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의 격전 고비고비 뒤끝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의 현장이 여럿 있었다.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양측의 결연한 자세가 때로는 인간의 나약함을 초월하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죄 없는 이들의 끔찍하면서도 불필요한 희생을 낳았다. 필자가 집중적으로 살펴본 바 있는 느시사냥(Trappenjagd) 작전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오늘은 이 작전의 뒤끝에서 1만 명이 넘는 패잔병과 피난민들이 어두컴컴한 채석장 동굴에 갇혀 170일 동안 저항하다 옥쇄한 아지무시카이 채석장(Аджимушкайские каменоломни)의 비극을 간략히 정리해볼까 한다.

아지무시카이는 케르치(Керчь)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져 있는 곳으로, 1830년 경부터 석회암 채석장으로 활용되어왔다. 구글 어스에서 살펴본 위치는 아래와 같다.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케르치와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위성사진 (구글 어스에서 캡쳐하여 표시)

석회암은 일부 노지에서도 채석하지만, 질 좋은 돌을 얻기 위해 주로 내부로 파고들어가 절개하게된다. 느시사냥 작전이 벌어진 1942년에 이르면 이미 이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내에는 1세기 동안의 채석에 의해 수많은 갱도와 공동(空洞)이 생겨 있었다. 후일 이오지마(硫黃島)의 일본군이나,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越共) 측이 만든 복층의 지하 진지 네트워크와 유사한 환경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P. M. Yagunov

P. M. 야구노프 대령

다른 글에서 살펴본 대로 느시사냥 작전이 독일군의 승리로 급속히 기울면서 1942년 5월 16일에 케르치마저 함락되었다. 소련 크림 전선군은 잔존 병력을 타만 반도로 퇴각시키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퇴각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당시 크림 전선군 부 참모장이었던 파벨 막시모비치 야구노프(Павел Максимович Ягунов) 대령에게 후비대를 조직해 결사 항전할 것을 명령했다. 야구노프는 퇴각 중이던 부대들을 정지시키고 이들을 긁어모아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을 근거지로 방어를 조직했다. 당시 여기에는 제83 해군보병여단(бригады морской пехоты), 제95 국경수비대(NKVD 소속), 야로슬라블 항공학교, 보로네시 무선통신 특수병학교 등의 다양한 부대 잔존병력이 끼어 있었으며, 피난민들 또한 섞여 있었다. 필자도 현장을 답사해본 것이 아니어서 상세한 밑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으나, 이곳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지하 구조는 크게는 2군데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이중 큰 쪽에는 야구노프 대령을 위시하여 파라힌(И. П. Парахин) 상급 대대 정치위원(중령급), 부르민(Г. М. Бурмин) 중령의 지휘 하에 1만여 명이 들어갔고, 작은 쪽에는 예르마코프(А. С. Ермаков) 중령, 포바즈니(М. Г. Поважный) 중위, 카르페힌(М. Н. Карпехин) 대대 정치위원(소령급)의 지휘 하에 3천여 명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은 이오지마나 베트남의 지하 진지들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애초부터 군사 시설로 기획되고 체계화된 설비가 갖춰진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에는 장기간 농성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 탄약이 있을리 만무했고, 발전 설비가 없으니 조명은 초나 횃불에 의지해야하는 실정이었다. 특히 물 부족이 이들을 괴롭혔다. 채석장 내에는 일체의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1만 3천여 명의 식수난은 이루 말하기 힘든 노릇이었음이 분명하다. 민간인들 가운데서도 특히 쉽게 탈수증세를 보였을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죽었으리라는 것도 눈에 선하다.

독일군(및 루마니아군) 또한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에 갇힌 농성군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이들의 공략에 나섰다. 독일군 측에서는 농성 규모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것 같으나, 거듭된 요구에도 굴복하지 않자 레닌그라드에서 그랬듯이 고사(枯死) 작전에 돌입했다. 이후 부족한 물과 식량을 구하고 포위망을 풀기 위한 내부 농성자들의 처절한 야습 작전과 이를 봉쇄하려는 독일군 및 루마니아군 사이의 접전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구노프 자신도 7월 8~9일 밤에 있었던 야습 과정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내부의 모습은 매우 참혹했을 것이다. 식수난을 해결하고자 내부에서도 폭약을 터뜨리며 우물을 굴착하여 성공한 사례가 있었다고는 하나, 석회암 층에서 나온 물이니 식수로는 매우 질이 나빴을 것이다. 물도, 식량도, 빛도 없는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나날이 죽어가는 시신들은 깊숙한 동혈 내부에 차곡차곡 쌓고, 가득차면 동혈 벽을 무너뜨려 매장을 했다고 하는데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독일군은 6월에 접어들자 이 지루한 공방을 끝내기 위해 외부로 노출된 출입구들을 하나하나 폭파하여 차단하기 시작했다. 소련 측에서는 대량의 최루가스 및 살상용 독가스를 주입했다고 하나, 어느 수준으로 독가스가 쓰였는지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소련 측의 전후 탐사 과정에서 독일군의 가스탄 파편이 채취되었다는 보고도 있으나,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얻은 파편이어서 명확한 성분 분석 등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흔히 독일군이 동부전선의 비정규전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간접적인 실마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경우 또한 그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고사 작전을 펼친 뒤에도 독일군은 결국 1942년 10월 30일(!)에야 진입에 성공했다. 170일 동안의 처절한 농성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사람은 불과 4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살아남아 케르치 인근에 거주하며, 매년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일(5월 9일)마다 작은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기념물

농성 40주년을 맞아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http://sevdig.sevastopol.ws/gal/gal_adg/gal_adg.html)

그러나 전후에도 이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비극은 제대로 밝혀지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스탈린 시대에는 대조국전쟁사에 대한 윤색이 심했으니, 이런 비극이 액면 그대로 전해질 리가 만무했다. 또한 독일군의 진압과 소련군의 저항 과정에서 많은 동혈이 폭파되고 묻혀버렸으며, 내부가 워낙 미로 같아서 정작 과학적인 진상 조사는 1960년대에나 이뤄질 수 있었다. 결국 1960년대 초에 이뤄진 집중적인 조사로 인해 주요 시설이 밝혀졌고, 그에 따라 1966년 1월에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이후 1970~80년대 까지 이어진 조사에서 약 323개의 지하 동혈이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채 석회암 더미에 묻혀 있는 곳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밋밋한 사건의 기술로 글을 끝맺기 전에, 필자의 감상을 조금 덧붙이자. 필자가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보던 중에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아래 사진을 봤을 때였다:

아이들의 방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중 '아이들의 구획' 사진 (http://fire-of-war.ru/adzhimushkay-foto.htm)

이 곳은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동혈들 가운데 아이들이 기거하던 구획이었다고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깜깜한 이 공간에 갇혀 신음하다 죽어갔을 어린 영혼들의 존재를 단순히 수백만의 전쟁 희생자 가운데 일부였다고 넘어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후세 사람들이 쌓아놓은 인형들이 그 아이들의 품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헛된 상상을 해보아도 잔인한 여운이 남을 따름이다.

아마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진실은 저 위 사진의 기념 부조에 새겨진 것처럼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NKVD 등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무장된 병력의 위협으로 채석장에 갇힌 애꿎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저 안에서 살기 위에서 발버둥치며 탈출을 모색하다가 처형당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오늘날의 현실에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2차 세계대전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여러 번 곱씹어보고 넘어가야하는 화두가 아닌가 다시금 생각이 든다.

2007/03/31 19:52 2007/03/3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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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민혁 2007/04/05 0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케르치-페오도샤 지구 전투의 막후에서 저런 일이 있었다...는 부분은 이 글 보고 처음 알았는데, 마침 해당 시대의 해당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후배가 있어서 참고할 만하다는 생각에 이 글을 읽게 했습니다. 저하고 마찬가지로 화학전 의혹 같은 부분에서 꽤 분노(그런 탓에, 저나 제 후배가 감정적으로 곡해해 볼 가능성이 적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했는데, 그 후배가 맨 마지막의 한 문장이 어쩐지 꺼림칙하게 걸린다고 제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NKVD 등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무장된 병력의 위협으로 채석장에 갇힌 애꿎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라는 부분에 대해서 그 후배의 느낌은 대충 이랬답니다.

