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믹시(Miksi)?'를 갖고 핀란드에 대한 이야기의 운을 뗀 바 있다. 오늘은 이에 보충삼아 가벼운 이야기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앞의 글만 보면 핀란드인이 일상 대화 속에서 말끝마다 '믹시?'를 외치면서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질거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절대 아니다. 여러 책에서 묘사하는 핀란드인의 경향은 대체로 과묵하며, 수다스러운 미국인이 보기에는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라고 한다. 핀란드인들은 게다가 언행일치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다고 한다. 말은 진실해야하며 내뱉은 내용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만큼 숙고하고 운을 떼는 버릇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말을 차분히 경청하고, 그 뒤에 상대의 의견을 신중히 헤아려 자신의 반응을 표출한다고 한다. '믹시?'는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정돈하고, 상대의 의견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사색의 화두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에 보면 리처드 루이스 스스로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겪은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소개되어 있다:
북웨일즈 지방에서 여름학기에 영어 수업을 맡은 적이 있다. 3개국에서 성인 학생들이 모였다. 이탈리아인 20명, 일본인 12명, 핀란드인 18명이었다. 낮에는 집중 언어교육을 하고, 저녁에는 모임을 가지며 긴장을 풀었고, 가끔 경치가 좋거나 역사적인 장소로 하룻동안 소풍을 가기도 했다.
스노든 산에는 이처럼 정상 부근까지 협궤 산악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어느 수요일엔가 스노든(Snowdon) 산1으로 소풍을 가기로 계획을 세워 두었는데, 전날인 화요일 밤에 세차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10시경 댄스 파티 중에 핀란드 학생 10여 명이 내게 다가와, 빗속에서 진흙탕이 된 스노든 산을 오르는 것은 재미가 없을테니 소풍을 취소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물론 동의했고, 취소를 공식 발표했다. 그러자 즉시 이탈리아 학생들이 내게 와서 항의하기 시작했다. 왜 소풍을 취소하는가? 우리는 소풍을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다(수업을 안 해도 되기 때문에), 등록금 속에 소풍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비가 조금 내린다고 죽지 않는다, 그나저나 핀란드 학생들은 뭐냐? 핀란드인은 터프하다고 들었는데 등등.
약간 당황하여 나는 캐스팅 보트가 될 일본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들은 정말로 매우 친절했다. 이탈리아 학생들이 가고 싶어 한다면 이들도 역시 따라갈 것이고, 소풍이 취소된다면 남아서 수업을 듣는 것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학생들은 핀란드 학생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핀란드 학생들은 중얼중얼하며 으르렁대다가 결국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가는데 동의했다. 소풍은 가는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밤새 비는 물을 퍼붓듯이 내렸으며, 내가 방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도 그치지 않았다. 버스는 오전 8시 30분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25분에 나는 우산을 들고 억수같은 빗줄기 속에서 버스로 뛰어 들었다. 버스 안에는 인상을 찌푸린 핀란드 학생 18명과 미소를 짓고 있는 일본 학생 12명이 타고 있었다. 이탈리아 학생은 없었다. 우리는 제 시간에 출발했으며, 끔찍한 하루를 보냈다. 비는 종일 그치지 않고 내렸으며, 우리는 정상에서 구름에 둘러싸여 점심을 먹었다. 진흙탕이 된 채로 오후 5시에 돌아와 보니 이탈리아 학생들은 차와 초콜릿 비스킷을 먹고 있었다. 분별 있게 침대에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핀란드 학생들이 왜 그랬느냐고 묻자 이들의 대답은 비가 오니까 그랬다는 것이다.
저자 리처드 루이스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이 책에서 하는 이유는 국민성에 따른 마음가짐의 차이를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학생 몇 명이 버스에 탔고, 핀란드 학생 일부가 침대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들의 행동은 개개인의 차이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모든 핀란드 학생은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이탈리아 학생은 라틴민족 특유의 유연성을 발휘했다. 일본 학생들은 또한 집단적 본능에 맞게 완벽한 결속력을 보여줬다.2
각국의 문화와 습성을 두고 우열을 논하는 것은 분명 무의미하다. 이는 핀란드인이 우월하다거나, 이탈리아인이 열등하다는 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님을 방문객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이다. 다만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특성을 가진 집단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그런 다양성을 느껴가는 과정이 매우 즐거울 따름이다.3 그리고 그들의 모습들로부터 우리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빌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 웨일즈 지방 최고봉(그래봤자 높이는 1,085m지만)을 자랑하는 산이다. 이곳은 최근에 Orca 님이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으니, 자세한 보충설명을 기대한다.
