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필자가 지인들과 독소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 때 많은 부족한 감을 느끼게 되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독소전 초기, 즉 1941년도의 전투 흐름이다. 국내에서는 이 독소전 초기에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모스크바 코앞까지는 승승장구했다는 식의 단편적인 이해가 횡행하는게 현실이며 필자도 한때 그런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자료를 접해본 결과로는 독소전 초기의 국경지대의 전투도 우리의 통념을 뛰어넘어 굉장히 복잡한 혼전이 있어왔으며, 이미 초기부터 독일군은 격전을 치뤄오며 많은 어려움을 겪고들 있었음을 알게 되어갔다.
그렇게 독일군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고, 다른 글에서 차차 언급을 하겠지만,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이 시작하자마자 난데없는 출현으로 독일군 제6 기갑사단과 제1 기갑사단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꺾어버린 소련군의 신예 중전차 KV-1, KV-2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실전으로 KV 전차의 데뷔전, 라세이냐이(Raseiniai, 독일어로는 로시니 Rossienie)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전투는 대국적 상황에서 보면 단 2일 정도의 지연만을 초래한 별거아닌 전투로 치부될 수도 있겠으나 그 나름대로 독소전 초기 국경지대의 전투와 이후 1941년 내내 이어진 KV 전차에 맞서던 독일군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어 골라본 것이다.
우선 간단한 당시 전차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자. 2차대전 중의 전차들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독소전에 돌입할 당시 독일군 전차들의 수준은 당시 서유럽 국가들의 기준에 맞춘 수준이었음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화력은 1940년 무렵부터 주력 3호전차들의 경우 50㎜ KwK (L/42)를 장비하기 시작했고, 지원전차 개념의 4호전차들은 75㎜ KwK (L/24)를 장비하였는데 이들 전차포의 위력은 당시의 서유럽 열강의 일반적인 전면장갑 30~50㎜의 전차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독일군 전차들의 방어력도 기껏해야 전면장갑 30㎜ 내외의 빈약한 수준에 중량은 20~30톤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독일군은 그 이상의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적 전차의 가능성을 거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대전 이전부터 이러한 통념을 뛰어넘는 전차들의 개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소련의 걸작전차 T-34와 KV 전차는 이미 1938년 경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39년 중에 승인이 되어 1940년에는 생산에 돌입하고 있었다. T-34의 선진적인 개념도 놀라운 것이지만, KV 전차에 국한되어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는 독일이 가히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중(重)전차였다. T-34에도 채용된 76.2㎜ (L/41) 전차포를 장비한 KV-1은 당대 독일 전차의 방어력을 훨씬 뛰어넘는 80㎜에 가까운 관통력을 낼 수 있었고, 방어력 면에서도 포탑, 차체 공히 75㎜ 장갑판으로 방호되어 당시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37㎜, 50㎜, 75㎜의 어떤 전차포 및 대전차포로도 관통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포병전차 개념으로 등장한 변형인 KV-2는 152㎜ M-10 야포(M1938/1940)의 화력과, KV-1과 동등한 75㎜ 장갑판의 막강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1
물론 KV 전차들도 지나친 화력과 방어력의 강화로 인해 기동성이 대단히 나쁘다는 고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기동력을 희생해서 얻어낸 화력과 방어력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다는 사실이었다. 상상해보라, 이전에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던 중전차가 앞길을 가로막고서 반격을 해대는데, 온갖 노력 끝에 자신들이 지닌 어떤 무기도 그 괴물을 퇴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승리의 도취감에서 깨어나 바닥없는 무력감으로 빠져드는건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법이다. 바로 독소전 개전 직후 며칠만에 최일선의 몇몇 독일군들이 KV 전차 때문에 절감해야 했던 사건들이 그런 것이었다.
2. 독소전 개전 당시 KV 전차의 배치 상황
실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과연 독소전 개전 당시 KV 전차가 얼마나 소련군에 장비되어 있었는가를 따져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KV 전차는 매우 인상적인 화력과 방어력을 가졌으며 소련군이 구상하는 기갑부대 편제에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도록 계획되고 있었으나 개전시까지도 배치는 매우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1941년 6월 시점에서 소련군의 기갑부대는 기계화군단 예하의 전차사단이 주요한 구성단위였으며, 1941년 초에 개정된 전차사단 편제에서는 KV 전차를 각 전차사단에 2개 중전차대대에 62대, 포병연대본부에 1대 도합 63대를 장비하게 되어있었다. 결국 6월 22일까지는 총 61개 전차사단이 인가되고, 이중 실제 배치된 부대가 56개 사단이었으므로 실소요량은 3528대였던 셈이다. 그런데 실제 일선에 지급된 KV 전차는 KV-1과 KV-2를 모두 합해서 단 508대, 평균잡아 14.4%에 불과했다.
