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여를 돌아보면, 홈지기가 그 동안 가장 달리 보게 된 인물로 단연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2, 3년 전까지만 해도 홈지기는 레이건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영화배우 출신이라는 편견에, 이란-콘트라 사건 등에서 보여준 멍청해 보이는 모습이 부정적인 상승작용을 일으켜 자리잡고 있었다. 그저 운이 좋고 넉살이 좋아 우매한(?)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 정도로 생각했다고나 할까.
그런 인상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미국 정치판, 그것도 리버럴 진영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레이건에 대한 재평가의 목소리들이었다. 단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조차 그가 미국의 진로를 바꿔놓은 인물이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이 발언은 지난 1월에 네바다 경선을 앞두고 한 지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것이었다. 레이건의 역사적 비중을 인정하면서도 은근히 빌 클린턴 시대를 폄하하는 이런 태도 때문에 후보 경선 기간에 힐러리는 오바마에게 맹공격을 퍼부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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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선서 재조명되는 레이건 前 대통령 (연합뉴스 2008년 1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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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시절이 그립다"… 美 암울한 현실 탓 '향수' (경향신문 2008년 1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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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 후보 "내가 바로 레이건의 후계자!" (아시아경제 2008년 1월 22일자)
홈지기는 레이건을 돌아 보면서 대통령의 자질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계기를 가졌다. 레이건은 분명 정책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최근 수십 년간 가장 무심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미국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낙천적이면서도 어리숙한 모습을 통해 묘한 친근감과 동정을 동시에 자아냈다. 이전 정권들에서 날을 세웠던 언론인들도 이런 마력에 필봉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백악관의 참모진들은 기민하게 의회와 여론을 설득하며 미국의 진로를 조금씩 꺾어나갈 수 있었다. 사회의 온갖 갈등을 무마하며 레이건주의의 가치를 각인시킬 수 있었던 그의 재능은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연예계 생활로 밴 쇼맨십에, 영화배우조합을 이끌며 기른 리더십을 더하고, 주지사 생활을 통해 배운 정치력을 버무려 얻은 자산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쉽게 비웃을 수 있는 유들유들한 모습이야말로 오랜 내공이 켜켜이 쌓여야 가능한 경지임을 느꼈다.
레이건 8년 치하에서 굳어진 새로운 미국의 창천항로는 2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중간에 빌 클린턴이 백악관을 탈환하였고, 그 또한 많은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었다. 경제상황 또한 좋은 물때를 만나고 적절히 이에 올라탔다. 덕분에 재정 건전성도 회복하고, 그에 대한 많은 반감 여론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리버럴의 가치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부시 주니어 치하에 들어와서는 그나마도 많은 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단극 체제에서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대는 미국의 모습을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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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08년 대선을 맞아, 많은 미국의 리버럴들은 오바마에게서 그 잃어버렸던 가치 회복의 희망을 찾고 있는 듯하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계 대통령의 꿈을 내세우며 현란한 언변으로 무장한 그를 새로운 메시아로 받아들인다고나 할까. 우리에게 2002년에 있었던 열풍을 재현하는 듯한 대선전 모습에서, 미국민들의 그런 열정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오바마가 공식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지금, 사람들은 스스로 불길한 데자뷔를 느끼는 듯하다. 어제 받아본 폴 크루그먼의 뉴욕타임즈 칼럼이 딱 그런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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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bama Agenda (The New York Times 2008년 6월 30일자)
여기서 크루그먼은 근래 오바마가 보이는 모습이 1992년의 클린턴 모습과 여러모로 유사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명확한 어젠다는 없이 낡은 정책을 들고 갈수록 중도기조로 후퇴하고 있으며, 오직 "할 수 있다! (We can do it!)"는 식의 모호한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게 봐준다면, 이런 모습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흑인 및 진보 진영 지지세를 등에 업은 위험 때문일 수도 있다. 중도 백인 유권자들을 포섭하기 위한 그럴듯한 전략적 스탠스로서 말이다. 그러나 크루그먼은 그 끝은 결국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귀결일 수 있음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The Reagan-Clinton comparison suggests that a candidate who runs on a clear agenda is more likely to achieve fundamental change than a candidate who runs on the promise of change but isn’t too clear about what that change would involve.
