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블로그 서핑 중에 장갑냐옹이 님의 블로그에 들르게 되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소매띠(Ärmelstreifen; 영어로는 cuff title) 제거 명령" 일화에 대한 글을 봤는데, 이게 그다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보충할 겸 트랙백을 달아 보기로 한다.

"소매띠 제거 명령"은 1945년 3월, 대전 막바지에 제6 SS 기갑군을 주축으로 한 독일군이 헝가리 발라톤 호수 일대에서 부다페스트 탈환을 목표로 벌인 야심찬 반격전(Frühlingserwachen 작전, 일명 Plattenseeoffensive)이 실패로 돌아가자, 히틀러가 절망한 나머지 제6 SS 기갑군 소속 무장친위대 병사들에게 차고 있던 소매띠를 다 떼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사건이다. 소매띠는 무장친위대로서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에 실로 충격적인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 이 명령은 전후에도 두고두고 말이 많았던 것이, 명령 그 자체 보다도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고질적인 육군(Heer)과 무장친위대의 반목 때문이었다.

국가의 공식적인 무력집단으로서 육군은 애초부터 무장친위대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군령권은 OKW, OKH에 위임되어 행사되었지만 별도의 군정 체계와 이질적인 성향 때문에 육군 장교들은 무장친위대 장교의 능력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반대로 무장친위대 또한 특유의 자부심을 지나치게 과시하면서 육군과 거리를 두려 했다. 전황이 그나마 좀 나을 때는 이런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는데, 역시 계속 패전과 퇴각을 거듭하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사소한 일에도 열받기 시작하며 악감정이 쌓이는 법이다. Konrad 작전에서 부다페스트 구원군을 지휘했던 역전의 지휘관 헤르만 발크(Hermann Balck) 기갑대장이 예하의 제4 SS 기갑군단장 헤어베르트 오토 길레(Herbert Otto Gille)의 작전수행능력에 대해 못내 못마땅해 하면서 충돌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 이후 대전 말기 무장친위대 병력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던 헝가리-오스트리아 전선은 양측 지휘관들 사이에 가장 첨예한 신경전이 일어난 장소가 되었다.

3월 16일 이후 Frühlingserwachen 작전 또한 실패가 명백해지고 소련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반격이 본격화되자 책임 문제가 또 다시 불거졌다. 육군에서 OKH로 올라오는 보고들은 대부분 무장친위대 야전 지휘관들의 신통치 않은 능력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이어졌고, 매일 히틀러에게 행해지는 OKH의 브리핑에도 이 문제가 언급되었다. 히틀러로서는 무장친위대 최정예 부대들이 가득 모여있는 제6 SS 기갑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꽤나 충격이 컸을 것이다. 이로 인해 소매띠 제거 명령을 내리기 까지의 간략한 과정이 (출간 이래 한창 논란이 있는 책인) 「The Hitler Book」에 실려 있다:

발라톤 호 반격의 실패는 히틀러를 깊이 충격에 빠뜨렸다. SS 사단들에게 쏟아부었던 희망은 사라졌다. 크렙스 장군은 그의 첫 브리핑에서 디트리히의 야전군의 퇴각을 보고했다. 히틀러는 놀라 테이블에서 머리를 휘저으며 좀 떨어진 곳을 응시했다. 나중 회합에서 디트리히에 대한 보고서가 당도하고, 그의 야전군이 막대한 수의 병력과 전차를 혈전 속에 상실했다는 사실이 굳어지자, 히틀러는 벌떡 일어나 '내 SS 사단들은 싸우는 법을 잊어먹었어! 다들 겁장이가 되어버렸다고!'라고 일갈했다. 그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다시 먼 곳을 멍청히 바라봤고, 그의 안면에는 경련이 일어났다. 그가 전 국방군에게 모범으로 내세우고 특별한 이름을 붙여줬던 SS 사단들이었건만, 이제는 그들을 겁장이로 비난하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난 뒤에 히틀러는 귄셰(SS 출신의 그의 부관)를 불러 디트리히가 발라톤 호 반격에 나서기 전에 뭔가 말한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귄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디트리히가 다가오는 작전에 대해 자신하며, 단지 그는 헝가리가 아닌 독일을 위해 싸우길 원했는데 폼메른이 아닌 헝가리에 싸우게 되어 유감이라고 했다고 보고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이 그렇게 말하라고 했겠지, 난 다 아네.'라고 쏘아붙였다...... (중략)