KV 전차를 장비한 전차사단별로 보다 자세한 배치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사단별 통계가 불분명한 부분은 군단별 통계를 이용하였으며, 일부 누락된 부대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둔다.)
| 군관구 | 기계화군단 | 전차사단 | KV 전차 총수 |
|---|---|---|---|
| 오데사 군관구 | 2 | 11, 16 | 10 (7.9%) |
| 발트 특별 군관구 | 3 | 2, 5 | 52 (41.2%) |
| 키예프 특별 군관구 | 4 | 8 | 50 (79.4%) |
| 32 | 49 (77.8%) | ||
| 8 | 12, 34 | 71 (56.3%) | |
| 15 | 10 | 63 (100%) | |
| 37 | 1 (1.6%) | ||
| 19 | 40 | 6? (9.5%) | |
| 43 | 5 (7.9%) | ||
| 22 | 19, 41 | 31 (24.6%) | |
| 서부 특별 군관구 | 6 | 4 | 63 (100%) |
| 7 | 51 (81.0%) | ||
| 11 | 29, 33 | 3 (2.4%) | |
| 합계 | 508 (14.4%) |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군 내에서 KV 전차를 완편으로 장비하고 있던 사단은 제6 기계화군단 예하제4 전차사단과 제15 기계화군단 예하 제10 전차사단의 2개 사단밖에 없었으며, 대략 6~7개 사단을 제외한 다른 전차사단들은 KV 전차를 반 수 이하 또는 전혀 지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KV 전차를 지급받은 부대들도 장비를 수령한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체계적인 훈련과 운용 전반에 대한 교육이 극히 부족했다. 심지어 개전시까지 탄약 지급 상황도 나빠 76.2㎜ 포탄의 재고를 1일치 이상 제대로 확보한 사단도 드물었다.
3. 국경 지대의 전투 개시
3. 1. 1941년 6월 22일 독일-소련 양측 상황 비교
이제 본격적인 실전의 이야기로 들어가보기로 하자. 여기서 살펴볼 독일군 제6 기갑사단과 제1 기갑사단은 모두 동프로이센 전선에 전개한 제4 기갑집단 예하 라인하르트 기갑대장의 제41 차량화군단 소속이었다. 제41 군단은 우익에 위치한 만슈타인 보병대장의 제56 차량화군단과 더불어 북부집단군 전체의 핵심적인 기동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 E. 회프너 상급대장 | ![]() E. v. 만슈타인 보병대장 | ![]() H.-G. 라인하르트 기갑대장 |
독일 북부집단군의 바바로사 작전 초반 계획은 중앙의 제4 기갑집단이 틸지트-샤울랴이 축을 따라 북동진하여 드비나 강에 이르는 길을 트는 동안에, 좌익의 제18 군이 틸지트-샤울랴이-리가로 진격하여 리가 서쪽에 위치한 소련군을 소탕하고, 우익의 제16 군이 중부집단군의 제3 기갑집단 및 제9 군과의 간격을 메꿔가며 레닌그라드로의 진격을 보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제4 기갑집단이 신속한 전진을 하여 드비나 강에 도달,소련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교란해야 했다.
이때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1 기갑사단은 제1 기갑연대 예하 1, 2대대에 3호전차(50㎜ L/42 KwK) 71대, 4호전차(75㎜ L/24 KwK) 20대, 2호전차 43대, 지휘전차 11대를, 기타 부대에 1호전차 15대 등을 장비하여 총 163대의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다. 또 제6 기갑사단은 제11 기갑연대 예하에 1, 2대대와 추가로 제65 전차대대를 배속받아서 연대 전차전력이 체코제35(t) 전차(37㎜ KwK) 155대를 주축으로 하여 4호전차 30대, 2호전차 47대, 지휘전차 13대 등 245대의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 두 사단을 얼핏 전차 수로만 보면 제6 기갑사단이 제1 기갑사단에 비해 전차대대도 1개 더 많고 더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1 기갑사단같은 경우는 전차 수는 적지만 신뢰성 높은 독일제 3호전차를 대거 지급받고 있었으며, 특히 사단 보병전력의 기계화가 잘 되어있어서 예하 4개 보병대대 중 2개 대대(8개 중대)가 보병장갑차량(SPW) 총 125대를 장비하고 있었다. 반면 제6 기갑사단은 사단전력 대부분이 37㎜ 포를 장비하고, 같은 체코 스코다 사의 38(t) 전차보다도 신뢰성이 떨어지는 35(t) 전차였다. 당시 바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전 기갑사단 중에서 35(t) 전차를 장비하고 있던 유일한 사단인지라 제6 기갑사단 소속으로 싸웠던 장병들의 회고에서는 이에 대한 심한 불평을 많이들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보병전력도 단 1개 중대만이 SPW를 수령해서 타격력이 제1 기갑사단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41년 6월 22일 동프로이센 지구: 독일 정보기관이 파악하고 있던 양측 배치상황
이에 맞서는 소련 발트 특별군관구는 동프로이센 전면의 리투아니아에 크게 2개의 기갑예비를 확보하고 있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틸지트 전선 북쪽 약 100km 일대의 샤울랴이와 텔샤이 사이에 제12 기계화군단(제23, 28 전차사단, 제202 차량화사단으로 구성)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굼비넨 전선 동쪽 약 80km 일대의 카우나스 부근에는 제3 기계화군단(제2, 5 전차사단, 제84 차량화사단으로 구성)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중 제12 기계화군단같은 경우는 위치 상으로 동프로이센에서 발트 3국으로의 길목에 놓여 있어서 발트 군관구 전체로도 중요한 전방위 기동예비였으나 장비는 매우 부실한 상황이었다. 예하의 제23 및 28 전차사단은 T-34나 KV 전차같은 신형전차를 전혀 지급받지 못한채 군단 전체로는 T-26이나 BT 전차같은 경전차 749대가 전력의 전부였다. 게다가 제28 전차사단 경우 예하의 전차부대가 샤울랴이 북쪽에, 보병부대가 리가 남쪽에 서로 100km 가까이 떨어져 주둔중이어서 전 사단의 신속한 집결 자체가 매우 힘들었으며, 다른 사단들도 정도야 덜했지만 유사한 문제들을 겪고 있었다.
