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가 2002년 대선에 임박하여 모교(KAIST) 학내 게시판에 게재했던 글이다. 당시 노무현의 경제정책을 두고
의 신법에 빗대어 논한 다른 게시물을 보고 그에 대해 논한 글이다. 이 글을 쓴지 어느덧 5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 노무현도 낙향하였고, 새롭게 MB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살펴보면 그 때의 우려가 해결되지 못한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MB 정부도 별반 나아진게 없어 답답함은 더하다. 글 속의 이름들은 조금 과거의 이름들이 되었으나 여전히 곱씹어볼 대목이 있지 않을까 하여 먼지를 털어내고 이곳에 다시 올려본다. 世事를 바라보는 독자 제현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글을 쓴 계기가 된 다른 분의 원문:
필자의 반론:
보낸이 (From) : chess (채승병)
시 간 (Date) : Tue Oct 29 13:32:24 2002
제 목 (Title) : 다르게 바라보는 신법과 구법 이야기
얼마 전 올 초에 키즈의 어떤 분에 의해 쓰여진 북송대 왕안석의 신법과 그에 따른 신법파-구법파 사이의 당쟁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보통 중국사 중에서도 5대 10국의 혼란기를 거쳐 북송대에 이르는 역사는 교양서적 수준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내려간 내용은 많은 이들에게 참신한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차용한 글에서는 항상 이야기 그대로 현혹되지 말고 제대로 본질을 꿰뚫어 차용한 것인지, 오늘날 현실의 눈으로 살펴보려는 의도 가운데에 무리는 없는가 항상 의심을 가져보아야 한다. 왕안석의 신법의 이야기 또한 그럴듯 해보이나 이런 의심 많은 필자의 눈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들이 눈에 밟히는 것을 어찌하랴.
그 글에서는 왕안석의 신법 이야기를 차용하여 두 가지 결론을 끌어 내고자 하였다. 첫째는, 신종 시대의 개혁의 필요성에 빗대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개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 개혁의 주도자로서 노무현의 시대적 필요성을 은근히 내세웠다. 아울러 원래 글타래의 단초처럼 노무현 진영 쪽에 당장 왕안석과 같은 인물이 보이지 않더라도 의지를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는 길이 옳다는 논리이다. 둘째는, 북송이 피폐해진 원인으로 당쟁을 꼽으면서 우리네 지역감정과 비교해볼 때 유사한 난국이 아닌가, 시급히 극복해야할 과제임을 첨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원글에서는 시종일관 위기 탈출수단으로서 신법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이 신법의 의도가 구법파로 지칭되는 기존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 때문에 훼손되고 좌초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허나 필자는 이에 의문을 던지고자 한다. 왕안석의 신법은 진정한 개혁이었는가? 그리고 북송의 문제를 해결할 올바른 방향을 짚었던가? 신법이 좌초된 책임을 기득권층들의 반동에만 전가할 수 있는가?
신법이 필요하게 된 신종조 북송상황을 이해하려면 멀리 5대 10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중국은 당의 멸망 이후 국가가 찢겨져 여러 작은 나라들이 반세기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계속 세워졌다 사라지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기는 통일된 국가를 지향하는 범 중화권 시각에서야 암울한 시기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사회 하부로 보면 꼭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다. 유럽에서 고만고만한 여러 나라들이 할거하면서 절대권력의 권위가 먹히지 않던 것이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했듯이, 5대 10국의 느슨한 체제는 상공업 발전의 큰 기틀이 되었다. 소국으로 쪼개진 나라들은 각자 먹고 살길 확보를 위해 특산물을 개발하고 무역을 장려했던 것이다.
