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블로그 서핑 중에 장갑냐옹이 님의 블로그에 들르게 되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소매띠(Ärmelstreifen; 영어로는 cuff title) 제거 명령" 일화에 대한 글을 봤는데, 이게 그다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보충할 겸 트랙백을 달아 보기로 한다.
"소매띠 제거 명령"은 1945년 3월, 대전 막바지에 제6 SS 기갑군을 주축으로 한 독일군이 헝가리 발라톤 호수 일대에서 부다페스트 탈환을 목표로 벌인 야심찬 반격전(Frühlingserwachen 작전, 일명 Plattenseeoffensive)이 실패로 돌아가자, 히틀러가 절망한 나머지 제6 SS 기갑군 소속 무장친위대 병사들에게 차고 있던 소매띠를 다 떼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사건이다. 소매띠는 무장친위대로서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에 실로 충격적인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 이 명령은 전후에도 두고두고 말이 많았던 것이, 명령 그 자체 보다도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고질적인 육군(Heer)과 무장친위대의 반목 때문이었다.
국가의 공식적인 무력집단으로서 육군은 애초부터 무장친위대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군령권은 OKW, OKH에 위임되어 행사되었지만 별도의 군정 체계와 이질적인 성향 때문에 육군 장교들은 무장친위대 장교의 능력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반대로 무장친위대 또한 특유의 자부심을 지나치게 과시하면서 육군과 거리를 두려 했다. 전황이 그나마 좀 나을 때는 이런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는데, 역시 계속 패전과 퇴각을 거듭하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사소한 일에도 열받기 시작하며 악감정이 쌓이는 법이다. Konrad 작전에서 부다페스트 구원군을 지휘했던 역전의 지휘관 헤르만 발크(Hermann Balck) 기갑대장이 예하의 제4 SS 기갑군단장 헤어베르트 오토 길레(Herbert Otto Gille)의 작전수행능력에 대해 못내 못마땅해 하면서 충돌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 이후 대전 말기 무장친위대 병력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던 헝가리-오스트리아 전선은 양측 지휘관들 사이에 가장 첨예한 신경전이 일어난 장소가 되었다.
3월 16일 이후 Frühlingserwachen 작전 또한 실패가 명백해지고 소련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반격이 본격화되자 책임 문제가 또 다시 불거졌다. 육군에서 OKH로 올라오는 보고들은 대부분 무장친위대 야전 지휘관들의 신통치 않은 능력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이어졌고, 매일 히틀러에게 행해지는 OKH의 브리핑에도 이 문제가 언급되었다. 히틀러로서는 무장친위대 최정예 부대들이 가득 모여있는 제6 SS 기갑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꽤나 충격이 컸을 것이다. 이로 인해 소매띠 제거 명령을 내리기 까지의 간략한 과정이 (출간 이래 한창 논란이 있는 책인) 「The Hitler Book」에 실려 있다:
발라톤 호 반격의 실패는 히틀러를 깊이 충격에 빠뜨렸다. SS 사단들에게 쏟아부었던 희망은 사라졌다. 크렙스 장군은 그의 첫 브리핑에서 디트리히의 야전군의 퇴각을 보고했다. 히틀러는 놀라 테이블에서 머리를 휘저으며 좀 떨어진 곳을 응시했다. 나중 회합에서 디트리히에 대한 보고서가 당도하고, 그의 야전군이 막대한 수의 병력과 전차를 혈전 속에 상실했다는 사실이 굳어지자, 히틀러는 벌떡 일어나 '내 SS 사단들은 싸우는 법을 잊어먹었어! 다들 겁장이가 되어버렸다고!'라고 일갈했다. 그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다시 먼 곳을 멍청히 바라봤고, 그의 안면에는 경련이 일어났다. 그가 전 국방군에게 모범으로 내세우고 특별한 이름을 붙여줬던 SS 사단들이었건만, 이제는 그들을 겁장이로 비난하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난 뒤에 히틀러는 귄셰(SS 출신의 그의 부관)를 불러 디트리히가 발라톤 호 반격에 나서기 전에 뭔가 말한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귄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디트리히가 다가오는 작전에 대해 자신하며, 단지 그는 헝가리가 아닌 독일을 위해 싸우길 원했는데 폼메른이 아닌 헝가리에 싸우게 되어 유감이라고 했다고 보고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이 그렇게 말하라고 했겠지, 난 다 아네.'라고 쏘아붙였다...... (중략)
발라톤 호 반격이 참패로 끝났음이 명백해지자, 히틀러는 귄셰를 다시 불러 라이프슈탄다르테 부대가 더 이상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붙일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디트리히에게 내릴 명령서를 준비하라고 했다. 한때 바로 그 부대의 일원이었던 귄셰는 히틀러가 방안을 여기저기 쏘다니는 동안 침울하게 앉아 마지 못해 명령서 작성을 시작했다. 귄셰가 여러 차례 작성하고 많은 부분을 지우길 반복한 끝에, 마침내 초안이 완성되었다: '라이프슈탄다르테가 내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내가 기대한 전투 근성을 발휘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달 자격이 없음을 명령한다.' 도중에 히틀러는 귄셰의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눈치챘다. 그는 귄셰에게 걸어가서 '놔두게. 내가 힘러에게 직접 얘기하겠네'라고 말했다.
