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윤시원 님이 블로그에 중화의 놀라운 실용주의(?)에 대한 글을 써 주셨다 — 링크 클릭해보고 낚였다고 퍼덕댈 애꿎은 방문객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 이야기임을 미리 경고드린다. 이야기인즉슨, 1949년 2월 중국인민해방군의 무지막지한 단대호 개편으로 1개 軍(야전군) 당 3개 師(사단)씩 70軍까지 정렬시켰다는 것인데…… 댓글 릴레이에서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런 실용주의(?)가 이어졌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필자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당장 자료를 찾아보고 트랙백을 걸려 했다. 아뿔싸, 그런데 결혼하고 새살림을 차린 뒤에 변변히 책을 옮겨오지 못해 필자가 소장한 군사사 관련 책의 90%가 본가에 있는 것이다! 원통함을 무릅쓰고 주말에 살짝 가서 간신히 관련서적을 몇 권 집어올 수밖에 없었다 — 전에 몇몇 지인 분들이 결혼하신 뒤에 비슷한 고충을 토로할 때는 그냥 흘려 들었는데 어느새 필자에게도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 책의 각 권말에 보면 전역별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단급 제대까지의 전투서열이 나와 있다. 그런데 시기별로 잘 들여다 보면 재미있는 패턴이 있다.
먼저, 중국이 한국에 진입(入朝)한 1950년 10~11월만 해도 실용의 기치는 엄히 서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 예하
- 第38軍: 第112, 113, 114師
- 第39軍: 第115, 116, 117師
- 第40軍: 第118, 119, 120師
- 第42軍: 第124, 125, 126師
- 第50軍: 第148, 149, 150師
- 第66軍: 第196, 197, 198師
- 砲兵司令部: 砲兵第1, 2, 8師
- 工兵司令部: 工4, 6團
포병이나 공병이야 원래 빈약한 군대에서 뽑아다 병과사령부 밑에 넣은 것이니 실용에서는 눈 감아 주자.
그런데 1950년 11월 2차전역에 돌입하면서 실용의 기치에 조금씩 변화가 온다. 서부전선에 배치된 38, 39, 40, 42, 50, 66軍은 변화가 없었지만, 동부전선(중국식으로는 東線)을 담당하는 第9兵團 예하에 배속된 20, 26, 27軍은 각 1개 師를 증원받았다:
중국인민지원군 第9兵團 예하
- 第20軍: 第58, 59, 60, 89師
- 第26軍: 第76, 77, 78, 88師
- 第39軍: 第79, 80, 81, 94師
원래 88, 89師는 당연히 第30軍, 94師는 第32軍 소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들 軍은 1950년 2월 경에 이들 師를 편입시킨 것으로 보아, 1軍3師 편제가 한국전쟁 이전에도 깨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군은 서울을 재차 점령하기까지 한 4차전역(1951년 1~4월)에서 혹독한 피해를 입는다. 이후 재편이 이뤄지면서 중조연합사 체제가 자리를 잡자 인민지원군 사령부의 직할 야전군들을 1951년 2~3월에 2제파로 入朝한 第19, 3兵團을 활용해 3개 兵團(19, 3, 9) 체제로 정비한다. 이미 4차전역까지 치루면서 거의 녹아버린 38, 42, 50, 66軍이 물러나고, 유명한 第19兵團에 第63, 64, 65軍이, 第3兵團에 第12, 15, 60軍이, 第9兵團에 第20, 26, 27, 39, 40軍이 배속된다. 2차전역 당시 4개 師를 거느렸던 20, 26, 27軍은 다시 꿔온 1개 師들을 떨어내고 실용의 본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면 실용을 거스른 부대는 第3兵團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 第3兵團 예하
- 第12軍: 第31, 34, 35師
- 第15軍: 第29, 44, 45師
- 第60軍: 第179, 180, 181師
연이은 단대호의 사단을 배속받은 60軍도 원래 61軍 소속이어야 할 181師를 배속받아 사실은 실용에서 비껴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항미원조전쟁사』 2권(p.249)에는 이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3兵團의 편성과 관련이 있다. 원래 第3兵團은 같은 단대호를 가진 부대가 第2野戰軍 예하로 있었으나, 한국전쟁에 투입된 第3兵團은 (대만 공격을 준비하던) 서남군구 소속 부대들로 새로 편성된 병단이었다. 12軍은 기존의 3兵團에서, 15軍은 4兵團에서, 60軍은 18兵團에서 차출했고, 각 병단별로 최대한 전투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몇 가지 수단이 강구되었다. 