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사실 확인 요청이 하나 들어왔다. 오늘의 주제는 1945년 4월 베를린 동쪽을 (말 그대로) 뜨겁게 달구었던 젤로(Seelow) 고지 전투. 문제는 모 사이트에 올라온 젤로 고지 관련 글로서, 여기에는 전투의 주역이 핫소 폰 만토이펠(Hasso von Manteuffel)과 이반 코녜프(Иван С. Конев)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젤로 고지 전투가 게오르기 주코프의 조바심에 의한 헛방 연속으로만 알아오던 통념과 배치되지 않느냐는 것이 질문의 요지였다.
필자도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자세히 알아보니 祈遇님이란 분께서 본인 블로그에 연재하신 글1이 소스인 듯 하다. 주인장 분의 다른 여러 글들을 보건대 열성적으로 자료를 모아 성실히 정리하시는 노력이 돋보였다. 제보된 문제의 글도 그런 노력의 발로라 여겨지니 굳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보다보니 짚히는 바가 있어 한 마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우선 독소전쟁사를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보대로 왜 젤로 고지 전투 이야기에 만토이펠과 코녜프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지가 첫 번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젤로 전면을 공격한 부대는 주코프가 사령관인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소속의 제8 근위군이었다. 이 야전군의 전신이 바로 스탈린그라드에서 맹활약한 제62군이고, 사령관도 계속 바실리 추이코프(Василий И. Чуйков)가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돌파구를 확장할 후속 기동제대로 미하일 카투코프(Михаил Е. Катуков)의 제1 근위전차군이 버티고 있었다. 좀 더 넓게 보면 제8 근위군 우익을 담당한 니콜라이 베르자린(Николай Э. Берзарин)의 제5 충격군까지를 젤로 고지 전투에 관여한 부대로 넣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코녜프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 중반과 달리 주코프도 스타브카 대리가 아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나와 있어서 코녜프가 주코프의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반대쪽 독일군 전선으로 넘어가도 의문은 마찬가지이다. 젤로 고지 부근의 전선은 헬무트 바이틀링의 제56 기갑군단과 마티스 클라인하이슈터캄프의 제11 SS 기갑군단이 수비하고 있다가 전투가 확대되자 군단 예비이던 뮌헤베르크 기갑사단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모두 테오도어 부세의 제9군 소속이었지, 만토이펠의 제3 기갑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만토이펠이 격돌한 상대는 슈테틴 일대에서 발진한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Константин К. Рокоссовский)의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이었다.

베를린 작전 계획 (출처: Le Tissier, Tony. Der Kampf um Berlin 1945. Berlin: Ullstein, 1997. 329.)
게다가 젤로 고지 전투의 원인이 된 소련군 최후의 대공세, 베를린 작전은 4월 16일에 막이 오른 작전이다. 글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4월 첫째 주에 공격을 시작하고 저지되고 그런 전투가 절대 아니었다.
도대체 이렇게 말도 안되는 혼란이 왜 생긴 것일까? 사실 이런 혼란은 祈遇님이 첫 번째가 아니다. 이것은 미국의 인기(?) 군사잡지의 하나인 "World War Ⅱ Magazine"이 던진 고도의 떡밥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는 이 잡지의 1999년 5월호에 나왔던 히튼(Colin D. Heaton) 교수의 『Battle of the Seelow Heights』라는 글이 그 떡밥의 정체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祈遇님 글의 상당 부분에 히튼 교수의 글이 무비판적으로 원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번역의 수고는 마땅히 존중할 필요가 있으나, 문제는 원문이 이 잡지(및 저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졸작이라는 점이다. 필자도 처음 읽었을 때, 혹시 만우절 특집판이거나 단편소설 투고란이 새로 생겼나 몹시 혼란스러웠을 정도였다. 젤로 고지 전투를 다뤘다는 제목과 달리 내용의 대부분은 실낱같은 사실 위에 순전히 정체 불명인 뇌내망상을 범벅해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원문이 얼마나 엉망인가 몇 가지만 더 지적해보자:
- 원문 중간의 주인공 중에 무장친위대 소령 루돌프 팔켄한(Rudolf Falkenhahn)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자그마치 전쟁 초반에는 공군 공수부대원으로 에방 에마을(Eben Emael) 요새 강습작전 및 크레타 공수작전에 투입되었고, 나중에 무장친위대로 옮겨왔다고 한다. 게다가 백엽검 기사철십자장을 수훈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사람 이름을 왜 들은 기억이 없을까? 백엽검 기사철십자장 수훈자는 물론, 일반적인 기사철십자장 수훈자까지 리스트를 대조해봐도 팔켄한 소령이라는 인물은 없다.