그제껏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힘러는 호헨리헨의 SS 휴양소에 머물러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는 다음날 전황 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서 그는 디트리히와 그의 야전군에 대해 분노를 발산했다. 그는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소! 더 이상 내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어! 힘러, 직접 디트리히에게 가게! SS 사단들에게서 이름을 떼어버릴거야. 소매띠를 떼어내라고. 디트리히 것도! 디트리히에게 사단들이 더 이상 퇴각하면, 장병들에게서 그들의 깃발과 훈장까지 떼낼 거라고 전하게!'라고 말했다. 힘러는 의견 없이 대답했다. '총통 각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괴링은 조심스럽게 히틀러에게 결정을 재고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의 의견으로는 개전 이래 동부전선에서 피를 흘려온 SS 사단들에게 너무 가혹한 징벌이었다. 이것이 히틀러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는 그의 운명을 7년 전쟁 중에 몇 개 연대의 졸렬함을 징벌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운명에 비유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연대들로부터 이름과 깃발, 표창 일체를 없애버렸오. 난 SS 장병들이 더 퇴각한다면 총살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히틀러가 SS 사단 깃발들까지 없앨 것으로 위협함에 따라, 4월 초에 디트리히 휘하 장교 2명이 수상관저 벙커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던 라이프슈탄다르테의 군기(軍旗)를 가지러 귄셰에게 찾아왔다. 이 군기는 퍼레이드에만 쓰이는 것이었다. 귄셰는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넘겨줬고, 그들은 이것을 이제 빈(Wien)의 사령부에 있는 디트리히에게 가져갔다......
참고로 이 정황은 전후에 소련군이 귄셰를 취조하여 얻어낸 증언으로 보인다. 또한 히틀러의 발언 중간에 '구데리안이 시켰겠군'이라고 한 부분은 아마 OKH 참모총장이던 구데리안이 성가실 정도로 히틀러에게 계속해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오더 강이나 폼메른 전선에 보낼 것을 촉구했던 것의 반작용으로 보인다. 사실 이 책 내용은 소련의 입맛, 특히 스탈린의 입맛에 맞게 윤색한 흔적이 있어서 저 내용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귄셰가 비슷한 내용을 후일 서방에서도 증언했고, 다른 문헌에서도 대동소이한 언급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크게 왜곡된 것 같지는 않다.
이날 사건에 관해서는 괴벨스 또한 일기에 짤막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총통께서는 SS 부대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로 결정하셨다. 힘러에게 헝가리로 날아가 그들의 소매띠를 떼어내라고 명령하셨다.'
