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安石이 글은 필자가 2002년 대선에 임박하여 모교(KAIST) 학내 게시판에 게재했던 글이다. 당시 노무현의 경제정책을 두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에 빗대어 논한 다른 게시물을 보고 그에 대해 논한 글이다. 이 글을 쓴지 어느덧 5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 노무현도 낙향하였고, 새롭게 MB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살펴보면 그 때의 우려가 해결되지 못한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MB 정부도 별반 나아진게 없어 답답함은 더하다. 글 속의 이름들은 조금 과거의 이름들이 되었으나 여전히 곱씹어볼 대목이 있지 않을까 하여 먼지를 털어내고 이곳에 다시 올려본다. 世事를 바라보는 독자 제현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글을 쓴 계기가 된 다른 분의 원문:

필자의 반론:

보낸이 (From) : chess (채승병)
시 간 (Date) : Tue Oct 29 13:32:24 2002
제 목 (Title) : 다르게 바라보는 신법과 구법 이야기

얼마 전 올 초에 키즈의 어떤 분에 의해 쓰여진 북송대 왕안석의 신법과 그에 따른 신법파-구법파 사이의 당쟁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보통 중국사 중에서도 5대 10국의 혼란기를 거쳐 북송대에 이르는 역사는 교양서적 수준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내려간 내용은 많은 이들에게 참신한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차용한 글에서는 항상 이야기 그대로 현혹되지 말고 제대로 본질을 꿰뚫어 차용한 것인지, 오늘날 현실의 눈으로 살펴보려는 의도 가운데에 무리는 없는가 항상 의심을 가져보아야 한다. 왕안석의 신법의 이야기 또한 그럴듯 해보이나 이런 의심 많은 필자의 눈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들이 눈에 밟히는 것을 어찌하랴.

그 글에서는 왕안석의 신법 이야기를 차용하여 두 가지 결론을 끌어 내고자 하였다. 첫째는, 신종 시대의 개혁의 필요성에 빗대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개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 개혁의 주도자로서 노무현의 시대적 필요성을 은근히 내세웠다. 아울러 원래 글타래의 단초처럼 노무현 진영 쪽에 당장 왕안석과 같은 인물이 보이지 않더라도 의지를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는 길이 옳다는 논리이다. 둘째는, 북송이 피폐해진 원인으로 당쟁을 꼽으면서 우리네 지역감정과 비교해볼 때 유사한 난국이 아닌가, 시급히 극복해야할 과제임을 첨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원글에서는 시종일관 위기 탈출수단으로서 신법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이 신법의 의도가 구법파로 지칭되는 기존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 때문에 훼손되고 좌초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허나 필자는 이에 의문을 던지고자 한다. 왕안석의 신법은 진정한 개혁이었는가? 그리고 북송의 문제를 해결할 올바른 방향을 짚었던가? 신법이 좌초된 책임을 기득권층들의 반동에만 전가할 수 있는가?

신법이 필요하게 된 신종조 북송상황을 이해하려면 멀리 5대 10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중국은 당의 멸망 이후 국가가 찢겨져 여러 작은 나라들이 반세기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계속 세워졌다 사라지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기는 통일된 국가를 지향하는 범 중화권 시각에서야 암울한 시기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사회 하부로 보면 꼭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다. 유럽에서 고만고만한 여러 나라들이 할거하면서 절대권력의 권위가 먹히지 않던 것이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했듯이, 5대 10국의 느슨한 체제는 상공업 발전의 큰 기틀이 되었다. 소국으로 쪼개진 나라들은 각자 먹고 살길 확보를 위해 특산물을 개발하고 무역을 장려했던 것이다.

거기에 북송의 시조인 조광윤은 군인 출신으로 나름대로 합리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군주였다. 조광윤은 이러한 경제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오늘날로 말하면 통화팽창정책을 시행하였다. 북송은 태조 시절부터 통화공급에 열을 올려서 동전만도 500만 관이 넘게 공급을 이뤄냈다. 이것은 후대 명조 시기 전체에 걸친 통화공급보다 많은 양인데, 북송은 이것을 태조 재임기에 투입하여 전 근대적이나마 경기진작을 이뤄내었다. 그 결과 북송 초기의 세수는 기록적일 정도였고 수도 개봉(開封)에 축적된 자본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북송은 근대적인 사회 발전에 필요한 경제력 확보에서 대단히 시대를 앞서간 국가였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에서 흘러나온 잉여자본이 서구와 같이 신흥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황실과 전 국가적인 관료조직으로 모여 정체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북송체제가 안정이 되면서 중국의 고질적인 병폐, 즉 과도한 중앙집권체제의 폐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쟁이 아니라 안정화된 권력층에 빌붙어서 독점적인 경제력을 유지하는 거상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은 나아가 대규모 농지를 장악하고 일반 농민으로부터 전대를 수취하여 이중으로 살을 찌웠다. 부의 독점화와 관료집단의 부패가 얽히면서 국가의 세수는 줄고 국방력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참고로 북송은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었기에 거란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국방비 부담이 매우 컸다.)

신종과 왕안석의 신법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혁안이었다. 당시 왕안석이 착안한 점은 세수증대를 위해서는 극단화된 경제 질서를 바로잡고 건전한 중간계층 — 중소농민, 중소상인 — 을 육성해야한다는 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건강한 중산층이 많아야 한다는 점이 경제 개혁의 이슈가 되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 초기 실시한 것이 유명한 청묘법(靑苗法)인데, 상평창이 가진 1400만 전의 자본을 저리(연 20%)에 농민에게 공급하여 소수 호상에게 집중된 돈줄을 틔운다는 아이디어였다. 이를 도시 중소상인들에게 실시한 것이 시역법(市易法)이고, 종래 강제동원 노역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던 차역법을 개선하여 봉급을 지급하며 고용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 모역법(募役法)이었다. 모역법은 정부주도 공공사업을 통해 자본을 시중에 풀어내는 방법이었으니, 어찌보면 이 신법은 후대 케인즈 경제학과 통하는 맥락이 있었다.

얼핏 보아 왕안석의 신법이야말로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뤄낸 선구적인 개혁안이라고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점들 때문이다. 상업자본이 대거축적된 북송대에 이렇듯 교묘하게 자본흐름을 이용한 정책이 나온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일부나마 본질을 짚어내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놀라웠다.