    "어차피 나가도 나치에게 당할 일은 거의 같은 일이었잖아요."

    뭐, 농성 중 옥쇄하는 것에 비해서는 사망율의 차원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도 있을 수 있긴 합니다만... (대략 2만 명 미만이던가요? 점령기간 2년여 동안 독일군에게 처형된 현지 주민 숫자가...) 뭐라 말할 건 아니지만, 왠지 꺼림칙한 느낌을 주더라는 거죠. 그 후배가 저 이상으로 확실한 반 나치여서 그런 건 있겠습니다만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싶어서 약간 꺼림칙해졌습니다. -_-; 그렇다고 그게 문제라고 얘기하기엔 스탈린 체제 편드는 것 같아 더 꺼림칙하고요.

    하여튼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승병님 글에서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있는 입장에서 도움은 못 드릴망정 오히려 이렇게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무지 죄송하네요. -_-;

    • Periskop 홈지기 2007/04/06 16: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좋은 의견이고 저 또한 스스로에게 그런 반문을 많이 던져본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선택의 문제는 이미 엎어진 과거일 따름이고,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문제이니 우리가 시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겁니다. 다만 저는 상대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를 불러 일으키며 국민들을 사지로 끌어들이는 체제의 작동기제에 탄식할 따름입니다. 저는 당시 저 많은 사람이 그 절박한 환경으로 들어간 데에는 이미 1942년 초에 소련이 한 번 케르치 반도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주입시켰을 공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이거든요. 그러한 과정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자꾸 던짐으로써 우리 사회에도 만연하는 '공포 주입'의 악습을 떨쳐 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썼다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 윤민혁 2007/04/06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입장표명 감사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고, 거기에다가 주민들에게 공포를 주입한 건 소련군만이 아니라 독일군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 정도니까요. (41년 11월에서 12월까지의 짧은 1차 점령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까지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공포 주입에 대한 생각은 저도 동감입니다. 공포와 증오 두 가지에 의존하는 체제 및 시스템 유지는 정말 떨쳐버려야 할 악습인데, 아직도 그런 경향이 강한 곳에 살고 있다 보니 가끔은 등골이 오싹할 때가 있죠.

  3. shrike 2007/06/09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어기 바다건너 대국들은 안그렇던가요...
    사람사는데가 거의 비슷하죠. 이라크 전쟁만 해도 얼마나 무모하게 벌인 일인지 그 과정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에도 역시 별 수 없구나 싶어지죠.

    개인적인 생각일런지 모르지만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인과 여타 지식인들이 벌이는 주도권다툼을 보며 긁적거린게 있는데.. 관심있으시면 한번 보세요. 스타워즈 이야기입니다.

    http://blog.naver.com/beebeam/20013350222


    얼마전 구글회장이 서울에 와서 노골적으로 정치인과 이라크전을 언급하며 까댄것 보면 그런 흐름이 미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도 참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이런 옛날역사를 아는 사람들이 다시 현재의 역사에 관여하고 있는것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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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의 배경과 독소 양측의 준비

느시사냥 작전의 배경

1941/42년 겨울의 치열한 혼전이 끝나갈 무렵, 새로운 봄이 도래하자 독일과 소련은 양측 모두 전년도의 충격에서 벗어나 새롭게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날릴 준비에 절치부심하게 된다. 독일의 경우 특히나 1941년 중에 마무리지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전쟁이 1942년까지 이르게 된 것에 커다란 실망을 하고 있었다. 독일이 소련에 침공하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단기간 내에 소련전역을 마무리 짓고 이곳에서 풀려난 역량을 영국-미국측에 집중한다는 계획을 깔고 있었던 것인데, 이 1차 목표가 무산되자 1942년 봄부터 영국-미국이 서유럽 배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징후는 1942년 3월 총통지령 40호 등을 통해 해안지구의 방어태세 강화를 촉구한 것에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42년 하계공세를 통해 소련을 확실히 붕괴시키는 것이 독일의 당면한 최우선과제였으며,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이제 그 새로운 드라이브의 시발점을 선택해야 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하계공세의 전 단계로서 1942년 봄 독일군의 공세는 케르치 반도(Керченский полуостров)와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의 소탕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히틀러는 앞서 언급한 총통지령 40호의 발령과 동시에 OKH에게 이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다.

Fedor von Bock

F. v. 보크 원수

Erich von Manstein

E. v. 만슈타인 상급대장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Козлов

D. T. 코즐로프 중장

그렇다면 어떠한 순서와 전략을 가지고 이 케르치 반도와 세바스토폴 소탕전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 우선 제 11 군이 케르치 반도부터 공략해야 할 것인가, 세바스토폴부터 공략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남부집단군 총사령관 폰 보크(Fedor von Bock) 원수는 이에 대해 세바스토폴을 먼저 쳐야 한다는 견해였고, 제 11 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상급대장은 케르치 반도를 먼저 석권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이에 따라 1942년 3월 31일, 폰 만슈타인은 새로운 작전명 "Trappenjagd(느시사냥)"인 케르치 반도 탈환작전 준비를 명령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케르치 반도 공략에 임하는 독일군 제11군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케르치 반도 입구의 단 20km 남짓한 전선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독일-소련 양 군 사이의 전력차가 매우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글에서 상술한 바대로 1941/42년 겨울의 케르치 반도 공방전을 통해 증원되어 있던 드미트리 코즐로프(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Козлов) 중장 예하 소련 크림 전선군은 독일군 정보망이 파악하기로는 케르치 반도에만 3개 소총군(제44, 47, 51군)에 17개 소총사단, 2개 기병사단, 3개 독립소총여단, 4개 전차여단으로, 총 병력 30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반해 독일군 제11군은 독일군으로는 1개 기갑사단(제22 기갑사단), 4개 보병사단(제46, 50, 132, 170 보병사단), 1개 경보병사단(제28 경보병사단)에 루마니아군 2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까지 총 9개 사단 15만 명 정도만이 투입 가능하여 병력에 있어 1:2의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야포 및 박격포도 소련군 4653문인데 반해 독일군 2472문으로 1:1.8의 열세, 전차 또한 소련군 213대에 독일군 180대로 1:1.2의 열세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상황이 나빴던 점은 이러한 우세한 적이 극히 좁은 정면에 촘촘하게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겨울의 혼전으로 파르파치 지협(Парпачский перешеек)에 형성된 전선은 고작 20km 정도에 불과하여 소련군은 우세한 전력을 깊은 종심에 걸쳐 배치할 수 있었다. 거기에 소련군은 심혈을 기울인 야전축성을 통해 길쭉한 케르치 반도 전체에 걸쳐 3개의 견고한 저지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The Reconquest of Kerch'

1942년 5월 8~19일에 벌어진 케르치 탈환작전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전선 바로 직후방에는 파르파치 지협을 가로지르는 파르파치 야전방어선이 있었고, 거기서 다시 약 15km 후방에 나시르 저지선이 있었으며, 케르치 반도 한 가운데를 따라서는 술타놉카(Султановка) 방어선이 있었다. 파르파치 야전방어선은 소련군이 1941년 파르파치 지협에 다다른 이후에 대대적으로 정비한 대전차참호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대전 초기 소련이 축성한 대전차참호선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자연지형에 기대어 폭이 20~30m, 깊이 5m 이상으로 파는 것이 보통인데다 돌파 취약지점에는 콘크리트로 보강공사를 하여 단시간 내 돌파가 매우 어려웠다. 파르파치 방어선에 대한 사진은 아니지만 그 규모와 돌파의 어려움은 아래 Wiking 사단 소속의 3호전차가 공병이 개척한 통로를 따라 참호를 넘는 사진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Pz.Kpfw. III

소련의 대전차참호선을 돌파하는 Wiking 사단 소속의 3호전차

술타놉카 방어선은 이미 역사적으로 러시아 초기 역사 때부터 존재해오던 이른바 "터키 장벽(Турецкий Вал)"에 걸쳐 이를 보강-확장시킨 방어선이었다. 상대적으로 허술하게 구축된 나시르 저지선에 비해 이들 파르파치 야전방어선과 술타놉카 방어선은 독일군이 추구하는 신속한 돌파 작전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들 방어선에서 장시간 고착되지 않고 최단시간 내에 성공적인 돌파를 이뤄내는 것만이 이 느시사냥 작전의 성공의 열쇠였다.

