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순명大帝께서 환율제도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계신걸 보다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 이름하여 폴 크루그먼(Paul Krugman)과 (故)뤼디거 돈부쉬(Rüdiger Dornbusch)1 선생 되시겠다. 환율문제하면 당연히 일물일가의 법칙(The law of one price; 이하 LOOP)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두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LOOP에 대한 공박으로 이름을 떨치신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워낙 국제경제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고수들이고 다른 측면에서도 업적이 많기에 LOOP 관련 부분만 말하긴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자 — 크루그먼은 1979년에 고정환율제 국가에서 신용과잉이 일어나면 투기적 외환거래세력의 공격에 의해 통화위기로 빠질 수 있음을 보이는 모형으로 이름을 떨친 바 있고, 돈부쉬는 1976년에 그 이름도 유명한 overshooting 모형으로 이름을 떨쳤다.

LOOP에 대해서는 뭐 달리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아주 간략히만 짚고 넘어가자. LOOP는 양국 통화의 교환비(환율)은 양국 소비자가 같은 가치의 돈으로 같은 양의 재화를 살 수 있도록 조정된다는 내용이다. 이걸 절대적 LOOP이라고 한다. 이를 조금 완화한 상대적 LOOP은 양국간 정확히 같은 양은 아니지만 살 수 있는 양의 비율이 안정히 유지된다는 것이다. 일본 소비자가 100엔으로 바나나 10개를 사먹을 수 있고, 한국에서는 1000원으로 바나나 10개를 사먹을 수 있다면 환율은 1엔=10원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절대적 LOOP이다. 반면 이를 좀 느슨하게 하여 100엔과 1000원의 바나나 구매력(10개)이 변하지 않는 한 환율도 변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1엔=8원에서 유지)는 것이 상대적 LOOP이다.

이걸 액면 그대로 (진심으로)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경제학자는 없(을 것이)다. 새뮤얼슨 이래 경제학의 원조급 대가들도 LOOP은 마찰같은 역할을 하는 거래 장벽이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맞는다는 이야기는 계속 해왔다. 우리가 용수철이나 진자의 진동에서 마찰력이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운동방정식을 풀고 해를 공부한 뒤에, 현실에서는 마찰이 있으므로 이대로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설명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2 이미 오래 전부터 관세, 운임 등 여러 마찰요인이 LOOP과 상이한 현실을 낳는다는 실증연구 결과도 많이 축적되어 있다.

크루그먼 선생

크루그먼과 돈부쉬 선생은 여기에 'pricing to market'(PTM)3 이론이라는 것을 하나 더 얹었다. 이 PTM의 개념 자체는 굉장히 간단하다. 뉴스에서 흔히 보듯이 환율이 출렁이는 상황에도 국내 시장에서 수입품 가격은 요지부동인 경우가 종종 있다. 당장 원화 가치가 급락해서 단숨에 100엔당 1000원을 돌파했는데, 이는 불과 작년에 800원 대에서 움직이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다. 그런데 국내 시장에 팔리는 일본 제품들 — 디지털카메라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 의 가격은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 특히 이른바 '정품'을 판다는 공인 수입업체들의 가격이 그렇다. (병행수입이라 불리는 비공인 수입업자들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변동이 크다.) 반대로 원화가 절상되었을 때도 이런 현상은 널리 나타났다. 환율 변동이 수입품 가격에 제대로 반영이 안 되는 이런 일반적인 현상을 가벼운 의미의 PTM라고 부른다.

그런데 학술적으로는 좀 더 엄밀한 상황에서 PTM을 다루고 있다. PTM이라 이름 붙이기엔 부적절한 상황을 크루그먼이 들고 있는 예로 (딱딱한 인용을 피해) 가볍게 설명해보자:

1달러=1유로이던 환율이 1달러=1.2유로로 평가절상이 되어 달러의 구매력이 커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전에 프랑스에서 샤토 마고 1병이 200유로에 팔리고, 미국에서는 30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면 (운송비+관세+유통마진 등 제반 수입비용은 50%로 가정) 가격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얼핏 생각하면 달러 가치 절상분을 반영하여 US$300 x €1.20 / US$1.00 = US$250이 되야할 것 같다. 이만큼 가격이 내려가지 않더라도 10% 세일(US$300→US$270)만 해도 로버트 파커에 솔깃해 프랑스 그랑크뤼급 와인들에 목말라 있던 미국 소비자들은 샤토 마고를 보다 많이 수입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수출이 늘면서 반대로 프랑스 또는 유럽 내에서 유통되는 와인 공급은 줄게 되어 프랑스 내 시세가 220유로로 10% 뛸 수 있다. 그러면 수입원가가 올라가니 미국 내 적정가격은 €220 x US$1.00 / €1.20 x 1.5(수입비용) = US$275가 되어 미국의 수입업자들은 다시 가격을 거꾸로 올리게 된다. 이렇게 환율 절상/절하분이 가격에 다 반영되지 않는 현상은 상대적 LOOP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 바로 마지막 US$275를 계산한 식이 상대적 LOOP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 굳이 특이한 PTM이라고 갖다붙일 필요도 없다.