거기에 북송의 시조인 조광윤은 군인 출신으로 나름대로 합리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군주였다. 조광윤은 이러한 경제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오늘날로 말하면 통화팽창정책을 시행하였다. 북송은 태조 시절부터 통화공급에 열을 올려서 동전만도 500만 관이 넘게 공급을 이뤄냈다. 이것은 후대 명조 시기 전체에 걸친 통화공급보다 많은 양인데, 북송은 이것을 태조 재임기에 투입하여 전 근대적이나마 경기진작을 이뤄내었다. 그 결과 북송 초기의 세수는 기록적일 정도였고 수도 개봉(開封)에 축적된 자본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북송은 근대적인 사회 발전에 필요한 경제력 확보에서 대단히 시대를 앞서간 국가였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에서 흘러나온 잉여자본이 서구와 같이 신흥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황실과 전 국가적인 관료조직으로 모여 정체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북송체제가 안정이 되면서 중국의 고질적인 병폐, 즉 과도한 중앙집권체제의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쟁이 아니라 안정화된 권력층에 빌붙어서 독점적인 경제력을 유지하는 거상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은 나아가 대규모 농지를 장악하고 일반 농민으로부터 전대를 수취하여 이중으로 살을 찌웠다. 부의 독점화와 관료집단의 부패가 얽히면서 국가의 세수는 줄고 국방력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참고로 북송은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었기에 거란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국방비 부담이 매우 컸다.)
신종과 왕안석의 신법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혁안이었다. 당시 왕안석이 착안한 점은 세수증대를 위해서는 극단화된 경제 질서를 바로잡고 건전한 중간계층 — 중소농민, 중소상인 — 을 육성해야한다는 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건강한 중산층이 많아야 한다는 점이 경제 개혁의 이슈가 되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 초기 실시한 것이 유명한 청묘법(靑苗法)인데, 상평창이 가진 1400만 전의 자본을 저리(연 20%)에 농민에게 공급하여 소수 호상에게 집중된 돈줄을 틔운다는 아이디어였다. 이를 도시 중소상인들에게 실시한 것이 시역법(市易法)이고, 종래 강제동원 노역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던 차역법을 개선하여 봉급을 지급하며 고용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 모역법(募役法)이었다. 모역법은 정부주도 공공사업을 통해 자본을 시중에 풀어내는 방법이었으니, 어찌보면 이 신법은 후대 케인즈 경제학과 통하는 맥락이 있었다.
얼핏 보아 왕안석의 신법이야말로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뤄낸 선구적인 개혁안이라고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점들 때문이다. 상업자본이 대거축적된 북송대에 이렇듯 교묘하게 자본흐름을 이용한 정책이 나온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일부나마 본질을 짚어내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놀라웠다.
그러나 신법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왕안석과 신법파는 케인즈와는 달리 자본주의와는 한참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신법파라 해도 결국 유교적 교육을 받은 관료집단이었으며, 이들의 경제 지식은 일천한 수준이어 신법이 서기 위한 바탕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이들의 방법론은 경제 전체가 화폐경제로 이행되고 근대적 시장경제가 확립된 바탕에서 쓸 수 있는 방법론이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를테면, 청묘법이 유효하려면 일반 농민들에게 자본수요가 있어야 했는데 당대 농민들에게 돈을 쥐어줘봤자 쓸모가 없었다. 구매력있는 소비주체로서 키워진 농민이 아니라 단순한 생산수단으로서의 농민이었으므로 수요라고는 악랄한 지주의 고리지대 납부를 위한 정도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는 새로운 관제 가렴주구 수단이 되어버렸다. 관청에서 강제로 농민에게 돈을 떠맡기고서 농민들은 돈을 쓰고 굴리는 법도 모르다가 애꿎은 이자만 물어야 했다. 이는 신법의 효과가 비교적 상업이 발달한 도시 주변에서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곳곳에서 좌초된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북송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기부터 화폐 공급을 늘였는데, 적절한 통화정책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이후엔 악수를 거듭하게 된다. 계속 중국식 관료주의에 경직되어 침체로 치닫는 경제 하에서 국방비 조달을 위해 통화공급을 늘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북송은 이를 위해 최첨단(?)의 지폐까지 발행한다. 하지만 역사가 어찌 그리 똑같은지 태환성이 철저히 보장되지 않은 불환지폐 남발은 두고두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부작용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프랑스 혁명기의 아시냐나 미국 남북전쟁기의 그린백과 같이.
