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저녁 운동을 하고 지친 몸으로 느즈막히 현관에 들어섰다. 서둘러 유청단백질을 휘휘 들이키고 거실 소파에 앉아 킨 TV,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어딘지 낯 익은 얼굴이 보이는게 아닌가. '앗, 저 양반은……'

한 눈에 알아보는 분이 있으신지 모르겠으나, 바로 다니엘 여긴(Daniel Yergin)이다.1 홈지기의 책장 한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꽂혀 있는 책 『황금의 샘(The Prize)』의 저자이다. 책날개에 박힌 저자 사진이 어디가 인상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재빨리 떠올랐다. 이 『The Prize』는 석유를 둘러싸고 엎치락뒤치락한 강대국들과 석유 메이저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다룬 책으로서, 여긴은 이 책으로 1992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대략 15년 전쯤에 이 책을 샀던 것 같은데, 당시 대학생이 된지 얼마 안 된 홈지기는 석유 그 자체보다도 책 내용 중에 2차 세계대전 중 석유 쟁탈을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이유로 3권 1질을 덥썩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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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양반이 갑자기 왜 TV에 나오나 싶었는데 조금 보다보니 다시금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 이 프로그램도 그, 다니엘 여긴의 동명 넌픽션을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바로 『Commanding Heights2』였다. 원작은 지난 1998년에 출간된 것으로, 당시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급부상하던 신자유주의와 글로벌화를 둘러싼 이슈를 다각도로 파헤친 작품이다. 이번에 KBS에서 방영3는 하는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가 이후 2002년에 9/11 이후 미국의 상황을 반영하여 조금 다른 관점의 3부작 다큐멘터리(총 6시간)로 이를 정리해낸 것이다. 꽤나 오래 전에 본 다큐멘터리인데 이렇게 다시 맞닥뜨리다니 반가움과 어색함이 교차했다.
이 작품의 함의는 부제에서도 미묘하게 드러난다 — 『The Battle for the World Economy (세계 경제를 둘러싼 전투).』 여기서 전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시장'과 '정부'이다. 최근 새로운 서브프라임발 경제위기를 맞아 다시금 가열되고 있는 정부와 시장의 역할이 떠오르지 않는가? 여기서는 이 논의가 실은 얼마나 지난 한 세기 자본주의 역사를 달궈온 것이며, 얼마나 많은 논란과 반전 속에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조망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다음의 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 The Battle of Ideas
첫 번째 에피소드는 20세기 경제사의 쟁쟁한 두 거두, 케인즈와 하이에크가 중심 인물이다. 잘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글로벌화된 세계 경제에서 이들은 각자의 독특한 논점에서 지향점을 제시한 이들이었다. 맑시즘과 경쟁하는 자본주의가 처한 위기 상황에서, 케인즈는 일반이론 이후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고, 하이에크는 일관되게 자유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후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케인즈주의가 대세로 자리잡았으나, 상황은 역전되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는 새롭게 글로벌 스탠다드로 부상한다. 자본주의 진영 내부에서 벌어진, 이러한 정부와 시장의 역할을 둘러싼 이론의 부침이 20세기의 역사적 순간과 오버랩되어 펼쳐진다. - The Agony of Reform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부상과 이어지는 1990년대 공산주의의 몰락은 세계 곳곳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맑스주의 혁명의 세기가 끝나며 거꾸로 자본주의 혁명이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그 현장을 동유럽(폴란드), 러시아, 남미(볼리비아나 칠레), 인도 등 다양한 국가들의 경험을 통해 조망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체제 붕괴로 인한 거센 세파에 내몰린 동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이른바 '시카고 보이'들에 의해 경제변화를 강요당한 남미, 네루의 제3 세계 노선에서 벗어나 세계경제로 편입해간 인도…… 기존의 체제를 버리고 자본주의로 이행한 국가들이 얻은 외형적 번영과, 그 속에서 깊어져간 골과 신음이 동시에 펼쳐진다. - The New Rules of the Game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는 희망의 약속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재앙의 뇌관이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붕괴될 때만해도 예측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1990년대 후반이 되자 점차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세계 