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패트릭 뷰캐넌의 신작 『Churchill, Hitler, and "The Unnecessary War": How Britain Lost Its Empire and the West Lost the World (처칠, 히틀러, 그리고 "불필요한 전쟁": 영국은 어떻게 제국을 상실하고 서구는 어떻게 세계를 상실했는가)』의 소식에 대해 전한 바 있다. 그 당시 주문했던 책은 이미 한참 전에 도착했으나, 다른 읽을거리가 많다보니 일독을 피일차일 미루고 있었다. 결국 이번 주말에야 내용을 숙독해볼 기회를 가졌다.

Patrick J. Buchanan

패트릭 뷰캐넌의 존안과

Churchill, Hitler, and The Unnecessary War

처칠로 부시를 통타하는 이번 신간

책을 읽어내려가며 느낀 첫 인상은 간단하다. '과연 뷰캐넌답다.'

이 의미에 대해 뷰캐넌의 글을 별로 안 읽어보신 분들을 위한 보충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뷰캐넌은 닉슨 시대부터 활약한, 고보수진영의 말 그대로 '논객'이다. 이 또한 요즘 인터넷에 '논객'으로 불리는 이가 너무나 많아(?)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홈지기가 생각하는 논객에 대해 좀 더 엄밀히 짚어보자.

우선 논객은 시시비비에 대한 견해를 명확히 전달해야 한다. 자신의 신조, 자신의 정파 등에 따른 명확한 글쓰기의 목적을 갖고, 독자들이 여기에 정확히 동조하도록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현은 간결하고 직선적이어야 하며, 적절한 근거들이 쏙쏙 입력이 되도록 잘 직렬화되어 있어야 한다. 현학적인 표현, 복잡한 학술적 개념, 모호한 태도를 남발하여 의심의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논객은 그 주장이 정말로 옳고 그름에 의해 정해지는게 아니다. 논객은 그런 면에서 선동꾼과 비슷해보일 수도 있으나,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논리적 근거의 배열에 더욱 치밀하여 듣는 이, 읽는 이로 하여금 이성에 감복당한다는 느낌을 준다.

뷰캐넌은 예전부터 이런 목적 의식을 가진 글쓰기에 능했다. 이런저런 견해를 두루 활용하는 능력이 있었고, 이를 또 적절히 맞추어 자신의 논지에 빠져들게 하는 흐름을 만들 줄 알았다. 보수주의 운동의 서막을 여는 악의적이면서도 교묘한 그의 글들은 많은 적들의 분노를 자아낸 바도 있다 —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또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번 책 또한 예고했다시피 현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의 정책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20세기 전반 대영제국의 외교적 딜레마와 실책들을 주욱 펼쳐 놓았다. 역사가들이 같은 주제를 놓고 책을 쓴다면, 훨씬 글은 복잡하고 맥락을 소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제대로 된) 역사가라면 현상을 둘러싼 다면적 논란을 제시하고 조심스럽게 진실을 끄잡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의 글에서는 수많은 상반되는 견해가 병렬적으로 나열되면서 뇌의 단기기억 용량이 넘쳐 버리기 일쑤이다. 읽다가 맥락을 놓쳐 책 앞뒤를 오락가락 하다보면 꾸벅꾸벅 졸기도 십상이다. 그러나 뷰캐넌의 책은 그런 고민이 덜하다. 늘어지지 않는 문장과 명확한 메시지, 적절한 인용을 쫓아가다보면 영어책임에도 재밌게 한 권을 끝낼 수 있다. 이번 책도 예외가 아니다.

뷰캐넌은 이 책을 통해 양 세계대전을 "불필요했던 전쟁"으로 규정짓고 있다 ― 물론 이것은 철저히 영국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대전에 대한 전후 영국 보수진영과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견해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주류의 논의도 교묘히 끌어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 집중하여 보자면, 체임벌린 내각의 동유럽 문제에 대한 지나친 개입이 오히려 전쟁을 불필요하게 확대했다는 내용을 우선 전개하고 있다. 애초에 육군력이 매우 약한 영국은 동유럽 문제에 현실적으로 개입할 수단이 매우 부족했다. 이러한 한계가 있음에도 영국은 처음에는 유화정책으로, 나중에는 섣부른 안전보장 약속이라는 백지수표로 독일의 팽창에 대응하고자 했으며, 이 모두가 악수로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체임벌린

 

처칠

누가 영국을 말아먹었나?

핼리팩스

 

1936년 히틀러가 처음 팽창의 기미를 보이고 라인란트에 진주하고자 했을 때, 프랑스의 적극적 개입을 막아선 것은 영국이었다. 현실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독일을 상대할 맞수는 당대 최강의 육군국 프랑스였음에도 말이다. 프랑스군이 예정대로 아직 빈약한 독일군에 대해 라인란트에 대한 강력한 무력시위를 행사했다면 독일의 팽창에 대한 경고로는 가장 확실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1938년 뮌헨 협정의 중재자로 나선 것도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뮌헨 협정이라는 외교적 탈출구가 없었다면 오히려 후일 독일의 동맹국으로 돌아선 다른 동유럽 국가(루마니아, 헝가리 등)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좀 더 자발적이면서도 강력한 대독 연합의 형성이 가능했다.

이후 독일이 뮌헨 협정의 틀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 전 국토와 메멜을 병합하며, 단치히 회랑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때의 개입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핼리팩스의 판단에 따라 체임벌린이 폴란드와 동유럽 여러 국가들이 침공받을 경우 자동적으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다는 선언을 한 것이 최악이었다는게 뷰캐넌의 주장이다. 영국은 현실적으로 이들 국가의 체제를 보장해줄 수 있는 육군, 공군력이 전무했기에 이는 허세에 불과했다. 독일은 이를 간파하고 폴란드와의 전쟁이라는 강수를 두었으며, 전통적 양면전쟁 회피의 옵션 가운데 소련과의 화친과 영국-프랑스와의 대결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면 '영국이 중동부 유럽에 거대 강대국 독일이 출현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했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나올 법하다. 뷰캐넌은 그에 대해 '그렇다'라는 입장이다. 해양세력으로서의 영국이 누리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중동부 유럽은 사실 현실적으로 포기할 수도 있는 카드였다는 것이다. 동유럽의 민주국가 수호라는 명분에서는 밀리더라도, 오히려 이 경우 독일이 동유럽에서 소련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면서 더 이상의 팽창이 억제되는 효과는 발휘될 수 있었다.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에 나선 것은, 자본주의 국가 영국/프랑스와 독일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면서 공멸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란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만약에 영국이 폴란드 안보를 담보하는 강수를 두지 않았다면, 스탈린은 여전히 독일의 제1 주적이 소련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게 독-소 양측이 팽팽히 대립하는 사이에 영국은 군비를 강화하여 서유럽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는 선에서 사태를 관망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940년의 전쟁은 프랑스가 아니라 벨라루스에서 벌어졌을 수도 있다.