느시사냥 작전의 기획

원래 남부집단군 사령관 폰 보크 원수는 작전 실행이 결정된 이후, 지체없이 총력을 몰아 케르치 반도를 소탕하기 바랬으며, 제11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에게 소련군이 더욱 더 증원되기 전에 4월 중으로 공격을 개시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폰 만슈타인은 우선 이러한 불리한 전력과 지형적인 문제를 떠안고서 성급히 작전을 결행할 경우 실패의 위험성이 극도로 높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두 가지 요소의 보강을 기획하게 된다. 그 하나는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공격작전술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병력의 열세를 메꿀 수 있는 강력한 화력지원이었다.

우선 기습을 달성하기 위해 폰 만슈타인은 가능한 초기 주공축에 대한 선정에 있어 주의를 기울였다. 단 20여 km 밖에 안되는 좁은 정면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적기는 하였으나 현실성 있는 대안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아래 그림에서 보는 1번 공격축으로, 이 안에 의하면 독일군은 카이-아산(Кай-Асан) 북쪽에 돌출되어 있는 소련군 제51군과 제47군의 목을 따는 방식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들 양 야전군이 파르파치 야전방어선 후방으로 퇴각하기 이전에 방어선 서쪽에서 고착-섬멸하고, 이 탄력으로 방어선 동쪽으로 진출, 케르치로 내달린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방안은, 아래 그림의 2번 공격축과 같이 반대로 제44군이 수비하는 최남단 전선을 노려 이곳에서 단시간 내에 파르파치 야전방어선을 돌파하고 소련군 배후로 크게 진출, 3개 야전군 전체를 고착-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Operation Trappenjagd

폰 만슈타인이 고려한 느시사냥 작전안 비교

1번 안의 장점은 당장 열세인 독일군 입장에서 초기 공격 목표를 파르파치 방어선 서쪽 돌출부로 한정함으로서 보다 용이하게 1차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1번 안의 심각한 문제점은 이러한 사실을 소련 크림 전선군 또한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코즐로프는 독일군이 다음 공세로 전환한다면 카이-아산 북쪽의 돌출부 절단에 우선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이곳에 제51군과 제47군의 주력을 종심 깊게 배비하고 있었다. 계속된 정찰활동으로 소련군 주력이 북쪽 돌출부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한 폰 만슈타인으로서는 기습 요소의 달성이 어려운 1번 공격축을 택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반면 2번 공격축은 보다 크게 적의 배후로 치고 들어가는 기동이니만큼 단시간 내에 파르파치 야전방어선 배후로 독일군 주력을 진출시키는 것이 성공의 핵심요소였다. 동시에 북쪽 전선에 포진한 소련군 주력이 단시간 내에 남쪽으로 전환되는 것을 지연시켜야만 하는, 위험 요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1942년 4월 16일,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은 새로운 공격안에 대해 히틀러에게 브리핑을 하게 되었다. 이날 회동에 대해 독일국방군 총사령부 전사국(Krigesgeschichtlichen Abteilung des OKW)의 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Der OB. der 11. Armee, Generaloberst v. Manstein, hält abends dem Führer persönlich Vortrag über den geplanten Angriff auf der Halbinsel Kertsch. Der Angriff soll auf den 5.5. vershoben und mit dem Schwerpunkt auf dem Südflügel geführt werden, um durch ein späteres Einschwenken nach Norden die starke feindliche Nordgruppe einzukesseln. Der Führer befehlt eine stärkere Unterstützung des Angriffs durch die Luftwaffe und wird die Verstärkung der Luftstreitkräfte selbst veranlassen.

[ 제11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은 오후에 총통과 개별 면담하여 케르치 반도 공격 계획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공격은 5월 5일에 남익을 주공점으로 하여 개시될 예정이며, 이어 북으로 방향을 틀어 적의 강력한 북쪽 집단을 포위-섬멸할 것이다. 총통은 공군을 동원해 공격지원을 더욱 강화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공군전력을 증원하기로 결정되었다. ]

결국 히틀러와의 협의 끝에 느시사냥의 성패를 결정지을 강력한 화력지원 임무는 공군이 떠맡게 되었으며, 뒤이어 히틀러는 공군 총사령부(OKL)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군 최고의 지상지원 항공부대인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 상급대장의 제8 항공군단(Fligerkorps Ⅷ)을 느시사냥 작전에 투입할 것을 명령한다. 이로서 느시사냥 작전은 강력한 탄력을 받고 본격적인 개전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독일 공군의 느시사냥 작전 준비 지연과 배치

4월 중순이 넘어 급박하게 제8 항공군단의 크림 반도로의 투입이 결정되자, 이 항공군단의 예하 부대들은 남부 러시아 곳곳의 기지를 떠나 크림 반도의 새로운 기지들을 정비하고 이동하느라 매우 분주하게 움직였다. 원래 이 제8 항공군단은 독일군이 1942년 하계공세 지원의 주력으로 써먹기 위해 겨우내 심혈을 기울여 재정비해온 부대였다. 1941년 바바롯사 작전에서 중부집단군 지원임무에 피폐해진 전력을 1942년 4월에 독일 본국 등 후방으로 이동시켜 다시 끌어올리고 있던 차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되자 급거 다시 이동배치하는 임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4 항공군(Luftflotte 4)의 준비상황 미흡으로 제8 항공군단 전력의 집결이 자꾸 지연되었다. 이에 제8 항공군단 사령관 폰 리히트호펜 상급대장은 제4 항공군 사령관 뢰어(Alexander Löhr) 상급대장에게 크게 불평을 털어놓게 되었다. 애초에 공격 개시일이 5월 5일로 잡혀 있었으나, 정작 5월 2일까지도 슐레지엔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전투기 전대(Jagd-Gruppe)와 1개 대지공격 비행단(Schlacht-Geschwader)이 궂은 날씨 때문에 도착하지 못하는 등 제 시간에 맞춰 항공부대가 집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폰 리히트호펜은 이날 폰 만슈타인과 협의하여 작전 개시를 5월 7일로 2일 연기하였다. 뒤이어 5월 4일에는 전선에 가까운 전방 항공기지들에 대한 소련 공군의 연이은 폭격으로 전투기 부대들의 준비가 늦어지게 되어 다시 작전 개시를 5월 8일로 하루 연기하게 된다. 폰 만슈타인으로서도 작전이 계속 연기되는 상황이 불안하기는 하였으나 작전 성공에 있어 공군의 강력한 화력지원은 최우선 조건이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5월 5일, 다시 한번 예정되어 있던 전투기 전대들의 도착이 지연되자 폰 리히트호펜은 작전 개시를 더 늦출 것을 고려하지만, 이번에는 일기예보상 5월 8일의 날씨가 가장 작전 개시에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그대로 5월 8일이 공격개시일로 확정된다. 이어 도착이 지연되었던 부대들도 속속 크림 반도의 비행장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결국 독일군은 느시사냥 작전을 위해 제8 항공군단 예하에 다음과 같은 강력한 공군 전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 4개 폭격 비행단(Kampfgeschwader): KG 51, KG 55, KG 76, KG 100
  • 1개 급강하폭격 비행단(Sturzkampfgeschwader): StG 77
  • 1개 대지공격 비행단(Schlachtgeschwader): SchG 1
  • 1개 뇌격기 전대(Torpedogruppe): Ⅱ./KG 26
  • 5개 전투기 전대(Jagdgruppe): Ⅰ./JG 3, Ⅱ.,Ⅲ./JG 52, Ⅰ.,Ⅱ./JG 77
    1개 전투기 중대(Jagdstaffel): 15.(Kroat)/JG 52

