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전을 비롯한 2차 세계대전기 군사이론에 대한 오해들
2차대전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참전국들의 군사사상, 군사이론, 교리체계 등에 대해서도 잘못된 인식이 아주 폭넓게 퍼져 있음을 곳곳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러한 오해들에 대해 필자가 접해 본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 독일의 전격전과 소련의 종심작전 교리는 영국의 풀러와 리델-하트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이 영국식 기동전 이론의 진정한 계승자이다.
- 소련의 종심작전 교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전격전 이론으로부터 배워온 것이며 그 내용도 전격전의 대규모 적용에 지나지 않는다.
- 전격전은 구데리안 등이 독일군 내의 보수파들의 심한 견제 속에서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자리잡게 만든 독일군의 기본 군사교리 체계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러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진실과는 엄청나게 동떨어진 이야기들이다. 당장 맨 처음 이야기한 독일과 소련의 기동전 관련 사상들이 상당부분 영국의 영향이란 주장은 전후 승전국의 입장이던 영미 연합국의 필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독일은 이미 대전 이전부터 프로이센 육군에 면면히 흘러내려오는 기동전의 개념이 있었으며, 소련은 광범위한 전장에서 벌어진 적백내전기의 경험을 통해 기동전의 개념을 체득하고 있었다. 풀러의 Plan 1919 같은 경우 독일-소련의 이론가들에게 많은 주목을 이끌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것은 실제 야전훈련과 기동부대 편성 등으로 현실성 있게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좀 더 특별히 주목을 받은 것일 뿐이고, 이론적인 측면만 따진다면 여타 다른 나라에서도 동등한 수준으로 주목을 받은 수많은 논문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리델-하트의 경우는 평균 이상 주목을 받았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 그것은 대부분 리델-하트가 전후에 유명한 전쟁사가로서 독일군 장교들을 취재했고, 많은 독일군 장교들이 예의상 그를 치켜세워주었으며, 리델-하트 또한 자신의 많은 저서에서 그런 부분을 언급했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이다.
 J. F. C. 풀러 소장 |  B. H. 리델-하트 |  H. 구데리안 상급대장 |
또한 소련군의 종심작전 교리는 독일군의 전격전과는 그 뿌리에서건 세부적인 측면에서건, 사고의 범위에서건 차원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소련은 이미 대전 이전이나 이후에나 학문적 군사과학(military science)의 체계화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한 나라였다. 소련군의 종심작전 교리는 같은 시대 어느 열강들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체계를 갖췄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험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 대규모 공수부대의 운용, 대규모 기동집단의 운용, 대규모 화력지원 집단의 운용 등 갖가지 분야에서 소련군은 대전 이전부터 한참 앞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1937년 대숙청과 그 회오리 속에서 종심작전 교리를 실천할 경험 있는 간부층이 소멸되면서 대전 초기 참화를 겪었을 뿐이다. 오히려 대전 중기 이후 신진 세대의 등장과 혹독한 정비를 통해 거듭난 소련군의 기동전 체계는 독일군의 체계를 압도해버렸음을 역사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소련의 종심작전 교리는 하나의 잘 짜여지고 정립된 교리 체계로서, 뒤에서 보게 될 공허한 전격전의 개념과는 동일선상에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이면에는 사실 전후 냉전 시기 적국인 소련의 용병술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시각도 깔려 있다. 위에 열거한 오해 1, 2번의 맥락은 결국 영국→독일→소련 순으로 맥을 계승했다는 족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원조 스승은 영국이고, 독일은 똑똑한 제자이며, 소련은 그 제자에게 두들겨 맞으며 배운 사이비 문하생 정도라는 지적 오만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에 나오는 전격전(Blitzkrieg)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 이것에 대해 오늘 이 글에서 좀 더 깊이 논해보기로 하자. 기실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특히 독일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면 "전격전"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격전이란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보았을 때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대개의 2차대전사 팬들이 전격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은 유명한 독일군 전차관련 사이트인 Achtung Panzer에 나와있는 전격전 개념정리 부분에서 잘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전격전의 개념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 공군이 우선 적의 전선, 후방거점, 주요도로, 공항, 교통중심을 공격한다. 동시에 보병들은 전 전선(또는 주요 지점들)에서 공격을 하고 적과 교전한다. 이로서 적이 주력이 어디에 투입될 것인가 판단하지 못하도록 한다.