뷰캐넌도 독일이 주도한 격랑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 '나치 독일보다 영국이 더 책임이 크다', '체임벌린은 무죄고 처칠만 유죄다'는 등의 생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어설픈 개입이 가중되는 유럽의 위기를 더 심화시키기도 했고, 무엇보다 의도와는 달리 영국에게 더 불리한 방향으로 불길이 번지도록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영국의 연이은 실수에 마지막 불가결한 요소를 더한 것이 처칠이라고 주장한다.

처칠은 전시 내각을 인계받은 상황에서 '모든 희생을 각오한 승리'를 쟁취할 것을 결심한다. 프랑스에서의 패배를 안고서 강화를 추구했다가는 영국이 독일의 의도에 종속되는 2등 국가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칠은 영국이 버티면 어떻게든 소련과 미국이 전쟁에 휘말릴 것이고, 그들의 힘을 빌어 '고통스러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리라 내다봤다. 이것은 분명 그다운 혜안의 결과였다. 그러나 뷰캐넌은 오히려 그의 탁월한 계산이 잘못된 방향으로 작동되었음을 지적한다. 대영제국이 2등 국가로 전락하는 선택보다, 막대한 인명피해와 전후 갈갈이 찢기고 쇠락한 대영제국, 공산화된 동유럽, 서구를 위협하는 공산세계의 출현을 낳은 선택을 더 좋게 볼 수는 없다. 해양세력으로 결코 등장할 준비도, 능력도 되지 못했던 독일과 강화함으로써 대영제국의 헤게모니는 좀 더 잘 보존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홈지기에게 (그리고 많은 2차대전사 팬들에게) 이런 글이 꽤나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역사를 볼 때 항상 경계하라고 이야기되는 '만약에……'가 너무 남발되는 감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후세의 시각으로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정작 당대 사람들을 짓눌렀던 요인들에 눈을 감게될 위험이 크다. 체임벌린, 핼리팩스, 처칠을 짓눌렀던 현실의 무게와 고뇌에 대한 이해를 의도적으로 경시했다는 점에서 분명 이 책은 '나쁜' 역사이다. 그러나 글쓴이 뷰캐넌이 역사가가 아니라 '논객'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또한 그가 쓰고자 했던 글은 역사서가 아니라 '현실 비판서'임을 상기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도 있다. 이것은 이 책의 맨 마지막 섹션에 잘 나와있다:

처칠식 어리석음의 반복

1989년 냉전의 종식,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미국은 그 정점에 올랐다. 모든 유럽 열강 —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 은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고, 중동의 터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그리고 극동의 호주, 남한, 일본 모두도 마찬가지이다. 레이건 시대에 러시아는 1980년 초의 "사악한 제국"에서, 고르바쵸프와 함께 붉은 광장을 걸으며 격려해줄 정도의 나라로 변모했다.

유럽과 소련의 4억 인민은 해방되었다. 붉은 군대는 짐을 싸서 귀향했다. 소련에 억눌렸던 국가들은 레이건의 미국을 해방자로 여겼다. 일국이 필요로 하는 모든 영역과 안보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제1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강자인 미국은, 이미 갖고 있는 자산을 지키고 보호할 정책을 채택해야 했다. 미국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친숙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신 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구축하려고 했다.

9/11 이후, 국제 정치에 무관심하고 이를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죠지 W. 부시가 민주화 원리주의(democratic fundamentalism)라는 윌슨식 이데올로기로 돌아서자 이 프로젝트는 최우선 순위에 놓였다. 전 세계를 민주화시켜야만 미국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 원리주의는, ……, "고루한 종교적 열정"과 유사하다.

부시는 민주화 원리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신 성경식 레토릭으로 고백한 바 있다: 그리스도가 말하듯이 부시는 선언했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맞서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는게 아니라면, 당신은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선과 악의 투쟁입니다." "사악한 존재들은… 국적도 없고, 이데올로기도 없습니다, 그들은 증오에 의해 움직입니다." 미국의 "궁극의 목적"은 "우리 세계의 독재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결백성"에 뿌리를 둔 외교 정책이 7년 동안 이어진 뒤, 1989년의 세계는 사라지고 미국은 샐즈버리밸푸어의 영국, 즉 정점을 지나 도처에 적들이 일어서기 시작하는 강대국의 모습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중국은 우리에게 영국 입장에서 빌헬름 시대 독일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가려 하고 있다. 우리가 "단극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이라는 신보수주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대륙에서 광란에 빠져들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케난, 아이젠하워, 레이건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우리는 열강에서 추락한 대영제국의 모든 어리석음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불가결한 국가"가 되자느니, "Bring'em on!(다 덤벼라!)" 식의 허풍을 크게 떠드는건 전 세계가 혐오하게 만드는 제국적 오만을 내비치는 것이다.

우리가 답습하지 않은 대영제국의 큰 실책은 거의 없을 지경이다. 그레이와 처칠이 폰 클루크가 벨기에의 중립을 훼손할 경우에 미숙한 전쟁 계획이 즉시 발동되도록 했듯이, 9/11에 사로잡힌 네오콘들은 우리의 못 배운 대통령에게 그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이라크를 해방시키며, 이란과 시리아 배후에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여, 중동과 이슬람 국가를 민주화시킴으로써, 이 시대의 처칠이 되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설득했다.