이 충격적인 명령은 힘러가 당장 직접 전하지는 않고 — 군사적으로는 이미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온갖 무능함을 보여준 본인도 차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 3월 27일 새벽에 전문으로 디트리히에게 보내졌다. 이 전문을 수신한 디트리히의 반응은 당시 그의 작전참모(Ia)였던 게오르그 마이어(Georg Maier)가 쓴 「Drama between Budapest and Vienna (원제: Drama zwischen Budapest und Wien)」에 나와있다:
1945년 3월 27일 05시 00분, 제6 SS 기갑군 사령부는 베를린으로부터 야전군 전체가 소매띠를 떼어 내라는 명령 전문을 받았다. 게오르그 마이어 중령은 04시 00분 부터 야전군 제1 참모장교로서 아침 교대에 나서 05시 00분 정도에 일어나는 디트리히가 볼 수 있도록 보고서와 각종 명령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통신 장교가 전문을 마이어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짧은 명령문을 읽고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노와 모욕감에 떨다 그는 진정하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결정하려 했다. 우선 야전군 참모장인 크래머 소장이나 디트리히의 부관인 바이저 소령을 깨워야 했다. 마침 그때 디트리히가 문으로 들어와서, 마이어는 그에게 아침 보고서와 명령서를 전달하며 보고했다. 디트리히는 명령서를 읽었다. 확연히 동요한 그는 지도 테이블로 가서는 그 위로 풀썩 굽혔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한참의 침묵 뒤에 여전히 지도 위로 몸을 굽힌 채로, 그는 평상시와는 달리 깊은 실망과 분노가 담긴 매우 조용하고 힘 없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건 모든 것에 대한 치사(致謝)야."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일어서서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건 계속 달아야만 해." 그는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마이어에게 뭘 해야겠느냐고 물었다. 마이어는 총통사령부에 그렇다면 도나우 강과 발라톤 호수 사이에서 죽어간 용맹한 수천 명의 무장친위대 병사들의 소매띠도 떼어야 하는 거냐고 되물을 것을 건의했다. 마이어의 실망감도 이해하면서 디트리히는 그에게 크래머에게는 알리되, 군단들에게는 이 명령을 전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중략)
08시 00분에 크래머가 나왔으며, 그도 전문을 읽고서는 실망과 분노에 떨었다. 그는 마이어와 함께 그의 라이프슈탄다르테 소매띠를 떼어냈다(마이어는 다스 라이히 소매띠를 떼어냈다)...... (후략)
여기를 보면 이 명령은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힘러의 이름으로 타전되었으며, 이를 수신한 제6 SS 기갑군 사령부 차원에서 불문에 부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령은 명령이기 때문에 대표로 야전군 참모장과 제1 참모장교(작전참모)가 실행에 옮긴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이 소식은 이러한 은폐 노력에도 불구하고 곧 소문이 퍼지게 된다. 게오르그 마이어의 책에서는 그것이 무장친위대에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남부집단군 사령부 및 제6군 사령부 쪽에서 유출시켰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사실 일반 야전 장병들은 부대 이동을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헝가리로 이동하면서 이미 소매띠를 다 떼어낸 상태였으니 시행 자체는 의미가 없었으나, 최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소식임에는 분명했다.
장갑냐옹이 님이 언급한 쿠르트 마이어의 자서전, 「Grenadiere」에 나와 있다는 이야기 가운데 제6 SS 기갑군이 추가 보고를 통해 이 명령을 철회시켰다는 부분은 실은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이다. 실제 벌어진 일은 그 다음 날인 3월 28일에 힘러가 제6 SS 기갑군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거센 항의였다. 힘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에서 디트리히와 참모들의 항의를 수긍하고 자신도 헝가리 전선의 무장친위대 장병들에게 부당하게 가혹한 명령이 내려졌음을 구두로 인정했다. 결국 이 역시 힘러 선에서 무마되었을 뿐, 히틀러가 공식적으로 이를 철회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쿠르트 마이어가 자서전에서 저렇게 약간 잘못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자서전이 나온 1950년대 중반 상황(「Grenadiere」는 1957년에 출간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애당초 이 소매띠 제거 명령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구데리안의 자서전 「Erinnerungen eines Soldaten」(1951년 출간) 등에 직접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갑부대가 엄호를 제공하는 사이에 무장친위대 보병들이 도망치기 바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포로 생활을 마치고 쿠르트 마이어 등을 중심으로 서서히 조직화에 나섰던 무장친위대 출신 참전용사들 사이에는 명예와 직결된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까 시급히 대응은 해야겠다는 작정으로 관련자들의 회고담을 모아 그 정도 언급으로 지나갔던 것 같다. 무장친위대 관점에서 보다 치밀한 자료조사에 근거한 문헌이 출판된 것은 그 후의 일들이다. 특히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신경써서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게오르그 마이어의 저작은 1983년이나 되어 출간되었다.
