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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9 색다른 반전의 목소리: 니콜슨 베이커의 Human Smoke (11)

지난 글에서 팻 뷰캐넌의 처칠 비판과, 그 이면의 미국 내 팔레오콘과 네오콘의 대립에 대해 잠시 소개해보았다. 결국 작금의 미국은 부시 정부와 네오콘을 상대로 다양한 진영이 갖가지 논리를 동원하여 반전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논란의 연장선 상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기사를 지난 주에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처칠과 루스벨트를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는 제목이기에 또 솔깃하여 뉴스를 뒤져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뉴스는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반전평화주의자(pacifist)인 니콜슨 베이커(Nicholson Baker)의 신간을 두고 벌어진 논란에 대한 것이었다. 베이커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홈지기는 사실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다. 국내에 4권이나 번역, 소개되었지만 말이다 — 『The Mezzanine (구두끈은, 왜?)』, 『Vox (복스)』, 『The Fermata (페르마타)』, 『The Everlasting Story of Nory (노리의 끝없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지난 2004년에는 반전평화주의자로서 부시의 호전성에 반기를 들고 써내려간 『Checkpoint』가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바도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넌픽션 『Human Smoke』를 출간했다니! 이 소식은 홈지기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가득한 호기심을 가슴에 품고 서점에 달려가 이 책을 서둘러 집어들 수밖에.

이 책은 서가에서 찾아내기도 쉽지만은 않았다. 책의 겉 커버부터가 매우 독특했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반투명 트레이싱 페이퍼 같은 재질로 되어 있어서 서가에 꽂힌 상태로는 안 커버에 쓰인 제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제목 그대로 연기(smoke)의 모호함과 불투명함이 겉 커버부터 느껴지는, 꽤나 멋진 책 디자인에 감탄부터 나왔다. 책을 들어 앞면을 보면 이런 기분이 한껏 더해진다. 반투명 겉 커버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손의 실루엣은, 내용을 펼쳐 보기 전부터 뭔가 전쟁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부터 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Nicholson Baker

도인의 풍모를 풍기는 니콜슨 베이커

Human Smoke

그의 신간 "Human Smoke"

책의 부제와 구성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The Beginnings of World War II, the End of Civilization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문명의 끝)'이라는 부제처럼, 책 안쪽에는 대전 초기인 1941년 12월 31일까지 여러 기록들(신문기사, 회고록 등)에서 발췌한 단편적인 장면들이 하나하나 날짜 순서대로 펼쳐진다. 그 첫 페이지는 멀리 알프레드 노벨슈테판 쯔바이크의 이야기부터 나온다:

폭약 제조업자 알프레드 노벨은 『Die Waffen nieder! (Lay Down Your Arms!)』의 저자였던 친구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럽 반전운동의 선구자였던 폰 주트너는 베른에서 열린 제4차 세계 평화회의에 막 참석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이것은 1892년 8월의 일이었다.

"아마 내 공장이 당신의 대의원회보다 훨씬 빨리 전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거요."라고 노벨은 운을 떼었다. "양국 군대가 격돌하여 단숨에 서로를 섬멸해버리는 바로 그 날, 아마 모든 문명국들은 공포에 진저리치고 그들의 부대를 해체해버리고 말테니까."

빈에서 온 젊은 작가 슈테판 쯔바이크는, 프랑스 투르의 한 영화관에 관객으로 앉아서 뉴스 필름을 보고 있었다. 이것은 1914년 봄의 일이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모습이 잠시 스크린에 나왔다. 즉시 극장은 소란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은 고함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러댔다. 남자, 여자, 아이할 것 없이 모두가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라고 쯔바이크는 썼다. "투르의 선량한 사람들이, 세계 정세와 정치에 대해서라고는 신문에서 읽은 것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그 순간 거의 미쳐나갔다."

쯔바이크는 놀랐다.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모습은, 모든 이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순간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쉽게 자극받는지를 내게 여실히 보여주었다."