작전의 원활한 지원을 위해 급강하폭격기, 대지공격기, 전투기 부대들은 대부분 크림 반도 내의 전선과 가까운 비행장들에 포진했으며, 폭격기 부대들만이 약 300km 이상 떨어진 니콜라예프(Николаев), 헤르손(Херсон) 등의 우크라이나 비행장에서 투입되었다. 이러한 제8 항공군단의 증원으로 독일군은 소련군 크림 전선군 항공부대의 176대의 전투기, 225대의 폭격기들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제8 항공군단은 이미 작전 이전에도 케르치 반도 상공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려는 노력에 즉시 착수하여 연일 소련군 크림 전선군 항공부대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기존에 이미 이곳 크림 반도에서 지상군 지원 임무를 맡고 있던 남부 항공지휘부(Fliegerführer Süd)는 소련군 흑해함대가 크림 전선군 지원 임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함대 기지와 함선들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수시로 퍼붓고 있었다. 이미 흑해함대 사령관 필립프 옥탸브리스키(Филипп Сергеевич Октябрьский) 제독은 독일 공군의 공격을 피해 세바스토폴 등에 대한 지상군 지원 임무는 야간으로 한정할 것을 주문한 상태였고, 봄이 되어 점차 낮이 길어지자 그나마의 지원 작전도 크게 축소한 상태였다.

소련군의 방어태세와 독일 지상부대들의 배치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이나 폰 리히트호펜 상급대장이나 모두 느시사냥 작전이 매우 독일군에게 힘겨운 싸움이 되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작전 준비기간에 축적한 정찰자료가 보여주는 소련군의 배치상황은 어느 곳이던 정면돌파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를 것이 분명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코즐로프 중장이 이끄는 크림 전선군의 당시 배치상황은 아래 그림과 같았다.

Obstanovka i plany storon v Krymu

1942년 5월 8일 독-소 양군의 배치상황과 작전계획

여기서 볼 수 있듯 소련군은 3선 예비대까지 배비된 상태로서 방어종심은 20km가 넘었다. 방어 최전선에는 6개 소총사단, 1개 산악소총사단이 늘어서 있었고, 북쪽 돌출부의 1선와 파르파치 야전방어선 사이에는 2개 차량화여단이 1선 예비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다시 그 후방 파르파치 야전방어선에 구축된 2선 방어에는 3개 소총사단, 1개 산악소총사단 등이 배비되어 있었으나,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가 1선 방어병력 중 최남단 전선을 일반 소총사단보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제63 산악소총사단이 맡고 있었으며, 거기에 2선 방어병력의 70% 이상에 해당하는 2개 소총사단, 1개 산악소총사단이 아크-마나이 북쪽의 방어선에 물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상대적으로 아크-마나이 남쪽의 파르파치 방어선에는 1개 소총사단과 1개 지뢰공병대대, 1개 차량화여단, 1개 독립 차량화대대 정도의 적은 전력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노린 것은 정확히 이들 남쪽 전선의 2선 방어병력이 약한 틈새를 파고 들어 이 공간을 통해 제47군과 제51군 후방으로 꺾어 북진하여 소련군 배후의 예비대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Maximilian von Fretter-Pico

M. v. 프레터-피코 포병대장

Franz Mattenklott

F. 마텐클로트 보병대장

Wolfram von Richthofen

W. v. 리히트호펜 상급대장

그래서 가용한 독일군 주력은 가용한 2개 군단 중에서 남익을 맡고 있는 프레터-피코 포병대장의 제30 군단에 집중되었다. 제30 군단에는 독일군 5개 사단 전력이 집중되었는데, 1제파 공격부대는 제28 경보병사단과 제50, 132 보병사단의 3개 사단이 맡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르파치 방어선의 거대한 대전차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해 1개 보병중대+1개 기관총소대+1개 공병소대로 구성된 공격조가 모터보트에 분승하고 은밀히 파르파치 방어선 직후방에 상륙, 협공하여 빠른 시간 내에 통로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이들 1제파 병력들이 파르파치 야전방어선에 돌파구를 만들고 통로를 개척하면, 뒤이어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제22 기갑사단과 제170 보병사단, 그리고 폰 그로덱 대령이 이끄는 임시 여단(독일군 2개 차량화 보병대대와 루마니아군 1개 차량화 보병연대로 편성)이 2제파로 후방으로 기동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제30 군단 지구에서 이러한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북익을 담당하는 마텐클로트 보병대장의 제42 군단은 예하에 제46 보병사단과 루마니아군 2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을 가지고 북측익에 몰린 소련군을 최대한 기만하여 고착시킨 후에 제30 군단의 기동부대가 후방으로 진출하면 제51군을 향한 정면공격과 추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이와 같이 독일군의 작전은 그럴듯 하였으나, 세세한 부분에서 초기에 어느 곳 하나라도 일정에 뒤쳐지며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우세한 소련군의 반격에 돈좌될 위험이 가득했다. 과연 이러한 계획이 한 치의 차질없이 진행되어 케르치 반도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모든 위협을 무릅쓰고 느시사냥 작전은 5월 7일 밤, 기습상륙공격조를 태울 보트들이 페오도시야(Феодосия) 항을 빠져나감으로서 그 막이 올랐다.

작전의 경과

T-Tag: 1942년 5월 8일 — 1제파 부대들의 교두보 장악

페오도시야 항을 빠져나간 보트들은 5월 7일 23시 경에 독일군 전선의 해안에 도달하여 기습공격조로 선발된 제132 보병사단 소속의 1개 보병중대(제436 보병연대 5중대) 병력과 지원병력으로 1개 중기관총소대+1개 공병소대 병력을 승선시켰다. 그러나 이들 제902 돌격보트지휘부(Sturmbootkommando 902) 소속의 보트들은 도강작전용으로 제작된 보트들이어서 여전히 스산한 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바다를 헤쳐나가는데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승선 도중에 인근 해역에서 초계 업무를 수행하는 소련군의 경비정이 발견되어 이들 공격조들은 배를 띄우지 못하고 해안에서 1시간 반 가량을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결국 깊은 새벽 다시금 잦아든 경계를 틈타 돌격보트들은 다시 바다로 나아갈 수 있었고, 해안선의 시계 밖에서 공격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독일군의 공격은 5월 8일 03시 15분 포병의 일제사격으로 시작되었다. 파르파치 지협을 따라 전개된 소련군 거점들에 대해 각 사단포병은 물론이고, 중포와 방사포로 무장한 독립포병부대들과 공군 소속의 중대공포들까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10분 간의 급속사격이 전개된 이후 03시 25분부터는 이미 전날 밤에 전방 거점으로 이동한 독일군 보병들의 전진이 개시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파르파치 야전방어선 서쪽에 포진한 소련군 제63 산악소총사단과 제276 소총사단의 양 사단의 신속한 분쇄였다.