그러나 신법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왕안석과 신법파는 케인즈와는 달리 자본주의와는 한참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신법파라 해도 결국 유교적 교육을 받은 관료집단이었으며, 이들의 경제 지식은 일천한 수준이어 신법이 서기 위한 바탕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이들의 방법론은 경제 전체가 화폐경제로 이행되고 근대적 시장경제가 확립된 바탕에서 쓸 수 있는 방법론이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를테면, 청묘법이 유효하려면 일반 농민들에게 자본수요가 있어야 했는데 당대 농민들에게 돈을 쥐어줘봤자 쓸모가 없었다. 구매력있는 소비주체로서 키워진 농민이 아니라 단순한 생산수단으로서의 농민이었으므로 수요라고는 악랄한 지주의 고리지대 납부를 위한 정도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는 새로운 관제 가렴주구 수단이 되어버렸다. 관청에서 강제로 농민에게 돈을 떠맡기고서 농민들은 돈을 쓰고 굴리는 법도 모르다가 애꿎은 이자만 물어야 했다. 이는 신법의 효과가 비교적 상업이 발달한 도시 주변에서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곳곳에서 좌초된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북송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기부터 화폐 공급을 늘였는데, 적절한 통화정책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이후엔 악수를 거듭하게 된다. 계속 중국식 관료주의에 경직되어 침체로 치닫는 경제 하에서 국방비 조달을 위해 통화공급을 늘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북송은 이를 위해 최첨단(?)의 지폐까지 발행한다. 하지만 역사가 어찌 그리 똑같은지 태환성이 철저히 보장되지 않은 불환지폐 남발은 두고두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부작용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프랑스 혁명기의 아시냐나 미국 남북전쟁기의 그린백과 같이.

서구처럼 민간부문에서 금융업이 성장해간 것이 아니라 관 주도로 금융업을 치루다보니 모럴 헤저드가 극심했으며, 화폐경제-시장경제를 떠받치는 신용질서가 제대로 유지되기 힘들었다. 민간에서 신용질서를 위반하는 자가 나오면 사법기능과 시장 자체의 기능으로 퇴출이 가능하겠지만, 관이 앞장서 돈 떼먹고 신용은 나몰라라 하면 금융질서가 유지될리가 만무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험이 일천한 서민들에게 화폐경제를 강요해 놓고 막상 국가가 통화관리를 엉망으로 하였을 때 일어나는 폐해가 얼마나 큰지는 경제학 지식이 쌓인 오늘날엔 경제 교과서들을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북송의 신법은 경직된 경제체제를 뚫어보겠다고 자본 공급의 색다른 활로를 열었으나, 낙후된 사회체제 때문에 수요 진작에는 실패하고 상업부문에서는 신용불안을 초래했으며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영세농민의 몰락은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북송대의 이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가 되어 금나라에 이르면 무려 6000만 배에 이르는 통화증발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경제정책 실패로 모병제로는 국방의 한계가 드러나자 국민개병 개념을 다시 도입하여 보갑법(保甲法)-보마법(保馬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층의 부담을 증가시켰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개혁의 방향은 옳은 길이고, 신법은 민중을 잘 살게 하는 길이라고 끌고 가는 것 또한 무리였다.

그리고, 원글의 저자는 왕안석이 신법을 추진한 기간이 무슨 성과를 내기엔 너무 짧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왕안석이 직접 집정한 시기 8년뿐 아니라 휘종조까지 이어진 신법파의 25년 집권기는 당대의 집권자들이 정책을 밀어준 상당한 시간이었다. 신법이 진정 단명했다면, 어찌 신법을 추종하는 세력이 파당을 이루고 그토록 세를 떨칠 수 있었겠는가? 신법이 결국 폐지되고 구법으로 돌아간 것은, 개혁의 방향이 옳았는데 신법파가 뜻을 펼칠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개혁의 방향과 방법 자체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법파는 애시당초 경제 측면에서 세수확대라는 목표에서 출발했고, 신민을 세공에 필요한 효율적인 생산수단으로 육성하는데 치우쳤다. 민중의 자유와 민권을 보장하여 근대적 시장경제로 나갈 수 있는 길은 꼭꼭 막아놓은채 추진한 신법은 오히려 민중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구조의 기반이 닦여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법의 추진은 100%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미 사학계에서는 많이 지적되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국이 왜 자발적 근대화에 실패했는가와도 연관이 있는데, 이미 진나라 시대부터 거대통일국가로의 경험과 꽉 짜여진 중앙집권 관료주의에 얽매인 바탕에서 개개인이 경제주체로서 행동하는 시민계급으로의 발전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거기다가 신법파는 왕안석 이후 제대로 된 개혁정신을 가진 걸출한 인재 또한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왕안석이 집권을 하자 정권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인물들 또한 신법파에 많이 끼여들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개혁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처신에 능하고 신법으로 위장한 소인배들이 들끓기도 했다. 신법의 몰락은 신법파 스스로 퇴락해서 벌어진 문제가 실로 크다.

물론 그랬다고 구법이 옳았다는 것을 설파하려는 것은 아니다. 구법은 말그대로 개혁의 의지조차도 박약했기 때문에 구법으로의 회귀는 북송의 참담한 말로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신법으로 피폐해진 농민층은 구법의 체제 하에서 더 이상 희망도 없이 퇴락해갔으며, 북송은 결국 거란의 기세마저 무너뜨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패망하고 만다.

그래서 필자가 위와 같이 신법의 역사를 보며 얻은 교훈은 사뭇 다르다.

첫째로, 개혁은 그 이름만으로 만능의 수단은 아니다. 개혁이란 이름을 거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자기검증에 소홀히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독선에 빠질 위험도 대단히 크다. 왕안석과 같은 이들에게 화폐경제의 본질 일부를 파악하는 능력은 있었으나, 범 국가적인 정책으로 시행하기 이전에 선결할 전제 조건이 무언지는 알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해악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인지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왕안석은 대학자요 나름대로의 투철한 의식을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말이다.

불행하게도 아무리 역사를 들여다본들 어떻게 하면 올바른 개혁이 될 수 있는지 정답은 없다. 지금 제각기 후보들이 (심지어 이회창까지도) 개혁이란 이름으로 갖가지 주장을 해대고 있지만 어느 하나 후보 이름만 믿고 넘기기엔 위험천만한 것들이 곳곳에 눈에 밟힌다. 누구에게건 항상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바라봐야한다. 이회창 진영에서 나왔다고, 혹은 노무현 진영에서 나왔다고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양측 모두 세련된 정책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사회라면 열심히 비판도 하고 의견도 나눠가며 검증을 열심히 해야한다. 막연한 기대로 이회창 만세, 정몽준 멋쟁이, 노무현은 달라~ 외치느니 주사위 던져 투표하는 것이 더 이로울지 모른다.