경제를 국경 없이 넘나드는 자본의 힘이 현대의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살펴본다. NAFTA 이후 멕시코의 난점들, 급부상하는 아시아 네 마리 용과 중국,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 등의 익숙한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는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로 기존의 발전모델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현장, 이어 대두되는 글로벌 양극화와 반 세계화 움직임도 펼쳐진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모호함에 갇혀버린 세계의 파노라마 속에서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내용 요약을 보면 알겠지만, 실로 상당한 분량의 이슈들을 포괄하고자 한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다 보니 각 에피소드에 2시간씩이 할애되었어도 충분히 깊이 있는 분석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각 꼭지(chapter) 마다 수 분간 펼쳐지는 시간들은 너무나 짧게 느껴지고 이래가지고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충분한 설명이 될까 우려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PBS의 이 『Commanding Heights』에는 독특한 매력이 느껴진다. 뭐랄까, 내용의 단순한 정보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장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홈지기가 이전에도 몇 개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면서 누누히 이야기했지만, 정보의 양과 질 면에서 다큐멘터리는 책을 따라오기 힘들다. 2차 세계대전사도 당연히 잘 정리된 책을 통해 훨씬 압축적으로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장답사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The Battle Box' 답사기에서도 밝혔듯이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봤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르다. 말레이 전역과 싱가포르 전투에 대해 책에서 받아들였던 정보가 다시 풀어 헤쳐지면서 좀 더 몸에 꼭 맞는 느낌으로 다시금 자리잡는 것이다.
홈지기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그런 감흥을 많이 느꼈다. 홈지기도 문헌으로야 케인즈주의자나 하이에크주의자들의 주장을 여럿 섭렵했으니 나레이터의 해설은 좀 진부했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 케인즈의 남긴 육성이 흘러나오자 짜릿함을 느꼈다. 그리고 하이에크가 생전에 가진 인터뷰들에서 파란의 시기에 대한 회고를 늘어놓는 모습에서 한층 고조되는 박동을 느꼈다. 그들은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죽은 옛사람이 아니라 이렇게도 한층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충격이었을까.
또 다른 장면을 보자.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정부 개입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풍조에 위기의식을 느낀 하이에크가 유명한 몽펠르랭회(Mont Pélerin Society)를 만든 것을 아시는가. 스위스의 한적한 리조트에서 당대 자유주의 수호의 거두 39인이 모였던 방의 모습과, 이미 고인이 된 이들의 생전 회고가 펼쳐질 때는 꽤나 숙연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들 이야기해왔던 브레튼우즈 체제는 또 어떠한가. 그 이름이 붙게 된 회의장소, 뉴햄프셔의 브레튼우즈가 시청자의 마음을 편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인지는 여기서 처음 알았었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영양가는 떨어질지언정 고적답사를 느끼며 즐기던 감정의 선율을 재현하는 힘이 있는 법이다. 이것이 홈지기가 글 제목에 '경제 청량음료'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기도 하다.
![]() 브레튼우즈의 Mount Washington 호텔 | ![]() Mont Pélerin의 회합이 열린 방 |
6시간을 들여 이 세 에피소드를 섭렵한다고 오늘날 우리가 처한 복잡한 경제위기의 본질을 느끼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펼쳐지는 이 모습이, 그리 간단한 도식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20세기 내내 지구촌 곳곳, 수많은 현장에서 허다한 사람들이 흘려온 땀과 피, 그리고 수많은 지성들의 치열한 고민이 자리잡고 있음을. 변변한 경제 지식도 없이 우리의 경제 현실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분이라면, 그 깊이를 맛보는 의미에서도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고 본다. 설령 이미 많은 책을 섭렵하여 정보로서는 더 얻을게 없는 분이라도, 가끔 책을 놓고 역사의 감흥을 즐기기에도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된다. 주말 버라이어티 쇼에서 연예인 풍설에 지친 분들, 특히나 키보드 워리어로 자나깨나 리만 브라더스 욕으로 혈압이 올라가신 분들이라면, 분노를 잠시 삭히고 이런 다큐멘터리라도 보면서 생각을 한층 가다듬으시길 권해드린다.
