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원 님께서 지난 주에 심히 덕후스러운 총통 각하의 지휘 방식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주셨다. 홈지기도 주말에 그 일화가 실려있던 Warlimont의 책(영역판)을 뒤적이며 독일군 참모장교들의 애환을 음미해봤다. 그러자니 역시 반대쪽 소련을 영도하신 스탈린 동지와 소련군 총참모부 장교들의 애환에도 생각이 미쳤다.

(참고로 홈지기는 이 책의 영역판 『The Soviet General Staff At War: 1941-1945』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도 재밌는 뒷 이야기가 있다. 홈지기가 몇 년 전엔가 이 책을 깨끗한 중고로 입수했는데, 이 영역판을 찍어낸 출판사를 보니 「PROGRESS Publishers」였다. 직역하면 '진보' 출판사가 아닌가. 서구에도 이런 왼쪽스러운 이름이 있나 싶어서 뒤져보니…… 이게 모스크바에 있는 출판사였다. 알고 보니 소련에서 모범적인 체제 선전용 저작들을 널리 세계 인민에게 보급코자 영역하여 찍어내던 곳이었다. 1980년대에는 국가보안법으로 걸고 넘어지기 딱 좋은 출판사이지 않았을까.)
소련군 총참모부도 전쟁 초기 극심한 혼란 상황을 극복하고 전시 체제의 기틀을 잡고나자 기계적으로 돌아갔다. 특히 스탈린의 일과에 맞춰 24시간 빡빡하게 반복되는 업무는 살인적이었다. 수령 동지께서는 총참모부의 주요 인사들의 근무 시간을 정해놓고 교대로 보고를 받았다. 총참모부의 근무 원칙은 17~18시간 근무에 5~6시간 휴식. 총참모부 내에서도 가장 이름난 워커홀릭이었던 부(副)총참모장 알렉세이 인노켄티예비치 안토노프(Алексей Иннокентьевич Антонов) 대장은 새벽 5~6시부터 정오까지 쉴 수 있었고, 시테멘코는 오후 2시부터 저녁 6~7시까지 쉴 수 있었다고 한다.

아침 담배는 끝내주는군
첫 번째 보고 내용과 수령 동지의 지시사항은 다시 12시에 총참모장에게 보고되었다. 바실렙스키나 안토노프 등은 정오에나 업무에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오전에는 총참모부 승인 없이 스탈린에게 직보하고 정오에 이렇게 업무 공유가 이뤄졌다.
두 번째 보고는 오후 4~5시 경에 이뤄졌다. 시테멘코는 오후 2시에 자러 가므로 작전국 부국장이 주간 전황을 오후 3시까지 정리하였다. 그러면 이를 검토한 안토노프가 수령 동지에게 보고했다. 이 내용은 문서로도 만들어져 총참모부 및 정부 핵심인사들에게도 서면 보고가 이뤄졌다.
세 번째 보고는 밤 11시 넘어 이뤄졌다. 하루 종일 있었던 모든 전황에 대해 밤 9시까지 집중 정리가 이뤄졌고, 총참모부의 종합 분석 보고서가 함께 준비되었다. 이를 토대로 다시 전황도가 세밀하게 작성되어 준비가 완료되면 안토노프, 시테멘코 등 주요 간부들이 함께 크레믈에 출두했다. 총참모부 장교들은 이 외에도 필요한 결제 서류나 부속 참고자료를 중요도 별로 세 개의 폴더에 정리해 갔다 — 빨간색이 가장 중요했고, 그 다음 파란색, 녹색의 순이었다. 이들은 스탈린이 저녁 일정을 모두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일간 최종 보고를 했다. 대규모 작전이 벌어져서 의사결정할 사안이 많아지면 보고는 한정 없이 길어지기 마련이었다. 행여 전선이 조용한 날이면 좀 일찍 끝나기는 했나보다. 그런데 역시 무시무시한 포스를 발산하시는 수령 동지는 새벽이 되어서도 그냥 쉽게 부하들을 보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 각 전선군 별 사안이 잘 넘어가면, 보고에 걸리는 시간은 덜 걸렸다. 그러나 이게 끝나면, 스탈린은 간혹 우리를 불러 보통 선전뉴스같은 영상물을 보자고 했다. 우리는 다른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고, 부서에 돌아가도 처리해야할 끝도 없는 업무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양손으로 지도가 가득찬 특송가방을 들고 앉아 있고는 했다……
이렇게 돌아온 총참모부의 간부들은 흔히 벌어지는 야간작전 상황을 통제하고 잔무를 처리하면서 꼬박 날을 지새웠다. 야간에 전선군 별로 작성하여 송신한 보고서를 다시 정서하여 배포처를 정리하고 발신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격무로 점철된 생활의 결과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 우리는 약간만 실수해도 가혹한 처벌을 받으리란걸 알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한계점까지 밀어 붙이며 일했다. 모두가 이런 부담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동료 몇몇은 이후 신경쇠약과 심장질환으로 오래도록 시달렸다. 그들 대다수는 정년이 한참 남았음에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퇴역했다……