둘째로, 개혁이란 이름도 훼손되는건 한 순간이다. 신법파는 왕안석 이래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재에 주도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권력지향적인 파벌로 변질되었다. 이들의 출신 성분은 대개 구체제에서 억압받던 미천한 계층에서 올라온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목적은 진정한 민생보국보다는 정권 교체의 혼란기를 틈타 울분을 풀고 나도 한몫 잡겠다는 식이 많았으며 결과적으로 후기 신법파는 개혁이 무색하게 타락한 소인배들로 넘쳐났다. (마치 요새 민주당 일부 바이러스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글의 원래 발단이 노무현의 경제 브레인 이야기 쪽이었던데, 참고로 필자는 노무현 지지자라면 한가하게 집권해서 구해 쓰면 되겠지……라는 생각일랑은 버려야한다고 생각한다. 집권해서 구해쓴다고 한다면 대부분 몰려드는 것은 의기의 지사가 아니라 시대를 두고 끊임없이 발견되는, 출세욕에 불타 사탕발림에 열을 올리는 권영해니 최규선 같은 아첨꾼들일 확률이 크다. 진정한 개혁가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인재를 모으고 많은 교감을 나누는 준비가 필요하다. 집권하고서 당장 일해야 하는데 팀웍이 맞지 않아 서로 삐걱거리기에는 5년이란 시간은 짧다.

조중동 때문에 개혁이 안 굴러가고 인재 발탁이 안된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개혁을 해내려면 거꾸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열세의 개혁세력이 성공하려면 애초부터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 놀리는 사람에게야 그때그때 비난하는 것으로 직성이 풀릴지 모르겠지만, 집권하겠단 세력이라면 조중동 때문에 만사가 안된다고 하기 전에 그러면 조중동의 방해를 어떻게 피해나갈 것인지부터 강구해야 한다. 인사에 관한한 카드를 충분히 준비해놓고 예기치 않은 반대파의 공세에 맞춰 주도적으로 쓸 수가 있어야지, 상대편이 한 두번 공격했다고 해서 밑천을 드러낼 수준이라면 더욱 반대는 거세지게 마련이다. 세상이 옛날처럼 한촌에 제갈량이 숨어있을만큼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막연히 어디 인재가 있을거야……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 기득권층에게 끌려다니는 첩경임은 분명하다.

왕안석의 신법파가 타락한 것을 당쟁의 소산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애시당초 왕안석이 당을 만들어 입각한 것이 아니라 입각을 하고서 쉽게 사람을 끌어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필자는 그래서 오늘날도 제대로 된 정당정치가 없는 한 어느 후보가 되어도 기대하는 만큼의 사회개조는 당장 이뤄내지 못하리라 본다. 평시부터 충분히 의식을 공유하면서 참여의 토대가 되어주는 지지층이 없는 마당에 근본 개혁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개혁국민정당의 열기도 3만 당원의 모집에서 정체되고 있는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대략 통계적으로 봐도 성숙된 이념정당이 유지가 되면서 정책방향을 원활히 주도하려면 적극적인 당원이 정당별로 인구의 0.5~1% 이상은 되면서 강력한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한국의 실정에서 최소 20만은 필요하다.)

한나라당이 첨에는 비교적 참신한 이회창이란 인물을 끌어들여 나름대로 일신을 바꿔보겠다고 했으나 결국에 진정한 지지핵심세력이 없어서 저런 잡탕 기회주의자들이 득시글하듯이, 아무리 노무현이라고 해도 이처럼 미약한 기반으로 국민의 막연한 개혁기대만 의지해 나아간다면 집권한다고 해도 정치 파리떼를 쫓아내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마 이 문제는 정몽준이 집권하게 된다면 가장 심각하게 발생할 문제일 것이다.

이제껏 너무 역사 속에서 개혁의 암울한 면을 강조했는가? 그렇다고 한탄할 필요 또한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북송이라는 시기는 중국의 고질적인 관료주의의 폐해에 얽매인데다 북으로는 거란이라는 외적이 버티고 있던 시기였으니 왕안석의 힘으로 돌려놓기에는 이미 늦은 사회였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아직도 정치문화가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역동성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북송 신종조의 시기보다는 훨씬 세상을 바꿔내기가 쉬운 입지에 처해있다. 역사는 지금 어떠한 개혁방향이 정답인지 이야기해주지는 않지만 지금이 최소한 나름대로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할 시기임은 이야기 해주고 있다. 현대 한국 정치사의 노정은 아직 실망하기에는 너무 짧다.

단언컨대 이 나라 정치가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고 굴러가는 날은 노무현이 이회창이 정몽준이 대통령이 되는 날 그 어느 것도 아닐거다. 어느 정당이 되었건 선명한 민주적 정책정당이 50만 열성당원을 가지고 후보를 추대하고 당선을 시키는 그날이 한국 정치를 바꿔놓는 날이 될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말처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고 할 수 있는 개혁세력을 꿈꾸며.

…… 행동은 행동하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은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지혜의 본질은 회피하는 것에 있는게 아니라 행동에 얽매임 없이 바르게 행동하는 가운데 정신의 숭고한 뜻을 파악하는데 있다……

— "Bhagavad Gita(भगवद्‌ गीता)" 에서

Notes.
  1.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신-구법당의 당쟁에 대한 원문은 해당 필자분의 동의를 따로 구하지 못했으므로 링크를 달지 않겠다.
2008/03/30 17:30 2008/03/30 17:3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윤민혁 2008/03/30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론에 절대동감이올습니다. 다만 아쉬운 건 6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결론이 먹히는 상태라는 거군요. -ㅅ-;

  2. 고전압  2008/03/30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와서 살펴보니 더더욱 감회가 새롭네요. DC 역사갤러리나 저희 학교 게시판 같은 곳에 퍼가도 될까요?

    (아, 인제보니 사정상 근시일 내에 퍼가진 못하겠네요;; )

    • Periskop 홈지기  2008/03/31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오래된 게시물이어서 어디 퍼나르기엔 부끄럽습니다. 다만 원칙상 제 게시물은 배너 달아놨듯이 CCL2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원저작자를 표시하고, 비영리 목적으로만 활용하고(애드센스 붙인 블로그도 자제바람), 변경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입니다. 그리고 되도록 트랙백, 방명록 등을 활용하여 어디로 퍼 가셨는지를 알려 주십시오.

  3. dasleich 2008/03/30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껏 읽어왔던 채승병님 글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글입니다.
    왜 넷 상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본좌라고 회자되는지, 그 이유가 압축된 명문입니다.
    채승병님 같은 분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네요...
    평생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3/31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윽,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즐비한 논객들 앞에 명함이나 내밀 수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2002년에 쓴 글이 가장 맘에 드셨다니 그 동안 5년 반 동안 글솜씨가 퇴보하지 않았나 심히 걱정입니다. =_=

  4. 길 잃은 어린양 2008/03/31 1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차분하고 논리적인 전개가 일품입니다.

