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자료사냥 로테이션 상 최근에 러시아 서적들을 이것저것 주문했다. 1차분이 어제 퇴근해보니 도착했던데 뜻하지 않게 좋은 책을 발견하여 기쁜 마음에 첫 인상만 전달해볼까 한다.

최근 고유가로 탄력 받고 있는 푸틴 치세의 러시아 흥성은 확실히 여러 군데에서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2차 세계대전사 서적에서까지 느껴지니 말이다. 푸틴 치세 초기 러시아 서적에 처음 관심을 가지던 때와 비교해봐도 확연히 질 좋은 저작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최근의 저작들은 러시아 현지인들만 접근이 가능한 자료들에 부가하여 서방의 연구 성과물까지 폭넓게 받아들인 한층 진보된 모습을 보여줘서 놀라고는 한다 — 이는 아마 2차 세계대전사 뿐만이 아니라 현용 밀리터리에도 공통적인 현상인 만큼, 앞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군사 분야 동호인들의 러시아어 공부에 대한 압박도 덩달아 가중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물론 사소한 불만사항은 아직도 있다. 우선 러시아 책들 대다수의 구질구질한 종이 질은 언제 개선될 지 모르겠다. 러시아 책은 많은 경우 본문 종이가 대부분 회색 갱지라서 읽다 보면 어렸을 적 등사지나 기계식 타자기로 치던 종이, 때로는 재생 두루마리 화장지가 자꾸 연상되어 묘한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또 책의 유통주기가 상대적으로 짧아서, 나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책들도 한국에서는 구하기 너무 힘든 것이 많다. 그나마 아직도 절대 다수의 서적들이 100~300루블(3500~10000원) 정도로 저렴하다는 점이 위안이다.

Курский излом

오늘 소개할 책은 올 2007년 2월에 나온 발레리 자물린(Валерий Н. Замулин) 著, 『Курский излом: Решающая битва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쿠르스크의 좌절: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투)』이다. 제목만 봐서는 사실 별 감흥이 없는 평범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책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소개글이나 목차를 보면 특이하게도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쿠르스크 전투의 전 영역 — 짧게는 7월 5~23일 정도, 길게는 2~3월 도네츠 만곡부 전투부터 8월의 루미얀체프 반격전까지 — 을 다루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극도로 압축하여 7월 4~9일까지의 단 6일 동안을, 그것도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만, 거기에 다시 켐프 분견군의 정면은 무시하고 제4 기갑군 소속 제48 기갑군단 및 제2 SS 기갑군단 전면의 전선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책이 무려 900페이지(!)에 이른다.

관심 영역이 넓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 전투를 다룬 저작들 중에는 유독 주요한 3일간의 전투를 하루씩 끊어 집중적으로 다룬 책들이 있다 — 『Gettysburg, July 1』, 『Gettysburg - The First Day』 등등의 책들이다. 하루 동안 벌어진 양측의 접전 양상을 500~700페이지로 엮어내는 몇몇 저자들의 괴력에 몹시 놀랐는데, 이 책도 첫 인상이 딱 그랬다. 쿠르스크 전투도 이렇게 상술하는 책이 나올 줄이야.

저자의 문제의식도 공감이 많이 가던 바였다. 흔히 치타델레 작전을 이야기할 때, 7월 12일의 프로호롭카 전투를 클라이막스로 많이 언급하고는 하는데,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돌출부 남쪽이건 북쪽이건 작전의 성패가 결정난 것은 이미 그 이전이라고 봐야 한다. 남부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애초 오보얀-쿠르스크 진출의 주력은 제48 기갑군단이었고, 이 군단이 초반에 대대적인 손실을 입고 끊임없이 측면을 두들겨 맞으면서 예봉이 꺾인 것부터 한계는 분명했다. 프로호롭카 전투가 좁은 발카 지형에 걸맞지 않은 소련군의 전술적 판단 착오에 따른 독일측의 전술적 승리였으나, 전략적으로는 독일군이 이미 며칠 전에 도달한 프숄 강 전선에서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함을 확인시킨 사건에 불과했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 경향이다. 결국 쿠르스크 전투의 핵심은 보다 초기의 전투에서 찾아야 하며, 그에 따라 초기 5일 동안의 양측의 치열한 교전 상황을 집중 조명한 결과물이 이 책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폰 멜렌틴의 『기갑전투(Panzerschlacht)』나, 슈페터의 GD 사단사 등에 언급되었던 쿠르스크 전투 초기 제48 기갑군단의 어려움의 이면에 과연 소련군의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가는 속시원히 해결이 안되던 부분이었다. 거듭되는 독일군의 측면 노출과 소련군의 반격이 과연 얼마나 주도면밀히 계획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방의 대표적 역작인 글랜츠의 『The Battle of Kursk』 또한 설명이 부족하다. 소련군은 전투 이전에 조직된 치밀한 방어계획에 따라 독일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해냈던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 이 책이 좋은 해답을 제공해줄 것인가?