제3 기계화군단은 사정이 나아서 예하 제2 및 5 전차사단이 KV 전차와 T-34 전차를 각기 1개 대대급 정도로 총 4개 대대가 이 신예전차들을 지급받고 있었다. 4개 대대 모두가 완편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KV 전차 52대, T-34 전차 57대를 장비하고 있었고, 군단 전체로는 총 651대의 전차를 보유하여 그 나름대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군단이었던 것이다.
3. 2. 1941년 6월 22~23일 독일군 제1 기갑사단의 진격
독일군은 6월 21일 밤부터 후방의 집결지로부터 공격 개시선으로의 진출을 시작했다. 이미 메멜 강(네무나스 강)에 공병들이 가설해놓은 부교를 건너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점선으로 표시된 지점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6월 22일 2시 55분부터 5분간 이어진 짧고 집중된 예비포격을 필두로 3시 정각에 일제히 아래 그림과 같은 부대간 지경선을 따라 일제히 전진을 시작하였다.

1941년 6월 22일 개전 당일 제4 기갑집단의 진격
제41 군단 소속의 제1 기갑사단은 틸지트에서 샤울랴이로 이르는 도로 양쪽을 따라 신속하게 북상하기 위해 다음의 3개 전투단(Kampfgruppe)을 편성하였다:
- (좌익) KGr. Krüger: 제113 차량화보병연대 + 제1 기갑연대 대부분 등
- (중앙) KGr. Westhoven: 제1 차량화보병연대 + 1개 전차중대 등
- (우익) KGr. Badnski: 제102 보병사단 소속 1개 보병연대 + 지원부대 등
우익의 KGr. Badnski가 제6 기갑사단과의 간격을 메꾸기 위한 보조적 성격이 강한데 반하여 좌익과 중앙의 KGr. Krüger와 KGr.Westhoven이 공격의 중추적 역할을 맡은 것을 알 수 있다. 공격은 이 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소련군 제125 소총병사단을 통타하면서 전방위선 돌파를 계속하여 22일 오전 중에 KGr. Westhoven은 유라 강에 걸쳐있는 국경도시 타우로겐에 돌입하였다. 타우로겐의 전투는 제125 소총병사단 주력을 맞아서 13시 무렵 1개 전차중대가 유라 강을 넘어 타우로겐 북쪽 시가로 돌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후 20시까지 전개된 소탕전을 거쳐 KGr. Westhoven은 타우로겐의 격렬한 소련군 저항을 분쇄하고 서서히 샤울랴이 방향으로 북동진을 할 수 있었다.
좌익의 KGr. Krüger의 초반 진격은 그보다는 원활해서 비교적 저항이 경미한 타우로겐 동쪽에서 유라 강을 도하, 타우로겐 북쪽을 돌아 소련군 배후로 진출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타우로겐 북쪽에서 소련군과 혼전에 돌입하여 다소 지연이 이어졌다. 어쨌건 이 양 전투단은 사단 구역 내의 중요한 유라 강 상의 3개 교량 중 2개를 확보하여 순조로운 지원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22일 밤 중에 완전히 와해된 소련군 제125 소총병사단을 추격하여 독일군 제1 기갑사단의 양 전투단은 23일 새벽 일제히 진격을 재개, 이날 중 켈메 남쪽까지 진출하여 두비사 강에 바짝 다가섰다.