    저는 저 때 노무현 후보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에 냉소적인 조롱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건설적인 비판은 전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정치에 대해 생산적인 태도를 가져보려고 하긴 하는데 아직도 기껏해야 '투표 당일 기권하지 맙시다' 정도에 그치고 있어 아쉽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의 건달 기질이 쉽게 가시질 않으니 한동안은 계속해서 냉소적인 농담이나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3/31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가까운 주변 동료들 가운데 워낙 노사모에 열성적인 이들이 많았는지라 냉소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 깔끔하게 주관을 지키며 순수한 열의를 보여줬던 이들에게는 지금도 경의를 표합니다. 다만 저도 예나 지금이나 특정 정치인에게 열광하며 그에 맞춰 세상을 비틀어 사고하는 자세를 혐오하기에, 간혹 독립적 사고주체로의 정신줄을 놓아버린 듯한 소수의 행태는 퍽이나 참기 힘들더군요.

  5. dcafe 2008/04/01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아직 모르겠고 (회사라서...) "유럽에서 고만고만한 여러 나라들이 할거하면서 절대권력의 권위가 먹히지 않던 것이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했다고 하기는 좀 곤란합니다. 옛 교과서에는 흔히 한자동맹을 상공업의 부활의 대표명사 격으로 사용했었지만, 실제 독일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은 19세기나 되서야 얘기고, 한자동맹은 별로 기여하지 못했지요. 오히려 부르주와지들은 절대권력의 권위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필요했습니다. 귀족보다 하층민이었던 그들의 지위가 상승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부분은 좀 옥의 티인듯..........후다닥...~

    • Periskop 홈지기 2008/04/01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저게 6년 전에 쓴 글이다보니 틀린 부분이 여럿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굳이 고쳐놓는 것보다는 냅두고 다른 분들의 지적을 받는게 온당한 것 같아서 사소한 오타만 고쳐서 올렸습니다. 글에 다른 문제가 있거나 대의에 공감하지 않으시면 또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6. 양성민 2008/04/01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과는 무관한 질문 2번째입니다. Korück, Höheres Kommando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간략하게나마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4/01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Korück(Kommandant rückwärtiges Armeegebiet)은 야전군이 담당하는 전선 후방지역 위수업무를 담당하는 별도의 지휘부입니다. 전방 야전군이 군사작전 관련 업무에 집중하고, 나머지 후방의 보안, 민정, 보급 등의 제반 군정업무를 Korück이 처리했습니다. Höheres Kommando는 대개 원래 대전 이전의 Grenzschutz-Abschnittkommando, 즉 국경수비대 지휘부였습니다. 야전부대 말고 국경수비부대를 모아서 통괄하고 있었는데, 대전이 발발하면서 기존 국경이 의미없게 되거나 적군과 직접 대치하는 전선이 되어버려서 이름을 이렇게 바꾸고 특정 후방지역의 위수사령부 기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또 1942~43년 경에 일반 군단사령부로 전환되어 폐지됩니다. 그러다 1944년이 되면 일부 지역에서 다시 부활되기도 하죠.

    • 양성민 2008/04/01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친절한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7. ssn688 2008/04/03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부 93학번 연령인 본햏 기억으론, 고교에서 배웠던 세계사 교과서에서 신법 부분을 단 1줄로 처리했는데, "개혁을 시도했으나 반발로 좌절..."이란 내용이라서 은연중에 "신법=송나라 부흥의 방책=좋은 것 vs 구법=보수반동=비애국"이란 도식을 조장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세계사 선생님께서 보마법이 얼마나 삽질인가를 예시해주셔서(군마로도 쓸모가 없고 농민 부담만 드는) 신-구법당의 대결이 가치판단을 내리기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겠구나...하는 어렴풋한 감을 가진 채로 넘어갔는데, 경제구조의 측면에서 바라본 본격적인 해설을 보니 놀랍습니다. @.@
    조정에 출사한 송대 신유학파(장횡거, 이정, 주희)는 구법당 인사로 분류됩니다만, 정전제와 같은 '옛 법도'에 근거해서 토지균분이나 환곡제도 개선을 통한 (절대다수가 농민인)민생안정을 주장했는데, 송대의 경제현실을 보면 이게 더 타당했을지 모르겠네요. 물론 이미 토지를 과점한 기득권층을 달래든 강제하든 움직이게 할 방안을 강구하는 문제에 이르면 할 말이 없어지겠습니다만.

  8. ssn688 2008/04/03 1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대권력의 권위가 먹히지 않던 것이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 이것은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에서도 본 듯한 시각인데, 본햏이 폴 케네디를 제대로 읽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절대권력'이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상공업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그 권력의 '범위'에 따라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중세 봉건제를 거치고 난 뒤의 서양이라면 "동네마다 제각각"인 사회구조를 최소한 (대부분 민족단위 국가로 가는)'국가 범위'로 통합하는 절대권위가 상공업 발전에도 유익했겠지만,
    하나의 '문명권 범위'(중국이나 무굴제국)에서의 절대권력이라면...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할거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문명권에 비해서 부강함을 향한 발전을 촉진하는 압박이 덜할 것 같습니다.

  9. 별마 2008/05/01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해박하시네요. 덜덜덜.. 근대 님의 문장에 약간 의문이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볼려고 합니다. 우선 5대10국 체제를 기존 중국의 중앙집권체제에 비해 많이 중앙집권이 약화된 국가라고 설명하셨는데 근거를 조금 설명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송대 신법의 고민은 사실 조선후기 지식인 일반의 고민과 유사한 거 같습니다. 송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지만 조선 후기 지식인 일반이 강조했던 개혁방안은 (물론 편차가 심하지만) 대체로 국가중심의 경제 건설이었다고 보여지네요. 그것은 조선 후기 나타났던 토지의 집중화 현상(이른바 광작이라고 하죠)에 의한 일반국민(국민이라는 용어는 참 맘에 안드네요)의 생활기반 상실이 조선후기 사회에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조일전쟁 기간 유입된 은화(대략 삼백만냥 정도라고 하네요)를 기반으로 형성된 화폐경제는 거의 국가의 통제권에서 벗어났는데 이로 인해 전란(돈난리^^)이 심각했었습니다. 국가 기본 산업인 농업이 이상화되고 상업으로 인해 농민들이 농촌을 이탈하는 상황을 보고 유형원이나 이익 같은 이들(흔히 중농학자라고 하지만 사실 중농학자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은 국가를 매개로 한 경제구조 재건을 주장합니다. 제가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해서 조선후기 사회와 연관지어 생각했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님의 글을 읽고 송대 왕안석이 느꼈던 문제점과 조선후기 지식인 일반(실학자라는 표현은 잠시 제쳐두죠)이 느꼈던 문제점의 유사성과 대안(해결책)의 유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왕안석과 비슷하게 조선후기 지식인 일반 역시 정치에 상대적 소수(극소수라고 보기는 힘들죠)를 점하면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고 본다면(볼 수 있을까요?^^) 조선후기 지식인의 개혁 정책이 좌절된 것도 왕안석의 좌절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이 너무 난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근데 알고보니 대단하신 분이시더군요.. 글쓰면서 눈팅하다 알게 됐습니다. 자주 블로그 방문하면서 고견을 많이 듣고 싶어집니다.