아직 숙독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질 수 없지만, 러시아에서 나온 저작 답게 러시아 연방 국방부 중앙 문서고(Центральном архиве Минобороны РФ)에서 찾아내었다는 해당 러시아군 부대들의 각종 전황보고 사료들을 이용하여 작전 경과를 상술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기대가 크다. 거기에 서방에서 나온 독일군 측의 문서나 회고 내용도 적극 참조하여 양측의 시각에서 혼란했던 전투를 재구성하고 있음도 엿보인다. 당장 책 내용을 아주 대충만 훑어봤음에도 기존에 서구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상세한 소련군 측의 전력 통계만으로도 감탄사가 나온다. 이만하면 대독일(Großdeutschland) 사단과 SS 기갑척탄병 사단들을 좌절시켰던 소련군의 노력이 비로소 실감나게 다가올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고나 할까. 아마 제대로 읽으려면 또 러시아어 사전을 싸매고 꽤나 시간을 들여야겠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보다 명쾌한 판단이 서면 다시 제대로 된 소개글을 써 보도록 하겠다.

여하튼 독소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최근 러시아 쪽의 출간동향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필자도 아직 러시아 서적을 빠르게 흡수해낼 역량이 부족함을 한탄하는 중이지만, 뭔가 러시아발 신천지가 열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니 말이다. 이런걸 보면 한국이 동북아 균형자는 커녕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4개 외국어(영어, 중국어, 일어, 러시아어) 일상화 교육에 나서야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P.S.
2차분에는 같은 저자가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 다룬 『Прохоровка: неизвестное сражение великой войны(프로호롭카: 대전의 알려지지 않은 전투)』도 올 예정인데 몹시 기대된다.

2007/05/03 17:45 2007/05/0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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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끼릴 문자를 배워야 할 날이 왔다. orz

    Tracked from 변태중년황금용마족 미르군의 별장 2007/05/04 02:19  삭제

    새로운 쿠르스크 전투 관련 서적 『Курский излом』 첫인상드디어 그날이 왔다. orz 번역기에라도 물려 보려면 적어도 끼릴을 알아보고 키보드로 칠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orz - 혁이가 -P.S : 약간 엇나가는 소리 같지만, 우가우가 고릴라 정도로만 러시아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예전 디코에서의 롬멜 논쟁 때 소련군을 원시인 취급하던 어느 분과 채승병님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중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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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igTrain 2007/05/03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영어 하나만으로도 벅찬 저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무서운 말씀이십니다. orz..

  2. 윤민혁 2007/05/03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게 영어로라도 나와주면 좋을 텐데요... orz;;;

    • Periskop 홈지기 2007/05/03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밌는게 러시아에서는 서구 서적들의 번역(영어,독어→러시아어)마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책들은 원서보다 값이 더 싸지요. 허나 반대 방향으로는 얼마나 활발히 일어날지, 또 번역된다 하더라도 값은 얼마나 비싸질지...... 안습입니다.

  3. 길 잃은 어린양 2007/05/03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굉장히 멋지군요. 서평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4. 윤민혁 2007/05/03 2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여튼 군사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러시아니만치 앞으로도 계속 좋은 책이 나와줄 거라고 기대는 되는데... 문제는 러시아어네요 진짜. 흑흑.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몸으로 러시아어까지는 정말 지독하고, 역시 러-영 번역기에나 의존해야 하는 걸까요. (...)
    (그나마 웹에서 제공하는 러-영 번역기 성능들은 꽤 괜찮은 것 같긴 합니다만 -_-;)

    • Periskop 홈지기 2007/05/03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죠. 구글이 온라인 번역기까지 만들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T.T

    • 윤민혁 2007/05/04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여튼 적어도 끼릴 알파벳 읽는 법 정도는 배워야 할 날이 왔군요. orz 번역기에 물려서라도 볼 생각이 있다면, 적어도 번역기에 물릴 수 있는 텍스트파일을 만들 수라도 있어야... orz;;;

  5. 삽질랜드 2007/05/03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아예 자기 특기 분야를 만드는게 나을 것 같네요-_-;;;; 저는 중국어로 가겠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도 나눠서...(퍽!)

