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멜, 세계적으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만큼 논란거리가 되어왔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장군이 있었을까. 필자도 롬멜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풀며 논란에 휘말려든 바 있다. 그런 논란의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서구 참전국들의 논의보다 한참 뒤쳐진, 롬멜 숭배의 논리가 판을 치는 우리나라였으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어느 정도 일신되어 허상이 많이 걷히긴 했다.
그럼에도 필자로서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점은 서구에서 벌어진 롬멜 논쟁의 이면에 깔린, 보다 큰 쟁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직감하신 분도 있겠지만 롬멜 논쟁의 핵심은 롬멜의 개인 능력에 대한 평가 문제보다도, 그가 가진 독일국방군(Wehrmacht) 전체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에 더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롬멜을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에는 그 개인의 허상을 깨는 것 뿐만이 아니라, 독일국방군 전체가 비극적 시대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라는 허상을 깨려는 움직임이 함께 깃들여있다.
흔히 무장친위대가 아닌 독일국방군에 대해 갖는 이미지란 어떤 것일까. 군사 분야에는 최고의 프로페셔널한 능력을 보여주면서도 적과 민간인을 배려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는 숭고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전후까지 이어지는 이 이미지는 묘하게도 과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롬멜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롬멜의 이미지는 히틀러와 괴벨스 치하의 나치 시대뿐만이 아니라, 전후 독일연방공화국(서독) 및 독일연방군(Bundeswehr)에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었다. 히틀러에게는 대중이 열광할 수 있는 현생의 군신(軍神)이 필요했고, 독일연방군에게는 나치 시대의 원죄를 모두 한데 품어 사(赦)해줄 과거의 순교자가 필요했다. 롬멜은 다수가 본질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후 반 세기에 걸쳐 서로가 손을 바꾸며 끌어들여 이용하고자 했던 상징적 존재였다.
 Mythos Rommel |  Rommel. Das Ende einer Legende |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에 근래 롬멜에 대한 책으로 가장 널리 읽혀진 바 있는 마우리체 필립 레미(Maurice Philip Remy)의 『Mythos Rommel(롬멜 신화)』도 굉장히 주의해야할 책이다. 『Mythos Rommel』은 그 자체로만 놓고 봤을 때, 롬멜에 대한 팩트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잘 쓰여진 책이다. 저자 서문 등에 나와 있듯이 이미 독일 내에서도 홍역을 치룬 바 있는 롬멜 관련 논쟁을 충분히 인식하고 ARD의 다큐멘터리와 병행하여 자료 조사에 상당한 공을 들인 저작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내포하고 있는 결정적인 위험은 다루고 있는 범위가 2차 세계대전 중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욱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전후 롬멜의 상징성이 어떻게 이용되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쳐오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독일의 좌파 군사사학자들은 이 점을 들어 이것이 오히려 더욱 교묘한 신화 만들기라는 비판을 전개해왔다.
이런 면에서 『Mythos Rommel』과 대조적인 책 가운데 하나가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Ralf Georg Reuth)의 『Rommel. Das Ende einer Legende(롬멜. 전설의 종말)』이다. 제목에서도 풍기듯이 이 책은 롬멜의 명성은 그의 능력을 크게 부풀려서 이용해야만 했던 외부 요인들에 힘입은 것이라는 논조를 견지하며 대전 중과 대전 후의 포장 과정을 5개 장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탁 들었을 때 솔깃한 감이 드는 내용이지만, 사실 팩트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잘 쓰여진 책은 아니다. 롬멜에 대한 전설 — 신화(Mythos)가 아니라 전설(Legende)이란 말을 쓴 것도 잘 음미해보시길 바란다 — 을 깨는 제대로 된 전기를 쓰겠다는 저자의 포부에도 불구하고 롬멜의 전시 행적에 대해 다른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좀 읽기가 껄끄럽다. 저자 랄프 로이트가 사학 박사학위를 가진 언론인이니 관련 분야의 훈련이 안 되어 있거나 내용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닐테고, 아마 저술된 시기상(2005년) 『Mythos Rommel』이 불러 일으킨 새로운 롬멜 붐을 꺼뜨려야 겠다는 심리적 압박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책이 비판하고자 하는 『Mythos Rommel』의 폐해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에는 좀 덜 알려진 편이지만, 전후 롬멜 미화의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B 집단군 참모장이었던 한스 슈파이델(Hans Speidel)이었다. 슈파이델은 상당한 수준으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개입했음에도 특별 군사법정(이른바 육군 명예법정)에서 배심원 역할을 맡은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과 하인리히 키르히하임(Heinrich Kirchheim) 중장 등이 그에게 우호적인 변론을 해주고 무죄 선고를 내림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덕분에 전후에 반(反)나치 군인으로서 전범 기소도 되지 않고 우호적인 평가를 받은 슈파이델은 롬멜도 철저하게 반 히틀러 영웅으로 윤색하기로 기획한다. 슈파이델이 전 상관인 롬멜의 미화에 착수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고 이야기된다. 첫째는 자신의 자백이 롬멜의 목숨을 앗아간 결정적 이유라는 오해 — 사실 그의 자백 이전에 다른 가담자들이 롬멜도 음모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자백했다 — 에 기인한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두번째는 전후 독일군의 재건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필요였다.