  10. 일화 2008/05/02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미흡하나마 동일한 주제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고, 노무현의 정책과의 연계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서 매우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제가 생각한 태생적인 문제점은 왕안석이 신종에게 자신의 정책을 세일즈할 때 원 목표와는 달리 군사력강화라는 목표에도 신법이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청묘법이 강제적으로 바뀌고, 보갑법이 중시된 주된 원인이 바로 신종의 군사적 야심을 위한 개혁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국가권력과 자본주의의 발달에 대해서는 유럽의 절대왕정 수준이 적당하다는 것이 세계체제이론의 주된 주장인 듯 합니다. 중국의 역사에 적용시키면 춘추전국과 5대10국이 이에 해당하고 바로 뒤를 잇는 전한과 북송대 화폐경제가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동서양을 포괄하는 이론으로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최근 순명大帝께서 환율제도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계신걸 보다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 이름하여 폴 크루그먼(Paul Krugman)과 (故)뤼디거 돈부쉬(Rüdiger Dornbusch)1 선생 되시겠다. 환율문제하면 당연히 일물일가의 법칙(The law of one price; 이하 LOOP)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두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LOOP에 대한 공박으로 이름을 떨치신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워낙 국제경제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고수들이고 다른 측면에서도 업적이 많기에 LOOP 관련 부분만 말하긴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자 — 크루그먼은 1979년에 고정환율제 국가에서 신용과잉이 일어나면 투기적 외환거래세력의 공격에 의해 통화위기로 빠질 수 있음을 보이는 모형으로 이름을 떨친 바 있고, 돈부쉬는 1976년에 그 이름도 유명한 overshooting 모형으로 이름을 떨쳤다.

LOOP에 대해서는 뭐 달리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아주 간략히만 짚고 넘어가자. LOOP는 양국 통화의 교환비(환율)은 양국 소비자가 같은 가치의 돈으로 같은 양의 재화를 살 수 있도록 조정된다는 내용이다. 이걸 절대적 LOOP이라고 한다. 이를 조금 완화한 상대적 LOOP은 양국간 정확히 같은 양은 아니지만 살 수 있는 양의 비율이 안정히 유지된다는 것이다. 일본 소비자가 100엔으로 바나나 10개를 사먹을 수 있고, 한국에서는 1000원으로 바나나 10개를 사먹을 수 있다면 환율은 1엔=10원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절대적 LOOP이다. 반면 이를 좀 느슨하게 하여 100엔과 1000원의 바나나 구매력(10개)이 변하지 않는 한 환율도 변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1엔=8원에서 유지)는 것이 상대적 LOOP이다.

이걸 액면 그대로 (진심으로)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경제학자는 없(을 것이)다. 새뮤얼슨 이래 경제학의 원조급 대가들도 LOOP은 마찰같은 역할을 하는 거래 장벽이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맞는다는 이야기는 계속 해왔다. 우리가 용수철이나 진자의 진동에서 마찰력이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운동방정식을 풀고 해를 공부한 뒤에, 현실에서는 마찰이 있으므로 이대로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설명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2 이미 오래 전부터 관세, 운임 등 여러 마찰요인이 LOOP과 상이한 현실을 낳는다는 실증연구 결과도 많이 축적되어 있다.

크루그먼 선생

크루그먼과 돈부쉬 선생은 여기에 'pricing to market'(PTM)3 이론이라는 것을 하나 더 얹었다. 이 PTM의 개념 자체는 굉장히 간단하다. 뉴스에서 흔히 보듯이 환율이 출렁이는 상황에도 국내 시장에서 수입품 가격은 요지부동인 경우가 종종 있다. 당장 원화 가치가 급락해서 단숨에 100엔당 1000원을 돌파했는데, 이는 불과 작년에 800원 대에서 움직이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다. 그런데 국내 시장에 팔리는 일본 제품들 — 디지털카메라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 의 가격은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 특히 이른바 '정품'을 판다는 공인 수입업체들의 가격이 그렇다. (병행수입이라 불리는 비공인 수입업자들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변동이 크다.) 반대로 원화가 절상되었을 때도 이런 현상은 널리 나타났다. 환율 변동이 수입품 가격에 제대로 반영이 안 되는 이런 일반적인 현상을 가벼운 의미의 PTM라고 부른다.

그런데 학술적으로는 좀 더 엄밀한 상황에서 PTM을 다루고 있다. PTM이라 이름 붙이기엔 부적절한 상황을 크루그먼이 들고 있는 예로 (딱딱한 인용을 피해) 가볍게 설명해보자:

1달러=1유로이던 환율이 1달러=1.2유로로 평가절상이 되어 달러의 구매력이 커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전에 프랑스에서 샤토 마고 1병이 200유로에 팔리고, 미국에서는 30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면 (운송비+관세+유통마진 등 제반 수입비용은 50%로 가정) 가격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얼핏 생각하면 달러 가치 절상분을 반영하여 US$300 x €1.20 / US$1.00 = US$250이 되야할 것 같다. 이만큼 가격이 내려가지 않더라도 10% 세일(US$300→US$270)만 해도 로버트 파커에 솔깃해 프랑스 그랑크뤼급 와인들에 목말라 있던 미국 소비자들은 샤토 마고를 보다 많이 수입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수출이 늘면서 반대로 프랑스 또는 유럽 내에서 유통되는 와인 공급은 줄게 되어 프랑스 내 시세가 220유로로 10% 뛸 수 있다. 그러면 수입원가가 올라가니 미국 내 적정가격은 €220 x US$1.00 / €1.20 x 1.5(수입비용) = US$275가 되어 미국의 수입업자들은 다시 가격을 거꾸로 올리게 된다. 이렇게 환율 절상/절하분이 가격에 다 반영되지 않는 현상은 상대적 LOOP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 바로 마지막 US$275를 계산한 식이 상대적 LOOP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 굳이 특이한 PTM이라고 갖다붙일 필요도 없다.

학술적인 PTM은 이런 효과를 배제하고 생각해도 국가간 상품가격의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고급 자동차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원화가 절상되거나 절하되거나 벤츠, BMW 등의 국내 공식가격은 별로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수입차 거품가격에 대해 언론에서 아무리 열심히 때려대도 한 번 책정한 가격은 좀체로 변하지 않는다. 기껏 비난여론이 높아지고 혼다 등이 선전하니 조금 가격을 낮추긴 했어도 그건 환율과는 무관한 가격정책이었다. 결국 원화가 절상될수록 이들 차종의 미국, 독일에서의 가격과 한국에서의 가격은 더더욱 벌어지게 된다.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이쯤 되면 PTM이 언제 나타나는지 짐작할 것이다. 벤츠 승용차가 국산이나 다른 외국 회사 제품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상품이라면 원화가 평가절상되어도 (조금이라도) 가격을 안 내리고 버티는 수입상이 배겨날 리가 없다. 바가지 씌우는 악덕 업자로 낙인 찍히고 소비자의 발길도 끊길테니까. 명확히 차별적인 제품을 과점적으로 공급하는 업체에서나 이런 가격정책을 써도 먹히는 법이다. 그런데 크루그먼과 돈부쉬는 이런 불완전경쟁뿐 아니라 다른 요인들도 PTM에 영향을 미침을 보인 것이다.