이러한 제1 기갑사단의 켈메-샤울랴이 방향으로의 진출에 대해 소련군도 기동예비인 제12 기계화군단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리가로 이르는 가장 상태좋은 도로가 깔린 타우로겐-켈메-샤울랴이 축을 방어하기 위해 샤울랴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202 차량화사단은 그보다 약간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제9 전차엽병대대와 함께 22일 오후 늦게부터 전진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예비부대의 진격이 이렇게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22일 오전에는 소련 최고지도부가 독일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22일 오전까지도 독일이 전면침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국경에서의 위력시위가 아닌가 하여 일선 부대들에게 즉각적인 반격을 하지 말고, 일단 기다리라는 명령을 계속 발령하고 있었다. 결국 외교 채널들을 통해 전면전의 개시가 확실해진 오후부터야 공식적인 반격명령들이 하달되었고, 이런 초반의 혼란 속에 소련군 2선 예비는 좀더 국경에 가까운 요지들에 전개할만한 시간적 여유를 빼앗기게 되었다.
22일 밤 늦게부터 선도부대가 켈메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23일 내내 소련 제202 차량화사단의 후위부대가 도착하며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제1 기갑사단은 신속한 진격을 위해 켈메를 동쪽으로 우회하여 배후를 찌르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이미 켈메 서쪽으로는 역시 제12 기계화군단 소속의 제23 전차사단과 제28 전차사단이 서서히 독일군과 접촉을 이루면서 독일군 제38 군단 소속의 제1, 11, 21 보병사단과 혼전에 돌입중이었다. 반면에 켈메 동쪽에서는 라세이냐이 방향으로 투입중인 소련군 제3 기계화군단 소속 제2 전차사단의 진격이 부진한데다, 이 사단과 제202 차량화사단 사이의 간격을 메꿔줄 제48 소총병사단의 방어태세가 미흡하여 신속한 돌파에 의한 충격을 가중시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제1 기갑사단이 뚫은 활로의 좌익을 방호하고 전과확대를 하기 위해 2선 제대로 대기중이던 제36 차량화 보병사단이 제1 기갑사단을 바짝 쫓아 투입되었다.
3. 3. 1941년 6월 22~23일 독일군 제6 기갑사단의 진격
독일군 제6 기갑사단도 다른 여느 독일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22일 새벽 3시부터 공격 개시선에서 소련 내륙을 향한 진격을 개시하였다. 제1 기갑사단의 경우에는 타우로겐 시가전에 첫날의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던데 반하여, 제6 기갑사단은 공격 개시선 전면의 울창한 숲과 습지대에 은신한 소련군 제125 소총병사단의 산발적인 저항이 큰 골칫거리였다. 제6 기갑사단이 배정받은 도로는 이러한 숲과 습지대 사이로 난 좁은 도로였기 때문에 방어력이 취약한 지원차량들이 계속 공격을 받을 경우 사단 전체의 진격이 힘들 것이므로 독일군은 오전 내내 이런 소규모 소련군 소탕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러한 초반 진격부터 전차들의 탄약 소모가 막심하여 오전 중 예하 전차부대들이 탄약 재보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전과 다른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대략 정오 무렵에 제6 기갑사단은 이들 숲 지대의 소련군 소탕을 마쳤으며, 살투오나 강을 강행도하하여 첫날 목표인 두비사 강에 도달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예기치 않던 숲 지대에서의 시간 지연으로 이미 라세이냐이 일대에 1선 예비로 주둔중이던 소련군 제48 소총병사단 병력이 남서진하여 두비사 강으로의 진격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제48 소총병사단도 긴급히 투입된 병력이다보니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는 못하고 제6 기갑사단에 조금씩 다시 밀려나기는 하였으나 22일 중으로 라세이냐이 동쪽에서 두비사 강을 도하한다는 작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6 기갑사단은 23일 새벽 중 전열을 정비하고 좌측의 제1 기갑사단과 우측의 제8 기갑사단의 진격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 다음의 2개 전투단(KGr.)을 편성하였다.
- (좌익) KGr. Raus: 1개 보병연대 + 제65 전차대대 등
- (우익) KGr. von Seckendorff : 1개 보병연대 + 제11 기갑연대 1대대 등
이들 양 전투단은 23일 이른 시각부터 각각 바싹 붙어서 제48 소총병사단을 북동쪽으로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다. 마침내 23일 오후들어 제48 소총병사단의 저항은 기세가 크게 꺾여서 대략 15시 무렵 KGr. von Seckendorff는 두비사 강으로 가는 길목의 작은 마을 라세이냐이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미 이때 제48 소총병사단은 두비사 강 서안에서의 저항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잔여병력은 두비사 강 동안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제12 기계화군단과 제3 기계화군단 예하 사단들의 지원을 기대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바싹 붙어 진격을 계속하던 제6 기갑사단 소속 양 전투단은 라세이냐이에서 각기 갈라져서 KGr. Raus는 정북진하여 제1 기갑사단 KGr. Westhoven의 두비사 강 교두보 확보와 보조를 맞추고자 하였으며 KGr. von Seckendorff는 북동진하여 역시 두비사 강 동안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양 전투단은 급히 퇴각하는 제48 소총병사단을 쫓아 17~18시를 전후하여 두비사 강 동안에 각각 작은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23일 오후의 두비사 강 동안의 교두보 확보 이후에 전황은 급박하게 심상치 않은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KGr. Raus의 라세이냐이 북쪽 교두보는 이미 약화된 제48 소총병사단의 경미한 저항만을 받고 있었지만, KGr. von Seckendorff는 동쪽에서 급히 전진하고 있던 제2 전차사단과의 충돌이 임박한 실정이었다.