발라톤 호 반격이 참패로 끝났음이 명백해지자, 히틀러는 귄셰를 다시 불러 라이프슈탄다르테 부대가 더 이상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붙일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디트리히에게 내릴 명령서를 준비하라고 했다. 한때 바로 그 부대의 일원이었던 귄셰는 히틀러가 방안을 여기저기 쏘다니는 동안 침울하게 앉아 마지 못해 명령서 작성을 시작했다. 귄셰가 여러 차례 작성하고 많은 부분을 지우길 반복한 끝에, 마침내 초안이 완성되었다: '라이프슈탄다르테가 내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내가 기대한 전투 근성을 발휘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달 자격이 없음을 명령한다.' 도중에 히틀러는 귄셰의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눈치챘다. 그는 귄셰에게 걸어가서 '놔두게. 내가 힘러에게 직접 얘기하겠네'라고 말했다.

그제껏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힘러는 호헨리헨의 SS 휴양소에 머물러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는 다음날 전황 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서 그는 디트리히와 그의 야전군에 대해 분노를 발산했다. 그는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소! 더 이상 내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어! 힘러, 직접 디트리히에게 가게! SS 사단들에게서 이름을 떼어버릴거야. 소매띠를 떼어내라고. 디트리히 것도! 디트리히에게 사단들이 더 이상 퇴각하면, 장병들에게서 그들의 깃발과 훈장까지 떼낼 거라고 전하게!'라고 말했다. 힘러는 의견 없이 대답했다. '총통 각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괴링은 조심스럽게 히틀러에게 결정을 재고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의 의견으로는 개전 이래 동부전선에서 피를 흘려온 SS 사단들에게 너무 가혹한 징벌이었다. 이것이 히틀러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는 그의 운명을 7년 전쟁 중에 몇 개 연대의 졸렬함을 징벌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운명에 비유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연대들로부터 이름과 깃발, 표창 일체를 없애버렸오. 난 SS 장병들이 더 퇴각한다면 총살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히틀러가 SS 사단 깃발들까지 없앨 것으로 위협함에 따라, 4월 초에 디트리히 휘하 장교 2명이 수상관저 벙커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던 라이프슈탄다르테의 군기(軍旗)를 가지러 귄셰에게 찾아왔다. 이 군기는 퍼레이드에만 쓰이는 것이었다. 귄셰는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넘겨줬고, 그들은 이것을 이제 빈(Wien)의 사령부에 있는 디트리히에게 가져갔다......

참고로 이 정황은 전후에 소련군이 귄셰를 취조하여 얻어낸 증언으로 보인다. 또한 히틀러의 발언 중간에 '구데리안이 시켰겠군'이라고 한 부분은 아마 OKH 참모총장이던 구데리안이 성가실 정도로 히틀러에게 계속해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오더 강이나 폼메른 전선에 보낼 것을 촉구했던 것의 반작용으로 보인다. 사실 이 책 내용은 소련의 입맛, 특히 스탈린의 입맛에 맞게 윤색한 흔적이 있어서 저 내용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귄셰가 비슷한 내용을 후일 서방에서도 증언했고, 다른 문헌에서도 대동소이한 언급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크게 왜곡된 것 같지는 않다.

이날 사건에 관해서는 괴벨스 또한 일기에 짤막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총통께서는 SS 부대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로 결정하셨다. 힘러에게 헝가리로 날아가 그들의 소매띠를 떼어내라고 명령하셨다.'

이 충격적인 명령은 힘러가 당장 직접 전하지는 않고 — 군사적으로는 이미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온갖 무능함을 보여준 본인도 차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 3월 27일 새벽에 전문으로 디트리히에게 보내졌다. 이 전문을 수신한 디트리히의 반응은 당시 그의 작전참모(Ia)였던 게오르그 마이어(Georg Maier)가 쓴 「Drama between Budapest and Vienna (원제: Drama zwischen Budapest und Wien)」에 나와있다:

1945년 3월 27일 05시 00분, 제6 SS 기갑군 사령부는 베를린으로부터 야전군 전체가 소매띠를 떼어 내라는 명령 전문을 받았다. 게오르그 마이어 중령은 04시 00분 부터 야전군 제1 참모장교로서 아침 교대에 나서 05시 00분 정도에 일어나는 디트리히가 볼 수 있도록 보고서와 각종 명령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통신 장교가 전문을 마이어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짧은 명령문을 읽고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노와 모욕감에 떨다 그는 진정하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결정하려 했다. 우선 야전군 참모장인 크래머 소장이나 디트리히의 부관인 바이저 소령을 깨워야 했다. 마침 그때 디트리히가 문으로 들어와서, 마이어는 그에게 아침 보고서와 명령서를 전달하며 보고했다. 디트리히는 명령서를 읽었다. 확연히 동요한 그는 지도 테이블로 가서는 그 위로 풀썩 굽혔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한참의 침묵 뒤에 여전히 지도 위로 몸을 굽힌 채로, 그는 평상시와는 달리 깊은 실망과 분노가 담긴 매우 조용하고 힘 없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건 모든 것에 대한 치사(致謝)야."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일어서서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건 계속 달아야만 해." 그는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마이어에게 뭘 해야겠느냐고 물었다. 마이어는 총통사령부에 그렇다면 도나우 강과 발라톤 호수 사이에서 죽어간 용맹한 수천 명의 무장친위대 병사들의 소매띠도 떼어야 하는 거냐고 되물을 것을 건의했다. 마이어의 실망감도 이해하면서 디트리히는 그에게 크래머에게는 알리되, 군단들에게는 이 명령을 전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중략)

08시 00분에 크래머가 나왔으며, 그도 전문을 읽고서는 실망과 분노에 떨었다. 그는 마이어와 함께 그의 라이프슈탄다르테 소매띠를 떼어냈다(마이어는 다스 라이히 소매띠를 떼어냈다)...... (후략)

여기를 보면 이 명령은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힘러의 이름으로 타전되었으며, 이를 수신한 제6 SS 기갑군 사령부 차원에서 불문에 부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령은 명령이기 때문에 대표로 야전군 참모장과 제1 참모장교(작전참모)가 실행에 옮긴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이 소식은 이러한 은폐 노력에도 불구하고 곧 소문이 퍼지게 된다. 게오르그 마이어의 책에서는 그것이 무장친위대에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남부집단군 사령부 및 제6군 사령부 쪽에서 유출시켰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사실 일반 야전 장병들은 부대 이동을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헝가리로 이동하면서 이미 소매띠를 다 떼어낸 상태였으니 시행 자체는 의미가 없었으나, 최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소식임에는 분명했다.

장갑냐옹이 님이 언급한 쿠르트 마이어의 자서전, 「Grenadiere」에 나와 있다는 이야기 가운데 제6 SS 기갑군이 추가 보고를 통해 이 명령을 철회시켰다는 부분은 실은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이다. 실제 벌어진 일은 그 다음 날인 3월 28일에 힘러가 제6 SS 기갑군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거센 항의였다. 힘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에서 디트리히와 참모들의 항의를 수긍하고 자신도 헝가리 전선의 무장친위대 장병들에게 부당하게 가혹한 명령이 내려졌음을 구두로 인정했다. 결국 이 역시 힘러 선에서 무마되었을 뿐, 히틀러가 공식적으로 이를 철회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쿠르트 마이어가 자서전에서 저렇게 약간 잘못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자서전이 나온 1950년대 중반 상황(「Grenadiere」는 1957년에 출간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애당초 이 소매띠 제거 명령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구데리안의 자서전 「Erinnerungen eines Soldaten」(1951년 출간) 등에 직접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갑부대가 엄호를 제공하는 사이에 무장친위대 보병들이 도망치기 바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포로 생활을 마치고 쿠르트 마이어 등을 중심으로 서서히 조직화에 나섰던 무장친위대 출신 참전용사들 사이에는 명예와 직결된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까 시급히 대응은 해야겠다는 작정으로 관련자들의 회고담을 모아 그 정도 언급으로 지나갔던 것 같다. 무장친위대 관점에서 보다 치밀한 자료조사에 근거한 문헌이 출판된 것은 그 후의 일들이다. 특히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신경써서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게오르그 마이어의 저작은 1983년이나 되어 출간되었다.