서구처럼 민간부문에서 금융업이 성장해간 것이 아니라 관 주도로 금융업을 치루다보니 모럴 헤저드가 극심했으며, 화폐경제-시장경제를 떠받치는 신용질서가 제대로 유지되기 힘들었다. 민간에서 신용질서를 위반하는 자가 나오면 사법기능과 시장 자체의 기능으로 퇴출이 가능하겠지만, 관이 앞장서 돈 떼먹고 신용은 나몰라라 하면 금융질서가 유지될리가 만무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험이 일천한 서민들에게 화폐경제를 강요해 놓고 막상 국가가 통화관리를 엉망으로 하였을 때 일어나는 폐해가 얼마나 큰지는 경제학 지식이 쌓인 오늘날엔 경제 교과서들을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북송의 신법은 경직된 경제체제를 뚫어보겠다고 자본 공급의 색다른 활로를 열었으나, 낙후된 사회체제 때문에 수요 진작에는 실패하고 상업부문에서는 신용불안을 초래했으며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영세농민의 몰락은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북송대의 이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가 되어 금나라에 이르면 무려 6000만 배에 이르는 통화증발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경제정책 실패로 모병제로는 국방의 한계가 드러나자 국민개병 개념을 다시 도입하여 보갑법(保甲法)-보마법(保馬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층의 부담을 증가시켰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개혁의 방향은 옳은 길이고, 신법은 민중을 잘 살게 하는 길이라고 끌고 가는 것 또한 무리였다.
그리고, 원글의 저자는 왕안석이 신법을 추진한 기간이 무슨 성과를 내기엔 너무 짧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왕안석이 직접 집정한 시기 8년뿐 아니라 휘종조까지 이어진 신법파의 25년 집권기는 당대의 집권자들이 정책을 밀어준 상당한 시간이었다. 신법이 진정 단명했다면, 어찌 신법을 추종하는 세력이 파당을 이루고 그토록 세를 떨칠 수 있었겠는가? 신법이 결국 폐지되고 구법으로 돌아간 것은, 개혁의 방향이 옳았는데 신법파가 뜻을 펼칠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개혁의 방향과 방법 자체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법파는 애시당초 경제 측면에서 세수확대라는 목표에서 출발했고, 신민을 세공에 필요한 효율적인 생산수단으로 육성하는데 치우쳤다. 민중의 자유와 민권을 보장하여 근대적 시장경제로 나갈 수 있는 길은 꼭꼭 막아놓은채 추진한 신법은 오히려 민중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구조의 기반이 닦여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법의 추진은 100%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미 사학계에서는 많이 지적되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국이 왜 자발적 근대화에 실패했는가와도 연관이 있는데, 이미 진나라 시대부터 거대통일국가로의 경험과 꽉 짜여진 중앙집권 관료주의에 얽매인 바탕에서 개개인이 경제주체로서 행동하는 시민계급으로의 발전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거기다가 신법파는 왕안석 이후 제대로 된 개혁정신을 가진 걸출한 인재 또한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왕안석이 집권을 하자 정권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인물들 또한 신법파에 많이 끼여들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개혁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처신에 능하고 신법으로 위장한 소인배들이 들끓기도 했다. 신법의 몰락은 신법파 스스로 퇴락해서 벌어진 문제가 실로 크다.
물론 그랬다고 구법이 옳았다는 것을 설파하려는 것은 아니다. 구법은 말그대로 개혁의 의지조차도 박약했기 때문에 구법으로의 회귀는 북송의 참담한 말로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신법으로 피폐해진 농민층은 구법의 체제 하에서 더 이상 희망도 없이 퇴락해갔으며, 북송은 결국 거란의 기세마저 무너뜨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패망하고 만다.
그래서 필자가 위와 같이 신법의 역사를 보며 얻은 교훈은 사뭇 다르다.
첫째로, 개혁은 그 이름만으로 만능의 수단은 아니다. 개혁이란 이름을 거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자기검증에 소홀히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독선에 빠질 위험도 대단히 크다. 왕안석과 같은 이들에게 화폐경제의 본질 일부를 파악하는 능력은 있었으나, 범 국가적인 정책으로 시행하기 이전에 선결할 전제 조건이 무언지는 알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해악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인지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왕안석은 대학자요 나름대로의 투철한 의식을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말이다.