체임벌린이 지킬 수 없음에도 폴란드에게 참전을 약속했듯이, 미국은 6개 바르샤바 조약국, 발트 3국, 이어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에게까지 NATO의 참전 약속을 건네기 시작했다. 만약에 모스크바에 적대적 정권이 들어서고 이들 국가를 다시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날에는, 우리는 선전포고를 해야한다. 허나 우리가 신생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소중히 생각한들, 그들의 독립은 미국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했던 적도 없었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독립을 잃는다 해도, 그게 핵무장한 러시아와의 전쟁을 정당화해주지도 않는다.

영국이 어떤 국가도 유럽의 지배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막는 "힘의 균형" 정책을 세웠듯이, 2002년의 미국 국가 안보 전략은 어떤 대륙에서도 미국의 지배권에 도전할 위치로 부상하는 국가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도를 천명했다 — 이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일시적 상황을 고착화시키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시간은 멈춰있지 않는다. 새로운 열강은 부상한다. 과거의 열강은 사라진다. 그리고 어떤 열강도 오랫동안 전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국들의 묘지, 20세기를 돌아보라. 우리 미국도 이런 역사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다.

영국이 일본을 내던지고, 이탈리아를 히틀러 품 안으로 몰아갔듯이, 부시는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정치에 관여하고 중앙아시아에 미군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러시아의 푸틴을 중국의 품 안으로 몰아갔고,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 기금(National Eonowment for Democracy)' 기준에 부합하지도 않는 독재국가가 만들어지도록 했다.

우리에겐 참 묘한 미국적 맹목성이 있다. 먼로 독트린 하에서, 해외 열강들은 우리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열강도 그들의 영향권을 갖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독선적으로 외국인들이 우리 선거에 돈을 밀어넣는 현상에 호통을 치면서도, 다른 나라 선거에 우리 세금을 퍼부어가며 간섭하고는 한다 — 우리의 민주주의敎를 전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국이 오토만 제국에게 승리한 이후 이라크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켰듯이, 우리는 소련에게 승리한 이후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우리의 간섭이 그토록 다발적이고 광범위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역 병력은 인구의 0.5%로 줄어들었고, 1945년 5월 무장시킨 병력의 고작 1/9에 불과하다.

우리는 월터 립먼이 "대외 정책 파산"이라 불렀던 지경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의 전략적 자산, 무장, 동맹국으로는 우리의 전략적 채무와, 중남미로부터 발트해, 발칸, 중동, 페르시아만, 일본, 남한, 필리핀, 호주, 대만에 걸친 수십 개 국가들을 위해 전쟁에 나서겠다는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 우리 이전의 영국처럼, 미국은 과도한 확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우리의 육해공 전력을 두 배, 또는 세 배로 늘리던가, 혹은 의무의 짐을 벗어던지기 시작하든가, 불가피하게 미국판 디엔비엔푸를 향해 나아가든가 하는 선택이 남아 있다. 미 육군과 해병대가 메소포타미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준동으로 인해 극한 상황까지 몰린다면, 어떻게 지구 남은 부분에서 경찰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할 수 없다. 우리가 건네준 차용증 2, 3개에 대한 상환 요청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미국의 대외 정책 파산은 만천하에 노출될 것이다.

미국은 1939년 대영제국처럼 과도하게 뻗쳐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핵심 이익과는 상관 없는 수십 개 국가들을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 몇 개 국가가 한꺼번에 요청하면 지킬 수도 없는 약속을 갖고 있다. 우리는 전 세계를 민주화시키고, 모든 국가를 우리의 사회 정의와 인권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며, "세계의 독재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미국의 정책을 천명해왔다.

그리고 만방에 그가 맡은 책무를 보여주기 위해, 부시 대통령은 그의 집무실에 윈스턴 처칠의 흉상을 갖다 놓았다.

Acceptance of Bust of Winston Churchill

2001년 7월 16일, 영길리 대사가 황제에게 처칠 흉상을 진상하다

결국 뷰캐넌은 네오콘들이 숭배하고 쫓아하려는 처칠의 행동이란 미국을 쇠락으로 빠뜨리는 길이라는 결론을 향해 4백 페이지 이상을 치달았다. 역사적 사실의 전개가 다소 불편해도 결론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홈지기도 그의 말마따나 미국의 독선에 다소 질린 주변국가 국민일 수밖에 없어서일까? 또한 처음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의 우려처럼 쓰레기 수준의 왜곡이 판치는 아주 허술한 책도 아니다. 이만한 수준이라면 역사가가 아닌 현실 논객이 내용상의 여러 결점(일부 사실관계 왜곡, 논리적 취약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펼 수 있을만한 논변임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네오콘과는 또 다른 미국 보수파 일각은 어떻게 역사를 이해하고 그들의 세계관을 갖고 있나를 살펴봄에 있어서는 충분히 일독의 의의가 있다. 때로는 역사적 사실보다도 다른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역사관을 들여다 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표류하는 미국 여론의 일단을 음미해보고픈 분들에게는 가볍게 권할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양 세계대전을 둘러싼 외교사를 제대로 접해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경고를 드리고 싶다. 흡인력 있는 논객의 글은 근거의 배열이 교묘해서, 자기도 모르게 왜곡된 역사적 맥락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다른 균형잡힌 역사 개설서들과, 인물 평전들을 접하면서 스스로 균형점을 찾아가는 노력이 병행될 때, 이 책도 맛깔나게 소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8/07/21 09:35 2008/07/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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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성민 2008/07/21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筆鋒'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 BigTrain 2008/07/21 1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이 확장한계점에 도달했다라... 논란이 될만한 내용이네요. 소개 감사드립니다.

    저자의 이름값도 있고... 되도록이면 번역돼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 Periskop 홈지기 2008/07/23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자의 이름값이 있다지만 국내에 번역된 책들은 그만큼 없으니 이거라고 번역되어 나올지는……^^ 어떻게 좀 팔릴 책일지 감을 잡기 힘드니 출판사 분들에게 번역해보시라고 슬쩍 찔러 보기도 그렇네요.

  3. 윤민혁 2008/07/21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부분에서 공감은 몰라도 수긍은 할 수 있는 주장이네요. 역시 뷰캐넌입니다. 책이 번역돼 나왔으면 좋겠네요 진짜.

