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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4 모든 모델은 틀렸다, 그러나…… (14)

최근에 학회 활동 관계로 모 대학에서 모델링에 대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모델링이라고 하니 프라모델 만드는 법(……)을 떠올리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고 사회과학도들을 위한 행위자 기반 모형(agent-based model) 입문 강좌였다. 아무래도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 모델링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모델링에 대한 기본 내용 설명도 곁들였다. 여기서 모델링에 대한 몇 가지 유명한 격언들을 함께 소개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거였다:

All models are wrong; some models are useful.1

우리가 과학에서 다루는 모델(또는 '이론적 모형')을 설명할 때는 흔히 '지도'를 들어 설명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아래 구글어스 위성영상과 콩나물 지도를 비교해보자.

Google EarthCongnamul

위성영상에 나타나는 수많은 건물의 꼼꼼한 디테일은 일반적인 지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서울특별시청은 그저 뭉툭한 회색 다각형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도로부터 현실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위치에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모양의 건물이 있다고 해석한다. 왜 그럴까?

첫째 이유는, 현실 대상과 지도 사이에 구조적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도에 나온 수많은 건물이 비슷해보이긴 해도 약간씩 모양의 차이가 있고, 공간적 배열의 차이가 있다. 지도는 위에서 바라본 모습만 투사하지만 건물의 기본적인 단면 차이 정도는 드러낸다. 또한 도로의 생김새도 기본 윤곽은 분명히 드러낸다. 각각의 요소가 구분되는 대응 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둘째 이유는, 그런 구조적 대응 관계를 해석하는 사회적 규약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진한 회색 또는 노랗고 발그레한 색으로 칠한 부분이 건물에 대응되고, 하얀 부분이 도로에 대응된다는 규약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슨 색깔인지를 명시적으로 교육받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색으로 구분되는 존재가 각각 건물, 도로, 녹지, 기타 공터에 해당된다는 규칙을 익혀왔다. 하지만 이렇게 규약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점점 특수한 목적의 지도가 될수록 특별한 규약이 점점 늘어나며, 일반인들은 해석하기가 어려워진다. 항공지도나 해도를 펼쳐 놓는다고 그 의미를 다 알 수 있겠는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사용되는 모델도 그러하다. 일련의 수식으로 짜여진 모델, 여러 개념들로 이뤄진 모델을 이해하려면 각 학계에서 확립된 규약을 익혀야 한다. 그걸 모르면 그냥 의미 없는 기호와 숫자의 나열, 뭔가 그럴듯 해보이는 글자의 잔치일 따름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지도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무리 세밀한 지도를 만든다고 해도, 현실의 모든 특징을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콩나물 지도에는 지형의 고저, 건물의 높이, 색깔 등에 대한 정보가 없다. 직접 시청 주변을 걸어다니며 관찰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에 비해 극히 일부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한국에 한 번도 와본 일이 없는 외국인이 콩나물 지도만 보고서는 서울 시내 고층건물들이 얼마나 들어서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마냥 평평한 땅에 2~3층 정도의 건물이 늘어선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지도는 필연적으로 현실의 모든 특징 가운데 일부만을 선택해서 담을 수밖에 없으며, 선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오도와 왜곡의 위험까지 있다. 모델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을 단순히 축소(또는 확대)한 것이 아니라, 정보가 의도적으로 첨삭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모델은 틀렸다.

그렇지만 콩나물 지도가 쓸데 없는 추상화라고 욕할 사람은 없다. 콩나물 지도는 우리가 어떤 지점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적당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내려서 웨스틴조선호텔을 찾아간다고 할 때, 롯데백화점 높이가 몇 미터이고, 건물에 유리창이 몇 개이며, 무슨 색깔로 칠해져 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한국은행 방향을 따라 난 대로를 따라 가다가 롯데영플라자와 CGV 명동이 보이면 우회전해서 가면 된다'라는 간단한 정보들만으로도 (길치가 아닌 이상) 충분하다. 이런 면에서 콩나물 지도는 유용하다. 모델 또한 특정한 목적에 따라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서 충분히 유용하다. (세상에는 그나마도 얻지 못하는 쓰레기 모델이 부지기수이다.) 바로 그런 유용한 지도, 아니 모델을 만드는 과정이 모델링이라 할 수 있다.