- 집중된 전차부대들은 적 주 방어선을 돌파하고 적진 깊숙히 돌진해나간다. 동시에 이를 뒤따르는 기계화부대들은 방어부대를 추격하고 지속적으로 교전하여 적이 철수해서 효과적인 방어망을 재정비하는 것을 방해한다.
- 보병과 다른 지원부대들은 공격을 종결짓고 적을 포위할 다른 부대들과 연결하기 위해 적 후방을 공격한다.
- 기계화집단은 적의 거점을 우회하고 후방을 마비시키며 적 영토 깊숙히 돌입하여 적 방어부대가 효과적인 방어거점을 재확립하는 것을 방해한다.
- 주력부대는 다른 부대들과 연결하여 적을 포위하고 차단한다.
하지만 여기서 열거한 내용들은 어떤 하나의 체계 하에서 존재하는 원리들이 아니다. 이 각각의 항목들은 사실 독일군의 여러 군종, 병과에서 채용한 작전술/전술 개념들을 온통 뒤섞어놓고 실제 전례에 그럴 듯하게 끼워맞춰서 "전격전 교리"란게 있는 것처럼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우선 독일 육군은 공군의 지상지원을 대단히 중요시 여기고, 1920~30년대에 걸쳐 이를 위한 효율적인 지휘통제체계를 구축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것이 어떤 육군의 작전체계에 종속적으로 편입된 개념은 아니었다. 또한 더 언급을 하겠지만, 여기서 보이는 유명한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의 개념은 전차의 개발과 기계화부대의 등장으로 인해 새롭게 창안된 것이 아니다. 독일군의 포위섬멸전 사상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강했고, 독일 군사사 전반에 걸쳐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으로서 그 뿌리도 매우 깊었다. 전차를 비롯한 장갑차량, 기동수단, 무선통신수단의 발달은 이러한 전통적 작전의 실행 효율을 크게 향상시킨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전격전 하에서 기갑부대는 방어선 돌파 후 적 후방으로 한없이 돌진하여 적의 지휘체계를 총체적인 혼란에 빠뜨리고 "마비"시켜야 한다는 통념은, 이러한 포위섬멸전의 맥락에서 실제 독일군이 추구하던 바와는 많은 부분에서 배치되는 것이었다. 편제상으로도 독일군 기갑부대는 종심작전 교리에서 필요로 하는 소련군의 기갑부대와는 달리 기동성이 보강된 다용도 사단의 성격이 강했다. 독일군이 수행한 많은 포위섬멸전에서 기갑부대들은 돌파 이후 대규모의 희생적인 전투를 회피하지 않은채 적 섬멸에 직접적으로 참여했고, 기동방어라는 이름으로 숱한 방어전에도 동원되었다. 오히려 기갑부대와 그 집단이 보병지원용, 방어선 돌파용, 후방 침투용 등으로 명백히 구분지어져 후방으로 적의 지속적인 마비를 위해 돌진하는 것은 독일군 교리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소련군 종심작전 교리의 특징에 가까웠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군사사상과 작전 체계를 독소전의 실제 전례와 비교하는 것은 이후 동부전선전사 정리를 하면서 꾸준히 시도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해 하나하나 뜯어보면 위에 열거한 특징들은 독일군이 실제 추구하고 확립한 교리 체계에 근거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 자체로도 모순되는 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전격전이란 무엇인가? 이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대니얼 휴즈가 1980년대에 쓴 글 하나를 이어가기로 하겠다. 글을 읽기 전에 이 글이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야겠는데, 1970년대 말 이래로 당시의 미군 내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그 동안 미군이 계속 추구해 온 소모전적 교리들을 새롭게 개혁하여 기동전의 개념을 채용하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 수준의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실 군사학의 수준은 소련, 독일 등에 비해 한참 뒤지는 나라여서, 이러한 새로운 운용 교리의 도입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따르고 있었다. 결국 독일과 소련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기동전 교리의 도입을 위해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독일의 "전격전"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보여준 화려한 전격전의 체계를 미군에서 최첨단 기술과 함께 부활시켜 당시 위협적으로 간주하던 바르샤바 조약군의 거대한 기동군 위협에 맞서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2차 세계대전기 독일의 전례들을 "전격전"이라는 틀로 짜맞추어 이해하고 이를 미군의 기동전 교리에 심어넣고자 노력하게 된다 — 그 결과로 1980년대 초에 들어와서야 아주 어중간하고 애매하기 그지없고 (결국 후일 실패작으로 끝나는) 공지전(Air-Land Battle) 교리가 도입되게 된다. 대니얼 휴즈는 바로 이러한 독일 군사이론에 대한 미국측의 자의적인 해석이 실제로 독일군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별 근거가 없는 것이며, 심지어는 독일군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전격전이란 무엇인가?