  4. 일화 2008/07/21 1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폴란드에 영/프가 개입한 것이 2차대전을 발발시킨 악수라고 생각해왔던 사람이라 일단은 동질감이 들기는 하네요. 뭐 처칠이 끝까지 버틴 것을 나무랄 생각까지는 없습니다만, 제국의 과대팽창을 비판한다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나라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언제쯤 이런 논객을 볼 수 있을지...

    • 獨步 2008/07/21 18: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한민국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체제를 수입할거면 이러한 '사상/정책의 자유시장경쟁'을 최우선적으로 도입해야겠죠. 나 이외의 모든 진영에 대한 '박멸의 신화'에 언제까지나 빠져있는 이상 맹목과 인신공격이 아닌 논리로 승부하는 투기장은 만들어지기 힘들 것입니다.

    • 일화 2008/07/21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멸의 신화'라... 정말 와닿는 표현이네요. 독보님이 직접 만드신 거라면 카피라이터의 재능이 있으신듯 乃

    • 獨步 2008/07/22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화님/
      과찬이십니다. 누구나 아주 가끔씩은 성공작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웃음). 지혜로운 자가 천 번을 고쳐 생각해도 놓치는 부분이 있는 반면, 우매한 자라 해도 천 번 정도 헛소리를 늘어놓다보면 한 마디 정도는 건질 말이 있게 마련이겠죠(智者千慮一失 愚者千慮一得).

    • Periskop 홈지기 2008/07/23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백 권의 책을 섭렵하고 자신의 논지를 다듬어서 책으로 정리해내며, 이를 현실 변화로 끌고 가는 동력까지 갖춘 사람들은 정말 드물죠. 미국의 회전문 제도가 그런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음은 분명한듯 합니다. 반면 우리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키워내고 끌어내는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현실이 자꾸 부각되어 다소 서글프군요.

  5. 눈팅 2008/07/22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반대한 영국의 피트 수상은 어떤 입장에서 나폴레옹을 반대한 걸까요.. 왕정에 대한 프랑스 대혁명의 반대에 대한 반대 - 아 말 꼬인다 --;; - 입장의 연장선일까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유럽사 책 번역 된거 좋은 거 없을까요..

    • lesis 2008/07/22 1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랑스는 당시 이미 세계 각지에 방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국가로 대영제국의 해양패권에 대한 유일한 경쟁국이 아니었습니까?
      때문에 혁명이 발발하자 기회로 여기고 경쟁국의 대열에서 완전히 탈락시키고자 압박을 가한 것이고, 나중에는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는 일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 것이겠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입장이 아닐까요? 해외 식민지가 없고 해양패권에 도전할 입장이 아니었던 나치 독일과는 전혀 다른 국가였죠. 오히려 그때의 프랑스는 1차 대전기의 독일 쪽에 더 가까웠다고 생각됩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7/23 1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윌리엄 헤이그가 쓴 『William Pitt the Younger』라는 전기가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이 책을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군요. 번역된 책은…… 제가 잘 모릅니다.=_=

  6. 눈팅 2008/07/23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lesis/ 맞는 말씀 이기는 한데 어차피 영국은 유럽에 여러 세력이 있는 걸 원했으니 나치를 방관했어도 어차피 2차 대전은 일어날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1/2차 대전 전에 전 유럽에 단일 세력이 등장하려는 것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말고는 아는 게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빈 체제 이후에 프랑스는 힘이 그렇게 줄어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사견입니다만 --;; - 프랑스의 잔존은 영국이 어느 정도 방관했다고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아는게 없으니 "이지않을까 통신"은 그만해야 겠죠.

    • Periskop 홈지기 2008/07/23 1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피트는 사실 처칠과는 달리 대륙의 정세에 되도록 간섭을 안 하려 했습니다. 이 무렵의 영국도 빅토리아 시대 수준의 헤게모니가 구축된게 아니어서 프랑스의 위협을 일일히 대응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특히 영국의 재정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막대한 전비를 쓸 형편이 못 되었죠. 웬만하면 대륙의 다른 열강들이 견제해주기를 기대했고, 곤란하면 혁명 프랑스 체제를 그냥 인정할 요량이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프랑스가 도발한 측면이 큽니다. 프랑스가 직접적으로 영국을 적대시하고 혁명을 부추기려는 시도를 공공연히 벌이자, 피트는 어쩔 수 없이 반 프랑스 동맹에 참여합니다. 피트는 고된 전쟁을 끌고 가면서도 제국의 기반을 말아먹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심초사했습니다. 섬나라 영국으로서는 유럽 대륙의 세력구도를 자신의 마음대로 재편하는 것이 별 이득도 없으면서 굉장한 국력의 소모를 가져오는 길이었습니다.

    • 눈팅 2008/07/24 1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단 책 이름 알려 주셨으니 번역 여부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언제 조사 끝나고 읽어 볼 수 있을지는 잘 ^^;; -

      감사합니다.

    • lesis 2008/07/25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눈팅/ 동유럽을 다 합쳐봐야 서유럽 3강국 중 하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은 아실테고, 가만히 병합하도록 놔두면 어차피 합스부르크 제국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죠.
      민족국가의 시대가 도래한 상황에, 나치가 어찌 타 민족의 국가를 병합하고 그 전력을 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1+1이 2가 되지 못하는 상황만 초래하게 될 뿐이죠. 결국 조선처럼 합병당해 수십년이 지난 다음이라면 모를까, 당장에는 별반 도움이 안되죠.
      단기적으로는 국력 강화는 크게 기대할 수 없고 단지 부담만 더 늘어나는 겁니다. 더욱이 대륙에는 프랑스와 소련이 건재한 마당에요. 그리되었다면 2차 대전은 상당기간 늦춰지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안 일어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건 가정일 뿐...;;

      승병님/ 피트 수상과 그 정권이 원한 것과는 달리 대다수의 우매한 군중과 정적들은 숙적 프랑스의 완전한 몰락을 원하죠. 프랑스가 도발하고 내부에서 반발한 이상 전쟁에 내몰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몰락으로 인해 패권이 공고화되지 않았습니까?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은 상당부분 경쟁국의 몰락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죠. 경쟁국이 없었기에 여유전력을 투사해 세계로, 동아시아로 뻗어나갈 수 있었고요.