1942년 소련군 총참모부와 정치국 인사들
격무로 찌든 모습을 (뽀샵이 없던 시절) 핸드드로잉으로 분칠한 모습이 조금 처량해보이긴 하다. 하기사 역사 속에서 이 분들만 고생했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가까이 앞으로도 노심초사할 이 분들도 있지 않은가!:

각하 2시간만 더 주무시옵소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스탈린 동지의 근영 부연설명 - 아침 담배는 끝내주는군...
음 홈지기님께서는 금연이신걸로 아는데 아침 담배의 맛은 어찌 아시는지(웃음)?
한창 때에는 1박2일로 놀러가면 밤새 2갑(!)까지도 피웠었는데 개인적으로 담배맛은 자기 전 하루를 정리하며 이런저런 잡생각과 더불어 피우는 2~3개비와 기상후 첫타가 제일이었던 듯(웃음).
정확히 2005년 1월 1일부터 - 그 이전부터 피우지 않긴 했으나 편의상 기산점을 설정 - 지금까지 금연중이니 3년 반 조금 안되는 기간이 흘렀군요. 그러나 지금도 아주 답답할 때에는 한 대 생각이 절로 떠오르니 역시 중독성 순위 No.2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 제가 알기로 No.1은 필로폰, No.3는 아편. 따라서 이론상 담배를 순수의지로 끊을 수 있는 사람은 아편도 끊을 수 있다더군요(오오).
2. 영상물 관람...
인터넷에서 떠도는 군대후일담 중에 자신의 상관이 부과했던 최악의 벌칙은 80년대(!)에 만들어진 정훈교육비디오를 밤새도록 관람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끔찍한 증언이 떠오르는군요(처참).
그런데 스탈린 동지께선 그런 영상물이 정말 재미있으셨던 것인지... 하긴 당시의 영상물은 결론적으로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치는 것들이 많았을테니 볼만했을 수도 있겠군요(한숨).
저야 아직도 담배는 손에도 대고 있지 않습니다만…… 아침 담배맛은 많은 사람들이 워낙 찬사를 던지는 지라 그런가 보다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전시 선전물들은 저도 많이 보지 못해서 사실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쉬테멘코도 이미 전선시찰할 때 봤던 장면들도 많았다고 하는걸로 보아 참모장교들에게는 좀 지루했던 모양입니다.
그러시군요. 담배의 경우 나중에 끊을 생각을 안하는 경우란 거의 없기에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듯 합니다(웃음).
예전에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KT&G에서 발매중인 모든 담배의 목록을 뽑아서 한 갑씩 전부(!) 피워보고 맛에 대한 감상 등등을 적었던 일이 있었는데 - 과거를 돌이켜보면 황당한 일을 너무나 많이 벌인 듯... - 결국 당시 200원이었던 '솔'만은 실패했더랬죠. '그들만의 유통경로'로만 배포되는 듯 합니다.
예전에 서울대 오석홍교수님께서 "담배든 뭐든 결국 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끊게 마련이니 일부러 지금 끊으려고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다"란 말씀을 하셨다고 전해들었던 일이 있습니다 - 실제 뵌 적은 없지만 진정한 대인배이신 듯...
그런데 저는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냥 어느 순간 안피우게 되더군요. 그 중독성이 강하다는 담배조차 별 이유없이 관두는 것을 보면 저란 사람은 꾸준함과는 역시 거리가 먼 듯 합니다(헛웃음).
채승병님깨서는 progress에서 나온 판본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사회주의 종주국에서 찍은 것을 가지고 계신다니 부럽습니다.^^ 제가 가진 슈테멘코의 책은 Pacific대학 출판부에서 찍은 판입니다. 왠지 본가에서 찍은 물건에 비해 뭔가 부족한 느낌을 떨칠수가 없더군요.
스탈린이 선전영화를 즐겨봤다는 부분을 읽으니 예전에 봤던 Inner Circle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스탈린이 혼자 영사실에 앉아서 독일의 선전영화를 보며 승승장구하는 독일군의 모습에 침울해 하는 장면이었는데 꽤 인상깊은 부분이었습니다.
그거 마치 반지의 제왕 원작에서 사우론의 선전영화(?)를 보면서 의기소침해지는 데네소르의 모습같군요. ^^
아, 그 Pacific 대학 출판부의 책은 저도 하나 갖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다 Progress 판본을 복사기로 민 수준이더군요. 저도 그래서 그 책을 받아보고 울컥했던 기억이 납니다. Progress 판본은 사회주의 국가의 우직함이 있었는지 꽤나 튼실한 판본이어서 아직도 책 잡을 때 느낌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