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까지 지식의 역사는 가지치기의 연속이었다. 불과 한 두 세기 전만 해도 학문 분야는 그다지 세분화되어있지 않았다. 당대의 물리학자라 불릴만한 사람이라면 수학자이기도 했고, 철학자이기도 했다. 대학에서도 수학/물리학/자연철학은 함께 교육되었고, 세분화된 경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학도 다들 정치경제학의 영역에 뭉뚱그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를 거쳐오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지식 앞에 학문의 선긋기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제는 어떤 학문을 연구한다고 해도 그 앞에 세부전공, 또 그 안의 전문분야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최고의 깊은 지식을 파들어가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그 어느 시절, 단란한 건물 안에서 오만 가지 학문의 이야기가 오고갔다는 회고담은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만 느껴지고는 했다.
홈지기도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당연히 그러한 경험을 해왔다. 예전부터 역사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그건 그저 취미거리일 따름이었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접점을 찾는다면 그저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정도의 이야기로 여겼다. 그나마 홈지기는 이런 분야가 지나치게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매우 싫어했었다. 대학 초만 하더라도 순수한 자연과학의 형식미를 더럽히는 짓이라고 믿기까지 했을 정도이다. 그러니 속세의 돈과 재화를 다루는 경제학은 오죽했겠는가, 물리학도라면 상종하기 곤란한 분야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학 공부를 해가면서 이상한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경제학이 고전물리학의 체계를 많이 채용했다는 이야기였다. 깊게 언급된 것은 아니고 관련서적 중간중간에 몇 줄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였다. 처음 들었을 때는 역시 물리학이 학문의 수학적 정식화를 선도했었다는 은근한 자기만족이 느껴졌다. 게다가 물리학이 양자역학을 위시하여 현대물리학의 체계를 잡아가는 동안에, 경제학은 여전히 고전물리학 체계로 썰을 풀고 있다니. 우월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홈지기가 이런 태도를 각성하게 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홈지기는 어쩌다보니 동역학 체계의 이론에 맛을 들였다. 지난 번 CERN의 거대 가속기(LHC) 가동으로 잠시 세상이 들썩였듯이, 보이지도 않는 쿼크와 초끈이 난무하는 극미의 세계나, 가늠할 수도 없는 우주의 거대한 세계가 흔히 물리학의 첨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동역학이 다루는 세계는 보통 눈에 보일만한 어찌보면 평범한 세계이다. 그 속에서 많은 존재들이 약간의 상호작용으로도 기괴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원리들을 다루는 이론을 공부했다.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혼돈(chaos) 이론이나 복잡계(complex systems) 같은 주제에 빠져들게 되었고, 다르게 보이던 세상 학문의 영역이 사실은 많은 부분 겹쳐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었다.
물리학과 경제학의 접점에 대한 의문을 다시 떠올린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경제학이 물리학 체계를 채용했다는데, 그럼 도대체 어떤 이유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채용을 했다는 것일까? 흔히 보이는 물리학 책에 이런걸 본 기억이 없었다. 경제학 교과서를 들고 찾아봤다. 대충 뭔가 익숙한 형식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아무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경제학도들에게 물어도 뾰족한 대답은 얻지 못했다. 다들 물리학과 경제학은 완전히 다른 — 자그만치 '理'과와 '文'과니까 — 세계로 알고 있을 뿐이고 당연히 이야기도 통하지 않았다.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자르족과 한민족의 뿌리찾기 같은 막막한 주제도 아닐텐데 어느새 이런 장벽이?