  6. 제3제국 2007/05/03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채승병님 말씀대로, 닥치는 대로 러시아어책들을 좀 사야겠습니다. 제가 향후에 계획중인 것이,채승병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좋다고 판단되는 책이 있다면,우리끼리 공유할 수 있는 문고를 가지면 어떠할까 합니다. 제 생각에 대략 1000만원 정도만 투자하면 어지간한 러시아, 독일어, 영어권 서적은 사모을 수 있지 않나 합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돌려보는 거지요...

    하여간 저도 이제 러시아어 초급서를 막 떼고, 중급서로 들어가는 수준이라,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채승병님께서 권하시는 책이라면 일단 올해가 넘어가기 전에 100권정도, 러시아어/독일어 서적을 구입해 볼까 합니다.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이리저리 들이받다보면 언어란, 어느 순간엔가 문이 활짝 열리지 않나합니다.

    이제 독일어는 조금씩 눈에 들어옵니다.
    다만 하루에 1시간 이상씩 짬을 내기 어렵다는게 안타깝네요.
    좋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7/05/14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권 선생님의 페이스라면 올해 중에 저보다 독일어/러시아어를 훨씬 더 잘하시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여전히 사전을 들고 암흑 속을 헤매고 있으니 말입니다 T.T 저도 언어의 변죽 찌르기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데 끝장 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7. 우마왕 2007/05/04 0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끼릴을 제대로 공부할 시점이 온 듯 하군요 -ㅂ-

  8. 비밀방문자 2007/05/04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7/05/14 0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답을 계속 못 드렸는데, 이건 제가 요즘 몇 군데 온라인 서점을 돌아가며 테스트해보고 있으니 좋은 곳이란 확신이 들면 블로그에 아예 소개글을 올리겠습니다.

  9. sonnet 2007/05/04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젠 정말 러시아어를 배우던가 노국공주를 물색하던가 해야겠군요 ^^

    저는 주로 우드로 윌슨 센터의 CWIHP에서 번역한 냉전기 러시아 사료들에만 의존해 놀았는데, 일단 책부터 몇 권 지르고 대조국전쟁 스터디를 궁리해 봐야겠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7/05/14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오, 안 그래도 푸틴 국왕의 공주께서 한국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시다는게 외교가의 훈훈한 미담인데 홍 대인께서도 부마에 도전을....^^

  10. 양성민 2007/05/04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홈지기님은 얼마나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계십니까? 갑자기 궁금하네요.

    • Periskop 홈지기 2007/05/14 0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에 목록을 만들다 보니 쏟아부은 돈이 자꾸 상기되어 집계를 중단한 일이 있었습니다. WW2 분야 외서만 따지면 5백 권은 넘고 천 권은 안되는 정도(?)로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책 수로 따지면 독일까지 건너가 책을 쓸어담으신 어린양 님이 훨씬 많으실 겁니다.

  11. deutsch 2007/05/13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영어도 수준이 낮은 판국인데..쩝.....ㅡ.ㅡ;

  12. 제3제국 2007/05/16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슨 그런 터무니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아마 제 생각에 평생해도 채승병님이나, 어린양님, 남교수님의 1/10에 못미칠 것이라 이미 오래전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현재의 제 모습으로는 같이 모이는 분들에게 누가 되는 관계로 그나마 노력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요즘은 병원이 너무나 바빠서, 와이프께서는 좋아하시나, 제 문화생활과 취미생활(외국어 공부)에 투자할 시간이 나지 않는군요...

    6월 말 경해서 자리를 한번 마련해서, 추가적인 출판계획이나, 글랜츠씨 초청, 혹은 가을에 대량 구입할 외국서적 목록이나 짜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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