  7. 라피에사쥬 2008/07/27 1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어찌보면 자신의 논변을 위해 일련의 팩트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최소한 그 본래의 목적하에선 적절한 사실 배치와 신랄한 논법이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7/30 1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히려 적당히 유명한 사람이면 참신하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뷰캐넌은 이런 모습을 하도 많이 보이다보니, 사람들이 이제는 경계심을 품으며 읽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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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 2년 동안 죠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등의 저작이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도 '프레임' 담론이 제법 퍼진 듯하다. '프레임'은 간단히 '생각의 틀'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인간은 항상 사물과 현상을 인지함에 있어, 기존에 축적된 지식과 사고체계에 근거하여 받아들이려는 특징에서 비롯된다. 반복되는 인지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견고한 생각의 틀을 형성하게 되고, 새로운 사물과 현상을 맞닥뜨렸을 때도 이 틀에 맞춰 받아들인다.

레이코프의 책 가운데 현실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시사성으로 꽤나 읽힌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Don't Think of an Elephant!)』에는 증세/감세 문제를 받아들이는 '프레임'의 사례를 들고 있다. 현 부시 정부는 감세정책을 추진하면서 이것을 단순한 감세(tax cut)라고 표현하지 않고,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쉽사리 그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운 감세 문제를 '구제(relief)' 가 갖는 긍정적 의미에 엮으려는 의도이다. 우리는 '빈민 구제'라는 맥락을 계속 인지해오며, '구제는 좋은 것'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감세를 이 프레임에 맞춰 받아들이면서 '감세는 좋은 것'이라는 프레임을 발전시키게 된다. 감성과 이성이 결합되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세금 폭탄'론이 퍼지면서 '종부세는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을 확산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프레임'은 역사의 접근에서도 은연 중 많이 쓰이게 된다. 변화를 추동하는 거시 구조적 동력도 중요한 연구 대상이지만, 역사적 순간마다 상황의 인지와 행동을 이끌어 낸 미시적 '프레임'도 핵심적인 연구 대상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들도, 당대의 시각, 당대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프레임'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전쟁사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전쟁의 각 장면마다 등장하는 각국 인물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났고, 그들의 감성과도 강하게 밀착된 '프레임'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니 처음 군사사에 입문해서 뻘소리(?) 같은 의문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설사 내공이 조금 쌓였다고 해도 '프레임'에 대한 오해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정보를 얻은 역사책도 결국에는 각 역사가가 여러 자료를 각자의 '프레임'에 맞춰 해석하고 투영했다는 한계를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에 에드워드 카(E. H. Carr)의 이야기까지 새삼스레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사를 이해함에 있어 필수적인 '프레임'은 무엇일까? 특히 많은 대전사 팬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마련인 독일군에 대한 프레임은? 이에 대한 해답을 고집스럽게 하나의 맥락에서 찾고자 하는 이가 있으니 Eastern Michigan 대학의 로버트 시티노(R. M. Citino) 교수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 행동 이면의 동인을 프로이센군 이래의 독일 고유의 군사적 전통에서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에 활약한 고위 독일군 지휘관들은 상당수 구체제(독일제국)에서 독일적 개성이 강한 교육을 받아왔고, 독일 군사사의 전훈을 통해 당대의 전쟁을 바라보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이미 홈지기도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Death of the Wehrmacht

독일 국방군의 종말

The German Way of War

그리고 그 전작

그런 일련의 연작 속에서 궁극의 의문, 즉 독일 국방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 원인을 찾는 책이 『Death of the Wehrmacht: The German Campaigns of 1942』이다. 제목에서도 묻어나듯 1942년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전환의 해였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의 처참한 실패를 딛고, 독일군은 1942년 5월 케르치 반도이쥼 돌출부에서 대승리를 얻어냈다. 비슷한 시기, 북아프리카에서는 가잘라 방어선을 우회하여 마침내 토브룩을 장악했다. 이 여세를 몰아 러시아전선에서는 캅카스 유전지대를 향해, 북아프리카에서는 카이로와 수에즈 운하를 향해 진격했으나, 결국 이 모든 노력은 스탈린그라드, 테레크 강, 엘알라메인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1942년 겨울, 독일군은 치명적인 반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면적인 수세로 휩쓸리게 되었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결정적인 고비에서 조금 더 유연한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왜 독일군은 고집스럽게 파탄의 길로 들어섰을까?

이 책은 그 원인을 독일군의 뿌리 깊은 프레임, 즉 '기동전(Bewegungskrieg)' 프레임으로 파헤치고 있다.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Bewegungskrieg'은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가 전작 『The German Way of War』에서 설파했듯이, 독일은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주변 강대국들과의 불리한 싸움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내선의 이점과 신속한 동원체제, 허를 찌르는 공격적 기동으로 신속하게 적을 연파하는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노력이 집약된 체계가 독일식 기동전이며, 2차 세계대전기 독일 지휘관들은 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를 추종하려는 프레임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견지에서 시티노 교수는 토브룩 전투 이후 알람 할파를 거쳐 엘알라메인으로 내달린 롬멜의 행동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의 뼈아픈 경험으로 인해 당대 독일군 지휘관으로서는 진지전(Stellungskrieg)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확고한 프레임이 서 있었다. 그러므로 기동전 프레임에 맞추어 미약하게 열린 승리의 문을 기회로 받아들이며 과감히 밀어 젖히는 결정도 무리가 아니었다. 독일이 이전 많은 전쟁에서 그래왔듯이, 롬멜과 다른 지휘관들은 물량의 열세에서 앉아서 죽는 게임을 하느니 지휘관의 의지를 믿고 기동 속에서 승리를 찾는 선택에 나선 셈이다. 단적으로 롬멜 자신의 말에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의 역전의 기병 지휘관으로 자이들릿츠치텐이 밟은 영광의 길을 쫓고자 했던 의중이 드러난다:

Die Zeit eins Seydlitz und Zieten ist wiedergekommen. Wir müssen den heutigen Krieg vom Kavallerie-Standpunkt sehen — Panzereinheiten wie Schwadronen führen. Befehle im fahrenden Panzer wie früher aus dem Sattel geben.