이 책, 『More Heat than Light』은 제목 자체는 무슨 소리인지 갸우뚱했지만1 부제만큼은 전율스러웠다. 자그만치 『Economics as Social Physics, Physics as Nature's Economics (사회물리학으로서의 경제학, 자연경제학으로서의 물리학)』이다. 물리학과 경제학이 단단히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의 설명도 그러하다. 노틀담 대학2에서 경제학 및 과학사를 가르치는 저자 미로우스키는, 현대 신고전파 경제학의 골간이 된 물리학의 영향을 해부해보고자 하였다. 오늘날 경제학도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이 확립되기까지 쟁쟁한 선학들이 고민해온 여정을 풀어보겠다니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홈지기는 그 즉시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백컨대 결코 쉬운 책은 아니었다. 물리학 관련 내용은 쉽게 이해했지만, 경제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입장에 어찌나 헤매게 되던지. 자본론처럼 분량부터 살인적인 책도 아니었음에도 — 400페이지 남짓에 불과 —, 실제 이 책의 본의를 알기까지 그후로도 몇 년에 걸쳐 몇 번이나 다시 뒤적여야 했다. 그러나 그만큼 홈지기는 꽤나 지적 흥분을 여러 번 느꼈다. 책의 전개 줄거리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이 책의 도입 격인 1장은 「The fearful spheres of Pascal and Parmenides」이다. 이 제목은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보르헤스(J. L. Borges)의 에세이 「La esfera de Pascal」3에서 착상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 짧은 에세이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Quizá la historia universal es la historia de unas cuantas metáforas. Bosquejar un capítulo de esa historia es el fin de esta nota.
만물의 역사는 한줌의 은유에 대한 역사일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그러한 역사의 한 장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다루는 '은유(metaphor)'는 '신성한 구(Divine Sphere)'이다. 이것은 파스칼이 자연과 우주를 '도처에 중심이 있고 그 어느 곳에도 언저리가 없는 그런 무한 구체'라고 서술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개념이 파스칼에 의해 뚝딱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리고 실상 그 이면에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지성들이 그러한 은유의 개념을 발전시켜온 역사가 있음을 적고 있다. 이는 멀리 파르메니데스가 '신은 중심으로부터 그 어느 방향으로 기운을 뿜어내도 그 기운이 균등하게 미치는 아주 둥근 구형의 덩어리 같은 것이다'라는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은유는 중세에 릴의 알랭(Alain de Lille)이 쓴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지적 구체'로 이어진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화형당한 죠르다노 브루노에 이르기까지 이 맥은 잇닿아 있다. 숱한 지성사의 실마리를 이처럼 공통의 화두와도 같은 '은유'의 맥으로 풀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보르헤스 | ![]() 파스칼 | ![]() 미로우스키 |
저자 미로우스키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잇는 맥도 이러한 '은유'를 통해 짚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물리학의 '에너지' 개념과 경제학의 '효용(utility)' 개념이 실은 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의 개념이 확립되고 이것이 불변의 보존되는 양이라는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자리잡았다. 개개의 벡터로 설명되는 힘(force)의 인식으로부터, 이를 적분한 스칼라양인 에너지 개념이 나오면서 물리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바탕을 다지게 되었다. 오늘날 고차원의 세계를 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체계는 에너지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런 에너지와 에너지 보존 법칙의 개념은 자연과학자들만의 이슈는 아니었다. 19세기 서구 지성사에서 이 놀라운 진전은 다른 분야로까지 파급되었고, 이 '에너지'란 화두를 어떻게 하면 각자의 분야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경제학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고, 19세기와 20세기 초를 빛낸 많은 경제학자들은 지적 교류를 통해 에너지로 꽃피운 물리학의 놀라운 성취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보르헤스가 '신성한 구'를 통해 살펴본 역사처럼, 미로우스키는 '에너지'를 통해 물리학과 경제학을 관통하는 역사를 펼쳐내겠다는 포부를 펴고 있다. 대단한 지적 압박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2장은 바로 이러한 '에너지' 개념이 정착된 역사에 대해 개관하며, 후반부를 이해하기 위한 물리학적 기초 지식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물리학도라면 지극히 익숙하게 느껴질만한 내용이지만, 쉽게 지나간 '에너지 보존 법칙'에 폰 마이어(J. R. v. Mayer), 줄(J. P. Joule), 폰 헬름홀츠(H. v. Helmholtz) 등의 다양한 각도에서의 고민이 응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3장부터는 이러한 물리학적 내용이 서서히 경제학과의 접점을 찾아간다. 미로우스키는 '에너지'의 개념이 단순히 자연과학에 고착되어있지 않고, 당대의 지성들이 공유한 다양한 '은유'의 하나임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에너지처럼 보존되는 양, 그와 관련된 불변의 법칙을 찾으려는 노력은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도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에너지의 개념이 확립되기까지 이런 다양한 분야의 지성들은 부단한 상호작용을 해왔다. 에너지가 특정한 분야(물리학)의 전유물이며, 다른 분야는 단순히 일방적인 수혜자라는 인식은 잘못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면에는 물리학에서 다뤄온 운동(motion)의 개념과, 신인동형설에서 다뤄온 육신(body), 경제학에서 다뤄온 가치(value)의 개념에 대한 치열한 고민들이 있었다.
