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젤로 고지 전투 이야기 교정 관계로 방문했던 祈遇님의 블로그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 경험 때문에 다른 글들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고무적인 이야기와 함께,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에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특수부대의 마이코프(Майкоп) 침투작전 이야기를 비판해주신 글을 보았다. 인터넷 곳곳에 떠도는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보다 엄밀하게 걸러내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우선 진일보한 자세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반대로 일부 오해의 소지도 있는 것 같아 한 번 더 지적하고 넘어갈까 한다.
아마 祈遇님은 지난 번 젤로 고지 전투 글과 마찬가지로 World War Ⅱ Magazine에 1997년도에 게재된 「The Brandenburg Commandos」라는 글을 보고 진위 여부를 추적하신 듯하다. 祈遇님의 추적 끝에 Feldgrau 포럼 등에서 찾아낸 비평대로, 그 글에 나와있는 마이코프 침투에 대한 내용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세세한 오류가 있는게 맞다. 허나 브란덴부르크 부대에 의해 마이코프 침투작전이 실행되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며, Feldgrau 포럼에 나온 비판도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마이코프 침투작전을 맡았다는 푈커잠(Adrian von Foelkersam) — 움라우트(ö) 없는 표기(oe)가 맞다 — 소위는 독일 특작부대 계열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다. 브란덴부르크 부대 경력도 인상적이지만, 나중에 무장친위대로 이적하여 오토 스코르체니와 유명한 특수작전을 여러 차례 수행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스코르체니가 자신의 회고록에도 그의 경력과 능력을 언급하고 있고, 지금도 (국내에서만) 유난히 인기가 있는 타임라이프 2차 세계대전사 시리즈에도 관련된 기술이 있다. 그렇다면 그와 관련된 논란의 쟁점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브란덴부르크 부대 — 정식 명칭은 제800 특수 교도연대(Lehr-Rgt. z.b.V. 800) — 가 1942년 캅카즈 전투에서 담당한 역할을 알 필요가 있다. 1942년 초 블라우 작전의 추진 단계부터 브란덴부르크 부대는 캅카즈 진공 지원을 위한 후방 교란 및 교량 탈취 훈련을 벌여왔다. 기갑부대의 빠른 진격을 위해서는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의 돈 강 교량은 물론, 너른 북 캅카즈 지구의 자연 장애물인 여러 하천의 교량 장악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실제 1942년 7월 24일, 로스토프-나-도누 전투 후속 단계에서 그라베어트 대위가 이끄는 8중대 소속 공격조가 돈 강 교량을 성공적으로 장악하여 바타이스크(Батайск) 교두보 확보에 수훈을 세웠다. 이곳으로부터 독일 제57 기갑군단(제5 SS 기갑사단 "Wiking"과 제13 기갑사단) 등이 발진하여 캅카즈 깊숙이 진격을 계속했다.
푈커잠의 마이코프 침투작전은 그 후 10여 일이 지난 뒤에 벌어진 일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필자가 갖고 있는 자료 가운데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책은 1970년에 나온 빌헬름 티케(Wilhelm Tieke)의 『Die Kaukasus und das Öl (영역판: The Caucasus and the Oil)』이다. 그 이전에 나온 소스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티케의 저작도 상세한 참고문헌을 표기하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티케 자신이 Wiking 사단 소속으로 캅카즈 전역에 참가했던만큼 공들여 책을 썼고, 그 외의 저작들도 많은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만큼 신빙성 면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푈커잠의 활약은 대략 이러하다:
- 1942년 8월 2일, 제13 기갑사단에 앞서 푈커잠이 이끄는 62명의 브란덴부르크 특작부대가 НКВД(NKVD) 복장을 하고 알렉산드로프스카야에 잠입했다.
- 푈커잠 소위는 НКВД의 트루힌 소령이라고 소련군을 속이고 계속 마이코프 방향으로 내달려 마이코프의 НКВД 본부로 잠입한다.
- 이들은 여기서 НКВД 지역 책임자의 환영을 받고 숙소까지 배정받았으며, 8월 7일까지 주변 정황을 계속 탐문하며 작전을 준비한다.