소련군 제3 기계화군단 소속이던 제2 전차사단도 22일의 혼란한 명령 끝에 그날 저녁 늦게서나 주둔지이던 카우나스 일대로부터 라세이냐이 방향으로 서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이 시점에서 이미 정보계통이 극도로 혼미해져서 일선 지휘부의 제대로 된 정세 판단이 매우 힘든 노릇이었다. 제2 전차사단은 제48, 125 소총병사단의 1선 방어선이 위태해지자 독일군 제41 차량화군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작정 라세이냐이로 보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 서쪽에 위치한 제56 차량화군단의 진격이 훨씬 더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제56 차량화군단 소속 제8 기갑사단의 행방을 소련군은 22~23일 내내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제56 군단은 이미 22일 첫날 전면의 소련군 방어선을 완전히 분쇄하며 네무나스 강과 두비사 강 사이의 공간을 통해 케다이나이 등 카우나스 방향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은 진격도상 바로 남쪽 20여 km 지점을 따라 거의 평행하게 반대 방향으로 독일군 제8 기갑사단이 찔러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정보 부족으로 지정된 위치인 라세이냐이로의 전진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제8 기갑사단 또한 괜히 이런 싸움에 말려들어 진격 페이스를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하여 후방을 제290 보병사단과 제3 차량화 보병사단에게 맡기고 흘끔 곁눈질한채 맹진해버리는, 실로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나마 55대의 T-34 전차와 KV 전차, 145대의 T-26 전차, BT 전차 등을 보유한 이 위협적인 제2 전차사단은 두비사 강 동안 교두보의 KGr. von Seckendorff를 향해 정면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이미 23일 오후 늦게 제2 전차사단의 선도부대들은 퇴각하는 제48 소총병사단 병력과 조우하여 T-26 전차, BT 전차들을 앞세워 KGr. von Seckendorff의 교두보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교두보를 둘러싸고 소련군은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잘 훈련된 독일 보병부대는 이러한 경전차들과 급하게 투입된 보병의 서투른 첫번째 반격을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23일 자정 무렵이 다 되어 전개된 보다 강력한 소련군의 역습은 독일군으로서도 상당히 버거운 것이었다. 야음을 이용해 경전차들이나마 대규모로 투입되면서 압박을 가해오는데다가 충분한 반격을 가할 수 있을 독일군 전차부대들이 아직 교두보로 제대로 지원을 나오지 못하던 상황이어서 단 2개 소대에 불과한 보병만으로 이를 막아내기에는 힘들었다. 급기야 두비사 강 동안 교두보를 방어하던 독일군 보병 2개 소대는 밤중에 모두 전멸하였다.
독일군 제6 기갑사단 사령부로서도 이러한 상황 전개는 매우 다급한 것이었다. 사단 사령부는 그래서 상황이 어느정도 수습되고 날이 밝은 후인 24일 08시를 기해 제11 기갑연대 2대대를 증원하여 소련군의 반격을 밀어내고 두비사 강 동안 교두보를 다시 확보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편, 소련군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은 24일 날이 밝으면 여세를 몰아 두비사 강 서안으로 진출, 라세이냐이 방향으로 밀어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단의 창끝이 충돌할 1941년 6월 24일 그날은 독일군의 전혀 새로운 경험을 예고하고 있었다.
4. 라세이냐이 전투
4. 1. 1941년 6월 24일 독일군 제6 기갑사단을 막아선 KV 전차
6월 24일 라세이냐이 동쪽에서의 전투는 예상외로 소련군의 선제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독일군 병력이 라세이냐이 방향에서 서서히 집결하며 준비를 가다듬는 동안에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은 예하의 포병 지원사격과 함께 그들의 신예 중전차 KV 전차와 다수의 경전차들을 짝지어 두비사 강 서안의 KGr. von Seckendorff를 향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라세이냐이 근방에서 벌어진 독일군 제6 기갑사단과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의 전투
아직 KGr. von Seckendorff 쪽에서는 제11 기갑연대 1대대 일부밖에 집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군에게는 소련군의 이러한 공세 자체로도 놀라운 일이었으나, 그들은 곧 눈앞에 나타난 KV 중전차의 위력 앞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KGr. von Seckendorff가 보유한 모든 대전차화기 — 37㎜ Pak, 50㎜ Pak, 대전차총(Panzerbüchse) 등 — 가 총동원되어 쇄도해오는 KV 전차에 사격을 가했는데도 전혀 관통될 기미는 안보이고 무기력하게 튕겨나왔다.