굵은 글씨체로 표시한 것처럼 모든 장면에는 'It was …… (이것은 ……의 일이었다)'와 같이 그 날짜가 적혀 있다. 그리고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그 날짜도 점점 흘러간다. 전쟁의 막이 깊어가면서 장면도 점점 담담하면서도 몸서리쳐지는 뒷얘기들이 등장한다. 가장 짧을 법한 대목 하나만 소개하자.

H. G. 웰즈는 윈스턴 처칠에게 편지를 썼다. 거기에는 책 한 권이 동봉되어 있었고, 영국이 독일의 농작물과 숲에 소이탄을 뿌려대자는 제안이 담겨져 있었다. 이것은 1941년 6월 20일의 일이었다. 처칠은 그에게 감사 전문을 보냈다.

저자가 보여주는 역사 속의 장면이 하나하나 지나가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 1942년 새해를 맞이하려는 1941년의 마지막 날 밤의 풍경을 보여준다:

빅토르 클렘퍼러는 드레스덴의 유태인 가옥에서 새해를 축하했다. 홍차와 케이크, 베르무트 술, 펀치 사발이 나왔다. "나는 심각한 소소한 연설을 늘어놨다. 너무 심각해서 서로 잔을 부딪힐 때마다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고 클렘퍼러는 적었다. 그 해는 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해였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 다른 사람들이 겪은 일들 때문에 가장 무서웠었다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내 권고(adhortatio)는 이랬다: 어려운 마지막 5분을 위해 고개를 꼿꼿이 높이 세웁시다!"

미하일 세바스티안은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그의 일기에 몇 줄을 써내려갔다. "나는 오늘 밤 마무리짓는 이 공포의 해의 364일을 내 안에 지니고 있다"라고 그는 적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우리는 아직 무언가를 기다릴 수 있다. 아직 시간이 있다; 우리에겐 아직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유명한 정치인들부터 평범한 민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이 덤덤히 기술되며 책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은 남은 대전 기간에 죽기도 하고, 살아남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 베이커는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정말로 악의 응징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좋은 전쟁"이었는가를 의문으로 던진다. 물론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대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들이 조각 그림이 되어, 결국에는 어떤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은 광기의 산물이라는 커다란 직소 퍼즐로 맞춰지는 그런 느낌을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저자의 의도는 성공적인 것일까? 홈지기는 이 책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엄청난 호불호가 갈릴 것임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이 책은 낮에 읽을 때와 밤에 읽을 때의 느낌부터 사뭇 다르다. 번잡함 속에서 이성을 곤두세우는 낮 시간에는 이야기 단편의 나열이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뭔가 억지로 반전의 관념을 주입시키려 든다는 거부감도 자아내고 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두운 밤에 차분히 감정을 고조시키고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보면, 몽환적인 느낌 속에서 전쟁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짧은 감정이입이 연이어 펼쳐지며 사실이 남겨주는 여백을 어느새 내 스스로 채워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로 편집해낸 교묘한 역사 왜곡서일 수도 있고, 자기 성찰의 진중한 안내서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모습은 기사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내노라하는 미국의 언론 서평들이 크게 갈리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류의 다양한 찬반 서평이 쏟아지는 것도 이 책 자체를 읽는 것 만큼이나 큰 지적 재미를 선사해주고 있다. 이런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조차 베이커의 의도였다면 그는 정말 대단한 작가임이 분명하다. 100명 중 10명이 읽고 이들 모두의 칭송을 받는 것보다는, 100명 중 90명이 읽고 찬사와 힐난이 팽팽히 맞서는 것이 사회적 의제를 던지는 데에는 분명 더 효과적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는 선뜻 말하기 어려워도, "성공작"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혹여 반전평화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전쟁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고찰과 논란에 빠져들고픈 분이라면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 반면 이런 측면에 절박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감정이입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분은 그냥 제껴도 좋다. 행여 구입을 고려해보더라도 나중에 열기가 좀 식어 저렴한 페이퍼백이 나오걸랑 인용문 정리 레퍼런스 정도로나 이용하시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밝힌 이 책의 제목, "Human Smoke"의 유래에 대해 잠시 언급해보자.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책 제목은 히틀러의 다루기 힘들지만 고분고분했던 장군들 중의 한 명이었던 프란츠 할더의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할더 장군은 그가 전쟁 막바지에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있을 때, 연기 조각이 그의 세포로 불어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취조관에게 이야기했다. 인간의 연기, 그는 그렇게 불렀다.

