이전 글에서 처칠의 1940년 6월 4일자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연설의 뒷이야기에 대해 언급하고나니, 저 연설 본편의 의의를 생각해보게 된다. 처칠의 저 연설은 오늘날에는 전시 연설들 가운데 손꼽히는 명작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당대에는 그렇게 단번에 영국 사회를 뒤흔든 연설이 아니었다. 이 연설의 파급력은 전쟁 기간 내내, 그리고 전후에까지 지속적으로 되새김되며 누적적으로 쌓여온 것이다.
원래 영국인 일반 대중에게는 1940년 5월 프랑스전역이 개시되어 독일의 전격전이 위력을 발휘할 때까지도 별다른 위기의식이라든가, 전쟁에 대한 총화단결의 움직임이 없었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히틀러의 준동은 그저 또 하나의 나폴레옹같은 무뢰한의 폭거였으며, 윗분들이 알아서 바다 건너에서 잘 해결하리라는 생각 뿐이었다. '영국이 설마 지기야 하겠는가?'라는 안이함 — 이것은 영국 사회가 여전히 뿌리 깊은 보수적 계급 사회인데 기인했다. 히틀러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비등한 여론, 프랑스에서 영국 원정군이 시시각각 쫓겨가며 패닉에 빠져드는 여론, 이 모두는 그저 신문과 방송에 귀 기울이며 세사를 논하는 중상층 이상 계층의 생각이었다. 영화에서 봄직한, 정장을 차려 입은 지긋하신 분들이 '못 배운 무지랭이 놈들이 정치에 신경쓰기는…… 쯧쯧'하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이러한 계층간 장벽의 문제는 작년(2007년)에 키라 나이틀리가 나온 영화로도 히트쳤던, 이안 매큐안(Ian McEwan)의 『Atonement』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탈리스(Tallis) 집안은 중상층(upper middle class)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로비 터너(제임스 매커보이)는 명색이 캠브리지 의대생이었지만 이 집안 하인, 그야말로 노동층(working class)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갖고 있었다. 결국 로비는 사춘기의 질투심에 불탄 13세 소녀(브리오니 탈리스)의 거짓 증언에 강간미수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고, 후일 영국원정군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허구이기는 하지만, 로비가 중산층(middle class)만 되었더라도 이런 설정이 가능했을까?
![]() 사춘기 소녀의 질투심이 | ![]() 계층간 사랑을 망쳐놓다 |
이런 계층간 장벽이 전쟁 수행에도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사례엔 이런 것도 있다:
…… 한 가지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증거는 (공습 가능성에 대비한 정부 계획으로) 전쟁 초기에 어린이들을 런던에서 소개시키는 작업이 전반적인 실패로 끝났다는 점이다. 이 계획에 따라 노동층의 어린이 100만여 명이 농촌 지역의 중산층 가정에 나눠져 살게 되었는데, 어린이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함께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계획은 (1940년 늦봄 시점에서 따져볼 때) 거의 실패한 형편이다. 사회학자들은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밝혀내고 기록했다. ……이들 어린이를 받아들인 수많은 중산층 가정은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더 이상 어린이들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한 어린이와 동행한 어머니들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채 위험지역으로 돌아갔다." (War Begins at Home, p.296). 대중관찰(Mass-Observation) 보고서를 내는 한 관찰자는 이렇게 전했다."중산층 위탁가정과 노동층의 소개된 어린이의 간극은 메워지기 어려웠다. 몹시 가난한 일부 어린이들의 위생상태(이가 들끓고 기생충이 있는 등의 위생상태)는 중산층 가정이 기겁을 하게 만들었다. 어느 집의 주부는 보호해야 할 두 어린이가 너무 불결한데다, 병까지 있어 거의 미치기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녀가 그런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ibid, p.312). "이런 소개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주된 원인은 계층간 격차를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ibid, p.306)……1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중상층은 쓰는 악센트가 다르고 — Received Pronunciation을 쓴다 —, 즐기는 스포츠가 다르며 — 축구가 아닌 크리켓을 좋아한다 —, 포크질도 다르다 — 포크를 스푼처럼 쓰는 삽질(shoveling)은 절대 금물. 