한 가지 팁을 더 알려 드린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굳이 졸리는 시간대에 KBS를 통해 볼 필요가 없다. 이미 2004년에 PBS는 이 다큐멘터리 전편을 홈페이지에서 마음껏 공짜로 볼 수 있도록 차려놨다. 영어 듣기가 안 된다고 걱정을? 그런 걱정도 덜 수 있도록 PBS는 VOD에 영문 자막 서비스도 하고 있으며, 영어 대본을 따로 볼 수 있게도 해놨다. 편한 시간대를 골라 영어 공부도 좀 할겸 시청해보시라.4
- Commanding Heights: Home (on PBS): 다시보기는 'STORYLINE' 페이지에 있음
마지막으로 홈지기가 인상적으로 들었던 하이에크의 한 마디를 소개하며 맺기로 하자. 첫 번째 에피소드에 보면 얼마전에 작고한 랄프 해리스가 몽펠르랭에서 하이에크가 남긴 말을 회고하는 장면이 있다:
해설자:
그러나 하이에크는 회합에서 그들[역주: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아주 큰 교훈 하나를 얻었다고 말했다.랄프 해리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찬사를 바치며 이렇게 말했어요.
사회주의자들의 위대한 힘은, 그들은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상주의적이 되고,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하나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하나의 비젼을 가지고, 그리고 그 비젼을 향해 시종일관 일해나갈 그런 용기를.5
하이에크가 배우자고 역설한 저런 용기야말로 이런 시기일수록 되새겨야 할 자세가 아닐까. 이 용기는 섶을 짊어지고 불길에 뛰어들라는 만용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신을 가다듬고 새 시대의 논리를 마련해가는 용기이다. 우리 앞을 살아간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용기를 갖고 "The Battle of Ideas"를 펼쳐갔다. 과연 이 시대 세상을 향해 일갈하는 사람들이 진정 그런 용기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홈지기 스스로부터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억하자, 세상에는 더한 좌절 속에서도 저런 용기를 갖고 시대의 지평을 열어온 이들이 있었음을.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 KBS는 '다니엘 여진'이라고 자막을 넣어놨다.
- 러시아어로는 'командные высоты'라고 하는데, 한 국가의 경제를 주도하는 기간산업 또는 주도 세력을 의미한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이 주요 기간산업을 초기 국유화 목표로 설정하면서 회자된 말이다.
- 자세한 국내 방송 일정 안내는 KBS의 안내 페이지를 참조하기 바란다.
-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 방송사들의 다큐멘터리 페이지도 두고두고 보며 추가학습할 수 있는 정보들을 담아 공들여 만들기를 바란다.
-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RALPH HARRIS: Hayek paid enormous tribute to the socialist intellectuals and said that the great strength of the socialists is that they had the courage, he said, to be idealistic; to have a theory, to have a project, to have a vision, and to go on working towards that, through thick and t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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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지막 인용문에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끼면 아직 나이가 덜 든 것일까요(웃음).
'빨갱이'와 '친일파'들에게도 무언가 배울 긍정적인 점은 분명 있을텐데. 양 진영 모두 너무나도 쉽게 척결만을 외치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합니다. 역시 '맛있는' 글이 많네요.
조금 늦었지만 "새해 福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거 어제부터 KBS1 에서 하고있습니다. 저녁 11시 30분에 합니다.
어제 방송된 1부를 봤는데, 정말 재미있더군요..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픈 프로그램입니다.
예전 포스팅 중에 어느 하나도 감사 드린다는 말씀이 허언인 적이 없었지만, 이번 포스팅은 정말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부족할 듯 싶네요. 특히 마지막 말씀은 저 역시 쥐구멍을 찾게 만듭니다. 언제나 좋은 글, 생각할 거리를 듬뿍 주시는 글에 감사 드립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다큐는 동명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거죠. 요즘 그 책을 읽고 있답니다. 다 읽고 다큐를 감상하려 했는데 이렇게 맛뵈기로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