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독일, 러시아로부터 쿠르스크 전투 관련한 유익한 자료들을 추가로 입수하고 있다는 글을 소개한 바 있다. (참고→ 『Курский излом』, 『Прохоровка』, DRZW Bd.8 「Die Ostfront 1943/44」) 쿠르스크 전투는 사실 필자도 한참이나 관심을 끄고 있던 주제였는데, 새로운 자료들을 읽다보니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짚어보고픈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 틈틈이 이 역사적인 전투에 대해 인식을 달리할만한 글들을 소개해보는 기회를 가져볼까 한다 — 물론 이러다 필자의 본업이 언제 어떻게 바빠질지 모르니 독촉은 정중히 사양……
사실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의 가장 유명한 3대 전투로 손꼽히면서도, 오늘날의 시각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에 잘못 알려진 부분들이 여전히 많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남부축선(벨고로드-오보얀-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이다.
통상적으로 소련군 제1 전차군과 제5 근위전차군 등의 소련군 기갑예비가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독일군 기갑부대에게 출혈을 강요한 것을 이유로 꼽는데, 독일군도 이미 작전이 입안될 때부터 후위에서 대규모 소련군의 예비대와 충돌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몇 가지 면의 이점으로부터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당시가 독소전쟁 중 야전에 배치된 소련과 독일 전차의 기술 격차가 가장 큰 시기였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소련이 주력으로 운용한 T-34/76과 T-70에 비해 독일의 티거와 판터는 기술적인 안정화가 덜 되었음을 감안해도 월등한 성능을 자랑했다. 실제 프로호롭카 전투와 같은 대규모 전략예비대와의 격돌에서는 독일군이 압도적인 전술적 승리를 거둔 사실들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기대만큼의 진격을 하지 못한 이유는, 전투 초기에 소련군의 전면 방어선을 돌파하는 단계에서 지나치게 큰 피해를 입으면서 지체한데 기인한 바 크다. 특히 판터를 집중운용한 제48 기갑군단과 공세의 우익을 엄호해야할 제3 기갑군단의 초기 작전 실패는 작전 시간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래 소개할 스티븐 뉴튼(Steven H. Newton)의 글에서는 바로 이 실패 원인이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망보다도 독일 남부집단군 및 제4 기갑군의 잘못된 전술적 고려와 초기 돌파 계획 수립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남부집단군의 심각한 문제였던 보병전력의 부족과, 이를 타개하기 위한 임기응변이 어떤 잘못된 결과를 낳았는지 여러모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포럼에 Wenck 님이 쓰셨던 스티븐 뉴튼 씨의 글이 수록된 원저 『Kursk: The German View』의 소개글, 「1943년 7월 제48장갑군단, 제10전차여단, 라우헤르트 연대」 글을 숙독하고 넘어가기를 강력히 권장한다.
Chapter 14. Army Group South's Initial Assault: Analysis and Critique
— Newton, Steven H. Kursk: The German View. Cambridge, MA: Da Capo Press, 2002. 381-406.
1943년 7월 5일, 제4 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이 진격을 개시했을 때, 독일측 입안자들은 단시간 내에 소련군의 처음 두 방어선을 분쇄하는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천둥같은 예비 포격이 방어측을 약화시킬 것이었다. 전투공병들은 지뢰원 사이로 공격로를 개척하고, 이어 보병들은 3호 돌격포와 티거의 지원을 받으며 좁은 구획을 따라 공격할 것이었다. 일단 전선이 뚫리면 중형(medium) 전차들을 중심으로 보병장갑차량(SPW)에 탑승한 보병들과 함께 편성된 전과확대 집단들이 러시아군 후방으로 진격해들어갈 준비를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단들은 첫날 최종 목표로부터 45㎞ 가량 떨어진 프숄(Псёл) 강 교량들을 배정받았다. 작전 개시의 연이은 지연과 잘 준비된 소련군의 병력과 장비 집결 상태에도 불구하고, 1939-1942년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러한 예상들은 그리 무리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날(7월 5일)이 에리히 폰 만슈타인(남부집단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제4 기갑군 사령관) 또는 베르너 켐프(켐프 분견군 사령관)이 예상했던 것과 아주 다르게 흘러갔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공격 연대들을 지휘하는 대령들로부터 남부집단군 사령부에 이르기까지 각급 지휘소들을 따라 스며든 충격을 잘 포착해내지 못한다. 제48 기갑군단이 달성한 가장 깊은 돌파라고는 군단 좌익에서 제3 기갑군단이 5㎞ 진격한 것이었다; 대독일(Großdeutschland, 이하 GD) 사단의 주공은 병력 및 장비 양면의 심각한 손실에 쩔쩔매며 정지했다. 