Hughes, Daniel J. 1996. Blitzkrieg. [ed.] Franklin D. Margiotta. Brassey's Encyclopedia of Land Forces and Warfare. Dulles : Brassey's Inc., 1996, pp. 155-162.
전격전(Blitzkrieg)이란 독일어 낱말은 1939년 9월 폴란드전역을 지켜본 비 독일계 관찰자들에 의해 처음 유명해진 이래 세월이 더해가며 매우 다양한 범위의 외연적, 내면적 의미를 얻게 되었다. 나찌 경제 구조에 대해 연구해온 역사가들 중 상당수는 동일선상의 전반적인 군사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단기전을 위한 조직적인 경제 계획 속에서 전격전 전략의 존재를 찾아왔다. 하지만 진짜 독일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또 그래서 정말 장차 전쟁의 부담을 미리 준비해놨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에서 조차 이견은 존재한다. 전략과 군사작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필자들은 독일군이 공격적인 전쟁에서 신속하게 승리하기 위한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고 이야기해왔다.
이러한 주장들의 새로운 형태는 근래 주로 미국의 군사 문헌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상당수의 저자들은 전통적인 전투를 통해 적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교란시키고 혼란에 빠뜨림으로서 전투와 전역에서 승리하도록 고안된 특정한 전술과 작전 체계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미국에서의 소위 군사개혁운동과 미 육군 내 공식, 비공식의 교리 사상 양쪽 모두에 많은 개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런가하면 다른 역사가들은 아예 기계화전의 전 시기를 "전격전 시대"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전격전 시대는 최소한 1980년대까지 잡아야 하며, 기동전에 대한 소련의 접근도 여기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정통파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독일 제국주의자들이 양대 대전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기울인 광범위한 노력을 전격전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관점들은 모두 전격전 뒤에는 정치적이거나, 경제 계획적이거나, 군사 교리이거나, 군사 방법론 적이거나 어쨌건 뭔가 어떤 큰 계획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러한 모든 해석이 잘못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전격전은 어떤 정책도, 경제적 수단도 아니었으며, 군사 교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쯔 구데리안(Heinz Guderian)이나 다른 이들이 독일군의 기갑부대를 위해 혁신적인 전술적, 작전적 교리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게 사실이다. 많은 역사가, 언론인, 정치학자들, 그리고 최근에는 미군 장교들도 이런 소위 전격전 교리를 결전을 치루지 않고서 적을 마비시키는 기동전의 사용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들은 전격전의 목적과 방법론에 대한 이론을 열심히 개발해왔으며, 그들의 결론을 지지하는 많은 여론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시각의 확산을 통해 현재 군사 사상에 순수한 학술적 중요성 이상의 이슈를 던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독일군 교리의 본질
어떤 군사적인 측면에서 전격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근본적으로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은 1919~45년 시기의 독일 군사 교리의 본질이다. (여기서 교리라 함은 군대의 전쟁 철학과 그 뼈대 안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전투를 치루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를 의미한다.) 독일군의 교리 교범들은 상황에 따라 지휘관들이 적용해야 할 근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독일군의 교리는 어떤 전쟁의 포괄적인 원리나, 신조, 명령은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지도, 도표, 도식 등으로 채워진 틀에 박힌 도해는 있어봤자 극소수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엄밀성과 확고한 기준은 없지만 독일군의 교리는 차량화된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단위부대에 적용할 수 있는 군사행동에 대해 꾸준하게 긴밀히 접근해갔다. 그래서 대규모 기갑부대 창설 이전에 쓰여진 1933년판 「부대지휘론(Truppenführung)」에서는 이미 기갑부대에 적용하기에도 충분히 유연한 개념들을 담고 있었다.