말 그대로 노는 물이 확연히 달랐다. 상대적으로 계급간 이질성이 타파된 상태에서 전쟁에 나선 다른 참전국들에 비해 동원 측면에서도 불리한 점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흐르도록 영국 사회를 지배했던 이런 고루함 속에서, 처칠의 연설은 묘하게도 사회계층 타파의 서막을 열었다. 그의 연설은 먼저 위선적인 중상층에게 진솔한 감정의 표현을 일깨워줬다. 별도의 대국민 방송 없이 하원에서만 이뤄진 6월 4일 연설에서, 원내에서는 일부나마 격정의 무드가 흘러 넘쳤던 것 같다. 몇몇 의원들은 처칠의 연설을 듣고 눈물을 쏟았고, 무엇보다 처칠 자신이 눈물을 보였다. 깨진 맥주병을 들고 싸우겠다는 위트를 날리고 돌아서서 자기 격정에 못이겨 눈물을 보인 처칠의 모습이란. 이것은 그의 (괴이하기까지 한) 다면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적어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다른 영국 양반들에게 감정의 대리배설 효과를 톡톡히 줬다. 이 연설장면을 지켜 본 미국 CBS 특파원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2는 감상을 이렇게 전했다:
나는 과거 10년간 처칠 씨가 하원에서 한 연설을 간간이 들어 왔지만…… 오늘 그는 또 달랐다. 그의 연설에 웅변술은 없었다. 더는 흥행사로 보이고픈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지금까지 의회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셰익스피어의 언어에 직접적인 위기의식을 담아 연설했다. 그 속엔 어떤 수식도, 속임수도 들어있지 않았다.3
여전히 많은 보수당 의원들은 처칠을 자기 멋에 들뜬 점잖지 못한 인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설을 시작으로 잇따른 처칠의 행보와 연설 속에서 보수당 의원들도 서서히 마음을 돌려 1940년 7월에 이르면 처칠의 전시내각에 강한 지지를 보내게 된다.

영국 상류층의 문제: "전하, 대안이 없습니다. 이걸(사회주의) 삼키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원에서 시작된 물결은, 다른 시민계층 전체에도 새로운 위기의식과 전의를 고취시켰다. 뎅케르크에서 독일군의 추격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수십 만 병력에 대한 이야기와, 내각의 항전 의지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영국 국민들은 설령 보수적 사회질서를 일거에 뒤엎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들의 전통적인 국가적 자부심을 조용히 일깨워 국가적 전쟁 노력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존 루카치의 책에서 소개하는 한 중산층 부인의 6월 5일자 일기는 그런 잔잔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오늘 아침 뎅케르크 소개작전 관련 기사를 읽고 또 읽는 바람에 아침식사가 늦어졌다.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마치 하프 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언덕 위에서 한 여름의 환한 햇살을 받으며 가시금작화를 바라보거나 공원을 거닐다가 화려한 색깔의 양귀비꽃 한 무더기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하다. 나는 아침에 가끔씩 두통 기운을 느끼며 피곤한 몸을 일으키는 중년 여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아침부터 날이 후덥지근해 일이 더뎌졌지만 매사가 밝고 값져 보였다. 그리고 내가 구조를 하고 구조를 받는 사람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 적잖은 기쁨을 느꼈다.4
이후 런던에 폭탄이 떨어지고 많은 이들에게 전쟁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되먹임(feedback)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중상층들이 체면의 고삐를 풀고 전쟁의 고통을 다시 짊어지고자 다가섰고, 노동층들은 축구장과 펍에서 열광하듯 일터와 전쟁터로 나아갔다. 언론인으로서 영국의 계급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해왔던 조지 오웰조차 처칠의 기능을 인정했다.