불행하게도 아무리 역사를 들여다본들 어떻게 하면 올바른 개혁이 될 수 있는지 정답은 없다. 지금 제각기 후보들이 (심지어 이회창까지도) 개혁이란 이름으로 갖가지 주장을 해대고 있지만 어느 하나 후보 이름만 믿고 넘기기엔 위험천만한 것들이 곳곳에 눈에 밟힌다. 누구에게건 항상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바라봐야한다. 이회창 진영에서 나왔다고, 혹은 노무현 진영에서 나왔다고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양측 모두 세련된 정책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사회라면 열심히 비판도 하고 의견도 나눠가며 검증을 열심히 해야한다. 막연한 기대로 이회창 만세, 정몽준 멋쟁이, 노무현은 달라~ 외치느니 주사위 던져 투표하는 것이 더 이로울지 모른다.
둘째로, 개혁이란 이름도 훼손되는건 한 순간이다. 신법파는 왕안석 이래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재에 주도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권력지향적인 파벌로 변질되었다. 이들의 출신 성분은 대개 구체제에서 억압받던 미천한 계층에서 올라온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목적은 진정한 민생보국보다는 정권 교체의 혼란기를 틈타 울분을 풀고 나도 한몫 잡겠다는 식이 많았으며 결과적으로 후기 신법파는 개혁이 무색하게 타락한 소인배들로 넘쳐났다. (마치 요새 민주당 일부 바이러스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글의 원래 발단이 노무현의 경제 브레인 이야기 쪽이었던데, 참고로 필자는 노무현 지지자라면 한가하게 집권해서 구해 쓰면 되겠지……라는 생각일랑은 버려야한다고 생각한다. 집권해서 구해쓴다고 한다면 대부분 몰려드는 것은 의기의 지사가 아니라 시대를 두고 끊임없이 발견되는, 출세욕에 불타 사탕발림에 열을 올리는 권영해니 최규선 같은 아첨꾼들일 확률이 크다. 진정한 개혁가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인재를 모으고 많은 교감을 나누는 준비가 필요하다. 집권하고서 당장 일해야 하는데 팀웍이 맞지 않아 서로 삐걱거리기에는 5년이란 시간은 짧다.
조중동 때문에 개혁이 안 굴러가고 인재 발탁이 안된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개혁을 해내려면 거꾸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열세의 개혁세력이 성공하려면 애초부터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 놀리는 사람에게야 그때그때 비난하는 것으로 직성이 풀릴지 모르겠지만, 집권하겠단 세력이라면 조중동 때문에 만사가 안된다고 하기 전에 그러면 조중동의 방해를 어떻게 피해나갈 것인지부터 강구해야 한다. 인사에 관한한 카드를 충분히 준비해놓고 예기치 않은 반대파의 공세에 맞춰 주도적으로 쓸 수가 있어야지, 상대편이 한 두번 공격했다고 해서 밑천을 드러낼 수준이라면 더욱 반대는 거세지게 마련이다. 세상이 옛날처럼 한촌에 제갈량이 숨어있을만큼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막연히 어디 인재가 있을거야……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 기득권층에게 끌려다니는 첩경임은 분명하다.
왕안석의 신법파가 타락한 것을 당쟁의 소산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애시당초 왕안석이 당을 만들어 입각한 것이 아니라 입각을 하고서 쉽게 사람을 끌어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필자는 그래서 오늘날도 제대로 된 정당정치가 없는 한 어느 후보가 되어도 기대하는 만큼의 사회개조는 당장 이뤄내지 못하리라 본다. 평시부터 충분히 의식을 공유하면서 참여의 토대가 되어주는 지지층이 없는 마당에 근본 개혁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개혁국민정당의 열기도 3만 당원의 모집에서 정체되고 있는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대략 통계적으로 봐도 성숙된 이념정당이 유지가 되면서 정책방향을 원활히 주도하려면 적극적인 당원이 정당별로 인구의 0.5~1% 이상은 되면서 강력한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한국의 실정에서 최소 20만은 필요하다.)
한나라당이 첨에는 비교적 참신한 이회창이란 인물을 끌어들여 나름대로 일신을 바꿔보겠다고 했으나 결국에 진정한 지지핵심세력이 없어서 저런 잡탕 기회주의자들이 득시글하듯이, 아무리 노무현이라고 해도 이처럼 미약한 기반으로 국민의 막연한 개혁기대만 의지해 나아간다면 집권한다고 해도 정치 파리떼를 쫓아내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마 이 문제는 정몽준이 집권하게 된다면 가장 심각하게 발생할 문제일 것이다.
