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온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데 있어 전통적인 서방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제껏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원수에 대한 인기와 선망이 유달리도 강하다. 사실 국내에 소개된 2차대전사에 대한 제대로 된 서적과 자료들이란게 엄청나게 척박한 실정에서 그나마 롬멜 원수에 대해서는 그가 저술한 「보병전술」과 리델-하트가 편집한 「롬멜전사록(The Rommel Papers)」이 재판에 개정판까지 나와가면서 아직 꾸준히 소개되고 있으며, 한국군 일각에서도 여전히 기동전의 전범으로 롬멜 원수의 북아프리카 전역 전례에 집착하고 있으니 필자 또한 그의 인기를 현상적으로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인기가 한 발 더 나아가서 롬멜 원수가 절대적인 독일 장교의 전범으로 추앙되고 그의 틀에 맞춰서 2차대전사를 왜곡되게 이해하려는 모습들도 너무나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롬멜이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롬멜 원수에 대한 군사적 능력에 대한 이미지가 나찌 독일 선전부의 조직적인 선전과, 전후에 그와 직접 대적했던 승자로서의 서방 연합군들의 시각에서 망자에 대한 존중심어린 저작들의 영향으로 왜곡되어진 측면도 인정해야될 부분들이다. 대전 중에도 독일 장교단 내에서는 롬멜 원수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좋지 못했으며, 전후의 거품이 걷힌 1960, 70년대 이후 독일 등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다면적인 평가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벌어지자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진정한 능력과 한계에 대해 새롭게 많은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롬멜 원수에 대한 정확한 재평가들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로 꼽을 수 있겠는데, 가장 큰 문제라면 그러한 재평가들이 상당수가 전문적인 군사학의 견지에서 이뤄져서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딱딱한 형태로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학문적인 성과란게 그렇지만 전문 저널에 실리고 몇 장 들여다 보면 잠이 쏟아질만한 두툼한 학술서적에 담겨 나오는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쉽게 퍼질리는 만무하다. 또 다른 이유라면, 이런 문제가 이슈화가 많이 된 쪽은 독일이었는데 그간 한국 실정에서는 2차대전사의 대부분이 미국이나 일본을 거쳐 유입되었기 때문에 독일이나 유럽 일부에서 이슈화가 되고 사그러든 논제들이 제대로 소개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실제 우리나라에 퍼져 있는 롬멜 원수에 대한 견해들 가운데에는 오늘날 재검토되어야 하는 것들이 상당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이러한 사례 중의 하나로, 흔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준비와 관련되어 잘못 알려진 롬멜 원수의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가만히 시중에 도는 설들을 듣다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히틀러와 다른 독일 장군들은 영미연합군을 얕보고 노르망디가 아닌 칼레(Calais) 일대에 상륙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노르망디 상륙을 예견한 롬멜을 무시하여 대사를 그르쳤다는 식의 이야기가 횡행함을 알게 된다. 단지 오직 하나의 실수, 그가 영불해협의 악천후에 잠시 안심을 하고 부인 루시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독일에 갔다는 로맨틱한 사실만이 불가항력적인 실수였을 뿐, 나머지는 대부분 그가 정확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만 들어보면 롬멜이야말로 안이한 독일군 수뇌부에서 유일하게 영미연합군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혜안과 식견을 가진 명장인 것만 같다. 그러나 과연 롬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였는가? 우리가 후세의 입장에서 공정히 평가해볼때 그가 그렇게 유달리 주목을 받을만큼 그의 능력은 탁월했는가? 이러한 부분에 대해 실제 1944년 봄에 역사 속에 있어왔던 여러 사실들을 살펴보면서 검증해 나가기로 하자.

참고로, 필자는 이미 다른 글 "1944년 독일의 서유럽 방어전략 - 기갑부대의 배치문제"에서 1944년 봄 당시에 임박한 상륙을 맞아 독일군 수뇌부에서 진행되어왔던 방어전략에 대한 여러 대표적인 견해와 분위기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바가 있다. 이 글은 그 연장선 상에서 보다 실제 노르망디 상륙에 임박해서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자세히 보충하는 것이니만큼, 그 글을 아직 읽어보시지 못한 분들은 먼저 일독해주시기를 당부드린다.