독일군은 심지어 포병연대가 보유한 10.5cm leFH(leichte Feldhaubitze. 경곡사포)와 15cm sFH(중곡사포)까지 직사하였지만 KV 전차에는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대개 아무리 강한 전차여도 15cm 중곡사포의 고폭탄 위력이라면 박살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던 독일군으로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이들 KV 전차들 중 일부가 독일군의 치열한 방어탄막을 뚫고들어와 후방에 위치한 지휘전차(Panzerbefehlswagen)를 들이받아 전복시켜서 해당 지휘관이 부상당하는 사태까지 알려지자 급속한 위기의식이 전투단 전체에 확산되었다.
그 결과 KGr. von Seckendorff 전체는 아니었지만 일부 장병들과 장교들마저 패닉 상태에 빠져버려서 어떤 장교는 전장을 이탈하고 직속상관에 이른 지휘계통을 다 무시한채 제4 기갑집단 사령부까지 가서 "모든게 다 끝장났다!"라고 외쳐대기까지 했다. 그나마 이런 분위기가 독일군의 파국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은 이유라면, 첫째로는 제6 기갑사단 전체적으로는 경험많은 장교들이 비교적 침착성을 발휘하여 동요하는 부하들의 통솔에 성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로는 소련군 전차병들이 워낙 미숙하여 KV 전차의 이러한 막강한 위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그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기만 해서 독일군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많이 입히지 못했기때문이었다.
이에 전열을 정비한 독일군 제6 기갑사단은 대략 12시 30분을 전후하여 집결을 마친 제11 기갑연대 2대대가 라세이냐이 동쪽에 저지선을 설정하고 서진하는 소련군 전차들을 맞아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제6 기갑사단의 주력을 형성하는 체코제 35(t) 전차들은 37㎜ KwK를 장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 화력이 더 나은 75㎜ L/24 KwK를 장비한 4호전차들이 KV 전차를 상대하는 주력이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의 최대 강점이라면 역시 우수한 조직력에 있었는지라 이들은 KV 전차가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안될 전차임을 깨닫고, 최대한 약점이 될듯한 무한궤도 등 구동계통이나 전차병들이 열어놓은 해치 등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특히 산발적인 사격이 아니라 한대한대 지휘관의 통일된 지시에 따라 중대 전체가 퍼붓는 탄막에 다수의 경전차들과 일부 KV 전차를 주저앉히고 소련군이 전차를 버리고 도망가게 만드는게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너무나도 탄약 소모가 막심하여 독일군 4호전차 중대는 전투에 돌입한지 불과 두 시간 정도만에 탄약 재보급을 위해 다시 전장을 이탈해야만 했다. 제11 기갑연대 2대대의 공격은 15시 무렵 재개되었고 점차 가중되는 독일군의 반격에 소련군은 두비사 강 서안으로 5km 가까이 밀고 들어온 것을 고비로 서서히 다시 물러서고 있었다. 양군의 공방은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도 두비사 강 서안 종심 약 1km의 교두보를 중심으로 격렬한 포병지원 하에 막아서는지라 독일군 KGr. von Seckendorff는 끝내 강 서안의 소련군을 두비사 강 서안에서 축출하지도, 동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지도 못한채 24일을 보내고 말았다.
한편 이보다 북쪽에서 두비사 강 동안 교두보를 확보한 KGr. Raus의 경우에는 KGr. von Seckendofff 처럼 전면에서 KV 전차의 대거 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역시 오전 중에 두비사 강을 도하한 KV 전차들의 일부가 방향을 틀어 KGr. Raus의 배후로 진출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이날 오전 중에 KGr. Raus를 보조하던 제65 전차대대 중 1개 중대와 대대사령부가 라세이냐이 방향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두비사 강의 두 교두보를 향해 갈라지는 삼거리 부근에 예비대로 돌려졌는데, 소련군이 이후 이 삼거리에서 KGr. Raus로 이르는 도로 한가운데를 막아서고 독일군 트럭 보급종대를 습격하고 도로를 차단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전투 전개 상황은 새로 추가된 Pt. 3을 참고하기 바란다.]