4장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2장처럼 고전 정치경제학 고유의 흐름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고 있다. 경제학의 핵심 중의 하나인 가치론이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그 속에서 자연철학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심히 살펴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중상주의 및 중농주의의 발달,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잡은 뿌리 깊은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이 보여진다. 그리고 그 흐름이 아담 스미스(A. Smith)와 세이(J.-B. Say), 리카르도(D. Ricardo), 맑스(K. Marx)로 이어지는 과정이 펼쳐진다. 경제학사를 주의 깊게 봐왔다면 익숙한 흐름이기도 하지만, 그 사이사이 미로우스키가 더하는 새로운 시각들은 단순한 레퍼토리에 길들여진 머리를 바짝 일깨우는 맛이 살아 있다.
이어지는 5장에서 본격적인 물리학과 경제학의 만남이 펼쳐지게 된다. 이 장은 제목부터가 「Neoclassical economic theory: An irresistable field of force meets an immovable object」이다. 앞 장에서 잠시 옆으로 제껴둔 신고전파 경제이론의 태동을 다루면서, 운명적인 두 분야의 만남을 파헤치고 있다. 카나르(N.-F. Canard), 벤섬(J. Bentham), 쿠르노(A. A. Cournot)는 일찌기 경제학의 수학적 틀을 짜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프로이센의 고센(H. H. Gossen)은 한계효용(marginal utility)의 개념을 발전시켜오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미로우스키는 오늘날 정형화된 형태로 이해하고 있는 한계효용에 대해 당대 고센의 착안점을 그대로 보여주며 서구 과학철학과의 접점을 보여준다. 고센이 기쁨(Kraft)을 가치창출활동(노동)의 원천으로 인식한 사유체계는, 헬름홀츠가 에너지를 운동을 유발하는 힘의 원천으로 생각한 체계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응축되어 펼쳐진 것이 이른바 '한계효용학파 혁명(Marginalist Revolution)'이었다. 제본스(W. S. Jevons), 멩어(C. Menger), 발라(M.-E.-L. Walras)의 3총사는 한계효용 개념을 이용하여 고전경제학적 가치론 체계와는 사뭇 다른 연역적 미시경제학 체계를 구축해낸다. 그리고 이 체계 하나하나의 의미가 어떻게 물리학과 맞닿아있는지 피셔(I. Fisher)의 해석을 통해 파헤치고 있다.