학술적인 PTM은 이런 효과를 배제하고 생각해도 국가간 상품가격의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고급 자동차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원화가 절상되거나 절하되거나 벤츠, BMW 등의 국내 공식가격은 별로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수입차 거품가격에 대해 언론에서 아무리 열심히 때려대도 한 번 책정한 가격은 좀체로 변하지 않는다. 기껏 비난여론이 높아지고 혼다 등이 선전하니 조금 가격을 낮추긴 했어도 그건 환율과는 무관한 가격정책이었다. 결국 원화가 절상될수록 이들 차종의 미국, 독일에서의 가격과 한국에서의 가격은 더더욱 벌어지게 된다.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이쯤 되면 PTM이 언제 나타나는지 짐작할 것이다. 벤츠 승용차가 국산이나 다른 외국 회사 제품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상품이라면 원화가 평가절상되어도 (조금이라도) 가격을 안 내리고 버티는 수입상이 배겨날 리가 없다. 바가지 씌우는 악덕 업자로 낙인 찍히고 소비자의 발길도 끊길테니까. 명확히 차별적인 제품을 과점적으로 공급하는 업체에서나 이런 가격정책을 써도 먹히는 법이다. 그런데 크루그먼과 돈부쉬는 이런 불완전경쟁뿐 아니라 다른 요인들도 PTM에 영향을 미침을 보인 것이다.

또 어떤 이유들이 있을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매출 확대를 위해 부가되는 비용이 많은 — 한계비용(marginal cost)이 체증하는 — 경우가 있다. 자동차같은 큰 실물을 많이 팔려면 매장도 늘리고 영업직원도 늘리고 각종 부대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오늘날은 각종 통신판매 유통망이 많이 발달해서 그런 부담이 덜하다지만, 예전에는 이 문제가 훨씬 심각했다.) 결국 평가절상분을 반영해 가격을 내려도 증가한 수요를 공급이 이를 쉽게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더군다나 평가절상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측되면 수입업자가 고정비용을 증가시킬 이런 판매 인프라 확충에 섣불리 나설리 만무하다. 수입업자는 가격을 조금만 내리고 현재 인프라 수준에서 커버할 수 있는 만큼만 더 팔려고 들 것이다.

다른 이유는 반대로 수요 측면에서, 가격을 내려도 수요가 빨리 상승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쉽게 지갑을 열 수 있는 물품들, 이를테면 할인매장의 식품이야 '폭탄세일!'이라고 방송하면 잽싸게 달려갈 수도 있겠지만, 2억 짜리 벤츠 CLK를 10% 할인해준다고 '지름신 강림!'을 외치고 달려갈 소비자는 그리 많지 않다. 평가절상분을 반영해 가격을 내리는 것은 박리다매를 노리는 것인데, 가격을 내려도 당장 판매량이 늘지 않는다면 이익만 감소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격인하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많은 요인에 의해 좌우되고 예측이 어렵다. 절박할 것 없는 벤츠 공식딜러가 이런 위험을 자처하여 떠맡을 이유가 없다.

그 밖에도 심리, 명성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환율에 민감하게 판매가가 움직이면 소비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분노를 자아내기 십상이다. 최근 원화의 평가절하분이 다 반영이 되어 2억 원이던 차 가격을 2억 2천만 원으로 올리면, 벤츠 한 번 몰아보겠다고 벼르고 있던 소비자는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수요감소는 물론 브랜드 이미지 타격으로 렉서스를 계약하러 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무리 가격을 다시 환원해도 떠나간 소비자는 다음 차를 구입할 때까지 (또는 영원히) 수요자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격을 내려도 마찬가지다. 지난 달에 산 내 멋진 벤츠가 이번 달에 갑자기 2천만 원이나 싸게 팔린다면 수입업자에게 속았단 기분이 들 것이다. 역시 다음 번 차량을 교체할 때 다른 업체로 넘어갈 수 있다. 가격 인하가 단기적으로는 수요 증가 효과를 내도 장기적으로는 수요 감소의 부작용이 나는 것이다. 이 역시 이미지를 중시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다. 가격을 고정시키면 원화 절상시 욕은 좀 먹겠지만 독과점업체의 우위 때문에 급격한 수요 감소는 피할 수 있고, 원화 절하시에는 단기적 이익 감소는 있어도 신뢰와 명성을 유지하여 장기적인 수요 증가를 노릴 수 있다.