두 종류의 전쟁
1919년과 1945년 사이의 독일 군사이론에서는 기동전과 진지전, 이렇게 두 종류의 전쟁을 구분하고 있었다. 1914~18년의 긴 진지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독일 내 대다수 군사이론가들은 일관되게 진지전을 미래의 모델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거부했으며, 대신 프리드리히 대왕, 몰트케, 슐리펜의 전통으로 복귀할 것을 그리고 있었다. 이 관점에서는 정적인 전선에서 지나치게 세심하게 준비된 단편적인 공격들과 큰 결정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로 점철된 1차 세계대전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었으며 작전 상의 고집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동전 기반 이론으로의 복귀는 종전 직후부터 즉시 대두되었다.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장군과 그의 동료들, 계승자들이 1918년 이후 이러한 기동전 이론으로의 회귀에 대해 공적(또는 책임)이 있지만, 진실은 사실 더욱 복잡하다.
 L. 베크 상급대장 |  O. 루츠 기갑대장 |  H. v. 젝트 상급대장 |
젝트와 그의 선임자들
젝트의 기동전 부활은 때때로 이야기되는 것만큼 그렇게 중대한 혁신은 아니었다. 그의 새로운 1921년판 기본 교범인 「지휘와 전투(Führung und Gefecht)」는 전적으로 전통적인 독일 군사이론의 넓은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교범이 출판되기 전에도 이미 새로운 독일군은 1914~18년 진지전의 대안을 계속 찾아왔다.
1918년의 독일군 공격 방법이야말로 서부전선에 기동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주 오해되고 있는 돌격부대(Stoßtruppen) 전술은 결국 전통적인 기동전으로 복귀하는 수단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결코 이런 근본적인 원칙들에 대한 독일군의 신뢰를 흔들어놓지 못했다. 이미 1920년에 빌헬름 발크는 독일의 전시 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을 지적하고 기동전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같은 해, 대전 이전의 주도적인 군사이론가이자 공간사가이던 휴고 폰 프라이탁-로링호펜 남작은 기동전으로의 회귀를 전후 독일 군사이론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대전 직후 시기 주도적인 반(半) 공식 편람이던 로어베크의 「전술(Taktik)」은 그 논의 전체를 기동전과 진지전의 전통적인 구분에 초점을 맞췄으며, 과거 전쟁의 경험을 아무리 돌아봐도 기동전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전통적인 프로이센의 개념
젝트의 새로운 1921년판 교범은 공식적으로 기동의 원칙이 계속 지배적인 원리임을 확인시켰으며, 결국 기동성과 화력에 바탕을 둔 빠르고 결정적인 공격행동에 중점을 두던 전통적인 프로이센 육군의 개념에서 멀리 벗어나본 일이 없던 장교단에게 와 닿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1919년과 1939년 사이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하다. 프로이센의 군사 지도자들은 항상 그들의 군사체계가 기동전의 요구와 기회에 유일하게 적합하다고 믿어왔다. 프로이센 육군은 신속한 공격행동, 지휘관의 재빠른 결정, 모든 계급에서의 자주적 판단, 예하 지휘관들에 의한 독립적인 행동, 위험부담의 감수, 높은 손실의 감내, 불확실성의 이용, 심리적 요인의 중요성, 즉흥성 등에 기반하여 기동전의 준비를 해왔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독일군의 교육 및 훈련 체계의 우월성과, 전장에서 그 군사이론들을 실행하는 독일군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이어졌다. 1921년 젝트가 새로운 국방군(Reichsheer)의 책임을 맡았을 때나, 나중에 기계화를 통해 육군이 기동성을 달성하는 새로운 수단을 얻었을 때나, 기동전은 모든 프로이센식 시스템이 집약된 핵심 개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교리
결국 독일군 전차부대의 씨앗은 오랜 세월 프로이센의 군사 전통과 1차 세계대전 전후 젝트와 다른 이들이 잡아놓은 군사이론적 체계로 잘 준비된 토양에 뿌려질 수 있었다. 독일군은 어떤 특별한 전격전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런걸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나 영국에서의 상황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기계화전에 대한 현대적 접근법의 확립에 군 견해를 혁신할 필요가 없었다. 구데리안과 루츠(Oswald Lutz)가 대규모 기갑부대의 운용에 대해 몇몇 폭넓은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는 했지만, 1939년에 어떤 공식적인 이론이 존재한건 아니었다.