이러한 히틀러의 명령이 나오기 까지 악감정이 있던 육군 측의 장교들이 지엽적인 문제를 확대해서 보고한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해도, 무장친위대가 발라톤 호 공세에서 전과 다른 졸렬한 모습을 어느 정도 보였던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무장친위대 부대사들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워낙 대전 말기 인력 수급의 난맥상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못 받은 신병들이 많이 배치된 것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무장친위대는 지상전 숙련도가 극히 낮은 공군과 해군 출신 인력을 대거 끌어들인 상태여서 정상적인 전투력 발휘가 어려운 시기였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군사사를 읽다 보면 느끼는 묘한 딜레마를 고백하자. 장갑냐옹이 님은 오토 뵐러 보병대장을 구라쟁이로 묘사했지만, 필자가 본 중에 무장친위대 옹호자들이 진짜로 이를 가는 사람은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기갑전의 귀재라 불리우는 헤르만 발크 기갑대장이었다. 헤르만 발크의 자서전을 봐도 그가 웬지 무장친위대에 상당히 심사가 꼬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반대로 무장친위대 인사들의 회고록이나 부대사를 봐도 발크에 대해서 굉장히 감정이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게 되었을까? 전쟁도 인간이 하는 일이다 보니 군사사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이성을 넘어선 심각한 감정 문제는 언제나 부닥치게 된다. 인간적인 면에 끌리면서 필자도 그런 문제에 대해 꼬치꼬치 쓰고 싶다가도 어느샌가 잘잘못을 너무 가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웬지 거기에는 종이에 쓰여진 기록에는 다 담지 못한 그들만의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과연 어떠하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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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부' 언론에서 "외국 언론도 '최진실법'을 거론하더라/관심을 보이더라..."하면서 전하는 기사들은 그런 법안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필요성 위주였는데, 생각 외로(아니, 당연한가?) 최소한 슈피겔만은 '균형'을 잡아서 기사를 쓴 것 같습니다. :)
외신이어도 대개 이런 기사를 쓴 기자는 이름을 보면 한국인이 많은데, 의외로 독일 기자가 몇 가지 날카로운 점을 지적해서 놀랐습니다. 균형까지는 몰라도 좀 노력은 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1 개인적으로 최진실법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이런 류의 특별법에 대해 법조계/법학계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고, 그에 대해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다만 일반인들이 하는 비판 가운데는 잘못알고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촛점을 잘못 맞추었지 싶은 것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습니다.
2 문제는 아무리 선진국언론이라해도, 우리나라 법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기대하기란 힘듭니다[선진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사시합격/학위취득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 없습니다. 독일에 유학간 한국인들이 우리 법에 대한 이런저런 논문을 쓰고는 있긴 합니다만...]. 그쪽에 한국법은 커녕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보면 간단하죠. 그러다보니, 한국법제에 대한 어떤 기사를 쓸 때,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쓰는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일반인들 사이 떠도는 잘못된 비판을 그대로 써버리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다시 한국여론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죠. 잘못된 비판이 외신을 타고, 외신에 나왔으니 일반인들에게 강력한 신뢰도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신에 나온 한국법제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 좀 신중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인용된 것을 보니, 어느 형법책에 나오던 독일판례 하나가 생각나네요[제가 그책 안본지 꽤 되서, 자신은 없습니다만]. 독일 어느 언론이 만평에서 유명 정치인을 돼지로 묘사했답니다. 사법처리 되었다죠? 그게 타당하다고 써 있던데, 아마 독일에서 나온 평석을 저자가 옮겨 놓은 것이 아닐까 싶네요.
2와 관련해서 덧붙입니다.
해당 외신에서 한국인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기자의 성향 또는 해당사안에 대한 기자의 태도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이 사안에서, 기자가 한나라당을 지지하거나 그 법안에 호의적인 경우와, 기자가 한나라당을 싫어하거나 그 법안에 적대적인 경우에, 쓰는 내용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군요.