늦은 오후에 제11 기갑사단이 체르카스코예(Черкасское) 근방에서 조공을 펼치고서야 대독일 사단은 초기 전술 목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과에 실망한 제4 기갑군의 전투일지는 대독일 사단이 초기 돌파를 이뤄내는데 필요했던 3시간과, 이후 체르카스코예로 진격해 나가는데 필요했던 10시간에 대해 길게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 체르카스코예는 원래 09시00분 이전에 장악할 예정이었다. 하우저의 제2 SS 기갑군단은 좀 더 잘 나아가서,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Leibstandarte SS Adolf Hitler, 이하 LSSAH) 사단은 소련군의 제1 방어선을 관통해 20㎞를 전진하여 제2 방어선 앞에서 멈춰섰다. 좌익에 선 제국(Das Reich, 이하 DR) 사단과 해골(Totenkopf, 이하 TK) 사단은 그다지 인상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당한 돌파를 이뤄냈다. LSSAH 사단은 602명의 병력과 30대의 전차를 잃어 쿠르스크 전투 13일 간 전체 손실의 25% 가까이를 잃었다. DR 사단은 290명을 잃어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사단 일간 손실로는 최대치를 기록했다. 먼 우측익에서는 켐프 분견군의 제3 기갑군단이 불균등한 전과를 거뒀다. 벨고로드(Белгород) 근방에서 제6 기갑사단 전면의 공격은 거의 나아가지 못해서 사단이 투입될 수가 없었다. 더 남쪽에서는 제19 기갑사단이 소련군 방어선 안쪽으로 마침내 몇 ㎞를 밀어붙였고, 제7 기갑사단은 6㎞의 종심으로 돌파했다. 최우익에 배치된 라우스 군단의 제106 및 320 보병사단은 동쪽으로 약 3㎞ 전진에 성공하여 당일 초기(그러나 계획상 최종은 아닌) 목표를 달성했다.
소련군의 방어 전력, 전술적 기습 달성의 실패와 신예 판터 전차의 기술적 결함, 소련군 파일럿들의 독일 공군의 제공권에 맞서려는 열의 등이 토마롭카(Томаровка)-벨고로드 전선을 따라 소련군을 분쇄하려던 독일군의 기도가 실패한 이유로 손꼽힌다. 이들 요인들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이들이 작전 개시 당일의 실패를 낳은 독일군의 전술 및 작전상 계획의 심각한 결함을 가려주지는 않는다. 이들 오판과 계획상의 오류들은 너무나 심각해서 독일군의 작전적 전문성에 대한 전설에 가까운 이미지에 진중한 의문을 자아낼 정도이다.
제4 기갑군의 공격 계획
호트의 제4 기갑군 작전 계획은 제48 기갑군단과 제2 SS 기갑군단의 평행한 진격을 상정하고 있었다. 각 군단의 주공점(Schwerpunkt)은 각 1개 사단이 담당했다.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제48 기갑군단장)의 경우에는 GD 사단이 공격 선봉을 맡고 제3 및 제11 기갑사단이 측면을 방호하기로 되어 있었다. 파울 하우저(제2 SS 기갑군단장)은 공격 중심을 좌익의 LSSAH 사단에 두고, 우익에 DR, TK 사단을 배치했다. 제48 기갑군단 지구의 성공을 담보할 목적으로 호트는 제10 기갑여단 소속 200대의 판터를 GD 사단에 배속시켜 거의 350대에 이르는 전차 및 돌격포로 구성된 사단급 기갑 괴물을 만들었다. 그는 이만하면 소련군이 어떤 방어벽을 만들더라도 능히 뚫고 나가리라 기대했다. LSSAH 사단에게 가용한 전차라고는 이의 ⅓을 갓 넘는 수준이었다; 사실 7월 5일에 GD 사단 하나만도 거의 제2 SS 기갑군단 전체가 보유한 만큼의 전차를 통제했다. 그러나 하우저의 여력을 향상시켜주기 위해 호트는 제8 항공군단의 지원 출격 소티의 압도적인 다수를 하우저의 공격 지원에 배정했다. 이런 이상하게 편향된 판터와 공군 전력의 투입이 7월 5일의 전투 향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 | ![]() 프리드리히 판고어 소장 | ![]()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 기갑대장 |
호트의 공격 계획에서 추가로 언급해야하면서도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간과되어오던 측면은 다름 아닌 전술적 예비대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6개 기동사단(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 전체를 공격 개시 시점에 한꺼번에 투입한 것이 보병사단의 부족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아래에서 분명해지겠지만, 남부집단군이 주공 지역에 확보한 소수의 보병사단들은 전선에 걸쳐 매우 위험하면서도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엷게 분산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호트나 판고어(Friedrich Fangohr, 호트의 참모장) 모두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소련군 방어선에 처음 내습하는 매우 제한된 전력만 가지고는 공격 첫날에 전선에 전 기갑사단들을 투입하는 도박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이러한 시각은 외견상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초기(그리고 잠정적인) 전술적 우위를 노린 이러한 배치는 호트를 장기적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작전적 외통수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제4 기갑군은 7월 5일 단 1개 사단도 예비로 확보해놓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호트는 각 사단의 배정 구역에서 소련군의 방어 전력에 무관하게 전면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GD 사단의 선봉 공격이 난관에 빠져 허우적댈 때, 제3 기갑사단이 코로비노(Коровино)를 장악하고 자체 기갑부대를 크라스니 포치노크(Красный Починок) 방향으로 돌파시켜 제71 근위 소총병사단의 제1, 제2 방어선을 뚫으려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48 기갑군단에게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를 줄 수 없었다. 