-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네스 고트리프(Hannes Gottlieb) 소령은 또 누구이며, 하인츠 빌커(Heinz Wilker) 소령은 또 누구인가? 이들이 활약했다고 하는 4월 9-11일에 젤로 고지 일대는 물론 퀴스트린 이북의 오더 강 전선은 조용했다. 당시 동부전선에서는 북쪽에서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마지막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브로츠와프(Wrocław, 브레슬라우)에서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코녜프와는 무관한 작전 지구에서 이 소속부대도 어딘지 모를 장교들의 활약은 도대체 뭘까?
- 절정은 만토이펠의 사령부에 소련군이 난입하여, 만토이펠이 직접 권총으로 쏘고 대검으로 처치하다가 자신도 팔에 총상을 입어 후송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독일군 전황이 어려웠어도 만토이펠은 그런 적이 없었으며, 카이텔 원수와 바익셀 집단군 지휘권을 두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면서 서부로 계속 후퇴해갔다.
이 밖에도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원문의 내용은 픽션 수준이다. 저자가 어떤 경로로 저런 내용을 접하고 글을 썼는지는 그야말로 미궁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들어맞는 내용은 심하게 이야기하면 제로에 가깝다. 분명히 4월 16일 이후 슈테틴 남방에서 펼쳐졌을 법한 전투와 젤로 고지 일대의 전투, 거기에 멀리 구벤 남방에서 벌어진 전투가 초현실 공간에서 한데 뒤섞였다고나 할까. "World War Ⅱ Magazine" 자체가 그렇게 나쁜 잡지도 아닌데다, 원문이 실린 1999년에도 이 정도의 오류는 쉽게 체크할 수 있을 정도의 책이 서방에 출간된 상태였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저자가 그럴듯한 냉전기 소련측의 기괴한 선전물이나 서방의 상상을 동원한 창작물에 낚인게 아닌가 싶다.
여하간 이 글은 아직껏 해당 잡지 온라인 아카이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 곳곳에 글이 퍼 날라진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때문에 많은 2차 세계대전사 팬들의 지탄을 받고 여기저기서 논란거리를 만든 과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것도 갖가지 언어로 — 이제 한국어가 말석을 하나 더 꿰어찬 것 뿐이다.
여기서 보듯이 제법 인기가 있는 "World War Ⅱ Magazine"의 기사라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학술잡지도 사실 관계가 잘못된 기사가 게재되는 일들이 종종 튀어 나오는데, 하물며 대중잡지야 두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하기사 곳곳에 환빠가 난무하는 한국에서 이런 말은 蛇足일 뿐일 것이다. 필자도 어떻게 고도의 낚시질에 당할지 항상 조심하며 경계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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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트랙백을 읽고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원래는 베를린 전투에 대해 알아보려 여기저기 뒤지다가 발견한 글이었는데 저도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 의아하긴 했습니다만 쥔장님이 언급한 그 잡지의 그 교수님의 글이 리퍼런스로 나와있길래 '아~그런가 보다.' 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저도 저글이 제가 알고있는 것이랑 너무 틀려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는데 http://www.hotlinecy.com/Hossfelder.htm에 SS 소령 팔켄한이 보이더군요.
원래는 다른 인물의 인터뷰 기사인데 동석자로 팔켄한 소령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외국은 다른 밀리포럼에서도 팔켄한의 존재를 물어본 사람의 글의 보았는데 팔켄하인과 다른 인물이라며 SS 소령 팔켄한의 존재를 인정하더군요. 덕분에 전 아주 심각한 오해를 해버렸구요....
지금와서 후회되네요. 거기에 모 잡지, 모 교수님의 글에 대한 작성글이 있었는데 그걸 읽어봐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 일의 시작은 저의 경솔과 부주의로 시작되었지만 그 잘못을 집어주신 주인장님께 감사드립니다.
p/s 아 너무 열받아서 땀이 다 납니다. 낚여버리다니Orz
크게 부끄러워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만한 낚시면 원저자를 탓해야죠. 저도 사실 낚시에 여러 번 걸려든 바 있습니다. -_-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을텐데 괜시리 의지를 꺾는 말을 하는게 아닌가 항상 고민입니다. 좋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쩌면 기우님이 참고하신 그 사이트의 작성자도 동일한 텍스트를 원본으로 해서 콘텐츠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크죠. 그 경우 A로 A를 증명하는 꼴이 됐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슈타인호프님의 말처럼 A로 A를 증명해버린 우를 범하긴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고 저야말로 공짜로 과외를 받은 셈이니 감사하죠.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Sigismund von Förster라는 사람에 대해 아시면 설명을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는 공간이 좁아 제대로 설명드리기 곤란할 것 같은데, 포럼에다가 질문을 다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