자,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또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모델링 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홈지기는 요즘 말랑말랑한 과학(사기?)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보니 새삼스레 저 '유용하다'는 의미를 되새겨보고는 한다. 조직론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들여다보자.

Albert Szent-Györgyi
비타민 C의 발견 업적으로 1937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알베르트 센트-죄르지(Albert Szent-Györgyi)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집되어 위생병으로 복무했다.2 그의 부대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일원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부대장은 일단의 척후조를 편성하여 산악지역 안쪽으로 정찰을 보냈다. 한 나절 정찰을 하고 주둔지로 돌아오는 가벼운 일정이라 이들은 별다른 장비를 휴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혹독한 눈보라가 이 지역을 강타했다. 말 그대로 블리자드(blizzard) 속에서 척후조는 길을 잃어 버렸으며, 해가 지도록 부대에 복귀하지 못 했다. 부대장부터 센트-죄르지를 비롯한 남은 부대원들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기다렸으나, 이틀이 지나도록 흔적을 발견할 길이 없었다. 모두는 그들이 블리자드 속에서 헤매다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은 눈을 뚫고 부대로 복귀했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예상했던대로 블리자드에 휘말린 척후조는 모두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부대로 복귀하려고 했다. 그런데 폭설에 뒤덮여 어디가 길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형지물도 익숙하지 않은 곳인데다 한치 앞을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조원들은 멈춰섰다. '이대로 죽는구나!'하는 절망 속에서 최후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조원들 가운데 한 명이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지도 한 장을 발견했다. 이들은 반색했다. 지도가 있으니 블리자드가 지나갈 때까지만 기다리면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번졌다. 급히 눈 속에 굴을 파고 이들은 눈보라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날씨가 좋아지자, 이들은 눈 덮인 산 속에서 열심히 지세를 가늠했다. 지도의 지형과 산세를 대조해가며, 이들은 서서히 방향을 잡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눈길을 헤치고 난 끝에 그들은 부대 숙영지로 돌아왔던 것이다.

부대장은 척후조를 불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감격하여 그 희망의 지도를 받아 보았다. 그러더니 부대장은 갑자기 낯빛이 바뀌며 한 마디를 던졌다.

"이건 피레네 산맥3의 지도잖아!"

Karl E. Weick
이 이야기는 조직론 분야에서 유명한 칼 와이크(Karl E. Weick) 교수가 자신의 글4에서 써먹은 뒤에 널리 알려졌다. 사람마다 이 이야기에서 제각기 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을테지만, 홈지기는 이 이야기를 듣고 글 서두에서 이야기한 "All models are wrong; some models are useful."을 떠올렸다.

앞에서 설명한 모델의 '유용함'의 판단하는 기준을 다시 상기해보자. 우리가 보고자 하는 현실의 수많은 정보 가운데 목적에 부합하는 일부의 정보만을 끄집어낼 수 있으면 '유용한 모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알프스를 헤맨 헝가리 병사들이 갖고 있던 지도(모델)는 그 수준도 못 되었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과는 전혀 관계 없는 정보를 담은 지도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지도를 정말로 유용하게 여겼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나마도 없었다면 그들은 주변에서 헤매다가 죽었을테니 말이다.