단 한 대의 KV 전차가 도로 한가운데에 서버린 이 상황 때문에 사단 본대에서 KGr. Raus로 향하는 연락로가 완전히 막혀버려서 이 방향으로도 제6 기갑사단은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오후부터 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군은 급히 증원병력을 보내어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는 KV 전차를 쓸어버리고자 하였으나 이 KV 전차는 어떠한 독일군의 공격에도 격파되기는 커녕 위력적인 주포와 기관총을 이용하여 접근하는 독일군에게 크나큰 어려움만을 안겨주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50㎜ Pak38로 무장한 전차엽병(Panzerjäger) 부대 투입에 이어 제41 군단 직속의 88㎜ Flak 1개 포대(Batterie)와 사단 포병연대의 10.5cm leFH 포대 등 가용한 중포들을 이 지점으로 계속 투입해서 사격을 가했다. 10.5cm leFH의 치열한 사격으로 이 KV 전차는 무한궤도가 파괴되어 행동불능에 빠진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련군 전차병들은 이 전차를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군이 믿을만한 88㎜ Flak의 사격도 KV 전차의 전면장갑을 관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후 중에 도로를다시 개통시키려는 독일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어둠이 찾아오자 독일군은 공병을 투입하여 폭약으로 이 전차를 날려버리고자 은밀히 이 KV 전차에접근하였으나 소련군은 또 접근하는 공병들을 발견하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어서 공격조를 격퇴한다. 작전 개시 불과 3일차에 일선 독일군이 보유한 최고의 중포들인 88㎜ Flak, 10.5cm leFH에 이어 공병의 육탄공격까지 막아내는 이 단 한 대의 KV 전차 앞에 정예 제6 기갑사단 전체가 멈춰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본격적인 독일군의 KV 전차 충격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4. 2. 1941년 6월 25일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의 포위와 섬멸
6월 24일 내내 벌어진 격전 끝에 24~25일 밤새 제6 기갑사단과 제2 전차사단은 양측 모두 재정비에 힘을 쏟느라 비교적 조용한 대치상황을 맞이하였다.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은 이미 가뜩이나 부족한 탄약 재고로 인해 더 이상 싸우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며 주변을 죄어오는 독일군의 움직임에 퇴로를 모색하고 새로운 방어선으로 물러날 필요가 있었다.
6월 25일의 날이 밝자 KGr. von Seckendorff 전면에 위치하던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의 예하부대들은 이미 밤새 두비사 강 동안으로 후퇴한 상태였으며, 독일군은 아침 9시부터 다시 두비사 강으로의 진격을 재개할 수 있었다. 또 KGr. Raus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던 KV 전차도 25일 오전 중으로 결국고립된 상태에서 독일군의 치열한 압박에 제압되어 KGr. Raus도 오전 11시 경부터 24일 내내 어렵게 고수하던 교두보로부터 전진할 수 있었다.
이날의 상황은 이제 전날과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의 경우 북동쪽으로의 탈출을 통해 인접한 우군과 접촉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므로, 밤새 제6 기갑사단을 위협하던 KV 전차 등 잔여 전차전력은 모두 퇴로를 봉쇄하고 있던 제1 기갑사단 정면으로 향하게 되었다. 진격을 개시한 제6 기갑사단의 전면에는 울창한 숲 지대를 기대어 산발적인 저항을 펼치는 후비대들만이 가로막고 있었다.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은 이미 이른 아침부터 독일군 제1 기갑사단 전면에 돌파구 마련을 위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여, 오전 내내 제1 기갑사단은 힘겨운 싸움이 이어졌다. 사우코타스에 위치하고 있던 사단사령부목전까지 소련군 전차와 보병이 밀고 들어왔지만, 다행히 이들은 기껏해야 T-26 경전차를 장비하고 있던 부대들이었고 제83 경대공포대대의 88㎜ Flak의 손쉬운 먹이감이 되었다. 그러나 사우코타스와 보실리스키스 사이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제1 차량화 보병연대 2대대는 KV 전차가 포함된 소련군의 역습을 받고서 역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제1 기갑연대 일부에서도 KV 전차만은 막을 수 없다는 놀라움이 터져나오면서 상황은 한층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보실리스키스에서 바이소갈라로 이르는 도로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 부대는 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일대에는 제1 기갑사단의 사단포병인 제73 포병연대 일부가 포진 중에 있었는데, 소련군의 KV 전차가 밀고오는 상황에서 다급한 나머지 3대대에 소속되어 있던 10cm Kanone를 직사한 결과 소련군의 KV 전차 몇 대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88㎜ Flak 이외에도 10cm Kanone가 KV 전차의 유효한 대전차화기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 확인된 사건이었다.
상황은 독일군이 집결한 제1 기갑연대 주력과 지원부대를 08시 20분에 전면 투입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소련군에 비해 월등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독일군 기갑부대의 출격만이 어려운 수세적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후 벌어진 독일군과 소련군의 혼전 상황은 제1 기갑연대 2대대의 다음 전투보고를 통해 그 단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에는 KV 전차의 제식명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서 KV-1, KV-2를 중량에 따라 43톤 전차, 52톤 전차 등으로 부르는 일이 많았으나 이런 표현들은 모두 제식명으로 의역하였다.)