- 8월 7일이 되어 독일 제40 기갑군단 병력이 바짝 육박해오자, 이들은 팀을 쪼개어 마이코프 시내에서 교란작전에 들어갔다. 중앙 통신소를 폭파하여 기능을 잠시 정지시키고, 전신국을 장악한 뒤에 '철수가 시작되었으니 전신소 업무를 중단한다'는 전문을 주변 수비부대에게 보내 전의를 꺾었다.
- 전략적으로 중요한 유정(油井)은 시내에서 너무 멀어 직접 장악은 힘들었고, 전신국을 통해 허위 명령을 발신해 파괴를 막고자 했으나 이는 제대로 먹혀들지 못했다.
이것만 갖고는 명쾌한 진위 여부의 판단이 어렵다. 진실이라면 참으로 영화같은 특수작전의 성공이지만 어딘가 좀 허술하게 보이는게 사실이다. 티케의 명성을 신뢰하는 수밖에는.
흔히 이 이야기에 대한 반증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푈커잠의 기사철십자장 수훈 내용이다. 푈커잠은 전투가 정리된 1942년 9월 14일자로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는데, 여기서 거론된 전공은 제3 기갑사단의 프롤레타르스카야 공격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아보자. 공교롭게도 이 작전도 티케의 『Die Kaukasus und das Öl』에 언급이 되어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로스토프가 아닌 보다 동쪽에서 돈 강을 도하한 제3 기갑사단이 마니치(Маныч) 강을 도하하기 위한 교량의 장악이었다.
제3 기갑사단이 선택한 도하점은 마니치 강이 대(大) 예고르릭(Большой Егорлык) 강과 만나는 지점 동쪽에 자리잡은 프롤레타르스크(Пролетарск)였다. 이곳에는 도로와 철로 교량이 함께 나 있으며, 남진을 위해서는 마니치 강의 교량과 예고르릭 강의 교량을 모두 장악해야 했다. 티케에 따르면 7월 29일에 제3 기갑척탄병연대의 선봉이 프롤레타르스크에 도달했으며, 이에 앞서 브란덴부르크 부대 1개 소대 병력이 이들 교량을 강습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남쪽 예고르릭 강의 교량 장악에는 실패하고, 소위 1명이 북단의 수문 통제소을 끝까지 사수했다는 언급이 있다. 정황상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소위 1명이 푈커잠이 아닐까 하나, 명확하게 적시하지는 않고 있다.

제3, 13 기갑사단의 진격 경로 (구글 어스의 위성영상을 이용하여 직접 작성)
어쨌건 이 결과 독일군 제3 기갑사단의 남진은 지연되었다. 결국 강습도하로 교두보를 확보하며 격전을 벌인 끝에 8월 1일에야 부교 가설에 성공하고 마니치 강 남쪽의 전진대열에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의 제40 기갑군단이 합류할 수 있었다.
푈커잠이 예고르릭 강 교량 강습에 참여했다면, 분명 이 사실은 앞의 마이코프 침투작전 참가설과 병립하기 어렵다. 예고르릭 강 교두보 전투가 8월 1일에 끝났는데 바로 그 다음날에 직선거리로 130㎞ 떨어진 알렉산드로프스크에 나타나 작전을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이들이 이용해야하는 길은 독일군도 최선봉부대가 정신없이 적을 우회하며 가로질러간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질풍노도와 같이 전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푈커잠의 마이코프 침투설이 부정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브란덴부르크 부대에 대한 역시 중요한 저작인 헬무트 슈페터(Helmut Spaeter)의 1978년작 『Die Brandenburger』에서 이 작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슈페터는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대독일(Großdeutschland) 기갑군단사를 쓴 역시 주요한 저자 중의 한 명이다. 사실이었다면 중요하게 언급되었을 법한 이 작전이 브란덴부르크 부대사 가운데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이 책에 수록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충분한 의구심을 자아낼만한 일이다.