우연히도 그들이 쥐고 있던 피레네 산맥 지도의 지형과 정찰나간 알프스 지형이 많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5 그러나 그게 꼭 결정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이들이 지도의 정확성에만 신경썼다면, 설사 지형이 유사했더라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조할 수 있는 많은 지형의 특징들도 눈에 일단 뒤덮이고 나면 판별하기가 아주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홈지기는 이 사례가 지도(모델)의 유용성이란 현실과 유사한 정도 이상의 의미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연구뿐 아니라 일상사 모든 일은 어차피 불확실성 속에서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정작 현실의 전체 그림이 뭔지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갖고 있는 지도(모델 또는 세계관)가 얼마나 정확한지 판별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완벽한 지도를 미리 갖고 출발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첫 걸음을 떼고, 여럿이 함께 길을 가면서 갖고 있던 지도와는 다르게 전개되는 현실 지형의 의미를 파악해가야 한다. 기존의 지도에는 없던 언덕이 나오면 누군가가 재빨리 올라 그 너머의 지형을 점검하고, 계곡이 나오면 조심스레 물길을 밟아 내려갈 방향을 가늠하는 식이다. 이야기 속의 헝가리 척후병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살 길을 헤치고 나왔을 것이다. 막막한 눈밭에 주저앉은 상황에서 던져지는 지도(모델) 한 장은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꺼져가는 삶의 의지를 되살리고 분연히 일어나 지형을 대조해가며 지혜를 모아보려는 사람들의 행동을 촉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꼭 전문적인 모델링을 업으로 하는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모델을 매일 그렸다 지웠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학술저널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블로거들이 매일 던지는 글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모델들이 숨어 있다. 각자가 품고 있는 모델을 함께 살펴보고 현실과 대조해가는 의논 속에서 모델은 점점 더 정교해진다. 그런 정교한 모델을 이해하고 가끔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연구자, 아니 소박한 모든 블로거들의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 마음 한 구석으로 꿈꾸는 이상은, 설사 미흡하더라도 헝가리 병사들을 구한 바로 그런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틀린 피레네 산맥의 지도조차 트랜싯을 맨 수많은 발길이 필요했듯이, 그런 모델을 만드는 저력도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는 않는다. 많은 학습와 단련의 기간이 필요하다. 지난 강의는 홈지기도 아직 미숙한 입장에서 얼버무린, 그리 길지 않은 모델링 강의였다. 그러면서도 강의실을 나서는 길에, 그 지루한 과정을 진중하게 밟아 결국 변화를 끌어내는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좀 더 많아지기를 조용히 기원해봤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Notes.
  1. 홈지기는 명저 Box, George E. P., et al. (2005). Statistics for Experimenters: Design, Innovation, and Discovery, 2nd ed. Hoboken, NJ: John Wiley & Sons.에서 본 말인데, 맨 처음에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제보바란다.
  2. 복무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 그는 군 생활을 몹시 혐오하다가 자해를 해버린다. 다행히 이 사실이 상부에 발각되지 않아서 의병제대 처리되어 연구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3.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산맥이다. 알프스와는 한참 동떨어진……
  4. Weick, Karl E. (1987). Substitutes for corporate strategy. In Teece, D. (Ed.), The Competitive Challenge. Cambridge, MA: Ballinger Publishing.
  5. 물리학을 아시는 분들이면 프랙탈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 생성 원리에 공통적 특성이 있고, 각각 자기유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비슷한 지형이 많이 생성되었을 가능성 말이다. 정확한 부분은 추가 자료 조사가 필요하니 나중에 별도로 논하기로 하자.
2008/07/24 15:30 2008/07/2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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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성민 2008/07/24 1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 일화 2008/07/24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책에서 읽은 이야기였는데 오늘에야 정확한 출처를 알았네요. 채승병님의 바램대로 그런 분들이 좀더 많아지기를, 그리고 저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7/26 1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워낙 여기저기서 나온 이야기라서 또 써먹기는 그랬는데 약간이나마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화님도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3. deutsch 2008/07/25 0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프스와 피레네라,, 산맥이 형성된 시기가 비슷하면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도....-0-;; 태백산맥 지도 주면 찾아갔으려나요? (근데 태백산맥 지도가 있나 ;;;)

  4. deutsch 2008/07/25 0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요즘 2차대전사는 어디에 박아두시고 ... ;;;

    • Periskop 홈지기 2008/07/26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은 주말 외에는 2차대전사만 따로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보니 이렇게라도 컨텐츠를 섞게 됩니다. 직장인의 고충이야 종현님께서 더 잘 아실테니……^^

  5. terra  2008/07/25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커다란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 ^

  6. capcold 2008/07/25 1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그 격언은 George Box 교수가 처음 쓴 것 맞고, 87년도 저서 'Empirical Model-Building and Response Surfaces' 에서 언급되었다고 합니다. :-)

    • Periskop 홈지기 2008/07/26 1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capcold 님의 재밌는 글 잘 구독해 보고 있었는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해하던 사항도 알려주시니 기쁨 두 배입니다. 자주 들러주세요.^^

  7. 액시움 2008/07/30 1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완벽한 지도를 갖고 미리 출발하기란 불가능하다……옛날에 어디서 들어본 말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한비야 씨의 저서에 나오는 말이더군요.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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