독일군이나, 전격전, 전차전에 대한 유명한 연구들 중 상당수는 일반적으로 독일군이 "정말로" 그런 교리나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론을 제쳐두면 세세한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일치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렌 데이턴(Len Deighton)의 유명하고 영향을 많이 끼친 연구에서는, 이러한 전격전의 방법론에서는 좁은 정면의 전선에 대한 집중공격이 수반되며, 따라서 2차대전에서의 유명한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들은 전격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개념에 따르면 전격전은 단지 1940년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이고, 그것도 단지 구데리안의 부대들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데이턴이나 다른 어느 누구도 1940년의 독일군의 전쟁 수행 방법론이나 전망이 1939년 전역의 그것과 달라졌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 주장 — 전쟁 초기 독일군의 전쟁 수행 관점과 방식은 별 변화가 없었다 — 에 대한 강한 증거들이 학계에 많이 제시되어 있다. 한편 메신저의 책에서는, 독일군은 풀러가 주장하던 적의 지휘계통을 공격하여 마비를 일으킨다는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영향력 있는 군사개혁가 윌리엄 린드의 견해와도 크게 보면 맥을 같이한다. 그래서 몇몇 근래의 군사이론가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용하여 전격전 이론과 근래의 "작전종심", "무게중심" 등의 개념을 연관짓고는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주장을 독일군의 교리 교범이나 규정집들에 기반을 두고 연관지어 설명하지 않았다.
구데리안의 견해
구데리안의 견해, 특히 대전 이전에 발표해온 글들은 전반적으로 독일군의 군사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주목할만은 하다. 반면 전후 수많은 저자들은 구데리안이 자신의 회고록에 기술한 대로, 보수적인 상급자들이 기갑부대에 대한 그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할 대규모의 독립적인 전차부대를 창설하는 것을 방해해왔다는 다툼을 종종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구데리안 자신의 회고록은 이 시기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없는 문헌 중의 하나이며, 그는 여기서 루트비히 베크 장군을 비롯한 대다수 참모장교들이 포함된 그의 정적들에 대해 폄하하거나 독설을 퍼붓고 있다. 기실 구데리안의 회고록이나 독일 기갑부대의 발전에 대해 남긴 상당수의 글들 어느 것도 그가 기갑부대에 대해 꿈꿔오던 목적이나 방법론에 대해 명확한 밑그림을 제공해주지는 않고 있다.
붕괴(disruption) 이론이라는 오해
학술문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견해차의 결과로, 많은 일반 민간 저자들이나 군사 저술가들은 전격전 방법론을 "붕괴 이론(disruption theory)"이라고 불리우는 지경까지 확대시키는 수준으로 나아가버렸다. 이 견해에 의하면 전격전 작전 개념의 본질은 적의 지휘 및 통제 시스템을 파괴하고, 희생이 많이 따르는 전투나 장기간의 전역 없이 적의 저항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적의 마비"가 군사 작전에서의 주요 목표로서 "적의 격파"를 대체해버린 것이다. 이 개념은 미국에서의 소위 군사개혁운동(military reform movement)의 상당한 기반이 되었으며, 미 육군의 기동전에 대한 공식, 비공식 견해의 재료가 되어왔다. 근래에는 정치학자들까지 이런 전격전, 기동에 대한 견해들과 함께, 전격전과 소모전 사이의 차이를 바탕으로 전략과 군사 교리의 조직적인 기원에 관한 이론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섬멸(annihilation) 원리
독일군이 여러 전투와 작전을 통해 정말 무엇을 달성하려고 했는가를 정확히 판단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육군의 공식 규정집(「부대지휘론 Truppenführung」)과 위에서 언급한 독일 이론가들의 저술을 고려해봐야 한다. 독일군의 전술적, 작전적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은 적 섬멸에 대한 끊임없는 강조이다. 독일군은 섬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들의 전통적인 기동전 이론에 의지하였다.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가능한한 가장 유리한 환경 하에서 전통적인 섬멸전을 실행하는 것이지, 그런 전투를 회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기갑부대들은 새로운 기동성의 수단으로 밝혀졌고, 화력을 증대시켜주었다; 그들은 독일군의 교전행위에 대한 접근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붕괴 개념와 연결되어 불리우고는 하지만, 오히려 구데리안 자신의 저작이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해준다. 1939년 참모본부의 저널에 실린 글에서 구데리안은 공격 시에 기갑부대의 주요 목표는 반드시 적의 장애물, 대전차방어, 포병, 기갑예비를 격파하는 것이어야 함을 적시했다. 그런 이후 뒤따르는 전차대열은 보병의 전투구역 내 잔적 소탕을 돕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썼다.