할더는 물론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적이 없었다.1 그러나 할더의 복역 장소야 취조시 통역이 잘못되었을 것이라 믿는다면, 이 연기는 아마도 수용소에서 수감자 시체를 소각하며 피어났던 것일게다. 할더는 그때서야 비로소 전쟁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고통과 회한이 그 자신에게 스며듦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작금의 우리 사회에도 그런 '인간의 연기'가 떠돌고 있는지, 누군가가 그 연기를 폐부로 느끼고 있었는지 혼란한 심경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Notes.
  1. 할더는 대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플로센뷔르크 수용소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전력이 있었다. 베이커의 저작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문제를 들어 그가 전혀 사실관계를 확인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다만 베이커는 이 구절이 나온 참고문헌도 일일이 밝히고 있다.
2008/06/19 09:45 2008/06/1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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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쿤돌 2008/06/19 1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채승병님의 블로그를 알게되고나서 늘 일주일에 두세번씩 방문을 하면서
    새글이 있나 없나를 살펴보는게 버릇처럼 되어있었는데, 몇일전 RSS라는 기능을 처음 알게되고 활용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채승병님의 블로그에서 새소식이 왔다는 메세지가 뜨더군요 ㅎㅎ RSS기능 정말 편하네요. 채승병님처럼 좋은분들의 글을 편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좋은 소개글 감사하고 잘읽었습니다.

    • 일화 2008/06/20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게 훌륭한 기능이?! 간단하게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6/20 0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RSS를 활용하는 법에 대해서는 우선
      http://www.hanrss.com/help/guide.qst?cat=1
      를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HanRSS 말고도 더 많은 서비스와 좋은 테크닉들이 있으나 차근차근 더 알아가시면 됩니다.

    • 쿤돌 2008/06/20 1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RSS 프로그램중에 연모라는 프로그램을 사용을 합니다. 관련 링크 : http://yeonmo.theple.com/
      한RSS는 웹기반이던것같아서 웹기반은 사이트주소로 들어가야하는 조금의 불편함때문에 프로그램을 사용합니다.

      Microsoft Outlook 이나 모질라 썬더버드 같은 POP 메일 프로그램에서도 같이 RSS기능을 사용할수 있으나 RSS기능을 지원해주는 신문사 사이트하고는 조금 안맞더군요 몇가지 자잘한 에러가.. 그래서 연모 프로그램은 호환이 잘되는듯해서 사용중입니다. ㅎㅎ

    • 일화 2008/06/20 1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분 모두 감사합니다~

  2. 양성민 2008/06/19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꽤 재미있어 보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3. 길 잃은 어린양 2008/06/19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개해 주신 책의 표지를 보니 David Halberstam의 The Coldest Winter와 비슷한 디자인 같아 보입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6/20 0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디자인 컨셉은 비슷합니다. The Coldest Winter는 눈 내리는 희뿌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The Coldest Winter는 서가에 꽂아놔도 찾기 쉽게 제본 부분(정면) 겉 커버에도 제목 인쇄가 되어 있는게 차이겠죠.

  4. 일화 2008/06/20 0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게는 영 땡기지 않는 책이로군요. 양을 동정하는 늑대가 되라는 책이라는 느낌이...

    • Periskop 홈지기 2008/06/20 0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에도 적어놨듯이 이 책은 섣불리 추천했다가는 개인 취향에 따라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도 있는 책이라서 딱 부러지게 뭐라 말을 못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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