어째 좀 누구나 감으로는 쉽게 생각할만한 현상들이 아닌가? 물론 크루그먼과 돈부쉬는 단순히 말로 때운게 아니라 열심히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을 그리고 단순한 동태적 모형을 세워 수식으로 풀어가서 학술적 인정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경제현상은 여러 요인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면서, 웬만하면 이상적인 균형 상태와는 멀어진 불균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보는 상품시장의 여러 속성들은 금융시장과 상품시장의 괴리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통찰을 줄 수 있다. 이처럼 현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할 때, 이미 주류 경제학에서도 깊이 논의된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는다면 영 이상한 함정에서 허우적대기가 쉽다는 점을 다시금 조심하도록 하자 — 이건 2차대전사도 마찬가지.

자, 그렇다면 LOOP이 이렇게 PTM 이론 등 여러 측면에서 공박당했다면 환율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다음 단계는 PPP(purchasing power parity)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다. 순명大帝의 고정환율제-변동환율제 논의를 따라잡기 전에 다른 글에서 또 간략하게 설명해보길 기약하며 오늘은 여기서 그만 접기로 하자.

P.S. 요즘 필자의 직장(모 민간 경제연구소)이 서브프라임 사태와 이후 미국의 불황 및 파급영향에 대한 조사와 연구 등으로 좀 바쁘다. 글 올라오는 주기가 조금 늘어져도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Notes.
  1. 이 양반은 원래 독일인으로 이름이 '뤼디거(Rüdiger)'인데 박사과정 시절부터 미국에서 줄곧 살면서 움라우트를 떼고 '루디거(Rudiger)'로 알려지게 되었다.
  2. 원래 경제학자들의 이상이란 경제 시스템에 대한 물리학을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리고 이 측면은 사실 경제학자들의 고집스러운 (때로는 고지식하기까지 한) 행태에 대한 좋은 실마리가 되므로 역시 다른 글로 보충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3. 우리말로 '시장차별화 가격 설정'(?)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다.
creative commons licens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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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rete 2008/03/29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순 무식한 자연과학자인 제게 Paul Krugman의 이름을 알려주신 분이 알파헌터님입니다. 넷상에서 뵙는 분이라 정확한 백그라운드는 모르지만 아마도 미국에서 선물시장 트레이더를 하시다 지금은 한국에서 선물시장 트레이더를 하시는 분이라 추측되죠. 미국과 한국의 경제, 특히나 주식과 환율 문제를 시의 적절하게 짚어 주셔서 그분의 블로그를 매일 방문합니다. 주인장께서도 경제연구소에 근무하신다니 그 분의 블로그에 흥미를 가지실 것 같네요. 한번 블로그 주소를 적어 보겠습니다.

    http://blog.naver.com/oneidjack.do

    이 분께서는 본인의 블로그를 통해 크루그만의 견해를 시장 상황과 연결해서 매번 재미있게 해설해 주고 계시죠.

    뤼디거 돈부시선생의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제가 어제 쓴 글 하나에 first name 이 같은 독일인이 한 분 등장합니다. 뤼디거 네베르크 (Rüdiger Nehberg)씨 인데… TARGET(http://www.target-human-rights.com/) 이란 인권단체를 구성해서 여성 할례 근절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죠.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2. sonnet 2008/03/30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기 쉽게 쓰신 보충설명 잘 읽었습니다. 쉽게 쓴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데 대단하십니다. 후속 포스팅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건 여담인데, 크루그먼&옵스펠드의 국제경제학 교과서 새 판(7판)을 최근에 살펴보았는데, 제가 예전에 공부할 때 쓰던 판에 비해 이머징마켓 외환위기에 대한(혹은 관련될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늘어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몇몇은 크루그먼이 외부 강연 등에서 발표했던 내용인데, 교과서에 올라갈 정도로 탄탄한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8/03/30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윽, 별 말씀을. 저도 직장에서는 글 좀 쉽게 쓰라고 구박을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크루그먼 국제경제학 교과서는 저도 6판 갖고 있는게 마지막이고, 7판은 훑어본 적도 없어서 얼마나 내용이 보강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국제경제학 이론들이란게 시대 조류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측면도 있고, 크루그먼이 워낙 신봉자도 많지만 적도 많은 사람이어서 어떻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크루그먼을 감히 '비주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류 내에서도 그의 저작들을 두고 너무 오버하는게 아니냐는 말이야 꾸준히 돌아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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