또한 마이코프 전투와 관련되어 브란덴부르크에서 주목할만한 서훈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8중대의 프로하스카(Prochaska) 소위가 있을 뿐이다. 프로하스카 소위는 8월 9일에 제13 기갑사단 예하 제66 기갑척탄병연대 1대대의 선봉부대와 함께 전진하다가, 마이코프 부근의 교량을 장악하기 위해 역시 러시아군으로 위장하고 침투했다. 이들은 교량은 성공적으로 장악했으나 소련군의 거센 반격으로 프로하스카 소위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프로하스카 소위는 결국 9월 13일자로 기사철십자장이 추서되었다. 푈커잠의 부대가 마이코프에 큰 혼란을 초래했었다면 당연히 서훈도 더 많이 받았을 것이고, 후속 부대가 이처럼 악전고투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푈커잠의 활극이 사실과는 동떨어졌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는 것이 합당한 듯 하다. 그런데 또 골치아픈 문제는 근래에 입수한 러시아 문헌들 일부가 많지는 않지만 간략하게 푈커잠의 작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Обозреватель - Observer』라는 잡지에 2002년에 세르게이 추예프(Сергей Чуев) 소령이 쓴 「СЕВЕРНЫЙ КАВКАЗ 1941-1945. ВОЙНА В ТЫЛУ」란 글에는 푈커잠이 유정 장악을 위해 활약했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비중이 크지 않은 걸로 봐서는 푈커잠의 작전이 티케 책에 언급된 규모로 실행되지는 않았어도 시도 자체는 있었다는 뉘앙스 같기도 하다.
여하간 이런 상반된 문헌들 때문에 필자도 명확한 단언은 내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워낙 세부적인 부분이라 여기까지 더 깊이 자료를 찾아보고 검증해볼 필요를 못 느꼈던 이유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필자도 그간 장만하지 못했던 슈페터의 『Die Brandenburger』를 주문하고 좀 더 확인작업을 해볼 작정이다. 책이 도착하고 좀 더 전후맥락을 잘 살펴본 뒤에 보충할만한 내용이 있으면 추가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祈遇님이 품으신 프란츠 쿠로프스키(Franz Kurowski)에 대한 불신감(?)에 대해 언급하고 끝내기로 하자. 이 방면으로 책을 많이 모으다보면 쿠로프스키의 책은 숱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저자가 워낙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많은 저작을 남겼고 영어로도 제법 번역되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은 영어권에서는 그의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다작의 폐해인지 저작마다 질적인 차이가 꽤 난다. 어떤 책들은 제법 정보도 튼실하고 읽을만 한데 반해 어떤 책들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다양한 자료를 짜집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나름의 공력은 인정하되 역시 저자의 이름만 갖고 신뢰를 두기에는 부족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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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티케의 책에서 푈커잠의 활극 부분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것과 쿠로프스키의 책 말고는 달리 읽은 게 없다 보니 그냥 넘어갔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쿠로스키의 새 책이 쏟아져 나오는 속도는 여전히 경악스럽더군요. 이 양반의 저술 방식이 궁금해 집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프란츠 쿠로프스키 씨야말로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요. 혹시 이외수 선생처럼 생기지는 않았을까요?
트랙백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배우고 혼나야 된다는 걸 한번 더 느끼게 되네요.^^::
흠, 마이코프의 대담한 활극은 부정에 가깝지만 아직 상세히 그 진위가 밝혀진 것은 아니었군요. 2차 대전에 대해 알아갈수록 의문만 더욱 쌓여가는 느낌입니다. 더운데 몸 건강하시고요. 오늘도 한수 잘 배웠습니다.^^
음, 혼난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고 원래 블로그에서 이렇게 주거니받거니 이야기하는게 즐거운거지요. 하여튼 역사는 자료가 없어도 고민, 있어도 있는대로 또 고민입니다.
뒷북이기는 합니다만 궁금해서 뒤져보니...
푈커잠도 같은 시기에 마이콥 주변 전투의 공으로 철십자기사장을 받은 것이 아닌지요. (푈커잠 9월 14일, 프로하스카 9월 16일.) [제가 글을 제대로 안 읽었었군요. 수정했습니다.]
슈페터의 BR 책에는 이 활극이 소개되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1984년에 출판된 대독일기갑군단 사진집(최근 Nebel에서 나온 것의 원본일 것입니다.)의 권말에 푈커잠의 수상경위는 "In der NKWD-Zentrale Maikop verhinderte er die Heranf"uhrung russischer Reserven und erreichte ..."라고 적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