어떤 경우든, 법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냉정하게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 떠도는 잘못된 비판을 자기 취향에 맞게 옮겨버리면, 위에 말씀드린 문제점이 나타나겠죠.
가. 2에서 독일판례를 얘기했는데, 다시 찾아보니 없군요. 개정판이 나오면서 그 얘기를 빼버린 것인지, 제가 다른 책에서 본 건데 착각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 1과 관련해, 법률안을 찾아봤습니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비판만 보고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더군요.
몇가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제가 뭐라할 주제는 못되고, 아무튼 윗 덧글의 [이런 류의 특별법에 대해 법조계/법학계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고, 그에 대해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는 말은 철회합니다.
보통 어떤 사건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형사특별법이 제정되는데 대한 비판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걸 생각하고 말한 것이구요. 그런데 이번 법률안도 그렇게 봐야할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덧글 단 것은 죄송합니다.
제가 법 공부는 해본 일이 없어서 정확한 판단은 못 내리겠지만, 제기하셨던 내용으로도 흥미를 느낍니다. 문제 제기 및 정리까지 줄줄이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저도 시간날 때 공부를 더 해서 즐거운 대화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쥐'를 제대로 현지의 어감을 살려서 Maus가 아닌 Ratte로 번역한 슈피겔지의 철저함(핫핫)에 슬쩍 감동했습니다.
제가 PS는 잽싸게 달았는데 정작 댓글이 늦었군요. 지적 감사드립니다.^^b
안녕하십니까. 홈지기님. 며칠동안 글이 올라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최근에 블로그를 찾게되어 감명깊게 글을 읽다가 용기를 내어 댓글 한번 달아봅니다.
배움이 부족한 대학생인 저는 홈지기님의 지식과 공부에 대한 열정에 그저 감탄만 하고 있습니다.
감탄만 하지말고 그 열정을 배워야 하는데 말만 앞서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니 그저 난감할 따름 입니다.
최진실법 이야기가 나왔네요. 다른 나라까지 이슈가 될 정도라니. 저는 어디가서 악플단적도 없고 댓글도 자주 달지 않는 편이라 관계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 짧은 생각으로는 정부가 개개인의 의견제시까지 광범하게 제어하려는 목적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헛소문이나 욕설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그것을 법으로 제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있는 법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누가 주장한 것처럼 인터넷에서 인식전환을 위한 캠페인을하는게 오히려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움도 부족하고 공부하는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홈지기님의 글이나 다른분들의 토론이 미욱한 저에겐 참으로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감탄하실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최진실 법 입법과정 이면의 문제는 좀 복잡합니다. 국회나 방통위 계신 분들이 무개념 통제에 목 매고 있어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만,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욕 먹을 짓은 한게 사실이죠. 아무튼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시기 바랍니다.^^
명예훼손을 당하면 피해자가 고발하면 되는 것을, 검찰이 나서서 검열을 하고 처벌하겠다는 발상이 그넘의 최진실 법의 내용이지요.. 세계적 웃음거리가 될 만합니다.
최진실 법에 대한 국내 논란도 재밌지만, 저는 외국에서 이 법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는 눈초리들이 재밌었습니다. 끝없이 발전해가는 인터넷 공간에 대해 현실 법 제도가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되는지 명쾌히 정리가 안 되어있다보니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계속 보고 있는듯한 모습이 느껴집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주말부터 정신 없는 일정을 보내느라 버스 안이랑 잠들기 전 침대맡에서 조금씩 읽어야만 했다...
뜬금없는 말씀이 되겠지만 홈지기님께서는 출퇴근을 버스로 하시는지? 아니면 일정관계상 지난 주말만 버스이동을 하셨다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어쩐지 홈지기님께서 개인승용차로 건물지하주차장에 바로 진입하시는 모습이 아닌 버스정류장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우루루 밀려나와 바삐 걸어가시는 모습은 좀 상상이 안되어서(웃음).