![]() 헬름홀츠 | ![]() 제본스 | ![]() 멩어 |
이 부분이야말로 놀라운 대목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고전역학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대응하고자 하는 명시적 또는 암묵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 입자 → 개인
- 힘 → 한계효용
- 에너지 → 효용
- 힘은 벡터량 → 한계효용도 벡터량
- 에너지 총량은 입자에 가해지는 알짜힘(net force)의 경로적분값 → 효용 총량은 개인에 가해지는 알짜 한계효용의 적분값
- 평형상태는 에너지가 극값(extremum)인 상태 → 균형상태는 효용이 극대화된 상태
- ……
이처럼 물리학의 마당(場, field) 개념이 경제학의 개념으로 이식되는 과정 하나하나가 끊어진 고리의 발견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두가 경제학을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으로 반석에 올리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미로우스키는 단순한 대응관계뿐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갖는 문제를 동시에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미로우스키가 주목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가장 큰 문제는 에너지→효용의 은유는 발견해냈으나, 정작 '에너지 보존 법칙'에 대응하는 법칙을 깔끔하게 찾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럴듯한 보존 법칙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여럿 있어왔으나, 모두가 이론의 여지 없이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은 물리학의 이른바 '라플라스의 꿈(Laplacian Dream)'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라플라스의 꿈(또는 몽상)은 인과적 결정론의 극한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말로서, 우리가 모든 만물의 현재상태를 완벽히 알 수 있다면 물리법칙에 의해 모든 미래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이러한 연역적, 결정론적 체계에 사로잡혀 체계 이식 과정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 막으면서 전진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6장은 이러한 무리한 은유에 집착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문제점을 역사적으로 더욱 깊이 파헤치고 있다. 제목도 「The corruption of the field metaphor, and the retrogression to substance theories of value: Neoclassical production theory」로서, 'corruption'이라는 표현이 거침없이 나온다. 여기서는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다루는 생산이론(theory of production)이 확립된 과정과 그 문제에 대해 깊이 논하고 있다. 미로우스키는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나오는 생산함수의 구축과정이 역사적으로 임시변통적인 개념 차용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신고전파에서 추구한 '가치' 마당의 개념으로는 적절한 생산함수를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전경제학의 가치 이론의 개념들을 이론체계에 우겨넣게 된다. 반 세기 전에 리카르도의 가치론을 이어받은 로빈슨-스라파 진영과, 새뮤얼슨-솔로 진영이 벌인 논쟁을 연상케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홈지기로서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 논쟁(이른바 '캠브리지 자본 논쟁'4) 이면에 이런 근본적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결국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점차로 경제학은 다시금 물리학과 유리되어 완전히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물리학에서 채용했던 은유는 불완전한 것으로 남겨진 채 후학들에게는 잊혀져버리고, 사회물리학을 꿈꾸며 도입했던 방정식 체계는 그 껍데기만 남아 답습되었다.
7장에 이르면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강해진다. 여기서는 20세기 초 이후 외형상 단절된 물리학과 경제학 관계 이면에 미약하나마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리학은 20세기 현대물리학이 발전되어 오며 19세기 에너지의 개념에서 한층 더 나아간다. 반면 경제학은 20세기에 들어오며 새뮤얼슨에 의해 현대 신고전파 체계가 탄탄히 짜여지게 된다. 20세기 중반부터 독보적인 권위를 누린 새뮤얼슨의 체계는 실상 고전물리학 체계 도입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 물리학계의 거성 깁스(J. W. Gibbs)와 에드윈 윌슨(E. B. Wilson)의 영향을 이어받아 고전열역학(classical thermodynamics) 체계라는 콘크리트를 미시경제학에 부어넣었다. 그러나 미로우스키는 외형적인 견고함 이면의 근본적인 결함을 장 제목이기도 한 「The ironies of physics envy」라고 표현하고 있다. 새뮤얼슨에 의해 사실상 완결된 물리학의 이식작업은 전술한 수많은 문제를 무시하며 쌓아올린 것이었다.