이렇게 보병이 소련군 전면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제8 항공군단 소속의 투입 가능한 항공기들 또한 일제히 사전에 부여받은 소련군 지상 목표에 대한 폭격 작전에 돌입하였다. 우선 크림 전선군 소속의 항공부대 격멸을 위해 대지공격기 부대들은 전선 후방의 소련군 비행장을 강타하였다. 소련군은 1941/42년 겨울의 케르치 반도의 전투에서는 항공부대의 안전을 위해 주로 타만 반도(Таманский полуостров) 등의 기지에서 출격했는데, 전선과 기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적시에 유효한 항공지원이 이뤄지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었다. 그 결과로 1942년 봄에 크림 전선군 소속 항공부대들은 대부분 케르치 반도로 이동해와서 상당수가 고작 전선 후방 20~50km 지점인 세미소트카(Семисотка)와 아스타반(Астабань) 일대의 비행장에 전개되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조치는 독소전 개전 당시 소련 항공부대가 입었던 참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작전 개시 1~3일 전에 전방 비행장으로 이동해온 독일군의 근접지원 항공부대들이 30분도 안되어 순식간에 날아와 미명 속에서 비행장을 덮치자 별다른 엄폐시설 없이 늘어서 있던 소련군 항공기들은 상당수가 그대로 고철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도 독일군 전투기들은 소련군의 전방 비행장 주위를 선회하고 있다가 어렵사리 격파를 면한 소련군 항공기들이 이륙을 할라치면 재빨리 공격을 퍼부어댔다. 그 결과 소련군 전투기 부대는 5월 8일 작전 첫 날 산발적인 저항 이외에 조직적인 작전이라고는 제36 전투 항공연대 소속 8대의 I-16 전투기가 마르포프카 비행장에서 출격한 I-153 대지공격기들을 엄호하는 정도밖에 펼칠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내에 소련군 항공부대의 무력화가 달성됨과 동시에 급강하폭격기들과 수평폭격기들이 전선 직후방에 전개된 소련군의 포병진지와 특화점들에 대한 공격에 가열차게 나서면서 소련군 진영은 커다란 혼란에 빠져들었다. 뒤이어 새벽 04시에는 해안가를 통해 파르파치 야전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려는 제132 보병사단의 작전이 개시되었다. 제132 보병사단 소속 보병부대들이 바로 해안가를 따라 소련군의 취약한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전차참호선 자락에 도달하면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습상륙공격조들에게 무전을 때리게 되고, 뒤이어 이들 보트들은 대전차참호선 대안으로 기습상륙하여 대전차참호선 양안에서 소련군을 협격, 대안 교두보와 연결통로를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해안을 따라 달린 카미시(Дальн Камыши) 동쪽으로 구축된 철조망과 지뢰밭을 독일군이 돌파해나감과 동시에 04시 40분에 바다에서 대기중인 기습상륙조에게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이들 보트들이 해안에 접근함과 동시에 소련군 또한 해안에서 야포와 소화기로 응사를 했으나, 이미 상공을 장악한 독일군 전투기들의 위협사격으로 효력사를 날리기는 어려웠다. 기습상륙공격조들은 접안이 이뤄질 때까지 11척의 돌격보트를 잃었으나 중화기에 당한 것은 아니어서 인명손실은 불과 1명 사망, 3명 부상에 그친 채 대부분의 병력이 성공리에 상륙했다. 이들이 참호선 후방의 소련군을 소탕하는 사이에 전면 해안을 달려온 제132 보병사단 본대 전력이 대전차참호선에 돌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작전 개시 2시간 만인 06시에 제132 보병사단 선봉은 대전차참호선 전면돌파에 성공했다.

Wilhelm von Apell

W. v. 아펠 소장

Karl-Albrecht von Groddeck

K.-A. v. 그로덱 대령

Johann Sinnhuber

J. 진후버 중장

그 바로 북쪽 전선에서 기동하던 요한 진후버(Johann Sinnhuber) 중장의 제28 경보병사단 또한 의외의 전진을 이뤄냈다. 돌파의 초점은 최남단 전선의 제132 보병사단에서 이뤄내고 점차로 돌파구역을 확대할 예정이었으나, 불과 07시 무렵에 제28 경보병사단 소속 부대들도 돌격포들의 지원 속에 야전방호선의 대전차참호선에 도달함으로서, 첫 포격이 떨어진지 단 4시간 만에 소련군 제63 산악소총사단의 방어진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다.

다만 제28 경보병사단 북측 전선에서의 돌파를 맡고 있던 제50 보병사단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이 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소련군 제276 소총사단과 후위의 포병진지들에 대해 사전에 기획된 대포병사격은 담당구역의 방사포(네벨베르퍼)들의 점화기구 고장으로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카이-아산 일대에 엄폐진지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던 소련군 전차부대들의 반격과 깊은 지뢰원에 말리면서 힘겨운 전투가 오전 내내 이어졌다. 이들은 새벽의 1차 타격 이후 재급유와 재무장 후에 다시 일제히 투입된 독일공군 폭격기들의 재차 가열찬 지상지원이 이뤄지면서 공격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The Advance of German Army on 8th May 1942

1942년 5월 8일, 작전 개시 첫날 독일군의 진격. 전선 후방의 소련군 포병들이 대부분 조기에 무력화되면서 소련군의 조직적인 방어가 무위로 돌아갔다.

이러한 오전 작전의 성공에 고무된 제30 군단 사령관 프레터-피코 포병대장은 12시를 기해 오후 느즈막히 언제건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를 조직화하는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당시 제28 경보병사단과 제132 보병사단이 장악한 파르파치 야전방어선 동쪽의 교두보는 소련군 2선 및 3선 예비대가 정비하여 대규모로 역습을 가해올 위험이 농후했으므로 오후내 예상되는 역습을 받아치고 교두보를 확대하려면 유효한 예비전력의 축적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카이-아산 북쪽에 배치된 소련군 주력은 물론이고 남쪽 전선의 3선 예비대로 대기 중이던 소련군 제157 및 404 소총사단마저 제대로 역습을 시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계속 밀려나기만 했다. 강력한 독일공군과 포병의 화력지원 앞에 미숙한 소련군 보병의 반격은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크림 전선군 지휘부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정확한 주공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북쪽 전선의 예비대를 남쪽으로 적극적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 결과 독일군 제132 보병사단은 밤새 교두보 확장에 나서 5월 8일 밤에 이르면 대략 대전차참호선 동쪽에 10km에 이르는 종심을 확보하게 되었다.

작전 1일차에 소련군의 심각한 저항 없이 독일군이 유효한 종심을 확보할 수 있던 데에는 제8 항공군단이 이날만도 2100소티 이상의 지원을 퍼붓는 등 후방의 소련군 거점타격과 기동방해에 독일군의 화력지원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 바가 컸다. 이렇게 1942년 수 차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 항공화력지원은 독일 지상군과 공군의 전성시대를 뚜렷이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T+1: 1942년 5월 9일 — 2제파 기동부대들의 투입

제30 군단 사령관 프레터-피코 포병대장은 간밤에 확보한 교두보로 이제 공격 2제파 부대들을 밀어넣을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 밤중에 제22 기갑사단의 전진을 명령하였다. 제22 기갑사단이야 말로 포위섬멸전 수행의 중추 사단으로서 소련군 배후의 예비대를 모두 밀어내고 북쪽으로 기동할 선봉 타격부대 역할을 해야 했으므로 얼마나 이 사단이 신속하게 발진하느냐가 작전 성패에 있어 최대의 관건이었다. 빌헬름 폰 아펠(Wilhelm von Apell) 소장이 이끄는 제22 기갑사단은 집결지를 출발하여 파르파치 대전차참호선으로 이동하였으며, 동시에 프레터-피코 포병대장은 또 다른 중요한 기동집단으로 야전군 예비로 대기중인 폰 그로덱 여단의 투입을 제11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순조롭게 보이던 독일군의 진격도 막상 2제파 기동부대를 투입하려고 하자 거대한 규모로 축조된 대전차참호선이 골치를 썩였다. 5월 8일 1제파로 투입되었던 보병부대야 참호선 바닥으로 뛰어들어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서 전방으로 밀고 나갔지만, 대규모 중화기와 장갑차량들이 지나가는 통로 개척에는 상당한 수고가 따랐다. 작전 초기부터 공병들이 대거 달라붙어 참호선 경사벽을 폭약으로 무너뜨리고 통나무 등을 깔아 진격로를 열고자 무던히 애를 썼으나, 노반이 제대로 다져지지 않아서 도저히 전차가 지나갈만한 상태가 되지 못했다.

한시가 아까운 시간인 5월 9일 오전 내내 독일군 제22 기갑사단이 교두보로 진출하지 못하고 대전차 참호선 앞에 대기하면서 통로가 개척되기만 멍하니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으니, 프레터-피코 포병대장은 더 이상 작전을 지체하다가는 소련군이 애써 마련한 돌파구를 봉쇄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며,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폰 그로덱 여단부터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대충 다져놓은 통로를 통해 이 여단이 신속히 전진하여 동측 교두보에서 집결이 완료되는대로 공격에 돌입할 것을 명령하였다.