이것은 이전 1938년에 출간된 작은 소책자에서 제시했던 것보다 약간 더 제한된 개념이었다. 1938년의 글에서 구데리안은 그의 전망을 전술적인 영역으로 제한했으며, 적 전선을 돌파할 때 인접 아군 전차들과 편성하는 3개 제대(Treffen)에 대해 언급했다. 제1 제대는 돌파를 하고 적의 참모부와 예비대를 격파한다; 제2 제대는 적의 포병을 격파한다; 제3 제대는 적의 보병부대를 공격한다. 이러한 임무는 돌파전투와 관계가 있으며 순전히 전술적인 것이다.
구데리안의 더 넓은 견지에서 기갑부대의 제병합동 기능에 대한 기술내용을 보면 어떻게 기갑이론가들이 손쉽게 그들의 이론을 독일군의 전통적인 기동전 개념과 접합을 시킬 수 있었는지 재미있는 예를 제공해준다. 구데리안은 전차가 지나치게 보병에 얽매여있는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이 제정한 특별한 규정을 인용하고서는, 같은 주제에 대해 독일군이 공식적으로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부대지휘론(Truppenführung)」에 언급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즉 구데리안이 인식한대로 이러한 근본적인 규정은 이미 독일군의 공식 군사이론(그리고 독일식 교리)의 바탕에 깔려 있었다. 「부대지휘론」은 결국 돌파를 이용한 섬멸을 중시한 교범이었다. 독일군에게 아직 전차도 없었고 기병사단에 중화기도 보유할 수 없었던 1933년부터 이미 이 교범은 기갑부대에 의한 붕괴이론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정 반대되는 바를 추구했던 것이다.
1933년판 부대지휘론(Truppenführung)
1931~32년 루트비히 베크(Ludwig Beck) 장군의 감독 하에 쓰여진 부대지휘론은 1933년에 공식 등장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군의 기본적인 규정으로 남았다. 이 고전적인 교범은 독일의 기동전 이론, 전술적 개념, 작전 수행에 대한 근본적인 뼈대를 제공했다. 이 교범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 가운데에는 전투 및 작전 목표로서의 적의 섬멸에 대한 부분이 있다. 특히 부대지휘론은 전차부대의 주요 과업으로 전선이 진지전으로 고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의 포병과 예비대를 섬멸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1945년 이후 전격전에 대한 평가들을 기동전에 관한 독일군의 실제 군사이론과 대조-조화시키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데, 이것은 이런 전후 평가들을 구데리안의 대전 이전 저술들이나 다른 현대의 독일측 공식 및 반(半)공식적인 군사이론 연구들과 비교해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쥬다 월락은 자신 있게 「부대지휘론」은 슐리펜의 섬멸전 및 배후 공격에 대한 강조 전통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구 동독의 학자들도 (마르크스 주의의 상투적인 수사를 젖혀놓으면) 이에 대해 똑같이 자신있게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마이클 게이어는 부대지휘론의 저자들은 작전 개념이나 섬멸전의 정의에 있어서 슐리펜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도 이 교범의 토대에서 기동전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기동작전의 기본 개념에 대한 또다른 오해의 한 예는 전격전의 방법론을 정의하는 어려움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다. 한 저자는 전격전의 붕괴 이론에 근거하여 독일군 공세가 좁은 정면에서 돌파를 이뤄내고, 이후 적의 후방에서 집결하고, 다시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데이턴에게서 차용한 것인데 역시 독일 군사이론의 견지에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실 구데리안은 돌파하는 부대의 후위는 적의 반격에 취약하므로 후위의 더 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최대한 넓게 돌파를 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좁은 정면에서의 돌파 주장들을 거부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저자들은 폴란드 전역이나 러시아 전역은 몰트케나 슐리펜 시대에 생겨난 고전적인 포위섬멸전에 의존했기 때문에 전격전의 예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전격전의 핵심 요소라고 보는 적의 심리적인 혼란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구데리안 자신은 항상 전투에서의 적의 섬멸에 대해 써왔으며, 최소한 한 경우에서는 적에 대한 심리적 효과로 승리를 쟁취한다는 아이디어를 확실히 거부했다. 반면 그는 적의 저항은 공격 지구에서 맞닥뜨리는 적을 화력으로 제압함으로서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경우에서건, 독일군 기갑부대의 기본적인 방법론과 이론들은 폴란드 전역부터 프랑스 전역, 초기 러시아 전역까지 별반 중요한 변화가 없었다. 전격전이란 독일이 상대한 적들에 대한 독일 기동전 체계의 신속한 승리를 기술하는 용어였다. 동일한 독일의 체계가 러시아의 매우 다른 환경에서 패배하게 되었을 때, 전격전이란 말은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어떤 전장에서건 전역에서였건, 전격전은 하나의 결과, 또는 아마도 그 결과의 사후 기술에 지나지 않았다. 전격전은 전술적이거나 작전적인 하나의 체계가 결코 아니었다.