레이건과 클린턴의 비교는 명확한 어젠다를 내세우는 후보가, 변화의 약속을 내세우지만 그 변화에 따르는 결과는 불분명한 후보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이는 시대의 흐름이 확실하게 왼쪽으로 꺾을 상황이면 미리 확실히 왼쪽 깜빡이를 켜고 대세를 결집하라는 주문이다. (지난 번 "닉슨 중국에 가다" 효과와는 다른 각도의 이야기이다.) 오바마에게는 지금부터 왼쪽 깜빡이 켜고 슬금슬금 우회전하는 것이 쉬울 수는 있다. 국민의 여론은 분명 부시 행정부의 긴 전쟁으로 인해 지쳐 있고, 경제 상황도 더 이상 녹녹하지 않다. 실망매물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기존 지지자들의 신뢰를 적당히 끌고 가면서 이들을 포섭할 적당한 중도적 스탠스를 취하는게 대선엔 분명 유리하다. 대선 승리를 얻은 뒤에 새로운 다시 탄력을 받아 좌회전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오바마에게 과연 많은 리버럴이나 진보 진영이 기대하는 근본적 변화가 가능할까?
문제는 모호한 어젠다가 정말로 뒤에서 비젼과 정책을 수립하는 참모진이 허약하고, 더 나아가 후보 자신도 이에 대한 생각이 분명하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다는 점이다. '중도'의 스탠스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무능'의 징후임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이다. 연설은 JFK 뺨치게 잘 한다는 오바마지만 과연 국가를 운영하고 의회와 이익집단의 대립을 조정할만한 충분한 경륜과 리더십을 쌓은 정치인인가. 자칫 어리숙한 준비 자세를 견지하다가는 절호의 정권교체가 실현되더라도 핵심적인 개혁 입법을 추진할만한 지지를 끌어내지도 못할 것이고, 웬만한 저항에도 표류하다 좌초하기 십상이다. 클린턴도 이런 이유로 의료개혁법안 같은 핵심 의제에서 큰 좌절을 맛봤다. 방향은 반대지만 지금 MB도 결국 모호하게 안주하여 승리를 거머쥔 뒤에 어설프게 오른쪽으로 급회전하겠다고 설치다가 이렇게 누더기가 되지 않았는가.
크루그먼은 이 컬럼에 대한 보론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1992년 클린턴의 대선 후보 지명 수락 연설 일부를 인용했다:
We didn’t get into this mess overnight, and we won’t get out of it overnight. But we can do it- with commitment, creativity, diversity and drive.
We can do it. We can do it.
We can do it. We can do it. We can do it.
We can do it. We can do it. We can do it.
그러면서 덧붙인다.
But we didn’t. Will 2008 be different?
이 경고성 의문이 결코 먼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최근에 너무나도 많은 리더십의 실패를 겪어온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여 그럴 것이다. 한국의 진로는 1987년 민주화의 유산에, 1997년 외환위기의 격랑이 얹혀져 기묘한 형태로 굳어져가고 있다. 이를 새롭게 잡아나갈 정권이 과연 가까운 미래에 나올 수 있을까? 그나마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분명한 사실은 어설프게 "We can do it"을 남발하는 이일수록 회의적으로 지켜봐야한다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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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e didn’t. Will 2008 be different?'가 뜨끔하게 만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쎄요... 레이건 시절의 '감세'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당연히 성공한 정치인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중적 인지도'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남한에 사는 사람들이 그 '대중적 인지도'를 긍정하는건 그다지 의미는 없지 않을까요?;;;
내 글에 레이건의 '정책' 하나하나를 긍정하는 언급은 없는데?^^ 아직도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들에 비판받을 부분이 많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우. 내가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 시대에 국가의 지향점을 바꿔놓은 리더십은 단순히 운빨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지. 레이건이 그렇게 욕을 먹었어도 요즘같이 재평가가 나오는 것은 그런 자질도 나오기 힘들다는 반증 아니겠어? 대통령 하면 세상 순탄히 싹 바꿀 것처럼 이야기하는 오바마나 우리 한국 정치가들도 그런 자질이 정작 있는건가 떠올라서 글 쓴거라고 이해하길.^^
뭐 정치인들이야 하는 이야기들은 항상 시켜주기만 하면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줄것같게 말하지 않습니까?한 검은둥이 분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버럭 사마님은 검은둥이처럼 행동하는 검은둥이가 아니라 하얀둥이처럼 행동하는 검은둥이다. 라는 말을 무조건 감정적인 인신공격만이라고 치부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는 사람이 만들수 있지만 그 성공은 오직 하늘이 결정짓는다. 라는 말처럼 비록 레이건 전 대통령이 조금 부족하 부분이 있지만 적어도 밥솥을 엎지르는 정도의 무한광속의 개념은 아니었다고 판단되는군요.