여기서 이 폰 그로덱 여단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넘어가면, 이 여단은 2제파 기동부대의 주요 전투력이었지만 동측으로 발진 이후 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소련군 제47군과 제51군 후방을 차단하기로 한 제22 기갑사단과는 사뭇 다른 임무를 띄고 있었다. 제22 기갑사단이 예하 전차전력과 지원 보병부대들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포위섬멸전에 돌입할 예정인데 반하여 이 여단은 이 임무에 동원되지 않고 곧바로 동진하여 케르치 반도를 가로질러 동쪽 끝 케르치까지 내달릴 작정이었다. 여단의 구성 자체가 중화기 위주라기 보다는 차량화된 보병부대와 균형잡힌 기동지원화력으로 편성되어, 최고의 속도로 전진하면서 적이 후위의 술타놉카 방어선에서 재정비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케르치 일대를 미리 장악하여 크림 전선군이 타만 반도로 후퇴하는 것까지 저지할 선견대였다.

폴란드 전역 개전 당시부터 대령으로서 다년간 여러 연대장을 역임한 잔뼈굵은 칼-알브레히트 폰 그로덱(Karl-Albrecht von Groddeck) 대령 예하에 여단 전력으로는 제3 루마니아 차량화 기병여단, 제401 (임시 차량화) 보병연대, 제391 보병연대 1대대, 제105 보병연대 1대대 등 2개 보병연대 및 2개 보병대대가 주축이었다. 여기에 제223 전차대대, 제22 차량화수색대대, 제154 차량화포병대대, 제560 차량화대전차대대 등등 여러 기갑-포병-공병-수색부대들이 지원부대로 배속되어 있었다. (보다 상세한 전투서열은 별도의 전투서열 정보 글에 올려놓도록 하겠다.)

마침내 정오 무렵 제132 보병사단이 확보한 교두보로부터 폰 그로덱 여단은 최고 속도로 케르치를 향한 동진을 개시하였으며, 맹렬한 속도로 불과 4시간 여 만에 소련군의 나시르 저지선을 돌파하였다. 이로서 소련군 제44군 배후의 3선 예비대들은 독일군 주력을 봉쇄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폰 그로덱 여단은 소련군 배후의 사실상 무인지대에 돌입하였다. 나시르 저지선 후위에 이 여단을 포착하여 저지할만한 소련군 기동예비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폰 그로덱 여단에 뒤이어 오후에 들어서자 제22 기갑사단을 위한 통로 개척도 완료되어 이 사단 예하 전차를 위시한 중화기들도 대전차참호선 동쪽의 발진위치로 진출할 수 있었다. 제22 기갑사단의 전진과 동시에 전날 진출한 제28 경보병사단 소속 엽병연대들 또한 북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들의 북으로 향한 기동은 16시에 이르러 개시되었는데, 처음 제22 기갑사단을 가로막은 소련군 전차여단의 반격은 큰 어려움 없이 격퇴되었으나 여기서 이들 공격부대들은 예상치 못했던 장애에 또 한번 봉착했다. 아르마-옐리(Арма-Эли) 일대에서 북으로 돌파해나가기 위해서는 일련의 야트막한 고지선을 넘어 진출해야 하는데, 오후에 갑자기 이 지역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대지가 진창으로 변해 도저히 진격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일부 기동예비가 분쇄되고 혼란 상태에 빠진 소련군 상황에서 만약 이 비가 오지 않았다면 제22 기갑사단 소속 전차들은 계속 진격하여 그날 밤 중으로 아조프 해안에 도달, 소련군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을텐데 커다란 성공의 기회가 빠져나갈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Situation on 8~12th May 1942

1942년 5월 8~12일 독일군의 진격상황. 파란 타원 부분이 5월 9일 밤 폰 그로덱 여단의 위치로서, 제22 기갑사단 등의 북진 정체에 비해 얼마나 성공적으로 동진했는가 알 수 있다.

이날 밤 야전지휘소에서 만난 제11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과 제8 항공군단 사령관 폰 리히트호펜 상급대장은 이 심각한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 일색이었다. 폰 만슈타인으로서는 북쪽 지구의 소련군 배후 차단이 지연되는 사이에 소련군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큰 고민이었으며, 폰 리히트호펜은 이런 악천후가 계속되면 다음날의 항공지원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고민이었다. 작전 2일차인 5월 9일도 무려 1700여 소티를 날려 지상지원에 박차를 가한 제8 항공군단으로서는 이제 소련 항공부대 보다도 날씨가 대승의 가장 큰 훼방꾼이었다.

T+2: 1942년 5월 10일 — 조여가는 포위망

다음 날인 5월 10일 아침도 여전히 계속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독일 공군의 항공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제22 기갑사단, 제28 경보병사단, 제50 보병사단의 진격은 진창에 쳐박혀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소련군과 독일군 지휘부에서는 치열한 다음 작전의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우선 소련군 총참모부에서는 5월 8~9일의 전투를 통해 남쪽 전선이 완전히 찢겨진 마당에 더 이상 파르파치 지협의 방어선을 고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날 10일 아침에 크림 전선군에게 현 방어선에서 일제히 후퇴하여 후방의 술타놉카 방어선에서 다시 전선을 형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아직 독일군이 포위망을 닫지 못한 상황에서 적시에 퇴각이 이뤄지고 잘 구축된 술타놉카 방어선에 도달한다면 아직 희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반면 독일군 측에서는 포위망 완성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지만 이미 폰 그로덱 여단이 나시르 저지선을 돌파해버린 상황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프레터-피코 포병대장은 이 성공을 전과확대하기 위해서는 소련군이 니시르 저지선 또는 술타놉카 방어선에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기 전에 독일군이 먼저 도달하여 돌파해내야 한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132 보병사단을 북진공격에 쓰지 않고 그대로 폰 그로덱 여단을 뒤따라 동진할 것을 명령함과 동시에, 2제파로 역시 전진투입되고 있던 에르빈 잔더(Erwin Sander) 소장의 제170 보병사단에겐 좀 더 깊숙히 북동진하여 케르치 반도 북쪽에서 나시르 저지선과 술타놉카 방어선을 돌파해나갈 것을 명령한다.

이제 카이-아산 북쪽에 고착된 소련군이 먼저 포위될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독일군이 먼저 포위망을 완성할 것인가 하는 느시사냥 작전 최대의 고비가 닥쳐왔다. 비가 막 그친 5월 10일 오후에 제22 기갑사단 소속 전차들은 보병 지원 하에 북진을 재개했다. 제8 항공군단 소속 항공기들도 출격하여 소련군의 역습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북진하는 와중에 소련군의 산발적인 저항과 포격이 끊이지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 연달아 달려드는 독일군 폭격기들에 의해 분쇄되기 일쑤였다. 느리지만 꾸준히 10일 오후 내내 독일군은 아조프 해안을 향해 한발한발 전진해가고 있었다.

반면 역시 이날도 맹진의 페이스를 늦추지 않던 폰 그로덱 여단은 역시 늦은 저녁 무렵에 술타노프카 방어선에 도달, 돌파에 성공하였다. 이 여단은 워낙 후위의 독일-루마니아군 부대들과 이격되어 전진하던 관계로 제대로 항공지원도 중화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서서히 소련군 후비대들의 격렬한 저항을 맞받아쳐야 했다. 그러나 제8 항공군단으로서도 이 여단에 대한 지원작전은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 상당수 지상지원 전투력이 소련군 제47군과 제51군의 포위작전 지원에 쏠려 있던 데다가 폰 그로덱 여단이 워낙 깊숙히 적 후위로 진출해 있어서 피아간 식별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무선통신 중계국이 제때 폰 그로덱 여단을 쫓아 전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진하는 지상부대와 항공부대간 전술통신의 중계가 불가능했다. 결국 폰 그로덱 여단에 대한 항공지원은 이미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보급작전에 집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T+3~T+4: 1942년 5월 11~12일 — 포위망 완성과 소련군의 붕괴

드디어 5월 11일 아침, 작전개시 만 3일만에 제22 기갑사단 예하부대는 아크 마나이 동쪽에서 아조프 해안에 도달하여 소련군 제47군과 제51군 병력 상당수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소련군 크림 전선군은 전날부터 총참모부의 명령으로 퇴각을 시작하고는 있었으나 역시 진창으로 허덕이는 노면과 끊임없는 독일 공군의 폭격 속에서 원활한 퇴각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이제 결국 독일군 제22 기갑사단, 제28 경보병사단, 제50 보병사단의 3개 사단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소련군은 대략 10개 사단 병력에 이르는 막대한 전력이었다. 이제 제30 군단 소속 이들 3개 사단이 소련군의 퇴로를 가로막는 사이, 이들 소련군을 몰아 압박해 들어가는 임무가 그제껏 북쪽 전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텐클로트 보병대장의 제42 군단에게 떨어졌다.