최근 전격전에 대한 인식의 변화
필자가 이 글을 처음 소개한 2002년 이후로 국내 뿐만이 아니라 서구 전체적으로도 전격전에 대한 인식의 환기가 폭 넓게 이뤄졌다. 필자는 다른 저작들을 통해 어렴풋이 느껴오던 전격전의 허상을 위의 대니얼 휴즈 씨의 글을 읽고 굳게 인식하게 되었으나, 그 뒤로도 이와 관련된 좋은 저작들을 입수하면서 개념이 더욱 명쾌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2002년 이후 서구에도 널리 소개된 저작들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지 간략히 소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선 단연 돋보이게 영향을 끼친 책은 Periskop Forum에도 소개한 바 있는 칼-하인츠 프리저(Karl-Heinz Frieser)의 「Blitzkrieg-Legende: Der Westfeldzug 1940」이다. 이 책은 1996년도에 초판이 나왔으나 필자도 존재를 어렴풋이 듣고만 있다가 2004년에야 직접 구입을 해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바 있다. 보다 상세한 책 내용은 필자가 정리해놓은 서평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참고 서평 ⇒ [소개] Blitzkrieg-Legende (by K.-H. Frieser)
이 책이 좀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은 영역판이 나오면서이다. 2005년 말에 Naval Institute Press에서 「The Blitzkrieg Legend: The 1940 Campaign in the West」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면서 영어권 독자들에게까지 퍼지자 그 반응이 매우 폭발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영어권 저자들의 한 번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던 전격전에 대해, 독일의 현역 군인이 정통적인 독일군 내부의 시각으로 다룬 시각 자체도 매우 참신했기 때문이다. 부수적으로 전에 볼 수 없던 상세한 내용과 컬러풀한 부도도 한 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기존에는 왜곡된 서술을 그대로 올려놓고 있던 영어 위키피디아도 'Blitzkrieg' 항목을 일신하면서 이 저작을 많이 참고한 것을 보면 그 영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저작이 머지 않아 올해(2007년) 중반 쯤에 국내에도 번역-출간될 예정이라는 점이다. (사실 순수한 번역 작업은 1년 전에 완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출판사의 게으름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필자도 원고를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독일 유학도 다녀오신 현역 기갑장교 분께서 번역하셨으니 날림 번역으로 인해 원작의 질을 해칠 위험은 없으리라 본다. 이제까지 전격전의 대표 사례로 암송되다시피 하던 1940년 서부전역의 실체에 대해 지적 충격이 가해질만한 책이니, 번역본이 나오면 필히 일독해보시기 바란다.
그 다음에 언급할 만한 의미있는 책은 메리 헤이벡(Mary R. Habeck)의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이다. 코넬대학교 출판부에서 2003년에 나온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성격의 저작이다. 여성인 저자가 이런 책을 썼다는 것도 조금 신기하지만, 내용도 전간기 독일과 소련 양국에서 어떻게 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되새기며 기갑부대의 교리를 발전시켜 왔는지에 대해 알찬 내용들을 담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소련의 기갑부대 교리에 대해 투하쳅스키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의식 속에서 전격전에 대한 구데리안의 역할 만큼이나 과장된 거품을 빼는데 꽤나 도움이 되는 책이다.