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토록 에너지 은유에서 출발하여 사회물리학으로 자리잡고자 했던 경제학이, 더 이상 현대물리학의 발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닫아버린 것은 진정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 놀라운 대장정은 8장에서 끝을 맺고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이 내재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때로는 무비판적인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은유가 단순한 사유의 화두를 넘어 남용되고 도그마로 굳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선학들이 경제학 이외의 학문과 깊숙이 교류해오며 개념을 쌓아왔던 과정이 철저히 잊히면서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미로우스키는 바로 두 학문이 교류해온 과정의 고찰을 통해 이러한 문제 해결에 다가가자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미로우스키가 단순히 경제학에 물리학을 이식하는 작업을 재개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제학 전공자로서 경제현상이 물리학을 그대로 대입하기 어려운 문제점들 또한 냉철이 판단하여 책 곳곳에 풀어놓고 있다. 읽기도 전에 물리학 만능주의(?)의 부활을 주장한다고 반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과거의 경제학자들이 열린 지식 교류의 한가운데에 있었듯, 다른 분야의 발전상에 열린 마음을 갖고 교류하려는 노력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런 교류의 재개가 진정한 경제학의 발전에 더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홈지기는 이 책을 읽어오며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개략적으로 살펴본 위의 내용에도 수많은 쟁쟁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사유의 복잡한 연결고리의 일단이 드러난다. 책 본문의 텍스트에 펼쳐지는 내용들은 훨씬 더하다. 실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4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 우습게 보이다가도, 물리학과 경제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맥을 놓치기 쉬운 내용에 질리기 일쑤였다. 홈지기도 이해를 위해 추가로 본 개설서와 논문들이 본문 분량보다도 훨씬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느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전혀 다른 분야라고 여겨졌던 물리학과 경제학이 이렇게 맞닿아 있었다는 쾌감이 어찌 강렬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에도 다양한 분야의 배경지식을 가진 블로거들이 서로의 글을 보며 인상을 받아가고 조금씩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끝없는 지적 상호작용은 매체가 달랐을 뿐 과거에도 유구히 있어온 것이며, 우리가 배우는 학문의 가지는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임에도 우리는 그런 지적 전통을 너무도 모르고 살아왔던게 아닐까.
잊혀진 지적 흐름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세상 학문 물길의 공통점을 인식하고 서로가 배우려는 노력은 매우 긴요하다. 분화된 지식체계를 더욱 심화시키려는 노력도 여전히 소중하지만, 이렇게 끊어진 물길을 복원하고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는 소양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도처에서 이야기되는 진정한 창조의 길도 그런 흐름에 놓여있지 않겠는가.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이지만, 부디 독자 여러분들도 부단한 노력 속에 그 기쁨을 누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더 이상 문돌이, 이공돌이 류의 편가르기에 휩싸이지 말고. 아울러 그 하나의 길라잡이로 이 책이 우리나라에도 보다 더 많이 읽히길 바란다. 나온지 20년이 다 되어가기에 — 1989년에 발간된 책이다 — 세세한 문제점들은 있겠지만, 물리학과 경제학의 접점을 찾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그 의미는 훨씬 오래도록 남으리라 확신한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 제목은 사실 백열전구를 이야기할 때 많이 나오는 표현이다. 아시다시피 백열전구는 효율이 나빠 투입되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빛에너지보다는 열에너지로 소모된다. 이 책 본문에서는 이 표현을 '엔트로피'의 설명에 쓰고 있다. 저자가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아마도 물리학과 경제학 접목의 오랜 시도가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질적 결함을 내재한 미완에 그친 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 이름만 보고 종종 프랑스의 대학으로 오인하는데, 미국 인디애나 주 노틀담에 있는 카톨릭계 미국 사립대학이다.
- '파스칼의 구(球)'라고 번역된 이 에세이는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출간되었다. 『독소전쟁사』를 출간한 열린책들에서 올해 발간된 보르헤스의 에세이집 『만리장성과 책들』에 수록되어 있다.
- 로빈슨-스라파는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을 근거지로 했고, 새뮤얼슨-솔로는 미국 보스턴 캠브리지의 MIT를 근거지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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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생각하고 있던 일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하나 궁금해지는 게 있습니다. 미로우스키는 'shape like'로 봤을까요? 아니면 'frame like'로 봤을까요? 홈지기님은 어떻게 보시는지도 궁금하구요.