자이들릿츠와 치텐의 시대가 돌아왔다. 우리는 전쟁을 기병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 전차부대를 기병중대처럼 지휘하자. 말 안장 위에서 그랬듯이 움직이는 전차에서 명령을 내리자.

Friedrich Wilhelm von Seydlitz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들릿츠와

Hans Joachim von Zieten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독일군은 결국 이런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 추구가 전략적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 그런 귀결을 가져온 역사를 자랑스러워했다. 2차 세계대전 초반부터 1942년 중반까지 이어온 성공은 그러한 영광스러운 역사의 재림인 듯 보였으며, 그들의 프레임을 한층 강화시켰다.

시티노 교수는 결국 이런 기동전 프레임에 대한 몰입이, 급속히 변화하는 전쟁 환경과 유리되면서 독일 국방군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1942년 중반에 독일식 기동전의 놀라운 성공을 가져왔던 전장 환경은, 단 6개월 뒤에는 전혀 이질적인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1942년 중반에 전개된 느시사냥 작전, 프리데리쿠스 작전, 테세우스 작전 환경은 측면과 배후의 기동공간과 함께 적을 포위할 수 있는 막다른 공간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기동전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고, 특유의 포위섬멸전을 끌어내기 극히 유리한 환경이었다. 반면 이후 돈 강 너머에 막다른 공간 없이 광막하게 뻗은 대지, 카타라 저지대에 가로막힌 회랑은 그들의 전쟁 수행방식의 이점을 모두 날려 버렸다.

독일군은 이 상황에서 다른 대안을 모색할 도리가 없었다. 독일식 기동전은 작전술 수준에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전략적 수준의 딜레마에 해답을 제시하기란 불가능했다. 애초부터 독일식 기동전은 독일 본토 주변의 작전술 규모 공간을 상정하고 발전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기동전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국면에서 군부와 국가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 것인가? 우려했던대로 물량의 위력에 짓눌리고 결정적 활로를 찾지 못하는 전략적 한계에 부닥치며, 그들에게는 과거 속으로의 침잠 이외에는 달리 위안의 길이 없었다. 점점 독일 지휘관들은 전략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보다는 7년전쟁에서 기적적으로 부활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운명을 강조했다. 표트르 3세의 갑작스러운 즉위가 7년전쟁의 급반전을 가져왔다는 과거는 "전쟁은 포기할 때만이 패배한 것"이라는 헛된 신념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에 종속되고 독일의 처참한 피해와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애시당초 독일은 전략적인 수준에서 1942년에 이만한 기동전의 도박을 벌릴 여유가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남부 러시아와 캅카스, 북아프리카의 광대한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술 차원의 돌파구를 모색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롬멜이 설령 엘알라메인 회랑을 돌파해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운하에 도달했다고 해도, 미국과 인도의 지원을 업고 있던 영국의 전략적 우위를 확실히 반전시킬 카드가 되었을까?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하고 칼라치-스탈린그라드 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다고 한들 이를 얼마나 지켜낼 수 있었을까? 독일군은 한 가지 목표를 확실히 추구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작전술 차원의 우위에 기댄 채 무리한 공세에 나서 1942년의 파멸을 맞게 되었다. 결국 독일군의 전통은 '작전의 승리'에만 유효할 뿐,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는 수단으로서는 종언을 고한 것이었다. 이 시대적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독일 제3 제국 체제와 국방군은 패망했다.

이 『Death of the Wehrmacht』는 여러 책들에서 숱하게 다룬 1942년의 전쟁사를 잘 압축해 설명하면서도, Bewegungskrieg이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자 하는 시티노 교수의 고민에 대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만큼 가볍게 책을 읽으면서 독일의 패배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게 만드는 데는 좋은 책인 것 같다. 단순히 1942년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개된 작전의 흐름에 대한 정보 차원이라면 부족한 책일 수 있겠으나, 이전에 이에 관한 내용을 숙지한 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을만한 책일 것이다. 특히나 『The German Way of War』를 읽어본 상태에서는 그런 기쁨을 더 크게 느끼리라 생각된다.

물론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당대 인물들의 행위를 일률적으로 독일적 전통의 프레임에 맞춰 보려는 시티노 교수의 시각이 좀 지나치다는 느낌도 남는다. 지난 번 『Hitlers Heerführer』를 소개하며 언급했듯이, 2차 세계대전기 독일군 지휘관의 인적 구성에는 프레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단의 다양성도 존재했다. 독일군 총사령부와 각급 제대 사령부, 지휘관들 사이에 존재했던 팽팽한 이견과 긴장은 그저 사소한 것이었을까? 프레임에 매몰되다가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도 주목해야할 부분이 아닌가? 이것이 근본적 변화의 계기로 작동할 여지는 없었는가? 이러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채 진행되는 서술은 뭔가 구성상의 허술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기동전 프레임 중심의 해석도 한계는 있는 법이며, 이에 매몰되어 다른 요인들을 경시하는 위험은 경계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프레임을 두루 읽기도 힘든 마당에, 머나먼 땅에서 과거에 있었던 프레임까지 생각하려니 참 쉽지 않은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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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5 04:15 2008/07/15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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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성민 2008/07/15 0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 윤민혁 2008/07/15 1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격전의 전설에서 프리저 대령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죠 아마. 1941년 대소 개전 결의에 그런 독일식 기동전에 대한 맹신이 크게 작용했다는 식일 텐데... 분명히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히틀러 탓이 아닐까 싶네요. -_-;

    • Periskop 홈지기 2008/07/18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맞습니다. "전격전의 전설"에도 작전술과 전략 수준에서의 전격전에 대한 이야기에 비슷한 언급이 있지요. 말씀하신대로 전략 수준의 고려에 대한 책임은 최고 통수권자인 히틀러에게 있으니, 가장 무거운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3 제국 시기에는 과거의 카이저와도 다른 총통(대통령 겸 수상)이라는 직위, 변화된 육군 참모본부의 위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프레임으로 군부에게 과한 책임을 묻기 어려운 측면도 있고 말입니다. 다만 제3 제국의 전략수립에는 여전히 냉철한 정치외교 전문가들보다 군 수뇌부의 입김이 강했던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3. 삽질랜드 2008/07/15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론: 역사의 마이너스 손('ㅅ') 히틀러

  4. 일화 2008/07/15 1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학자의 글은 막연했던 것을 명확하게 밝혀낸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네요. 전략적으로 수세를 취해야 하거나,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공세를 선호하는 독일의 선택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프랑스전역 막바지 등과 같은 예외가 있고, 그런 예외들까지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현재까지의 인류지성으로는 아직 무리인듯 합니다. 복잡계이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채승병님의 책에 재도전 중이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는 잘 와닿지가 않네요... ㅜ.ㅜ)

  5. http://panzerbear.blogspot.com/  2008/07/15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책을 대략 100페이지 정도만 읽고 책장에 꽂아놨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빨리 마저 읽어야 겠군요.