이러한 히틀러의 명령이 나오기 까지 악감정이 있던 육군 측의 장교들이 지엽적인 문제를 확대해서 보고한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해도, 무장친위대가 발라톤 호 공세에서 전과 다른 졸렬한 모습을 어느 정도 보였던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무장친위대 부대사들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워낙 대전 말기 인력 수급의 난맥상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못 받은 신병들이 많이 배치된 것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무장친위대는 지상전 숙련도가 극히 낮은 공군과 해군 출신 인력을 대거 끌어들인 상태여서 정상적인 전투력 발휘가 어려운 시기였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군사사를 읽다 보면 느끼는 묘한 딜레마를 고백하자. 장갑냐옹이 님은 오토 뵐러 보병대장을 구라쟁이로 묘사했지만, 필자가 본 중에 무장친위대 옹호자들이 진짜로 이를 가는 사람은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기갑전의 귀재라 불리우는 헤르만 발크 기갑대장이었다. 헤르만 발크의 자서전을 봐도 그가 웬지 무장친위대에 상당히 심사가 꼬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반대로 무장친위대 인사들의 회고록이나 부대사를 봐도 발크에 대해서 굉장히 감정이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게 되었을까? 전쟁도 인간이 하는 일이다 보니 군사사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이성을 넘어선 심각한 감정 문제는 언제나 부닥치게 된다. 인간적인 면에 끌리면서 필자도 그런 문제에 대해 꼬치꼬치 쓰고 싶다가도 어느샌가 잘잘못을 너무 가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웬지 거기에는 종이에 쓰여진 기록에는 다 담지 못한 그들만의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과연 어떠하실런지?

2007/03/28 00:05 2007/03/2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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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후베르트 마이어 영감님의 변명

    Tracked from 장갑냐옹이의 창고 2007/06/30 00:02  삭제

    쿠르트 마이어의 척탄병을 시작으로 제국의 아들들, 히틀러의 투사, 제12 SS 기갑 사단사 2권을 함께 참조해서 무장 친위대 소매띠 제거 명령에 관련된 사실을 재검토해 보았습니다. 채승병 님이 이미 검증해 주셨지만 개인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국의 아들들에는 관련 내용이 293~295쪽에 있으며, 히틀러의 투사와 내용이 비슷해서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이하는 차례대로 척탄병, 제12 SS 기갑 사단사, 히틀러의 투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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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갑냐옹이 2007/03/28 1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료의 선별과 객관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와 흥미를 추구하다 보니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는데, 채승병 님 말씀으로 인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사뭇 진지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다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서 웃어넘기고자 하는 심리가 강합니다. 뵐러 보병대장 얘기도 같은 맥락이죠. 가끔은 심각하게 객관성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근래 올린 대부분의 글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심정으로 올렸으니 사실을 알린다는 측면에서 꽤나 무책임한 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채승병 님이 페리스코프 포럼을 재개장한 사실을 알게 돼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 그랬으면 더욱 늦게 알게 되었겠죠. 안 그래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전락해 가는 2차 세계 대전사인지라 빨리 방향 전환을 하지 않으면 꽤나 문제가 커질 상황이었죠. 깊게 파고드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왜곡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죠. 여러 모로 채승병 님의 트랙백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색안경을 벗을 수 있게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재개장 축하드립니다.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늘었습니다. :)

    • Periskop 홈지기 2007/03/28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의 정서상 트랙백만 쓱~ 남기는게 좀 결례가 아닌가 싶었는데 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

  2. 뉴 제타냥☆ 2007/03/28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로운 글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차대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잘 몰랐는데, 좋은 자료가 많이 보이니 참 기쁘군요.

    재개장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자주 뵙지요.:-)

  3. 근거리 2007/03/3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문단이 참 인상깊네요. 역사, 사람사라는걸 모두 글로만 판단할수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문단을 읽고 글로 표현할수없는 미묘한 느낌이 들어 잠시 이것저것 생각하게해주었네요. :)

  4. dcafe 2007/04/06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정적인 원인 또는 계기가 몇 가지 있기는 하겠지만 오랜동안 누적된 요인들이 있겠죠. 결국 군사사라는 것도 인간사이니 말입니다. 후대의 우리가 몇 줄의 글로는 알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감정이란 게 있으니까요.

  5. 아텐보로 2007/04/06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급하신「The Hitler Book」이 히틀러평전인줄 알고 오래 찾아봤습니다;;;
    참, 그리고 블로그 개장 축하드립니다^^

  6. shrike 2007/04/12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황이 안좋아지면 사람들이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던 내면들이 표출되죠. 군대일수록 전쟁상황일수록 극단화 되는만큼 그런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의 다툼이나 대립이라는게 결국은 서로간에 다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혹은 이해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걸 감안한다면 애초에 창설 목적 자체가 사뭇 다른 집단인 친위대와 육군의 감정대립도 이해될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두 조직은 비록 같이 싸우긴 했지만 왜 싸우는지에 대한 목적은 달랐죠.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는 전쟁터 지휘관 사이의 관계에서 이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요인이 됬을겁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때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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