파국적인 상황에서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데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인물은 다름 아닌 귀족 출신의 보수주의자 처칠이었다.5
모래알같은 영국이 그제껏 생존하고 대영제국을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수준의 집단선택(group selection)이 일어난 결과였을 것이다. 그렇게 체득한 특질이 다시 기능하면서, 영국은 내적 모순을 봉합하며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노력 속에서 대영제국의 헤게모니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경직성은 점점 허물어져갔다. 돌이켜보건대 처칠의 6월 연설들은 원대한 비젼이기 보다는 끝없는 경고와 전통적인 영국적 자존감에 대한 호소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러한 압력은 위기에 맞선 영국 고유의 특질을 일깨웠으며, 전후 사회적 계급체제의 약화를 불러온 진화과정을 촉발시킨 단초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면에서 그의 연설은 시원한 청량제가 아닌, 은근한 불에 서서히 우러나는 진국이었다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조선시대같은 신분제는 소멸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격차가 확대되면서 모종의 차별적 계층이 형성, 고착화되는 추세가 여기저기서 경고되고 있다. 한국의 짧은 역사에서 이런 사회적 분리문제를 떠 안고서도 순탄히 굴러갈 시스템이 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대로 방치하기에는 너무나 골치 아픈 사회적 뇌관이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관악을 북악이나 여의도를 보면 이만한 변화의 물꼬를 찾을 수 있을까? 얼만큼의 시행착오를 반복하면 우리도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연설처럼 두고두고 진가를 발휘하는 메시지를 제시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보게 될까?
P.S. 직장에서 사회적 격차 해소방안을 연구하며 골머리를 싸매다가 늘어놓은 잡상임을 양해 바란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 존 루카치(John Lukacs) (2000). 『세계의 운명을 바꾼 1940년 5월 런던의 5일』(홍수원 譯). 서울: 중심.
- 그는 1940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런던 공습의 현장을 라디오 방송으로 본국에 생생하게 전달하여, 미국의 참전 여론 조성에 큰 몫을 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 그레첸 루빈 (2007). 『처칠을 읽는 40가지 방법』(윤동구 譯). 서울: 고즈윈.에서 재인용
- Nella Last, et al.(1981). Nella Last's War. New York, NY: Falling Wall Press. (존 루카치(John Lukacs) (2000). 『세계의 운명을 바꾼 1940년 5월 런던의 5일』(홍수원 譯). 서울: 중심.에서 재인용) 이 일기와 저자 Nella Last에 대해서는 BBC가 다룬 소개 페이지를 참조하기 바란다.
- George Orwell (1947). The English People. Collin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주 예전에 학교에서 같이 뛰놀던(?) 자들과 함께 밤낮으로 술마시며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한(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계층 구조가 존재하는 한 차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다양한 삶의 가치를 존중할 것을 계몽하고 이를 통한 만족도 향상만이 살 길이라는 소결론을 얻었는데요. 물론 투명한 사회 이동성 확보라는 일반론은 늘 깔아두고 말이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논리도 인기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물론 의복 환경이 낙후되는 걸 전제로 했던 얘기지만요.
우리나라 같은 傳受國家에서 정상적으로 계층간 갈등이 봉합된 케이스를 찾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네 역시 시간이 필요한 문제겠지만, 좀 고통을 덜 받으며 적당한 규칙을 찾아가도록 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은 계속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으로 요즘 지난 십수 년간의 변화를 추적해보고 있노라면, 어떤 부분은 치명적으로 실기한 것이 아닌가 해서 안타까운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장 공개하기는 그런데 기회가 되면 천천히 풀어보죠.
다른 글과는 느낌이 다르다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으셨던 거로군요... 우리나라의 조로현상은 정말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네요.
음, 괜한 소리를 했나 봅니다. 다음 글은 좀 더 재밌는 글로~^^
10여 년 전에 직장인들 저가숙소로 이용되던 고시원의 총무를 잠시 맡았던 일이 있었는데, 미합중국에서 흑인폭동으로 가게를 잃고 대한민국으로 흘러들어온 남자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 말씀이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아직은' 역동성이 있어서 재미있게 일을 도모해볼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것이었는데... 본문을 보고 그 분이 아직 살아계시다면(!) 10여 년 동안 역동성수치가 어떻게 변했다고 보시는지 여쭤보고 싶군요.