    그러고 보면 기동전에도 소모전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봤던 투하체프스키의 식견은 정말 탁월한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해서 스탈린에게 욕을 얻어 먹은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요. 독일 군인들이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서 기동전에 몰입한 반면 소련 군인들은 어떻든 소모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소련의 기동전 개념이 독일 보다 한 수 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7/18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체제와 군사전략, 작전술 수준에 이르기까지 유기적 체계성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소련의 프레임이 우월한 측면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만 독일군 행동에 대한 시티노 교수의 시도처럼, 대전기 소련군 지휘관들의 행동을 그런 프레임에 맞춰 설명하는게 가능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6. lesis 2008/07/15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레임...;;

    일각에서 일정한 사고의 틀을 깨부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의 승리가 독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전체적으로는 이제까지의 관성을 이겨낼 수 없지 않았을까요.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7/18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티노 교수는 2차 세계대전기 독일군의 패배를 바로 그 관성의 측면에서 귀결지으려 하는 것이지요. 돌이켜 보면 많은 체제와 조직이 그러한 관성에 휘말려 처참히 몰락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가운데도 가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성공한 경우들을 보면, 그게 단순히 우연이었는지 뭔가 변화의 열쇠를 읽은 혜안의 산물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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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대의 열차포로 이름이 높은 "도라(Dora)" — Schwerer Gustav — 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 놀라운 위압감과 상징성 때문인지 잊을라치면 어디선가 떡밥이 튀어 나오고는 한다. 물론 대부분은 상한 떡밥의 재탕 수준이어서 과거에 포럼이나 이곳 블로그에서 했던 이야기들, 인터넷 상에 도는 정보들로 갈음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실 돌아보면 홈지기가 언급했던 내용 중에서도 사실 관계가 부정확한, 또는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들이 있다. 식품 안전성으로 신음하는(?) 이 시대에, 정확성이 강조되어야 할 컨텐츠 역시 예외는 아닌 듯 싶어 이런 부분에 대해 자발적 리콜(?)을 조금 해볼까 한다.

Schwerer Gustav

Periskop의 기존 관련 글:

첫 번째 문제는, "도라"가 이뤄낸 불멸의 전과로 꼽히는 소련군의 탄약창 "하얀 절벽(Weiße Klippe)" 파괴에 대한 의혹이다. "도라"는 제한된 탄약을 갖고 당시 세바스토폴 외곽을 방어하는 주요 요새시설에 대한 포격을 감행했다. 1942년 6월 5일부터 사격이 개시되어 이날 15발을 쐈고, 다음 날인 6월 6일에 16발, 6월 7일에 7발, 이어 11일과 17일에 또 각각 5발씩이 발사되었다. 5–6일은 공격 준비포격 기간이어서 하루 종일 사격이 이뤄졌고, 7/11/17일은 지상군 진격이 병행되던 관계로 이른 아침에만 사격을 했다. 절정의 사격을 퍼부은 6월 6일의 포격이 역시 많은 사람의 도마에 올랐으며, 이날 17시43분 포격을 관측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120 Meter hohe, schnell ausschießende Rauchwolke

120미터 높이의, 빠른 탄착 연기 구름 관측

독일군이 세바스토폴의 탄약창 "하얀 절벽(Weiße Klippe)"의 존재에 대해 인지한 것은 1942년 1월의 일이었다. 포로가 된 소련 해군 포병장교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이 거대한 탄약창의 존재가 드러났다. 세바스토폴 안쪽으로 만입한 세베르나야 만 북쪽 해안 절벽 안쪽 깊숙이 위치해있으며, 3층 규모의 구조에 수백 미터에 이르는 길이로 뻗어있는 보관 시설에는 수비대가 2년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의 탄약이 저장되어 있다는 보고였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두터운 해안 암벽 자체가 탄탄하게 감싸고 있는 이 시설은 독일군의 다른 어떤 무기체계로도 격파가 불가능해 보였다. 이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도라"밖에 없었다. 다른 요새시설에 대한 포격에 이어, "도라"의 철갑탄 8발이 "하얀 절벽"을 향해 날아갔고, 17시43분 사격에서 관측된 무시무시한 연기는 "하얀 절벽"이 파괴되었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그러나 1990년대 세바스토폴이 개방된 이후 — 흑해함대의 모항이라 냉전 중에는 개방되지 못했음 — 독일과 러시아(및 우크라이나) 연구자들이 현지 답사를 통해 조사한 결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도라가 "하얀 절벽"을 날려 버렸다는 설명은 지나친 과장이라는 쪽에 비중을 둔다. 어디나 그렇지만 탄약창은 한꺼번에 모든 저장 탄약이 날아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격벽을 짜서 저장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하얀 절벽" 또한 당대와 오늘날의 사진을 보면 탄약창이 몇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고, 수송선에 탄약을 싣기 위한 부두 시설과, 트럭 등 지상 운송수단을 이용한 탄약 이송을 위한 야적장 등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탄약창의 한 구획이 피탄되거나, 사고가 일어난다고 쉽사리 전체 탄약창 파괴로 이어지기는 힘들었다.