종전 후 살아남은 당대 독일군 출신 인사들의 위기감은 매우 심각했다. 나치의 비인간적 범죄들의 공범이었다는 오명 때문에 독일군은 베르사유 체제 이상의 가혹한 징벌 — 아마도 일본의 평화헌법 및 자위대 체제와 유사한 조치 — 을 뒤집어 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나치의 범죄 행위와 분리된 독일군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필요했다. 이것은 전쟁범죄에 가담한 독일군은 극소수 나치 광신도에 불과했으며, 대다수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히틀러에게 끊임없이 반감을 갖고 체제 정상화에 노력했다는 인상을 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의도에 맞게 가장 잘 포장이 가능한 인물이 바로 롬멜이었다. 롬멜처럼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던 장군이 히틀러에 의해 반 강제로 자결했다는 사실은 극적인 효과로도 최고였다. 그의 순교자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그를 독일군 전체와 동일시함으로써 독일군은 면죄되고 부활하여 새로운 반 볼셰비키 전선에 떳떳이 동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대였던 영국군의 기호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롬멜을 부각시킴으로써 영국군이 참여한 전장은 어느 곳이나 깨끗하고 신사적이었다는 이미지를 고양할 수 있었으며, 승자로서의 영예도 한층 드높일 수 있었다. 섬나라 영국은 또 다시 콧대를 높일 거만한 프랑스와 무서운 붉은 곰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독일을 몰아붙일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아데나워 수상 치하에서 독일군 재건에 나선 슈파이델과 다른 장군들 뿐만이 아니라, 전쟁 당시 롬멜을 고깝게 생각하던 장군들도 그에 대해 부정적인 언사를 아꼈다. 1950년대까지 나온 다양한 독일군 장군들의 회고록을 보면 롬멜에 대해 흠집을 낼만한 내용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힘입어 독일군은 영국, 미국의 우호적인 지원 속에서 NATO의 일원으로 새로운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슈파이델은 신생 독일연방군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명예를 누리며 죽는 날까지도 진정한 롬멜의 모습에 대해 끝내 침묵했다.
그러나 묻혀둔 역사의 시각도 시간에 따라 재평가가 이뤄지고 수면 위로 튀어 나오는 법이다. 반 세기 동안 이어진 '진정한 군인 롬멜 = 깨끗한 독일군'에 대한 이미지도 독일 내부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크게 추락했다. 『Mythos Rommel』 서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2001년 5월 28일 고슬라(Goslar) 엽병부대 병영에서 롬멜과 구데리안의 기념물을 떼어내버린 사건은 1990년대의 롬멜 및 독일군 재평가 움직임의 적나라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전후의 상징조작을 가볍게 넘어간 채 롬멜의 반 히틀러 고뇌만을 계속 부각시킨 『Mythos Rommel』은 당연히 우파의 또 다른 롬멜 및 독일군 신화 만들기로 보일 법도 하다.
ZDF에서 귀도 크놉(Guido Knopp)의 감독 하에 롬멜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뒤에, 마우리체 레미는 2002년에 TV 다큐멘터리와 책을 동시에 제작했다. 이는 전후에 슈파이델이 만들어 낸 원수에 대한 전설이 레미의 『Mythos Rommel』로 재림한 것과도 같은 전환점이 되었다. 롬멜은 오랜 기간 '확신에 찬 민족사회주의자'였음에도 '저항운동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롬멜은 양자 모두였다'라고 레미는 결론짓고 있다.
사실 롬멜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민족사회주의나 그에 대한 저항 모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롬멜은 수백만 독일인들의 전형이었다. 독일의 비극은 원수의 페르소나 속에 하나의 원형처럼 반영되어 있다. 그는 모욕당한 국가의 자존을 회복시킨 총통을 따라 재난으로 빨려들어갔고,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단지 그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믿었다.
—『Rommel. Das Ende einer Legende』의 맨 마지막 구절
필자 입장에서는 딱히 마우리체 레미 같은 '롬멜을 이해하자'는 주장이나, 랄프 로이트의 '롬멜을 미화하지 말자'는 주장 가운데 어느 한 편을 강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 사실 심정적으로만 따지자면 레미 쪽의 의견에 약간 더 우호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역사란 것은 본질적으로 현세의 이해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다시 쓰여지고 이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롬멜과 2차 세계대전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님을 같이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싶은 바램이다. 이런게 다 역사를 음미하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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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궁색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감동적이군요. 이걸 읽고 보니 저도 한 질 사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절판되기 전에 질러야 겠군요.
사실 이 마지막 부분만 비장미가 감돌지 나머지 부분은 다 밋밋합니다. 그래도 역시 극강의 가격 메리트는 여전하니 사 두실만 할 겁니다.
"영웅적인 투쟁"이라는 어구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장렬한 싸움을 벌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니 전례없는 전투라는 면에서 깊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패배가 눈앞에 보이는 시점에서도 심지어 수도가 함락되고 자국이 유린되는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싸운 독일 국방군을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울립니다.
1차 세계대전처럼 혁명으로 끝을 맺지도 못하고 독재자와 최후까지 함께 했어야 했던 사실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요. 『Der Untergang』에 묘사된 것과 같은 최고위층의 모습과 『硫黃島からの手紙』에 묘사된 것과 같은 개개 말단 병사들의 모습이 병존하는게 전쟁이고 보면, 방점을 어디에 두고 그 시기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감정이 많이 교차하고는 합니다. 역사를 읽다가도 어느덧 도덕적 분노와 인간적 연민 속에 방황하게 마련이지요.
왠지 서글프네요...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어깨를 어루 만지는 듯한 글이네요
문득 저 글을 쓴 공보관의 심정은 솔직히 어떠했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BOB 마지막에서 독일 장교가 항복한 자기 부하들에게 하던 연설 장면이 떠오르네요.
말씀하시니 생각났는데 몹시 궁금한 것은 그 독일 장교(원작에는 대령이나 미니시리즈에서는 장군으로 묘사)가 한 독일어 연설의 소스입니다. 그냥 작가들이 지어낸 말인지 어디 다른 곳에서 실제 누군가 행한 연설을 옮긴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