저는 버스 또는 자전거로 출퇴근합니다. 이쪽 회사에서 저처럼 직급이 낮은 직원이 승용차로 진입하는게 오히려 상상하기 힘들죠. 커다란 불경죄에 해당됨은 물론이요, 교통정체로 신음하는 강남 일대의 탄소 배출을 악화시키는 중죄에 해당…… 뭐 그렇습니다.^^
SS본부가 옆에 들어선 정도로 추가된 교통난은 그 동네 30년 붙박이 인생의 내공(?)으로 가뿐히 넘긴다지만 L본부까지 이전한다는 소문에는 좀 두려운 느낌도 듭니다.
저런 연구들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독일의 장점이지 않을까 싶네요. 잘 봤습니다.
우리도 민감한 터부를 벗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저런 노작들이 나올 환경이 될텐데……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역사를 특정 세력이 쥐고 흔들려는 시도가 사라지길 바랄 뿐이죠.
나찌의 기억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는 것일까요? 일본을 보며 늘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가 '독일인들은 과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독일'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닌 '독일인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홈지기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독일인들'이라 하면 스펙트럼이 워낙 넓기 때문에 일률적인 대답이 어렵지요. 지난 번 귄터 그라스 관련 글이나 역사가논쟁 글에도 썼다시피 천차만별입니다. 다만 '침묵의 카르텔'은 좀 과도한 시각입니다. 그건 대개 68세대 이전의 1950~60년대에 심했던 이야기이고, 지금은 나치 시대를 어느 정도 직시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나치의 몰락과 함께 덩달아 묻혀 버린 동유럽의 독일 고토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풀어나갈지의 문제가 있지요. 그 외에도 요즘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망각과 무시'의 과정입니다. 독일 사람들도 신세대는 나치 시대에 대해 교육은 받아도 구체적인 실감이 안 나니 서서히 잊어가는거죠. 아무튼 이에 대해서는 꾸준히 독일 언론에서 불거져 나오는 문제들을 모니터링하며 다양한 스펙트럼에 놓인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자연스레 느껴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쥐에서 약간 웃겼네요. 그리고 우리 대통령이 아니라 글쓴이의 대통령이겠죠.
그럼 그 '우리'에서 님은 빠지신 걸로 받아들이죠.^^
독일어 공부를 다시 하려고 한참 벼르고 있는 중인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빨리 실행에 옮기십시오. 핫핫.^^
슈피겔을 읽을 정도의 독어 실력을 갖추려면, 독일어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고등학교에서 3년 내내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어에 낯설지는 않지만,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모든 공부는 자기만의 테크닉이 있기 때문에 저도 일률적으로 이렇게 하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그래도 제2 외국어를 독어로 공부해본 경험이 있다면 매우 수월하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읽기 공부를 위해서는 관심있는 영역부터 직접 읽을거리를 잡고 부딪혀보는게 어떨까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처음에 손을 놓게되는 이유가, 자신이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분야의 경우 너무 사전에 손이 많이 가면서 흥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사전에 그리 의존하지 않고도 내용을 빨리빨리 파악해갈 수 있는 읽을거리를 잡아 꾸준히 읽다보면 서서히 익숙해지게 되겠지요. 저도 기실 웬만한 외국어 공부는 이런 군사사 서적으로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가면서 드는 생각이, 공부가 항상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제대로 된 교과서로 순서를 밟아가며 시작할 내용도 있지만, 일상의 지식들은 역 과정을 밟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언어가 그런 측면이 강한데, 오히려 막무가내로 부딪히며 웬만큼 감을 잡은 뒤에 잘 정리된 교재를 정리하는 셈치고 보면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겁내지 마시고 당장 읽을거리를 찾아 나서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나치의 자식들이란 책을 보니 2002년에 히믈러의 딸 구드룬 히믈러는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하고 있었다던데 지금은 뭐하는지 모르겟군요.
그러고보니 하인리히 히믈러를 보는 시각차때문에 구드룬과 카트린은 갈등이 많겠군요.
2002년이 아니라 그전이네요...
죄송;;;
책의 내용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영문판을 찾아도 없는것같네요.
사실 얼마전부터 독일의 나찌즘을 매스미디어와 군중심리로 풀어본
책을 찾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책 추천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