그 중 하나가 역시 18兵團 소속이던 61軍이 병력을 긁어 모아 1개 師(181)를 60軍에 증원한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도 비슷한데, 역시 入朝하는 부대의 전투력을 끌어 올리기 위한 軍간 조정이 있었다. 1950년 11월 1일 중국 중앙군위는 6개 軍(12, 15, 60, 10, 11, 16)의 투입을 결정하는데, 11월 7일에 서남국 제1서기였던 덩샤오핑이 여러 문제를 들어 우선 3개 軍만을 파병할 것을 상신한다. 아무래도 이들 軍은 국공내전 최후기까지 격전을 벌인 부대들이어서 한국전쟁까지도 그 여파가 심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동원대상으로 지정된 다른 軍의 師를 入朝하는 軍에 충원하는 조치가 이뤄졌다. 위의 12軍이 충원받은 31師는 11軍, 15軍이 충원받은 29師가 10軍이 원래 소속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36師나 43師는 어디로 간 것일까? 43師는 15軍 위수구역이던 운남군구의 방위를 위해 잔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36師는 자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병력이 부족한 34師의 102團(연대)으로 편입되었다가, 전후에 다시 재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1953년까지의 전투서열에서는 몇 가지 실용에 위배되는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크게 언급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1951년 중반 5차전역까지가 대 격전이었고, 이후로는 휴전협상과 진지전 단계로 넘어가면서 그나마 건제를 유지한 채 충원이 가능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간 중화의 기묘한 실용정신이 한국전쟁까지 상당 부분 유지되는 가운데서도, 국공내전에 연이은 한국전쟁의 극심한 피해로 원칙이 무너지는 일도 종종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각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부대들이 아득바득 군축 과정에서 살아남음으로써 결국 실용은 역사 앞에서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중국인민해방군에 남은 집단군들 상당수1가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軍이니 말이다.
- 현재 중국군의 군구 및 집단군 현황은 국방일보 기사 참조 → 중국의 집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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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본문과는 별 관련이 없지만 제가 가진 "육군종합학교"에 나온 어떤 졸업생(한섭규, 26기)의 회고담을 보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싸웠던 중공군 중 27군과 38군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한 이야기를 하면서 감회를 털어놓고 있더군요. 애초에 시위대를 소극적으로 진압하던 38군은 52년 10월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한국군 9사단에게 괴멸당했었고, 38군과 교체되어 투입되자마자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가한 27군은 현리 전투에서 우리 3군단에게 대타격을 주었던 중공군 최강부대였다...고 말입니다.
그 현리전투에서 오마치 고개를 차단한게 27군 81사 242단 병력이었죠. 오늘날 81사는 1996년 중국군의 개편 과정에서 무장경찰로 편입되어 武警機動師(8630부대: 무경제81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은 79, 80사는 자동차화보병여단(이른바 마보려)으로 개편되었고요.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니겠습니다만 천안문사태에서 한몫을 한 것도 무장경찰로 전환된 요인 중 하나가 아닐런지??
트랙백을 넣었는데 뜨지는 않는군요;;;; 할로스캔으로 트랙백을 넣으면 이글루 같은 국내 블로그 서비스에는 잘 들어가는데 개인 블로그들은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번 트랙백을 보냈는데 번번이 실패한걸 보면 이 텍스트큐브는 할로스캔과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3주 전쯤에 TNC 관계자들과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고쳐달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