이제껏 너무 역사 속에서 개혁의 암울한 면을 강조했는가? 그렇다고 한탄할 필요 또한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북송이라는 시기는 중국의 고질적인 관료주의의 폐해에 얽매인데다 북으로는 거란이라는 외적이 버티고 있던 시기였으니 왕안석의 힘으로 돌려놓기에는 이미 늦은 사회였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아직도 정치문화가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역동성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북송 신종조의 시기보다는 훨씬 세상을 바꿔내기가 쉬운 입지에 처해있다. 역사는 지금 어떠한 개혁방향이 정답인지 이야기해주지는 않지만 지금이 최소한 나름대로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할 시기임은 이야기 해주고 있다. 현대 한국 정치사의 노정은 아직 실망하기에는 너무 짧다.
단언컨대 이 나라 정치가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고 굴러가는 날은 노무현이 이회창이 정몽준이 대통령이 되는 날 그 어느 것도 아닐거다. 어느 정당이 되었건 선명한 민주적 정책정당이 50만 열성당원을 가지고 후보를 추대하고 당선을 시키는 그날이 한국 정치를 바꿔놓는 날이 될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말처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고 할 수 있는 개혁세력을 꿈꾸며.
…… 행동은 행동하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은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지혜의 본질은 회피하는 것에 있는게 아니라 행동에 얽매임 없이 바르게 행동하는 가운데 정신의 숭고한 뜻을 파악하는데 있다……
— "Bhagavad Gita(भगवद् गी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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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했습니다, 요새 뜸하신다 했더니 그쪽에다 살림을 차리셨군요.^^
아일랜드에 비유하기는 좀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볼때 과연 영국에 해당되는 그런 나라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니까 말이죠.
(일본의 지배력은 구한말 포함해도 고작 50년 정도에 불과하죠.)
전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태생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탓에 마치 껍질을 밖에서 깨줘서 나온 병아리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까요. 밑바닥 국민정서와 문화흐름을 보고 그것을 외국의 그것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죠.
노무현의 죽음 역시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그것에 비유하기는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평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말이죠..
아일랜드는 그냥 감정적 연결고리일 뿐이지요. 우리나라 역사와 아일랜드의 역사를 직접 비교한 대목은 없습니다만? 그리고 제 글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의 죽음을 노무현의 죽음과 비교한 대목도 없습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제가 왜 예이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설명일 따름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예이츠 스스로가 만년에 절감하고 'Under Ben Bulben'에 적은 내용이 노무현의 자살과 상통하는 바가 있으리라는 느낌을 적은 것이지요. 제가 감정의 흐름을 옮기다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게 썼나 봅니다.
본래 군사적으로도 적의 수장. 커맨더를 먼저 노리고 제거하는것은 전투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도 그렇죠. 국가 내부 정치집단간의 암투 뿐만아니라 국가간의 영향관계에 있어서도 2차대전 겨울전쟁의 '핀란드-만네르헤임' 같은 관계가 어떤것인지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MB야말로 제대로 운을 타고난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악재가 터지자마자 북한의 20Kt 핵실험 성공과 급속한 정세진행으로 완벽한 디펜스에 성공했으니까요.
안됐지만 이번 사태는 과거 촛불시위보다 더 심각한 파장을 가져올겁니다. 촛불시위가 재야계의 공세축선과 예비전력을 날려버린 사태였다면 이번에는 지휘부의 붕괴로 'MB POWER' 를 극대화 시킬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것이니까요. 대운하부터 시작해 다양한 부분들에서 '역습' 이 아닌 '대공세' 차원의 판도가 빚어질겁니다.
현재 재야계의 수준이나 모양새를 보고있자면 찹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무능합니다.
게다가 스스로 무능하다는것 조차도 모르고있죠. 저쪽에서 그걸 이제 완벽하게 감 잡았고 그간 그걸 잘 활용해왔듯 이번 기회역시 그냥 지나치지 않을겁니다.
감상적으로 바라보기에는 대단히 심각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604867&RIGHT_DEBATE=R0 이런 글도 돌아다니는 마당이니 사회 다양한 분야로 눈을 돌려보셨으면 합니다.