뉴욕타임즈에서 『Class Matters』라는 책을 냈던게 기억나는군요. 그렇게 잘 쓰여졌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여러 가지 미국식 계급체계의 단면이 재미있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서 그 책의 데자뷰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요즘 높으신 어르신들의 행태를 보면 남조선이 국가적 위기에 처할때 사회갈등이 봉합되기는 커녕 붕괴를 가속화시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갑자기 난세가 닥쳐오면 어떤 구국의 인물이 나올 수 있을지 가끔 꼽아보고는 합니다. 그런데 역시 높으신 분들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나오기는 힘들 것 같더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영국의 사회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선시대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자면, Received Pronunciation 못지않게 조선시대에도 신분에 따른 어법의 차이는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포지역은 당시 한강을 통한 물류유통의 중심지라 자연히 장삿치들이 많이 살았는데 "~하였습죠." 같은 특유의 말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촌 양반가에서는 마포 사투리가 장삿꾼 말투라 천하다며 자식들이 절대로 흉내내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한국어에서 유난히 발달한 경어법은 조선시대 신분제의 영향으로 봐야 겠죠. 동학의 등장에서 갑오개혁, 일제침략, 6.25라는 거대한 사건들이 연속되는 과정에서 신분제 관념이 점진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경어법만은 살아남은 셈입니다.
청명 임창순 선생이라고 지금은 돌아가신 한학자가 계셨는데 그 분 일화에 그런 이야기가 있더군요. 일제시대때 본인이 아직 청년시절에 그때까지도 나이든 상민들에게 하대를 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는데 신분제도 사라졌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때부터 나이든 사람들에겐 무조건 경어를 쓰셨답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신분에 따른 높임말의 용법이 '장유유서'라는 또 다른 유교적 관념에 따른 용법으로 대체된 것이죠. 시골지역 일부에서는 50년대까지도 여전히 양반, 상놈 따지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교과서에서는 조선후기의 신분제 변화상을 너무 과대평가한 감이 있는데 요즘에는 연구경향이 좀 바뀌고 있다죠. 물론 조선후기가 전기에 비해 양반들의 특권을 비롯한 신분제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긴 합니다만, 여전히 문화적 사회적 관념이랄까 그런 부분들이 강고하게 남아 있었던 셈입니다. <백범일지>에도 김구선생이 동학교도를 만났는데 그 동학교도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상민인 자신에게 높임말을 써줘서 감격해하는 내용이 나오죠.
일제시대와 박정희 시대의 서울개발 때문에 전통적인 서울의 계급적 공간이 완전히 파괴 되었는데 알고보면 이것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서울노론의 최고벌열 가문들이 살았던 북촌, 한미한 양반(일면 남산골샌님들)과 아전들이 살았던 남산골, 장삿꾼들의 거리 마포, 서강, 이현, 동대문 등. 이런 신분과 신분에 따른 다른 문화, 공간이 결합된 서울의 형태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지요.
요즘 영어몰입교육, 강남 땅값, 서울집중 현상을 보고 있자니 조선시대말의 세도정권기-한문, 북촌, 경향분기가 떠올라서 심히 걱정입니다.