또 어떤 이유들이 있을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매출 확대를 위해 부가되는 비용이 많은 — 한계비용(marginal cost)이 체증하는 — 경우가 있다. 자동차같은 큰 실물을 많이 팔려면 매장도 늘리고 영업직원도 늘리고 각종 부대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오늘날은 각종 통신판매 유통망이 많이 발달해서 그런 부담이 덜하다지만, 예전에는 이 문제가 훨씬 심각했다.) 결국 평가절상분을 반영해 가격을 내려도 증가한 수요를 공급이 이를 쉽게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더군다나 평가절상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측되면 수입업자가 고정비용을 증가시킬 이런 판매 인프라 확충에 섣불리 나설리 만무하다. 수입업자는 가격을 조금만 내리고 현재 인프라 수준에서 커버할 수 있는 만큼만 더 팔려고 들 것이다.

다른 이유는 반대로 수요 측면에서, 가격을 내려도 수요가 빨리 상승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쉽게 지갑을 열 수 있는 물품들, 이를테면 할인매장의 식품이야 '폭탄세일!'이라고 방송하면 잽싸게 달려갈 수도 있겠지만, 2억 짜리 벤츠 CLK를 10% 할인해준다고 '지름신 강림!'을 외치고 달려갈 소비자는 그리 많지 않다. 평가절상분을 반영해 가격을 내리는 것은 박리다매를 노리는 것인데, 가격을 내려도 당장 판매량이 늘지 않는다면 이익만 감소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격인하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많은 요인에 의해 좌우되고 예측이 어렵다. 절박할 것 없는 벤츠 공식딜러가 이런 위험을 자처하여 떠맡을 이유가 없다.

그 밖에도 심리, 명성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환율에 민감하게 판매가가 움직이면 소비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분노를 자아내기 십상이다. 최근 원화의 평가절하분이 다 반영이 되어 2억 원이던 차 가격을 2억 2천만 원으로 올리면, 벤츠 한 번 몰아보겠다고 벼르고 있던 소비자는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수요감소는 물론 브랜드 이미지 타격으로 렉서스를 계약하러 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무리 가격을 다시 환원해도 떠나간 소비자는 다음 차를 구입할 때까지 (또는 영원히) 수요자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격을 내려도 마찬가지다. 지난 달에 산 내 멋진 벤츠가 이번 달에 갑자기 2천만 원이나 싸게 팔린다면 수입업자에게 속았단 기분이 들 것이다. 역시 다음 번 차량을 교체할 때 다른 업체로 넘어갈 수 있다. 가격 인하가 단기적으로는 수요 증가 효과를 내도 장기적으로는 수요 감소의 부작용이 나는 것이다. 이 역시 이미지를 중시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다. 가격을 고정시키면 원화 절상시 욕은 좀 먹겠지만 독과점업체의 우위 때문에 급격한 수요 감소는 피할 수 있고, 원화 절하시에는 단기적 이익 감소는 있어도 신뢰와 명성을 유지하여 장기적인 수요 증가를 노릴 수 있다.

어째 좀 누구나 감으로는 쉽게 생각할만한 현상들이 아닌가? 물론 크루그먼과 돈부쉬는 단순히 말로 때운게 아니라 열심히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을 그리고 단순한 동태적 모형을 세워 수식으로 풀어가서 학술적 인정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경제현상은 여러 요인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면서, 웬만하면 이상적인 균형 상태와는 멀어진 불균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보는 상품시장의 여러 속성들은 금융시장과 상품시장의 괴리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통찰을 줄 수 있다. 이처럼 현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할 때, 이미 주류 경제학에서도 깊이 논의된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는다면 영 이상한 함정에서 허우적대기가 쉽다는 점을 다시금 조심하도록 하자 — 이건 2차대전사도 마찬가지.

자, 그렇다면 LOOP이 이렇게 PTM 이론 등 여러 측면에서 공박당했다면 환율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다음 단계는 PPP(purchasing power parity)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다. 순명大帝의 고정환율제-변동환율제 논의를 따라잡기 전에 다른 글에서 또 간략하게 설명해보길 기약하며 오늘은 여기서 그만 접기로 하자.

P.S. 요즘 필자의 직장(모 민간 경제연구소)이 서브프라임 사태와 이후 미국의 불황 및 파급영향에 대한 조사와 연구 등으로 좀 바쁘다. 글 올라오는 주기가 조금 늘어져도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Notes.
  1. 이 양반은 원래 독일인으로 이름이 '뤼디거(Rüdiger)'인데 박사과정 시절부터 미국에서 줄곧 살면서 움라우트를 떼고 '루디거(Rudiger)'로 알려지게 되었다.
  2. 원래 경제학자들의 이상이란 경제 시스템에 대한 물리학을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리고 이 측면은 사실 경제학자들의 고집스러운 (때로는 고지식하기까지 한) 행태에 대한 좋은 실마리가 되므로 역시 다른 글로 보충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3. 우리말로 '시장차별화 가격 설정'(?)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다.
2008/03/28 17:15 2008/03/28 17:15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Crete 2008/03/29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순 무식한 자연과학자인 제게 Paul Krugman의 이름을 알려주신 분이 알파헌터님입니다. 넷상에서 뵙는 분이라 정확한 백그라운드는 모르지만 아마도 미국에서 선물시장 트레이더를 하시다 지금은 한국에서 선물시장 트레이더를 하시는 분이라 추측되죠. 미국과 한국의 경제, 특히나 주식과 환율 문제를 시의 적절하게 짚어 주셔서 그분의 블로그를 매일 방문합니다. 주인장께서도 경제연구소에 근무하신다니 그 분의 블로그에 흥미를 가지실 것 같네요. 한번 블로그 주소를 적어 보겠습니다.

    http://blog.naver.com/oneidjack.do

    이 분께서는 본인의 블로그를 통해 크루그만의 견해를 시장 상황과 연결해서 매번 재미있게 해설해 주고 계시죠.