제가 미국역사에 밝지 않아서 그런데, 레이건때 미국의 지향점이 바뀌었던게 뭐가 있는거죠?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최종승리를 거머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 외에 뭐에서 뭘로 바뀌었다고 할만한게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바마에 대해서는 웬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만,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바로 본문에 나온 단극체제를 준비하고 완성한 것입니다. 양극체제의 경쟁자였던 소비에트를 와해시키고 미국위상을 유일제국으로 격상시킨거지요
단극체제하에서 미국은 뭐든지 내키는 대로 할수 있어습니다
마음에 안드는 정부을 불량국가로 찍어 토마호크 날리고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와 미쳐는지 안미쳐는지 알수없는 소고기를 꼬봉나라에 사먹으라 하고
아프리카고 아시아고 전쟁 날것같다 싶으면 무기 왕창 팔아먹고
석유 가스 금 다이아 같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를 등쳐서 때돈을 벌고
그외 등등등...
PS 대처가 레이건에게 협력한 덕에 영국도 한목 단단히 잡았습니다
"레이건은 8년간 대통령역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연기한 배우였다."
수많은 정책실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가슴에 지도자로써 살아남은 것은 레이건의 대통령역에 대한 연기력이 세계최고수준이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를 보았는데 이글을 보니 다시 기억나는군요. 뭐 변방의 속국민이 레이건 수구꼴통영감 ㅋㅋㅋ이라고 뇌까려대 봤자 천조국 오덕들이 나의 레이건님은 그렇지 않다능! 이 은혜를 모르는 야만인들아! 하며 돌도끼 (토마호크)를 쏟아부으면 그대로 얻어맞고 석기시대로 고고씽 해야하는게 현실이죠.
오바마의 연설장면을 보면 그 또한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배역을 가장 잘해낼지, 그에게 역사가 준 배역이 무엇인지가 가장 큰 문제일갓 같습니다. 어쩌면 정책은 모두 주저 앉더라도 리버럴의 레이건이 되어, 나름대로 아름답게 스러져간 개혁의 어린양이라는 상징으로 남을지도 모르죠.
이명박대통령은 노무현대통령이 보여준 방향이 그렇게 왼쪽방향이 아닌데 노무현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주변상황을 보지도 않고 우측으로 꺽다가 사고가나서 벽에 처박힌 모습이 떠오르네요 ㅎㅎ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언론의 보도를 보면 공화당의 맥케인과 백중세로 보이는데 국내에서는 오바마가 대세인 듯 인식되어 대미관계의 방향을 벌써부터 민주당-오바마를 기준으로 놓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 미국산 쇠고기수입반대론자들의 주요논거 가운데 하나도 오바마가 FTA에 반대입장이라는 점이지요.
하지만 미국대선의 향방을 대한민국에서 멋대로(?) 기정사실화했다가 뒤통수맞은 일은 부시(父)-클린턴의 대결 때에도 있었죠 - 하긴 이 때는 미국언론조차 민주당의 승리를 의외로 받아들였다고 하죠. 쿠데타 이외에 민주당이 공화당으로부터 정권을 가져올 방법은 없다는 신문만평도 있었습니다.
걸프전쟁 승리의 영웅 부시가 재선될 것임을 믿어의심치않아 클린턴에는 전혀 줄을 대놓지않았던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여당은 요즘 말로 '멍때리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면에서든 외생변수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대한민국 상황에서 그것을 미리부터 상수화하는 것 보다는 가중치는 주더라도 여러 변수를 함께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네요 - 너무나 당연한 일반론에 불과하지만, 대한민국은 일반론이 당연히 지켜지기에는 심하게 Dynamic해서 말입니다(웃음).
"레이건과 클린턴의 비교는 명확한 어젠다를 내세우는 후보가, 변화의 약속을 내세우지만 그 변화에 따르는 결과는 불분명한 후보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솔직히 이것보고, 벙쪘습니다. 경제학이 과학이라면, 과학하는 사람이 이렇게 엄청난 일반화를 할 수 있나? 꼴랑 2개 사례에서!!! 아니, Nixon goes to China처럼 10개 정도는 되야지... ㅋ
레이건과 클린턴이 다른 점을 찾으려면, 수십개는 될 것입니다. 그 중 명확한 어젠다를 내세우는 것과 실제적인 성과의 상관관계는? 분명 선거전략은 참모진이 짜지 않을까요? 실제적인 성과를 내는 것도 참모진이 한다고 볼 수 있지만, 홍보전략과 정치전략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을 듯. ^^
물론 단정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성급"하다는...
그러게요, 뉴스위크도 그렇고, 우리나라 언론도 그렇고, 예전에는 재정적자를 초래한 무모한 대통령이었다는 레이건에 대한 인식이, 근래에 드문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이었다는 인식으로 변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습니다. 뭐 아직 미국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레이건의 정책면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국민과 반대파를 설득해서 국론을 통일하고 정책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킬 줄 알았던 리더십은 배울 필요가 있을 듯..
어쩌면, 민주국가에서의 대통령의 이상은 그렇게 국민들에게 호감을 사고 반대파를 설득하는 능력을 가진 정치 엔터테이너(?)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