생각하고 있던 일이 뭔지 궁금해지는군요.^^ 그런데 질문에 답해드리려니 폴라곰 님이 생각하시는 'shape'와 'frame'의 의미가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조금 불분명하네요. 불필요한 오해(및 동문서답)를 피하기 위해 조금 더 정확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했던 일'이 시작되면 아마도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리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
여쭤봤던 내용을 조금 더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종 학계간 접근을 단순한 '요소 간 대응'으로 보시는 건지, 아니면 양자를 아우르는 '일반 법칙'을 도출하려는 노력(?)으로 보시는 건지를 알고 싶습니다.
이중 후자에 대해서는 좀 과도한 해석을 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만 '현실의 위치에서 지난 현상을 해석하는 개념'이 아니라 '과거의 위치에서 새로운 모델을 세우는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위와 같은 접근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절대 반지'를 찾은 듯한 느낌입니다. :)
저도 홈지기님이 느끼셨던 그런 '쾌감'을 맛보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름의 지향하는 분야에서 꼭 그런 쾌감을 느끼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번번이 지적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글지킴이' 활동이라도 하시는지?^^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와, 저도 갖고 있던 의문이였는데 의문의 중심까지 파고 들어가셔서 이렇게 설명을 해주시다니 감사하네요 ^^ 솔직히 다 이해는 못했어요 ㅠㅠ
다 이해를 시켜드리기엔 제 필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가 다 설명드리지 못한 부분은 결국 스스로 공부하여 깨치셔야겠죠. 방문 감사합니다.^^
정말 멋진 서평입니다!
채승병님의 치열한 지적 탐구 과정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군요. 학문 분야 간의 벽을 허물고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고수들의 분야인 것 같습니다. 저같은 하수는 고등학교 수준의 수식만 나오는 경제사 논문도 경기를 일으키니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지적하신 지적 전통의 문제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국의 대학체제는 서양의 학문이 학문적 분화가 고도로 진행된 상태에서 영향을 받아 출발했기 때문인지 어딘가 뿌리가 허전하고 파편화 되어있다는 느낌입니다. 학제간 교류를 강조하지만 잘 되지 않는 원인에는 이런 전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쓰시는 것을 보면 강의도 재미있게 하실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윤시원 님의 지적 열정도 충분히 존경스럽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발음이 좋지 않아 강의에 애를 많이 먹습니다. 간혹 나가는 강의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고는 하지요.
입자를 개인으로 치환해서 볼 수 있는 거였군요.
그렇다면 좀 뜬금없지만 이런 체계를 인문학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까요?
입자와 개인의 대응관계를 인문학에 적용한다…… 인문학에 그리 조예가 깊지 않은 저로서는 뭐라 딱부러지게 답해드리기엔 어려운 질문입니다. 흔히 물리학적 '입자(particle)'이라고 할 때는, 어떤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하고 상호작용하는 명확한 개체를 의미합니다. 그 '규칙'이 물리학에서는 자연의 운동법칙이 되는거고, 여타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시스템에서는 동종 개체군 공통의 행동규약(behavior rule)이 된다고 봅니다. 물론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개체들은 아무리 잘 분류한다고 해도, 조금씩 다른 인지 및 행동특성을 갖고 있기에 어디까지나 이상화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럼에도 어떤 시스템에서는 그러한 개체 수준의 이질성이 큰 영향을 주지 않기에 개인을 입자화하여 보는 방법이 유용합니다.
좀 더 진전된 논의를 기대하신다면 당장 떠오르는 밑천은 별로 없고, 다른 내용들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전에 과학철학하시는 분들에게서 뭔가 비슷한 류의 이야기를 들은 어렴풋한 기억은 있는데 솔직히 당장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기회될 때 다시 알아다가 추가 답변을 하던지 하겠습니다.
본문 중간에서부터 제 수준에서는 이해불가능한 영역으로 나아가기에 결론만 보았습니다. 홈지기님께서 인상깊게 보셨다는 책이라고 해서 덥석 손에 들었다가 낭패를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본문에 소개하신 책을 당장 읽어보겠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네요(헛웃음).