- 리처드 D. 루이스 (2008). 『미래는 핀란드에 있다: 국가 경쟁력 1위의 비밀』 (박미준 譯) (pp. 303-305). 파주: 살림출판사. (원전은 2005년에 출판)
- 아무래도 이에 대해서는 브루노 보제토(Bruno Bozzetto)의 걸작 "Europe and Italy"가 연상됨을 주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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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이 이야기는 민족간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님에도
순간적으로 핀란드인이 이탈리아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니 서열화시키기 좋아하는
우리사회에 제대로 젖어있는 자신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뭐 2차대전때의 이탈리아군의 삽질 얘기도 널리 돌다보니
이탈리아는 웬지 유럽의 2류국가처럼 느껴지는군요.
사실은 우리보다는 훨씬 앞서있는 나라일텐데요^^
제가 겪어본 바로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꽤나 좋더군요. 이탈리아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어 저녁 내내 떠들다 보면 인생의 행복이 이런거구나 라는 느낌을 가지고는 합니다. 하여간 이탈리아가 천태만상의 국가이기는 한 모양입니다. 자신들도 한 나라 안에서 그렇게 큰 다양성이 있는지 놀랍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니까 말입니다.^^
"비가 오니까 당연히 안 갔다"는 이탈리아 학생들의 말....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역시 이탈리아인이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네요.
만약 한국 학생이 15명 정도 섞여 있었다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합니다. 근데 한국 학생들은 한 가지로 일치된 모습을 보였을 것 같지는 않네요(...)
아,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핀란드/일본 학생들 중에 미녀가 여럿 있었다면 이탈리아 학생들도 비가 오건말건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만 해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런 다양한 변인들을 놓고 실험이라도 쉽게 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기차 한 번 타 보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게 저렇게 작아도 증기기관차입니다. 하얀 증기 내뿜으며 기어 물고 칙칙폭폭 올라가는게 나름 운치있을 것 같습니다. Orca 님이 어서 경험담을 소개해주셔야 할텐데 말이죠.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집단적 반응이었다면 '같은 성향이 논의 없이 표출된 것'인지 아니면 '집단 내부의 논의의 결과'였는지 궁금합니다. 이 또한 집단 간 다양성 중 하나일테니까요. 잼나게 읽었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Us and Them, Understanding Your Tribal Mind, David Berreby)이 떠올랐습니다.
그건 그렇고 Snowdon에 snow가 없네요. :)
그런 점에 대해서도 자세한 관찰이 있었으면 분명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관련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헌을 한 번 찾아봐야 겠습니다. 그리고 Snowdon은 예전에는 눈이 많이 왔다고 하는데, 여기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예전같지 않다고 하더군요. 눈이 팍 줄어 스키장 운영도 힘들어지는 덕유산이 생각났습니다.
재밌는 일화네요 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핀란드 학생들 좀 많이 황당했겠군요.....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충격을 겪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탈리아 인에 대한 일화들은...
대인배의 나라...
재미있는 일화네요.
이탈리아인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인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일조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이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읽다보니 전에 봤던 한 동영상이 생각나네요.너무 재밌게 본 에니메이션이였는데 보고 나서 참 한국이랑 비슷한게 많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보세요 .. ^^
http://kr.youtube.com/watch?v=aOo36FnSTqQ
아, 이게 제가 위의 미주에서도 소개한 브루노 보제토의 "Europe and Italy"군요. 브루노 보제토 씨의 작품은 역시 재밌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탈리아 사람들은 귀여운 구석이 많은듯...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매우 흥겨운 사람들입니다.^^
ㅎ
영국에는 잘 돌아가셨는지요? 앞으로도 재밌는 소식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그 핀란드 학생 입장이라면 이탈리아 학생들의 콧잔등에 한방 날렸을지도;;;;;;; 정말 얄밉네요. ㅋㅋㅋ
얄밉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하하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탈리아를 찬양하라!!
댓글 감사합니다. 역시 이탈리아에 다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요.^^
이탈리아인 학생들의 행동은 '사기'이상 그 무엇도 아니라고 봅니다.
알고 보면 별다르지 않은 것이 바로 사기이죠.
그것을 유연성이라 보는 것에 동의하고 싶진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