    뤼디거 돈부시선생의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제가 어제 쓴 글 하나에 first name 이 같은 독일인이 한 분 등장합니다. 뤼디거 네베르크 (Rüdiger Nehberg)씨 인데… TARGET(http://www.target-human-rights.com/) 이란 인권단체를 구성해서 여성 할례 근절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죠.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2. sonnet 2008/03/30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기 쉽게 쓰신 보충설명 잘 읽었습니다. 쉽게 쓴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데 대단하십니다. 후속 포스팅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건 여담인데, 크루그먼&옵스펠드의 국제경제학 교과서 새 판(7판)을 최근에 살펴보았는데, 제가 예전에 공부할 때 쓰던 판에 비해 이머징마켓 외환위기에 대한(혹은 관련될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늘어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몇몇은 크루그먼이 외부 강연 등에서 발표했던 내용인데, 교과서에 올라갈 정도로 탄탄한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3/30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윽, 별 말씀을. 저도 직장에서는 글 좀 쉽게 쓰라고 구박을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크루그먼 국제경제학 교과서는 저도 6판 갖고 있는게 마지막이고, 7판은 훑어본 적도 없어서 얼마나 내용이 보강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국제경제학 이론들이란게 시대 조류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측면도 있고, 크루그먼이 워낙 신봉자도 많지만 적도 많은 사람이어서 어떻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크루그먼을 감히 '비주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류 내에서도 그의 저작들을 두고 너무 오버하는게 아니냐는 말이야 꾸준히 돌아왔죠.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얼마 전 프랑스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최후의 노병이라는 라자르 퐁티첼리(Lazare Ponticelli) 씨가 향년 110세(!)로 사망하셨다. 언제나 세계대전은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는 한국이지만, 한 세기 넘게 살아온 참전용사에 대해 국장으로 예우하는 프랑스의 분위기에 대해 많은 보수언론들은 훌륭한 귀감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듯하다. 특히 동아일보는 사설까지 할애하는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의미 있는 국제 뉴스지만 동아일보처럼 사설까지 쓰는건 역시 찜찜하다. MB 정부 출범 이후 참여정부에 들이밀던 펜날을 쓸 곳이 없으니 이런 것으로라도 사설을 채워야하는 압박의 결과 같기도 하고…… 불쌍히 한 번 흘겨주고 지나가자.

그러고 나니 문득 프랑스는 국장을 어떻게 진행하나 궁금해졌다. 뼈대 있는 국가의 행사에는 언제나 국가의 문화와 전통이 서려있는 법이고, 그 과정을 지켜보고 이해하는 것으로도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퐁티첼리가 앵발리드에 묻힌다는 이야기에 더욱 동했다 — 홈지기도 가장 최근에 파리를 방문했던 2004년에 하루 시간을 내서 이곳에 있는 Musée de l'Armée(육군 박물관)에 가봤는데, 그 거대한 전시실 규모에 한 나절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외국인이 한 국가의 국가행사를 들여다보려면? 이럴 때 유용한 곳이 각국의 정부기관, 특히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원수 관저의 사이트가 유용하다. 한국에 청와대가 있듯이, 프랑스는 엘리제궁을 보면 된다. 역시 거북한 사르코지의 이미지 아래 퐁티첼리의 국장 동영상이 대문에 잘 링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앵발리드의 안뜰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하는 동영상은 다음과 같다:

직접 들어가 걸어봤던 곳에서 벌어지는 행사라 그런지 좀 더 현장감이 느껴진다. 프랑스 육군의 전통답게 다양한 복장의 의장대들이 행사에 참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저 도끼를 들고 치마를 두른 아저씨들은 과연 누구인가? (아래 사진의 노란 사각형 안)

퐁티첼리의 국장 모습

앵발리드 안뜰에서 거행된 퐁티첼리 국장 모습: 노란 사각형은 National Geographic과 무관함

우선 퐁티첼리의 관을 에워싸고 있는 병사들은 캐피 블랑(흰 모자)을 쓴 모습에서 이들이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La Légion étrangère)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위에 링크한 기사들에도 나와 있듯이 퐁티첼리가 외인부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 실마리를 물고 구글신에게 또 열심히 신탁을 구해 본 결과……

저 도부수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저들은 프랑스 외인부대의 공병대(Pionniers de la Légion étrangère)였다.

나폴레옹 시대의 공병대원

Grenadiers-á-Pied 연대의 sapeur

오늘날 외인부대 공병대원

프랑스 외인부대의 pionniers

저 특이한 모습 — 도끼와 가죽 앞치마, 구레나룻 — 들에 대한 설명을 프랑스어판 위키피디아와 여러 웹페이지에서 긁어 모아보니 이런 사연들이 있었다. 원래 공병(sapeurs)은 원래 중근세기 공성전에서 적진을 향해 종심방향의 참호를 뚫던 임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공성돌격 단계에서는 도끼를 들고 쇄도하여 각종 장애물을 때려 부수면서 진로를 개척하고는 했다. 프랑스에서는 이에 18세기 초부터 척탄병부대 — 역시 공격의 선봉에 자주 선 부대들이다 — 에서 도끼를 소지하고 성문을 때려 부수는, 이른바 "porte-haches2"가 출현하게 되었다.

위 2장의 사진에서 좌측에 보이는 사진은 그 결과 프랑스 혁명기, 통령정부 시절에 제식화된 sapeurs의 모습이다. 통령근위대(나중의 제국근위대)의 이 공병들은 일반적인 근위대 척탄병이 쓰던 것과 같은 털가죽 모자를 썼으나 앞에 금속판은 대지 않았다. 프랑스 정규 육군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전투공병대(pionniers)가 제3공화국 시기에 완전히 사라졌으나, 프랑스 외인부대만이 1831년 전투공병대를 창설한 이래 그 전통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프랑스 육군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이런 험악한 도부수들이 프랑스 외인부대 관련 행사에는 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의 인상적인 특징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 도끼(hache): 앞서 이야기한대로 돌격을 가로막는 목제 장애물들을 부수기 위한 장비이다.
  • 가죽 앞치마(tablier de cuir): 도끼질을 할 때 튀게 마련인 각종 나무 파편들에 다치지 않기 위해 착용한 것이다.
  • 손목장갑(gants à crispin): 역시 도끼질할 때 다치지 않도록 소매 위로 길게 올라오는 장갑을 착용했다.
  • 구레나룻(barbe): 원래 이들은 살아남을 가망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전투에 나갈 때 수염을 깎지 않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 이게 전통이 되어 다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다 보니 외인부대 공병대에서는 아예 1844년부터 의무적으로 구레나룻을 기르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퐁티첼리에 대한 의문을 이어가면서 프랑스 도부수의 정체까지 이르고 보니 두 가지 잔념이 남는다. 하나는, 여러 의문들을 꼬리를 물고 이어나가며 지식체계를 늘여가는 즐거움이다. 포털 뉴스 사이트에서 쉽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뉴스를 쓱 훑고 지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시 원어로 된 정보들을 자꾸 찾아다니다 보면 건질거리는 풍부해지는 법이다.