하얀 절벽

1942년 세바스토폴 전투 이후 "하얀 절벽"의 피탄 사진

여기서 당대의 자료사진을 보자. 탄약창 입구 한 곳 외벽에 명중탄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로 인해 절벽 사면이 붕괴된 모습은 7톤 짜리 철갑탄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세바스토폴 요새가 2년이나 농성할 분량의 탄약이 대거 연쇄폭발을 일으켰다기에는 그 정도가 약해 보인다. 수천 톤의 탄약이 유폭되었으면 훨씬 거대한 규모의 사면 붕괴가 목격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탄약창 입구들은 오늘날까지도 멀쩡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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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진 삼각표식 문의 오늘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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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절벽" 탄약창의 다른 출입구 잔해

이 사실로부터 17시43분 사격은 "하얀 절벽" 탄약창 입구 1개와, 일부의 탄약만을 유폭시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120미터 높이의 연기 구름을 만들어 내고, 접안해있던 함선을 침몰시킬 정도의 파괴력은 발휘했다. 하지만 진정 세바스토폴이 농성할 기력을 소진시킬 수준의 효과를 달성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탄약이 제대로 유폭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이미 공격을 예감한 소련군이 상당수의 탄약을 각 요새 거점 및 야전부대로 반출시켰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막대한 운용자원이 소모되는 1350톤 짜리 괴물을 동원해서 얻은 결과치고는 다소 실망스러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하얀 절벽" 파괴가 널리 알려지게된 것도 "도라"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독일군의 과대 선전이었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당시 "도라"가 탄약창을 목표로 다수의 철갑탄을 발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히틀러는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Vom Chef AOK 11 wurde ein Gespräch der Heeresgruppe weiter vermittelt, 'daß der Führersehr aufgebracht sei, weil "Dora" auf Munilager "Weiße Klippe" gefeuert hat.' Der Führer äußerte sich dahingehend, daß dies kein Ziel für "Dora" sei. Dieses Geschütz ist nur für betonierte Kampfstände da.

제11군 사령관으로부터 '총통께서 "도라"가 탄약창 "하얀 절벽"에 사격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격분하셨다'는 집단군과의 대화 내용을 전해 들었다. 총통은 이것이 "도라"의 적절한 목표가 아니며, 이 포는 콘크리트 전투거점에만 쓰여야 한다고 지적하셨다.

제54 군단의 전투일지에 수록된 이 내용은, 히틀러가 "도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목표 하나하나에도 간섭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세세한 간섭 — 히틀러와 처칠의 공통점이기도 했던 — 이 기울여지는 와중에, "하얀 절벽"에 대한 포격 효과도 그리 없었다고 보고가 이뤄진다면? 분명히 지휘관 누군가는 목이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하얀 절벽"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뉘앙스의 보고와 연이은 선전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꽤 크다. 오늘날 기업 현장에서도 경영진이 닥달하는 시급한 문제일수록, 문책의 두려움에 압박을 느낀 나머지 허위 보고가 빈발하는게 현실 아니겠는가?

당시 독일군은 "도라"를 위해 준비한 탄약이라고는 1차분으로 철갑탄 48발 밖에 없었다. 추커토르트 장군이 지휘하던 HArko 306은 이를 8군데 목표에 배정했고, 결국 목표당 평균 6발이 사격되었다. "도라" 관련 포병관측일지에는 목표에서 20미터 이내로 탄착한 경우가 이 가운데 8회였다고 하지만, 단일한 시설이 아니라 여러 포좌와 화점이 연결된 소련군 요새 시설을 일격으로 무력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콘크리트로 강화된 요새시설에 명중탄과 유폭이 일부 발생했어도, 이후 보병의 공격단계에서 소련군은 여전히 치열한 방어로 독일군을 괴롭혔다. 만슈타인 등 야전지휘관들이 예상한대로 오히려 1차 세계대전의 유물과도 같았던 20~30㎝급 구경의 구포와 초중곡사포들이 더 효과적이었다. 이들은 탄약 재고도 풍부했고, 속사성도 훨씬 좋았다. 당장 21문의 30.5㎝ 구포는 작전 기간 내내 4920발(1640톤)을 퍼부으며 보병이 돌입하기에 유리한 탄막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의혹보다는 사소하지만, "도라"에 대한 자발적 리콜 하나만 더 하고 마무리짓자. 홈지기가 적어놓은 바도 그렇고, 많은 문헌에서 세바스토폴 전투 기간 "도라"가 사격한 포탄이 총 48발이라고 하지만, 실은 53발이었다. 전투 개시 당시에는 철갑탄 48발 밖에 준비되어있지 못했으나, 이후 추가로 보급을 받아 고폭탄(Sprenggranate) 5발의 재고를 뒤늦게 확보했다. 이는 철갑탄과 달리 탄두 대부분이 고폭약으로 채워져있으니 그 폭발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고폭탄은 시험사격을 해본 적도 별로 없고, 이미 48발의 철갑탄 사격으로 인해 사격제원이 영 불안했기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 직접 지원포격을 하기는 위험했다. 결국 달리 쓰기도 뭣하고 해서 전투 막바지인 6월 25일에 이 5발을 그냥 쏴 버렸다. 4발은 바다에 떨어졌고, 1발이 세바스토폴 시내에 떨어졌다. 그리고 관측기록에는 이 마지막 포탄으로 인해 무려 너비 200미터, 높이 35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연기 구름이 피어 올랐다고 한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8/07/12 15:30 2008/07/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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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라프 2008/07/12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미츠급 항공모함보다 더 큰 물기둥이라...;;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정말 볼만한 광경이었겠군요.-_-;

    • 獨步 2008/07/12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평화시위의 개념이 전혀 없었던 80년대 후반 시내중심가에서 가게를 하셨던 친척분 말씀으로는 해외언론에까지 언급된 '과격' 시위조차 한 걸음 떨어져서 구경하면 그렇게 흥미진진한 볼거리일 수 없었다고 증언(?)하시더군요(웃음).

    • Periskop 홈지기 2008/07/15 0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기사 저도 80년대 중딩 시절에 방과 후 친구들이랑 가까운 모 대학 시위 구경가던 기억이 있군요. 최루탄 냄새도 나지 않는 모 건물 옥상에서 백골단과 시위대가 엉기고 사과탄 정신없이 터지는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는 했습니다. 지나보면 저 발치 아래에서 있던 살벌한 일에 그리 무덤덤할 수 있었던게 섬뜩하긴 합니다.

  2. 일화 2008/07/12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크기가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군요. 그나저나 히틀러가 도라에도 관심이 많았는지는 몰랐네요.

  3. 삽질랜드 2008/07/13 00:22  댓글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