제42 군단 소속의 제46 보병사단, 루마니아군 제8 기병사단, 루마니아군 제19 보병사단의 진격이 개시되자 이미 혼란에 빠져 포위된 소련군에겐 공황의 물결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추축동맹군 6개 사단에게 포위된 소련군 10개 사단은 이날의 격전을 통해 마지막 남은 조직적인 전투력마저 상실하고, 단순히 소부대로 쪼개져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오합지졸이 되어버렸다. 포위망에 갇힌 부대들에 대한 크림 전선군 사령부의 통제력은 상실되어 조직적인 후퇴란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으며, 이미 독일군은 폰 그로덱 여단을 위시하여 제132, 170 보병사단이 거침없이 케르치 반도를 가로질러 파고들고 있었다. 또한 재수좋게 미리 빠져나와 퇴각 대열에 나선 소련군과 전진하는 독일군 부대는 곳곳에서 뒤엉켜서 극도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5월 12일이 되자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에 대한 소탕작전이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이를 위해 제8 항공군단은 이날 다시 1500여 소티에 이르는 작전을 통해 패주하는 수많은 소련군을 분쇄하였다. 제11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과 예하 군단장인 프레터-피코 포병대장, 마텐클로트 보병대장은 모두 느시사냥 작전의 1단계가 거의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이제 남은 것은 완전히 조직력을 상실한 소련군 잔여병력 섬멸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고 최종 목표인 케르치의 소탕에 전 전투력을 집결하는 것임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이날 우선적으로 포위망 동측 전선을 방어하던 3개 사단 중에서 제22 기갑사단을 포위망 결속 임무에서 해제하고 케르치를 향한 동진 대열에 동참하게 하였다. 이미 술타놉카 방어선을 돌파하여 넘어선 폰 그로덱 여단은 치열하게 전개되는 마지막 소련군의 반격을 항공보급을 받아가며 어렵사리 격퇴해내고 있었고, 뒤를 쫓아오는 제132 보병사단과 제170 보병사단은 12일 밤 중에 술타놉카 방어선 전면에 도달하였다. 이로서 소련군 총참모부가 이틀 전 크림 전선군에게 내린 술타놉카 방어선 확보 또한 헛된 몽상으로 끝났음이 명백해졌다. 어찌 보면 그 명령 또한 제공권을 완전히 뺏기고 진창으로 범벅이 된 소련군 상황에서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겠지만, 소련군 총참모장 바실렙스키는 후일 크림 전선군 사령부 지휘관들에게 그들이 의도적으로 총참모부의 명령 수행을 지연했다는 혹독한 비판을 가하게 된다.

Situation on 12~13th May 1942

1942년 5월 12~13일 독일군의 진격상황. 5월 10일에 술타놉카 방어선에 도달, 격전을 벌이고 있던 폰 그로덱 여단에 뒤이어 후속사단들이 동진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T+5~T+11: 1942년 5월 13~19일 — 케르치 함락과 작전 종결

5월 12일을 기점으로 포위망의 소련군 소탕이 거의 정리단계에 돌입하자, 이제껏 남아 소탕전을 수행하던 사단들도 케르치를 향한 최후의 일격에 합류할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5월 12일 제42 군단장 마텐클로트 보병대장이 발령한 명령에서 잘 알 수 있다:

......

2. 5월 13일에 우리 군은 전 전선에서 추격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는 적군이 케르치 항에 도달하기 전에 기동부대로 케르치로 향하는 도상에서 따라잡을 것이다. 추격하는 보병들은 반드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서 적이 술타놉카와 케르치 서쪽 교두보에 포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땀은 피를 덜어준다! 노출된 측후방은 무시하라.

3. 5월 13일 05시 00분에 제42 군단은 우익에 제28 경보병사단, 좌익에 제46 보병사단을 대동하고 추격전을 개시한다. 첫 목표는 술타놉카 진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선도 보병부대들은 그곳 동쪽에 있는 고지를 장악하라.

4. 제28 경보병사단은 추격전 준비를 엄호할 책임이 있다......

결과적으로 5월 13일은 독일군으로서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겹친 하루가 되었다. 좋은 소식은 독일군의 주력이 드디어 술타놉카 방어선을 완전히 넘어갔다는 것으로서, 이날 아침 일찍 제132 보병사단과 제170 보병사단이 모두 술타놉프카 방어선을 넘어 방어선 동쪽에서 소련군 잔존병력을 밀어내었으며, 약 3일 동안 힘겨운 싸움을 벌인 폰 그로덱 여단에 대한 압력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동시에 전날부터 동진을 개시한 제22 기갑사단도 기갑사단 다운 기동력을 발휘하여 이날 한낮이 다 될 무렵에 술타놉카 방어선 돌파에 성공했다.

반면 나쁜 소식은 역시 남부전선의 하리코프와 이쥼 돌출부 일대에서 들려왔다. 1942년 봄 최대의 전략적 승부처로 선택된 이곳에서 소련군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이 하리코프 일대의 독일군 제6 군 병력을 노리고 5월 12일 대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른바 제2차 하리코프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봅킨 집단 등 소련군 공격부대를 요격하기 위한 공군 전력이 다급해진 남부 집단군과 제4 항공군는 크림 반도에 투입된 제8 항공군단의 주력 상당수를 급히 빼돌린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먼저 12일에 1개 전투기 전대, 1개 급강하폭격기 전대, 2개 수평폭격기 전대가 차출되었으며, 이어 13일에 2개 전투기 전대, 2개 급강하폭격기 전대 등이 빠져나가면서 느시사냥 작전을 지원할 공군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애초에 독일 공군이 크림 전선군의 소련군 항공부대를 철저히 격멸하고 승세가 독일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이전에 소련군이 이쥼 돌출부-하리코프 지구의 공세를 개시했다면 케르치 반도의 독일군에게는 훨씬 심각한 위험이 닥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련군으로서는 이제 어떻게든 크림 전선군의 잔존병력을 바다 건너 타만 반도로 퇴각시키느냐의 문제가 남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질서하게 케르치 반도를 가로질러 패주해 온 병력들이 대책없이 케르치에 몰려들고 있었으나 이들을 타만 반도로 철수시킬 조직적인 움직임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흑해함대 소속의 함정들은 독일 공군의 직접적인 위협 하에 노출되고 방어기동도 하기 힘든 철수작전 지원에 나설 생각이 없었으며, 흔히 그래왔듯이 스탈린은 결사항전을 촉구하며 파르티잔으로 독일군 후방을 교란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소련군은 항내에 있는 어선부터 소형 보트까지 갖가지 배를 모두 징발하여 케르치 해협을 건너고자 무던 애를 썼으나 별다른 대형선박이 없는 상황에서 효율도 엉망이었고 상황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무작정 얼기설기 뗏목을 만들거나 쪽배와 폐타이어 등에 의지하여 바다로 뛰어든 소련군 병사들은 급한 케르치 해협의 조류에 휘말려 표류하다가 독일군 항공기들과 해안에 도달한 지상군 화기에 희생되었다. 폰 만슈타인이 마지막으로 걱정한 또 다른 뎅케르끄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Situation on 13~19th May 1942

1942년 5월 13~19일 독일군의 진격상황. 5월 13일에 술타놉카 방어선이 돌파된 이후 15일에 케르치가 함락되었으며, 19일까지 케르치 반도 동쪽 끝까지 완전히 도달했다.