또 하나의 저작, 아니 사실 저작이라기 보다는 언급할 만한 저자는 로버트 시티노(Robert M. Citino)를 들 수 있다. 이 저자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캔자스대학 출판사를 통해 3권의 책을 출간했다 — 첫 작품이 「Quest for Decisive Victory: From Stalemate to Blitzkrieg in Europe, 1899-1940」, 그 다음이 「Blitzkrieg to Desert Storm: The Evolution of Operational Warfare」, 마지막이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이다. 저자는 독일 군사사를 깊이 있게 연구해 온 전문 사학자로서 보다 통시적인 군사학의 발전 과정에서 '전격전'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세 저작 중 앞의 두 책은 연작으로서 기동전 이론이 발전해온 역사적인 흐름을 19세기 말부터 걸프 전쟁에 이르기까지 짚어내고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40년 독일군의 서부전역을 정확히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를 서술하여 역사적 중요성을 한층 강조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전이 부닥쳐 온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동전이 다채롭게 발전해왔는지 통시적으로 바라보는 데 유익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책은 프로이센 군사사의 관점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바라보고 있다. 독일이 통일되었어도 그 핵심 중추와 역사적 맥락은 프로이센 군을 계승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독일 장교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적 개념과 전쟁에서 추구한 목표들도 프로이센 군의 전통적 관점을 정확히 이해할 때만이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논지이다. 이 또한 의외로 무시하기 쉬운 독일군 고유의 관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아무튼 근래 점점 정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2차 세계대전사 분야에서 확연히 개선되는 현상은, 교전 당사국 각각의 고유의 시각을 존중하며 그들의 관점에서 당대 사건들을 이해해보려는 저작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당장 국내만 보더라도 지난 10년 전과 달리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다채로운 언어의 정보들이 많이 소개가 되고 있으며, 이들을 소화할 수 있는 동호인 층이 늘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항상 상식의 허점과 오류를 파고드는 유익한 정보 생산과 공유에 애써주셔서 곳곳에서 읽는 즐거움을 업해주시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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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매우 관심있는 책이지만 아직 구입하지 못한 물건인데 이렇게 내용을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올려주신 내용을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요.
그다지 상세한 책 리뷰를 올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용이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긴 한데, 역시 높아진 유로 환율에 너무 가격이 올라 선뜻 주문하기는 어려운 책인 것 같습니다.
결벽증 탓인지 저런 식의 금일봉 수여에는 좀 껄끄럽다는 느낌인데, 저때는 저게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히틀러는 저걸 개인 돈(비자금 포함)으로 줬을까 아니면 정부 예산을 멋대로 유용해서 줬을까 궁금해지는군요. -_-;
후자이죠.^^ 총통 각하의 한말씀에 충직한 공무원들이 열심히 서류 만들어서 처리했을 겁니다. 기본 세팅이 이미 어긋났으니 법과 행정절차는 그저 각하의 의지에 분칠하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채승병님.. 오랜만이네요..
결혼하셨나보네요..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금일봉치고는 참 많은 돈을 뿌리셨군요..
열심히 서류 만들었을 공무원들 생각하면 저 역시 웃음만 나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부산에서의 공무원 생활은 여전하시죠? 언제 놀러오실 일 있으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전두환 전대통령 부하들은 노태우 전대통령 부하들에 비하면 "먹은 값"을 했다고들 하지요^^;;
이게 꼭 자기 "부하"들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닌 것이..."효자동 이발사"의 원래 모델이었던 진짜 청와대 이발사 했던 분의 인터뷰를 보니, (대통령 되기 전 장군일 때) 어쩌다 머리를 깎고 이발료를 줄 때도 노태우 전대통령은 일전 한푼 어긋나지 않게 딱 이발료만 주는데, 전두환 전대통령은 집히는 대로 꺼내서 쥐어주면서 "응, 수고했어! 회식이나 해!"그랬다고 하더군요.
노(태우) 前대통령은 씀씀이도 꽤나 짠돌이였다지요? 제대로 풀 배포도 없으면서 자칭 '통치자금'을 왜 그렇게 많이 쌓아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게 관행이려니 하면서 어설프게 좇은게 아닌지. 어쨌건 오늘도 전 前대통령 각하께서는 29만 원의 기적을 베풀고 계시겠지요.ㅍ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