배후에서 어떤 문제가 진행되어 왔고, 어떤 일이 기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직무 특성상) 이쪽이 더 정보가 많을 듯하니 크게 걱정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런 민감한 내용은 앞으로도 블로그건 게시판이건 공개된 장소에 구체적으로 적을 일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아고라의 저 글은 왜 링크해주셨는지 도통 모르겠군요. mechanism design 내용을 정확히 알고 저런 비유를 했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혹세무민 수렁에 빠지기 쉬운 글인데 말입니다. 저 글 내용에 정말 솔깃하셔서 링크를 걸어주셨다면 아고라를 끊으라고 권해드리고 싶고, 저런 억지 비유가 난무하는 세태를 알리기 위해 링크를 걸어주셨다면 이미 많이 지켜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과거 '쇠고기파동' 에 따른 촛불시위가 어떤건지 보셨을겁니다.
알려드리고 싶은것이 바로 그겁니다. 혹세무민의 structural mechanics 이죠.
집단지성에 근거한 위키피디아같은 시스템이 실제로는 상당한 오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곳에 실린 지식들을 추적해보면 극히 협소한 몇몇 소스들에서 기인해 복제된것임을 알고 계실겁니다. 즉 집단지성이 항상 옳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그것에 대한 낙관은 마치 파생상품의 리스크평가를 그대로 믿는것과도 같은것이라는거죠.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는 항상 그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미 격어보고 지켜본바 있으시듯 말이죠..
결국 그런 집단지성의 구조적 위험은 얼마만큼 양호한 기반에 리스크햇지를 제대로 해놓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형편없이 취약한지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단지 지식의 양이나 질.. 이전에 학계수준.... 이전에 교육체계...... 국민의 의식........ 그 밑바닥 정서까지.
수직으로 큰 구멍이 뚫려있는것과도 같습니다.
물론 그 구멍의 밑바닥에는 구멍의 출발점이 있죠.
저 역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곳이 많다보니 저런것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스스로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도 말이죠. 덕분에 승병님과 같은 분의 장단점도 알게되곤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부딛히며 산다는건 정말 좋은것이더군요.
스스로 말을 타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것인지. 가야 할 것인지를 길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줄은 알았지만, 예이츠까지 수비범위이실 줄은 몰랐네요. 저야 예술적 소양은 꽝인 인간이라 반의 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막연하게나마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지는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예술적 소양은 별로이고, 시감은 더더군다나 떨어지지만 가끔 머리 속에서 뒤적이기엔 좋은 것 같습니다. 예이츠도 나름의 매력이 느껴져서 가끔 들여다보는 정도입니다.^^
홈지기님께서 제 정치적 성향을 잘 아실테지만, 제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이토록 슬퍼할 줄 몰랐습니다. 오늘 분향소에 다녀왔고, 지난 토요일부터 그야말로 추모의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전 항상 남보다 한 발 늦는 듯 합니다.
노대통령 재임당시에는 속으로 괜찮은 정책이다 싶은 것들도 참 많았고,, 겉으로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속으로는 인간적 공감을 느낀 것 도 참 많았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그분의 모습에서, 언제나 저는 과거의 모습만 집착하다, 현실을 놓친다는 그런 기분이 들어 아쉬운 마음이 더합니다.
올 여름휴가때는 딸들 데리고 봉하마을에 한번 다녀오려 합니다.
언제나 제 본적지인 합천의 그분(?)만 바라보는 정치적 성향도 이기회에 고쳐보려 합니다.
하여간 홈지기님은 국가원수가 되실 분입니다.
정치적 소양에서, 지식, 인간적 됨됨이, 실력, 능력,,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분이니 말입니다.
dasleich 님의 말씀이야말로 놀랍군요. 전에 만나뵐 때도 이런저런 말씀을 듣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마지막 말씀은 이거 영 민망해서…… --a 그냥 흘려 듣겠습니다.
0.
슈타인호프님의 블로그에 댓글로 썼던 내용을 거의 재탕하게 됩니다만 어떻든 여기도 쓰고 싶어지네요. 개인적인 글쓰기 공간이 없다보니 지인분들 블로그에 관련글이 등장하여 댓글로 쓸 기회만 기다리게 되는 경우도 많은 듯.
1.
저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이미지가 에르빈 롬멜원수의 그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느껴지네요.