사우코타스 일대에서 우리가 처음 조우한 KV-1과 KV-2 전차는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 제1 기갑연대 6중대 및 7중대는 약 700m 전방에서 사격을 개시하였으나 이것들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우리가 점점 적에게 가깝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듯 했다. 곧이어 약 50~100m까지 간격이 좁혀졌다. 엄청난 양측 사이의 포화가 이어졌지만 아군이 성공했다는 어떤 가시적인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소련군 전차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채 전진하고 있었다. 모든 철갑탄은 그 전차의 장갑판에서 무기력하게 튕겨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소련군 전차들이 지금 우리 제1 기갑연대 사이를 뚫고 후방의 제1 차량화 보병연대 소속의 보병들과 여러 보급품이 쌓여있는 후방까지 진출하려는 놀라운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우리 전투단과 사단 사령부까지 위협하며 더욱 후방의 보급종대까지도 갈 수 있었다!
이에 우리 제1 기갑연대는 급히 방향을 돌려 이들 KV-1과 KV-2와 나란히 평행하게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그들을 다시 따라잡고 다수의 적 전차를 때려대었다. 이러한 놀라운 작전 끝에 우리는 Rotkappchen이라 불리우는 특수 탄환을 불과 30~50m의 지근거리에서 퍼부어서 몇 대를 기동불능 상태로 빠뜨릴 수 있었다.
나중에야 일제 반격이 개시되었으며 소련군은 최종적으로 격퇴되었다. 보실리키스와 사우코타스 일대의 방어선이 확실하게 잡힌 것이다. 이후로도 때때로 격렬한 방어전은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제1 기갑연대 소속 전차들의 분전을 통해 기동불능에 빠지고 고립된 KV 전차들은 보병들이 달려들어 다량의 고폭약을 차체에 매달아 날려버리거나 승무원들의 항복을 이끌어내면서 그 기세가 급속히 꺾여갔다.
실상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의 잔여 전차전력은 오전 9~10시 무렵에 이어진 이러한 혼전 끝에 이미 치명타를 입고 있었다. 원래 KV 전차나 T-34 전차의 보유량이 워낙 적었는데다가 그나마 전날인 24일 제6 기갑사단과의 전투에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고, 탄약 재고는 사실상 바닥난 상태였으니 25일 오전 제1 기갑사단과의 전투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얼마 남지않은 KV 전차의 위협은 이렇게 25일 아침 갖가지 방법이 동원된 독일군의 필사적인 방어 앞에 사라져갔다.
소련군은 마지막으로 11시 무렵부터 사우코타스 남쪽에서 잔여 병력의 재집결과 돌파를 시도하였다.그러나 이를 정찰기 등의 활동으로 미리 파악한 독일군은 제73 포병연대 소속의 곡사포 4개 포대와 제3 대공포연대 소속의 88㎜ Flak을 지원받아 강력한 탄막을 소련군에게 퍼부어대었고, 이미 KV 전차와 같은 비장의 돌파력을 거의 상실한 소련군의 반격은 다시 격퇴되었다.
이제 이어진 오후의 전투는 독일군에게 한결 손쉬운 것이었다. KGr. Krüger는 사우코타스 일대에서의 소련군의 조직적인 반격을 15시 경에 모두 소탕하고 남서쪽에서 진격해오던 제6 기갑사단의 KGr. Raus와 약 20시를 전후하여 조우할 수 있었다. KGr. West는 보실리스키스에서 남서쪽으로 전진을 계속하여 역시 다음날 새벽까지 KGr. von Seckendorff와 연결하여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을 완전히 여러 갈래로 분단해놨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제269 보병사단이 제1 기갑사단과 제6 기갑사단이 갈라놓은 소련군 잔존병력을 포위, 압박하고 소탕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세세한 싸움은 26일 새벽까지도 이어졌지만 소련군 제2 전차사단은 26일 날이 밝을 무렵까지 사단장 솔리얀킨 소장마저 전사하며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셈이었다.
그리고 26일 오후가 되자, 독일군 제41 차량화군단은 꼬박 2일간 그들을 혼란과 놀라움으로 몰아넣었던 소련군 제2 전차사단과 KV 전차들의 잔해를 뒤로 한 채, 다시금 멀리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맹진격을 재개하였다. 이미 더 서쪽에서 제18군 소속 보병부대들의 선전 끝에 제12 기계화군단 전력이 붕괴되고, 이곳에서 제2 전차사단 전력이 괴멸되었으니 드비나 강까지 더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그 뒤로 제41 군단은 3주간 750km의 돌파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하며 독소전 초반의 승리를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Article History
저자: 채승병 (Periskop 홈지기)
비고: 2000년 12월 7일 초고 Periskop 게재, 2007년 3월 17일 재게재
- 병기 측면에서 보다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들은 Russian Battlefield의 KV-1 및 KV-2 부분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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