일제 식민통치가 조선의 계급사회 질서를 붕괴시키고 의식을 전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생각나는군요. 지배의 주체 변화와 그에 따른 통치체제 구축의 영향이었다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혼란이 지난 반 세기의 역동성에 일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도시 발전에 있어 부촌과 빈촌의 분리 현상은 불가피한 변화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경계가 자연스러운 모자이크처럼 뒤섞이느냐, 완전 물과 기름처럼 장벽화되느냐가 관건이겠죠. 최근의 도시공학에서는 단순한 심미적, 기능적 설계 이외에 구성원간의 자연스러운 유대를 촉진하여 계층간 분리를 억제하는 부분까지 고려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애초에 현대 한국사회의 역동성 자체가 반은 허구적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상류층이 관대한 것도 아니고, 체제가 공정경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구멍투성이라서 허술한 면이 있기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좀 있었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안정기(?)에 들어선다고나 할까요?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었던 게 아니라 '한국'이 역동적이었던 게 아닐까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기반이 취약해졌던 상류층에 새로운 사람들이 비집고 정착하는 과정이었겠지요. 앞으로 한 20~30년만 지나면 정말 가관일 것 같습니다. 서열에 유난히 민감한 한국 사회가 과연 다수의 사람들에게 나름의 가치를 만족시켜줄 길을 찾을 수 있을지?=_=
작고하신 송준호 교수님은 조선조 이래의 신분구조의 해체 요인으로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산업화로 꼽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역동성 상실은 일본이 더 이른 것 같은데 일본은 어떻게 평가하고 대응하는 것일까요. 일단 국민성면에서도 저항요소가 덜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간에 자민당 집권세력이 "1억총중산층"을 구현해오다가 근래에 들어와서 깨지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굴러갈지 흥미롭습니다.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그렇군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 살펴봐야 겠습니다. 일단은 다른 편법을 써서 급한 불은 꺼놨으니, 다른 문제가 또 발생하거든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었던것이 아니라 한국이 걸어돈 시대가 역동적이었던것이아닐가요? 격동의 근대사아닙니까.
새로운 계층구조의 수립은 이미 완료 단계로 접어들고 있지 않나 싶네요.
계층간의 교류나 노는 물들이 틀리니..왠지 글을 읽으며 2008년 한국 사회가 오버랩되는건 혼자만의 생각일지 쿨럭..
본문과 댓글에 언급되었던 책을 함 구해서 봐야 겠네요.
다른 나라도 보면 전통적 신분질서에 의한 계층이 무너지고, 경제질서에 의한 계층이 부상해오지 않았겠습니까. 최근 경제성장이 정체되면서 승자독식현상이 강화되고, 계층이 안정화되고 있다는 느낌도 강해지는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과거처럼 한 세대만에 최하층에서 상층으로 도약하는 일은 확실히 어려워졌으니 말입니다. 당장 이 조류가 급반전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중장기적으로 분명 또 다른 계층 물갈이의 파고가 밀려오겠지요. 과연 그 파도는 어떤 형태일지 상상해보고는 합니다.
처칠의 연설이 대략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새로 알게 되었네요 ^^; 전 처칠의 그 연설소식을 들은 영국국민들이 부르르 떨면서 "이..이.. 사악한 게르만놈들...!!(버럭)"하는 그런 광경을 떠올렸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사회봉합이라는 의미가 더 큰거였군요.
아직은 다른나라만큼 심하게 닫힌것은 아니지만 점점 계층화현상이 심해지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당장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봐도, 저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감사하게도 학비를 대주실 여력을 가진 부모님을 만나서 학비걱정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공부는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보면 대학 학사학위 받는데까지만 해도 비용이 너무나도 많이 들고-학원수가 적은 단과학원들은 30만원을 오르내리는 곳도 많고 심지어 강남지역에는 100만원을 호가하는 학원들도 심심치 않으니까요..-, 이것이 하류층 이하에는 교육 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보수쪽에서는 좋은 학교를 많이 세운 뒤 장학혜택을 늘려서 가난한 집 아이들도 노력만 하면 진학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자고 하는 반면, 진보쪽에서는 아예 입시구조 자체를 뜯어고쳐서 교육의 계층화를 막자고 하는데,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워낙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대응능력이 빨라 입시구조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학생들만이 혜택을 보는 그런 정책들을 너무 밀어부칠 수만도 없는 것이고요. 덧붙여 형평성만 고려하다보면 교육의 질이 낮아질 수도 있고 하니 진짜 골치가 아픈듯.. (그런데 사안의 복잡성에 비하면 위정자들은 교육에 대해 그닥 크게 고민하는것 같지는 않습니다. 뭐 일반 지식인들도 다소간 그렇고요.)
여튼 지금 당장에는 계층화 자체를 막는건 어렵고 어떻게 해서든 유동성을 보장하자는게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인 것 같은데, 또 막상 보면 확실한 그런 답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참 "불편한 진실"인 듯합니다.
아무튼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