5월 14일, 독일군 제132 보병사단은 케르치 남쪽으로 파고들었으며, 폰 그로덱 여단과 제22 기갑사단이 각각 케르치 남서쪽과 서쪽을 위협하는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날 15시에 이들 3개 주요 제대들은 케르치 외곽 약 6km 지점에 도달하여, 케르치 항과 산발적인 해상 철수를 벌이고 있는 소련군을 모두 포병사정권 내로 집어넣게 되었다. 이어 5월 15일에 이들 독일군 주력들은 케르치를 우회하여 케르치 동쪽으로 몰리고 있던 소련군 병력을 더욱 바짝 밀어붙여 갔으며, 시가에 본격 돌입한 제170 보병사단은 이날 저녁 케르치를 실질적으로 함락시켰다. OKH 총장 할더는 케르치 함락 소식에 한껏 고무되어 느시사냥 작전이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였으나, 아직도 전투는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루마니아군 제8 기병사단은 케르치 반도 흑해방향 남쪽해안의 소련군 잔존병력 소탕에 나서고 있었고, 제46 보병사단과 루마니아군 제19 사단은 아조프해 방향 북쪽해안 일대에 뒤쳐진 소련군 잔존병력 소탕에 한창이었다.

5월 17일이 되자 상황은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독일군은 약 5일 동안 계속된 격렬한 추격전 기간 동안에는 제8 항공군단의 항공 지원에만 의존하여 전진을 해냈지만, 마침내 케르치 반도를 종단하여 대략 80여 개 포대 300여 문의 야포를 케르치 일대의 전선에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포병 화력이 불과 폭 5km 정도밖에 남지 않은 좁은 해안과 전선에 집중되면서 가히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이로서 5월 18일에 독일군 보병들은 소련군을 케르치 반도 최동단인 마야크 고지 일대와 케르치 동쪽 카프카니 일대의 좁은 구역에 몰아 넣었고, 이들마저 5월 19일,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드디어 5월 19일에 제11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은 느시사냥 작전의 종결을 최종적으로 선언하여 12일 간 치열하게 전개된 기동전이 그 끝을 고하게 되었다.

작전의 결과

채 2주가 안되는 기간 동안 전개된 느시사냥 작전에서 독일군 제11군은 1:2의 병력 열세를 딛고 실로 놀랄만한 승리를 이뤄내었다. 크림 전선군은 케르치 해협을 넘어 총 116,405명의 소련군을 탈출시키기는 하였으나 케르치 반도에서 입은 손실은 무려 162,282명에 이르렀다. (독일군 측에서는 169,198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민간인 수치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손실은 약 7천 명의 사상자로서 포로를 포함할 경우의 양측의 손실비는 20배 이상인 셈이었다. 이로서 크림 전선군은 지난 1941년 12월에 케르치 반도에 상륙한 이래 무려 연인원 50만 명 이상의 손실을 떠안은 채 다시 캅카스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병력손실도 큰 문제겠지만 결정적으로 소련군은 케르치 반도에 확보한 유리한 전략적인 거점을 상실함으로서 세바스토폴을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뜨리고, 독일군의 1942년 하계공세를 교란할 기회를 함께 잃었다. 이제 독일군 제11군은 마음놓고 최소한의 병력을 케르치 일대에 남겨놓은 채 예하의 전투력을 세바스토폴 공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소련군은 세바스토폴에 지원할 물자와 전투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 느시사냥 작전의 참패와 뒤이어 이쥼 돌출부-하리코프 일대에서 벌어진 제2 차 하리코프 공방전의 참패로 소련군은 1942년 5월 이 두 전투만으로 35~40만 명 이상을 잃어 중요한 독일군의 하계공세 공격목표 앞에 적절한 방어전력을 재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승리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작전 기획단계부터 이야기했듯이 느시사냥 작전은 치밀한 시간표대로 돌아가서 적시에 독일군이 소련군의 배후 깊숙히 진출-차단을 해내지 못하면 성공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독일군이 다소간의 장애를 극복하며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에는 작전의 상당 기간 효율적으로 지속된 독일 공군과 포병의 강력한 화력 지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작전 첫 날부터 소련군 항공부대 상당수가 비행장을 이륙하기도 전에 무력화되면서 독일 공군은 확고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공중포병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작전 첫 날 2100여 회 출격을 정점으로 하리코프 방향으로 전환되기까지 제8 항공군단은 매일 1500여 회 이상의 과중한 작전을 연이어 수행하였으며, 전환 이후에도 매일 500~800여 회의 출격을 달성했다. 소련군의 포병과 기갑예비는 이들 앞에 철저히 녹아났으며, 이 바람에 종심 깊게 구축한 남쪽 전선의 소련군의 예비대는 단 이틀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폰 그로덱 여단을 위시하여 적절하게 편성된 기동집단의 적극적인 종심기동 또한 소련군의 분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후방으로 침투한 기동집단을 포착-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현저하게 떨어졌던 1942년의 소련군에게 전선 깊숙히 침투해오면서 사전에 계획된 방어선 일각을 조기에 돌파해버리는 기동은 지휘통제 체계의 무력화와 공황 유발에 한 몫을 단단히 하였다. 물론 이 또한 후위부대와 크게 이격되어 전진하는 대담한 기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공중보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폰 그로덱 차량화여단은 5월 10~11일 내내 탄약 부족에 시달렸으나 제8 항공군단의 적극적인 보급작전을 통해 위기를 간신히 넘겨가며 술타놉카 방어선 일대의 교두보를 확보, 후속하는 보병사단들의 원활한 진격이 이뤄질 수 있었다.

느시사냥 작전에서 벌인 독일군의 현란한 기동은 케르치 해협이라는 명확한 최종 목표가 그어진 상황에서 강력한 화력지원 하에 대담한 포위기동 및 종심기동과 섬멸전, 그리고 잔존병력 소탕의 패턴으로 벌어진 교과서적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보듯이 실상 기동전의 탄력을 유지하고 승리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적의 예비대 격파를 위한 기동간 화력지원수단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동시에 지속적인 보급 추진능력이 필수적이었다. 독일 육군의 화려한 승리 이면에는 임기응변식 기동과 상황타계에 능한 지휘관들의 자질 이외에도 부족한 차량화-기계화 능력을 보충해준 지원부대와 항공부대의 노력이 있었음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러나 5월 19일 막 힘겹게 케르치 반도 소탕을 끝낸 독일군에게 휴식의 여유란 여전히 사치였다. 전투 종결과 함께 제11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은 즉시 일부 후비대를 제외한 전 전투사단들에게 세바스토폴 전선으로의 이동과 재배치를 명령하였다. 케르치 반도를 탈환한 탄력을 이어 다시 한 번 이 철옹성과도 같은 요새를 쓸어버릴 임무가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과 폰 리히트호펜 상급대장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느시사냥 작전이 현란한 기동전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들 앞에 놓인 세바스토폴은 2차 세계대전 최고의 공성전 현장이 될 운명이었다. 이제 단 2주 여의 소강상태 후에 전쟁의 흐름은 철갑상어낚시(Störfang) 작전으로 이어진다.

Article History.

2003. 07. 27. 초고 Periskop 게재
2007. 03. 31. Periskop 재게재

2007/03/31 01:15 2007/03/31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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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영훈 2007/03/31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홈지기님이 쓰신 느시사냥작전, 오랜만에 보네요.^^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여쭤보겠습니다. 도이치군의 케르치반도'탈환'작전이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바르바로사 작전때-혹은 느시사냥작전 전에- 도이치군이 한번 케르치반도를 점령한 후 다시 소련군에게 뺏긴 것을 느시사냥작전으로 탈환했다는 말씀인가요? 문득 궁금해져서 여쭤봅니다.

  2. 정영훈 2007/03/31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번에 구입한 독소전쟁사 잘 읽고 있습니다.^^ 원서의 오류를 바로 잡아서 구입한 것에 매우 만족합니다. 그리고 페리스코프의 재개장 축하드립니다.

  3. Orca 2007/04/01 1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홈페이지 다시 여신거 정말 감사합니다...종종 들를께요...

    블로그 쪽이 깔끔해서 저같은 사람이 보긴 더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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