따라가기엔 너무나 높아서 때때로 아니 종종 좌절감마저 느끼게 되지만 그렇기에 디씨나 아고라를 보며 느꼈던 공허한 우월감을 겸손함으로 바꾸게 해주시는 분들의 영역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 만으로도 인생 헛살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어떤 책이었죠? --a 그나저나 세상에는 고수들이 많으니 항상 겸손한 자세로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는 말씀엔 저도 깊이 동감합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말을 들어보긴 했는데, 깊히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 물리학은 순수 숫자의 계량을 많이 사용하니까 이런 정신이나 방법론이 경제학과 연결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슥 넘어갔죠.
이런 넘겨짚기 태도가 부끄러워지네요. 더욱이 승병님같이 한 가지 주제를 몇 년 씩 갖고 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저도 한 주제를 몇 년씩 파서 거창한 논문이나 책 쓰고 이런 수준은 못 됩니다. 그냥 중간중간 생각날 때 책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고 그랬으니 순수히 투여한 시간 총량은 그리 많다고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직도 명쾌하게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의문점들이 너무 많고요. 저야 이모저모 부족한 사람이다보니 너무 조급하게 마음 갖지 않으려 합니다. 언제 그런 의문을 다 풀어낼지 까마득하지만, 조금씩 파헤치는 과정 속에서 뭔가 성취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나 가져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생각나네요. 이론체계가 도그마화 되기 쉽다는 것이 실험이 어려운 사회과학이 갖는 주요 결점이고, 이것이 최근 통계의 도움으로 조금씩 극복되고 있는 것이 최근 경제학계의 주류가 신고전파에서 행동경제학으로 넘어가는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물리학과 경제학의 새로운 교류도 학문의 새 지평을 여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말씀하신 노력들이 다각도로 이뤄져야겠죠. 아직 행동경제학이 주류의 바통을 넘볼만큼의 조류를 형성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발전시킬 내용들이 많은 것은 사실 같습니다. 저도 현대의 통계물리학적 지식을 어떻게 경제시스템에 잘 적용시켜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다수의 경제학자들에게 그런 물리학적 시도가 무시되어왔죠. 제가 한때는 그게 경제학자들이 옹졸해서 그런 것인줄만 알았는데, 제 입장에서도 경제학의 바탕을 좀 더 이해하고 대화할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노력 중입니다. 이런 노력들이 언제 결실을 맺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정말 지적인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로군요. :) 개인적으로도 관심있는 주제이긴 하나 게으름과 무지로 인해 손도 안 대고 있는 분야입니다만..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유물론자들도 그 당시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과의 결합을 여러 차례 시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이를테면 엥겔스의 반듀링론이랄지 -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책에 언급이 안 되어 있나요? 저도 한번 기회가 되면 이러한 학문적 통합의 시도(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 싶네요.(언제나.. --; )
네, 말씀하신 내용은 아주 간략히 언급이 되어있고 깊이는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책의 주제가 신고전파 태동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유물론자 입장에서의 논의까지 다 포괄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 쪽에 대해서는 다른 적절한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foog 님도 기회가 되셔서 이런 논의에 적극 동참해주신다면 기쁘기 한량 없겠습니다.^^
대학생 때 이수호 선생님의 '인간과 우주'라는 강의를 들었던 때가 생각나네요.
천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강의를 하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연세가 많으신데도 정말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준비하시는 모습에 항상 감복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글 올려주신 데 대해 독자로서 감사드립니다.