2.
제 거주지 근처 강남역에 뜻밖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더군요 - 서초/강남/송파가 한나라당 지지의 철벽요새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아고라의 관련글을 보니 설치한 분들의 예상도 벗어나 천막도 치고 규모면에서 대한문 분향소 수준까지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밤에 한 번 산책겸 나가서 살펴보니 4열종대 대기열이 한 블럭 가까이 이어져있더군요.
고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해서 거의 시종일관 반대입장을 유지했던 저로서는 등산길 소망탑에서 조용히 고인의 명복을 빈 다음 적어도 장례식이 끝나는 순간까지만이라도 고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입닥치고 삼가하는 편이 '죄송하다'며 분향소에서 소리내어 울먹거리는 것 보다 덜 위선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 분향하지 않았다는 말을 이렇게 늘일 수 있다는...
3.
숙어집에서만 본 표현이지만 영어로 'bury the hatchet'이 '휴전하다'는 뜻이라죠. 어떻든 이번 일을 기회로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무기를 너무 자주 빼들지 않는 대한민국이었으면 합니다.
롬멜 원수의 경우와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예리한 지적에 동감합니다. 막전막후에 그러한 측면이 있는데, 이 역시 짧게는 추모기간, 길게는 이번 정권 동안에는 차마 적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른 언젠가에는 깊이 다뤄볼만한 주제이겠죠. 그리고 강남역 분향소는 바로 회사 앞이어서 계속 지나쳤습니다만, 대한문 분향소 수준까지는 아니더군요. 저는 강남역 주변 사람들이 강남/서초/송파를 대변한다고 보기 어려운 것 같아 큰 의미는 두지 않았었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어떤 계기로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감정의 창칼을 녹여 이성의 보습과 쟁기를 만들기를 바랬는데 참 갑갑할 따름입니다.
'강남'에 대한 저와 홈지기님의 대화는 '대한민국'에 대한 한국인과 박노자 교수의 대화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웃음).
거의 한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모습'과, 외부인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심정'은 하나의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모두 중요할 것입니다 - 대개의 경우 네가 뭘 안다고... 라는 감정싸움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독보님이 강남 거주민이신 줄은 몰랐군요. 아마 저와 분향소에서 마주칠 번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
그동안 바빠서 채승병님의 홈페이지도 제대로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소식을 듣고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 월요일 새벽에 대한문 갔다왔습니다. 아늑하게 펼쳐진 병풍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예전 부대 지휘관이었던분과 담소나 나누고 왔습니다. 서로 오지말아야 할곳에서 만난 사람들끼리의 모여서 만든공간에 아늑하게 느껴지는 병풍속에서 함께한 대화는 참 어이러니 하더군요
과연 앞으로 남은 세월이 지난세월만큼 보다 더 많은데 얼마나 더욱더 많은 일이 생길지가 걱정이 됩니다.
오늘 저도 비슷한 마음을 느꼈지요. 성경 전도서를 읽으면서 "삶에, 죽음에, 냉철한 시선을 던져라.말 탄 자여, 지나쳐 가라!" 이런 마음을 느꼈답니다. 그분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지요.
그나 저나..참...사진과 글에서 느꼈던 내공이...이렇게 시까지...당최..전공자라고 하기엔 네루다 밖에 모르는 저의 팍팍함이 부끄럽네요!
여하간 오늘 또 존경의 마음! 한자락 품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읽어온 노 대통령을 추모하는 글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입니다.
전부터 읽어봐야지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 뒤늦게 읽습니다.
잠깐 아일랜드 전설에 관심이 있었을 때 관련 홈페이지에서 상당수 전설을 글로 남긴 사람이 예이츠임을 알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가 교과서에 실렸던 기억만 가물했던 때였는데도, 예이츠와 아일랜드 사이를 연결하는 몽환적인 이미지에 끌렸던 것 같습니다. 그 뒤에 깔려있는 오랜 정서-한(恨)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가 예이츠의 독립운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새삼 생각하게 되는군요. 여담이지만 예이츠가 제임스 조이스의 데뷔에도 관계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벤 불벤 기슭에서>. 정말 좋은 시입니다. 뜻도 채 모르는 문구를 입에 넣어 혀로 굴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느낌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