다음은, 외국인의 시각으로 한국과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고 할 때 과연 창이 있느냐는 의문이다. 위에서도 엘리제궁이 외국인도 접근할만한 적절한 매체를 제공하기 있기에 의문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우리의 청와대는 그에 비하면 한 눈에 봐도 우리 안에서 치고박고 하는데만 편리하지 외국인에게 한국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의 역할은 매우 빈약하다. 청와대 홈페이지를 대 보수언론 전쟁의 최전선으로 요새화시키는 살기나,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국정홍보처 없애고 대못질 빼겠다는 요란함이 앞서기 전에, 낮은 눈높이에서 유익한 국가의 창을 만드는데 신경 쓰겠다는 인식부터 할 수는 없는 것일까?

Notes.
  1. 우리가 흔히 'PR하다'라고 할 때의 PR(public relations)이 아니다. 이건 La Présidence de la République(공화국 대통령직)의 준말이다.
  2. porte는 '문', hache가 '도끼'라는 뜻으로 문을 때려부수는 斧手를 의미한다.
2008/03/20 17:00 2008/03/20 17:0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길 잃은 어린양 2008/03/21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혁명기념일 퍼레이드에서 도끼를 메고 행진하는 외인부대 공병대의 사진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임영훈씨의 '외인부대'라는 책에서 외인부대 공병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해 놓은 덕에 프랑스군 중 다른 부대는 몰라도 외인부대 공병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시시한 사설에도 동정심을 보여주시니 정말 아량이 넓으십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3/21 08:2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죠, 저는 임영훈 씨 책에 관심이 없었는데 글을 올리고 나서 포털의 책 검색 서비스를 이용해보니 '외인부대'에도 관련된 이야기가 있더군요. 역시 저는 현용 밀리터리에는 까막눈이라……^^ 그리고 동아일보의 기사들은 지능범들 사이에 끼인 멍청한 종범을 보는 재미로 눈에 조금씩 적셔주고 있습니다.^^

  2. Crete 2008/03/21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언제나 즐겨 읽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출처를 밝히고 퍼가고 싶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3/21 0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글은 게시물 하단마다 명기한 CCL2에 따라 이용하시면 됩니다. 원작자를 표시하고, 영리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며, 변경하지 않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물론 어디로 퍼가셨는지 댓글 또는 방명록에 남기거나 트랙백을 날려 주시는 센스는 갖고 계시리라 믿겠습니다.

    • 비밀방문자 2008/03/21 09:25  댓글주소  수정/삭제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3. Crete 2008/03/2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국가의 창에 대한 말씀을 남겨주셨는데…… 국정홍보처 폐쇄와 맞물려 현 정권의 홍보력이 문제시 되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실은 우리정부의 국가 홍보 정책이랄까.. 실무적인 면에서 보면 문제가 제법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답니다.

    2005년과 2006년에 분배 문제와 관련해서 아일랜드 정부 지출 내역서를 찾기 위해 구글신께 여쭤본 적이 있죠. Republic of Ireland를 치니 바로http://www.irlgov.ie/가 맨 위에 뜨더군요. 이 사이트를 통해 아일랜드에 관한 모든 정보를 클릭 한번에 모두 찾을 수 있었고 방문자들로 하여금 One-Stop 투자까지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반면에 구글(www.google.com)에서 Republic of Korea를 치니 북한 공식 홈페이지가 맨 위에 뜨더군요. 아... 이 황당함이란..... (-.-;)

    물론 지금은 위키피디아의 South Korea가 맨 위에 뜨고 북한 공식 홈페이지는 6번째로 내려 앉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2년 여 동안 여러 곳에 진정을 했는데도 생각보다 금방 바뀌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 자료 중 영문으로 된 걸 찾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 정도의 우수한 인력 풀을 가진 나라도 찾기가 쉽지 않을 테고 사회간접자본 역시 유럽 연합내의 어느 나라에 뒤 떨어지지 않는데, 제가 보기에는 외국인을 위한 홍보개념이 아직 공무원들에게 절실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주하는 곳은 미국 텍사스주의 샌안토니오인데.. 이 곳은 미군이 합동작전을 하는 전세계 모든 국가의 장교들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기 전에 언어 연수를 실시하는 교육기관이 있는 곳이랍니다. 당연히 매년 우리나라의 육해공 해병 장교들이 100여명 씩 방문을 하고 짧게는 3주 길게는 3개월 정도 언어연수를 받고, 다음 번 군사연수를 받을 장소로 떠나고는 하죠.

    각군에서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분들께서만 선발되어 오시는데도 영어가 말이 아닙니다. 오셔서도 골프 주로 시간을 보내시지 영어 연수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신 것 같고. 오죽하면 그곳의 교관 분이 한국 장교들을 보면서 이렇게 영어를 못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렇게 영어가 안 느는 것도 신기하다고 하실 정도죠.

    늘 좋은 글과 자료에 감사하단 말씀을 언젠가는 정식으로 드리고 싶었답니다. 그럼.. 건필 하시기 바랍니다.

  4. 양성민 2008/03/24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과는 무관한 질문입니다. 동부전선의 동지 작전에 동원된 SS군단이 제10군단입니까, 제11군단입니까?

  5. 양성민 2008/03/25 0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C.Duffy의 <Red Storm on the Reich>에서도, wikipedia에서도 제10군단이라고 하던데, 오류인가 보네요.

    • Periskop 홈지기 2008/03/25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윽, 제가 실수를 했군요. 군단을 물어보시는 건데 제11군(제11SS 기갑군으로 불리기도 했음)을 묻는 질문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a 당시 제11군 예하 군단을 묻는 것이라면 제10SS 군단이 맞습니다. 제11SS 군단은 퀴스트린 지구에 배치되어 있었지요. 착오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6. 양성민 2008/03/25 1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닙니다. 친절한 답변 '매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간혹 질문하겠습니다. ^^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얼마 전 윤시원 님이 블로그에 중화의 놀라운 실용주의(?)에 대한 글을 써 주셨다 — 링크 클릭해보고 낚였다고 퍼덕댈 애꿎은 방문객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 이야기임을 미리 경고드린다. 이야기인즉슨, 1949년 2월 중국인민해방군의 무지막지한 단대호 개편으로 1개 軍(야전군) 당 3개 師(사단)씩 70軍까지 정렬시켰다는 것인데…… 댓글 릴레이에서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런 실용주의(?)가 이어졌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필자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당장 자료를 찾아보고 트랙백을 걸려 했다. 아뿔싸, 그런데 결혼하고 새살림을 차린 뒤에 변변히 책을 옮겨오지 못해 필자가 소장한 군사사 관련 책의 90%가 본가에 있는 것이다! 원통함을 무릅쓰고 주말에 살짝 가서 간신히 관련서적을 몇 권 집어올 수밖에 없었다 — 전에 몇몇 지인 분들이 결혼하신 뒤에 비슷한 고충을 토로할 때는 그냥 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