심히 부끄러운 자기고백의 서평을 잘 읽어 주셨다니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자주 들러주세요.^^
아참, 믹시업! 버튼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새 글 볼 때마다 항상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요즘 다음블로거뉴스 추천버튼이랑 믹시업 버튼을 많이들 다시긴 하더군요. 저도 한 때 달아볼까 했는데 괜시리 글 쓰고 '삥' 뜯는 기분이 들기도 해서 조금 주저하다 아직껏 못 달았습니다. 다른 분들 활용하시는 바를 좀 더 살펴보고 괜찮으면 달아놓도록 하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잊혀진 지적 흐름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세상 학문 물길의 공통점을 인식하고 서로가 배우려는 노력은 매우 긴요하다. 분화된 지식체계를 더욱 심화시키려는 노력도 여전히 소중하지만, 이렇게 끊어진 물길을 복원하고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는 소양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딴소리를 하자면....문학을 가르치면서..역사와 예술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나날이 깨닫습니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다루지 않으면서...달랑...글귀 하나 문자 하나 대응되는 지식을 지식이라고 공부라고 하는지....그래서..나아간 공부의 결과를 어찌 일제고사로 측정할 수 있는지....회의를 품을 뿐이지요.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어요!
요즘 읽은...하워드 진 "교육을 말한다"랑...경제학 서적인 "미래를 말한다" 둘이 어찌나 짝을 잘 이루는지...재밌게 읽었는데 교육쪽으로 추천해요!
선생님다우십니다, 추천하신대로 잘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소개하신 책의 서평이 있군요.
https://www.mises.org/journals/rae/pdf/RAE5_1_7.pdf
링크해주신 서평을 보니 일전에 읽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처음에 이 책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경제학자들의 서평이 궁금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스트리아 학파의 학자분이 쓴 서평이라 그런지 꽤나 재미있게 읽히더군요. 신고전파 비판에는 한참 동참하면서도,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야기는 별로 안 해줬다고 툴툴대는 모습이 재밌었습니다. 다음 번에 관련 글을 쓸 때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호평, 악평 고루 모아서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P.S. 근데 일전에 알려주신 닉으로는 잘 모르겠으나, 추측해보면 존함을 알 것도 같은데 어찌 인사를 드려야할지……^^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언뜻 약해 보일수도 있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던 두가지 삶의 경로가 하나로 합일될 수 있음을 보여 주기에 더욱 기뻐하시는듯...
예리하시군요, 어찌보면 제가 왜 이상한 경로를 가고 있는지 스스로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아닐까도 합니다.^^ 대감님도 셋째 자제분 부디 건강히 커가길 바라겠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저같이 단순무식한 사람들은 홈지기님같은 분들이 무척 부럽거든요. 저런 책은 커녕 경제원론도 무차별곡선 이후는 이해불가였습니다. 내 전공도 못하다보니 다른 분야는 아예 손 댈 엄두도 못내거든요.
휴대폰 선전에도 나오지만 '좌절금지' 아니겠습니까. 저도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아둔한 머리와 무식을 한탄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학부시절 경제수학을 가르쳤던 교수님이 경제학은 현상을 수학으로 나타내다보니 물리학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했었죠. 이 글을 보니 수긍하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드는 인상은 '수학'도 언어처럼 하나의 논리화된 사유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흔히 우리가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때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닌, 뭔가 그 이상의 문화적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물리학과 경제학 체계를 번갈아 들여다보니 그런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느낌의 근거에 대해 조금씩 다져가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댓글 감사합니다.^^
"부의 기원"이라는 책을 한 번 읽어보시면,
경제학에서 물리학을 도용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과
그것의 한계가 꽤 잘 나와 있습니다.
언급하신 책이 참고도서로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쓰신 글 내용은 다 안읽고 도입부만 읽고 적어봤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위 책도 꼭 읽어 볼께.
포스팅 재밌게 봤습니다. 트랙백을 안 할 수 없었네요.ㅎㅎ;
마치 카프라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원제는 '물리학의 도')]가 떠오르게 하는 책이군요. 그 책은 물론 이원론적 세계관과 일원론적 세계관을 기존의 뉴턴역학과 양자역학으로 치환해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글이었습니다만 약간 제 눈엔 어색해 보였습니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을 받진 않기를 바라면서 제 지름목록에 올려 보도록 하지요.
좋은 책 추천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