이 성공이 그의 좌익에서 이뤄졌고, 그는 전력 전부를 이미 중앙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폰 크노벨스도르프 장군은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다. 전격전의 특징은 부분적 성공이 일어날 때마다 이를 강화하고, 단숨에 공격 주공을 전환할 수 있을만큼 유연한 지휘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호트는 그의 한정된 자원을 갖고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 가장 극단적인 해법은 GD 사단 하나와, 다른 2개 기갑사단 중 하나로 제48 기갑군단의 공격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제11 기갑사단이 제48 기갑군단과 제2 SS 기갑군단의 간극을 메꿀 제167 보병사단 지원을 위해 1개 기갑척탄병연대를, GD 사단의 공격 지원을 위해 사단포병을 차출하고 나머지를 예비대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제3 기갑사단이 포치노크에서 달성한 것과 같은 전술적 성공이 일어나면, 제11 기갑사단이 보유한 102대의 전차 및 돌격포는 보병장갑차량에 탑승한 보병, 공병, 대전차자주포 등과 함께 7월 5-6일 밤에 전방으로 진출, 작전 2일차에 새로운 전력으로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제11 기갑사단이 공격에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소련군이 조용한 전선에서 전술 예비대를 빼내어 GD 사단 전면으로 돌려 단순히 일진이 나쁜 날을 철저한 재난으로 몰아갈 위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예비대 편성을 반대하는 것은 2가지 이유에서 성립하기 어렵다. 첫째는, 전투 초기에 걸쳐 보로네시(Воронеж) 전선군과 예하 야전군은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측면 이동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예비대는 보통 후방에서 전방으로 이동하는데, 일단 전선에 자리잡으면 그 부대는 성공을 거두거나 격파될 때까지 남아있기 마련이다. 설사 소련군이 그런 이동을 시도했다 하더라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던 제11 기갑사단은 그로 인해 전선에 생긴 약점을 추가로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그만한 약점이면 당시 전 전장을 휘젓고 다니던 독일군의 광범위한 항공정찰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는, 제10 기갑여단을 활용하여 적어도 하나의 괜찮은 작전 예비대를 만들 수 있다는, 덜 극단적이면서도 실행가능한 대안 계획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판터의 기계적 문제와, 첫날 진창과 지뢰원에 쳐박혀야했던 불운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명백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제48 기갑군단은 한정된 구역에 너무 많은 전차를 투입했다. 폭 3㎞의 공격 전면에 350대의 전차와 돌격포가 투입되고, 그나마 그 가운데 250대가 단 1개 대대가 선도하는 1개 연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쓰인 것은 공격의 무력화로 직행하는 길이었다. 이렇게 좁은 공격 전면에서라면 반수의 전차는 돌파를 달성하기에 더 좋은 기회를 엿보며 멈춰서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제10 기갑여단의 2개 대대 가운데 하나는 제39 기갑연대 지휘부와 함께 GD 사단의 공격에 큰 지장을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분리될 수 있었다. 이는 군단이 상황에 따라 1개 보병대대, 1개 공병중대, 1개 대전차자주포 포대 정도만을 긁어모아 배속시킴으로써 편성할 수 있는 예비 전투단의 중핵으로 활용이 가능했다. 이런 결정은 제48 기갑군단으로 하여금 성패에 무관하게 정면만을 두들겨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성공을 거둔 지점에 전력을 증강할 수 있는 전술적 유연성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재밌는 점은 호트와 판고어가 실제로 이러한 2가지 옵션에 대해 토의했으나, 결국 각각 이를 무시한 것 같다는 점이다. 제3 기갑사단을 예비대로 돌리고 공격 2일차에 투입하자는 아이디어는 원래 5월 10일 폰 만슈타인과의 회합에서 논의된 것이었으나, 호트는 6월 27일에 그의 마음을 바꿨다. 판고어는 기갑군의 전투일지에 꽤 상세하게 GD 사단의 배치문제에 대한 새로운 논리를 적어놨다. 그 요지는, GD 사단이 양 측면에서 전차의 지원을 받는 공격을 하지 못한다면 충분히 빨리 돌파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공격이 임박해서도) 제4 기갑군 지휘부가 여전히 제48 기갑군단의 신속한 소련군 방어선 돌파 및 전과확대 단계 돌입 능력에 심각한 우려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기실 매우 나쁜 징조였다.
(⇒ 「제48 기갑군단의 공격 작전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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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