롬멜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대립

잘못된 첫 만남

1944년 1월, 롬멜과 그의 B 집단군에게 북프랑스 지구의 관할권이 주어진 이후 얼마 동안은 느슨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겨울의 궂은 날씨 속에서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롬멜을 비롯한 프랑스 지구의 고급 지휘관들은 예상되는 봄의 상륙에 대한 물밑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러던 분위기가 점점 가열되기 시작한 것은 드디어 날이 풀리고 움츠려있던 대지에 봄의 기운이 찾아오면서 부터였다. 그 동안 담당 지구의 현황 파악에 목소리를 다소 낮추고 있던 롬멜과 다른 고급 지휘관들은 이제 목청을 가다듬고 각자의 판단에 입각하여 종합적인 북서부유럽 해안방위 마스터플랜을 관철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본격적인 시발점은 1944년 3월 20일 클레스하임(Kleßheim)에서 열린 히틀러와 롬멜, 폰 룬트슈테트 등의 회합이었다. 히틀러와 OKW는 1942년 말 이래 갖은 풍상과 대립을 겪어 오면서 다소 의기소침해진 롬멜의 기를 세워주는데 꽤 많은 배려를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롬멜은 병치레 때문에 엘 알라메인 전투 현장을 시작부터 지키지 못하고 험난한 퇴각전을 치룬 이래, 튀니지에서는 제5 기갑군 사령관이던 폰 아르님 장군과 심각한 대립을 한 바가 있었고, 이어 B 집단군 사령관으로서 북부 이탈리아를 관할했지만 이곳에서도 이탈리아 전선 통제의 주도권을 쥔 남부전구 총사령관(OB. Süd) 케셀링 원수와의 심각한 마찰로 프랑스로 밀려난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런 그에게 북프랑스 지구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만큼 충분한 지원을 해줌으로서 한때 눈부셨던 독일군의 영광 재현에 다시 한번 큰 기여를 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날 오후 느즈막히 시작된 회의에서 롬멜은 이러한 히틀러와 OKW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용하여 역시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프랑스 지구에 배치된 기갑사단들의 운용에 맞춰져 있었다. 롬멜은 거듭 프랑스 지구에서 OKW 및 서부전구 총사령부(OB. West) 예비로 배치된 기갑사단들을 모두 B 집단군 직속으로 전환하여 지휘권을 넘겨줄 것을 히틀러에게 요청하였다. 상륙 저지에 가장 핵심적인 예비 기갑전력은 현장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을 자신에게 일임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히틀러 또한 깊은 이해를 표명하며, OKW와 상의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가용한 기갑사단들을 서부전구 총사령부가 B 집단군에게 내어주도록 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한다.

롬멜은 이러한 히틀러의 약속에 만족했으며, OKW 국방군지휘참모부(Wehrmachtführungsstab) 부장인 요들 상급대장에게 이에 따른 후속조치를 거듭 촉구하고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15군 지구의 해안방위 현장순시길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을 접한 서부전구총사령부의 반응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룬트슈테트 원수가 회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그다지 제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함께, 히틀러의 정식 명령이 없는 단순한 구두 약속만으로는 금쪽같은 예비 기갑사단들을 B 집단군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단호한 반대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국방군지휘참모부 또한 어떤 일을 벌일지 예측이 어려운 롬멜이 모든 기갑사단들에 대한 지휘권을 틀어쥐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하여 서부전구총사령부의 이러한 의도적인 거부에 동조하였다.

Rommel

B 집단군 사령관 E. 롬멜

Rundstedt

서부전구 총사령관 G. v. 룬트슈테트

Geyr von Schweppenburg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L. Frhr.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역시 이러한 롬멜의 지휘권 인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의 선봉장은 서부기갑집단(Panzergruppe West) 사령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이었다. 이모저모 살펴봐도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입장에서는 롬멜에 비해서 계급은 낮아도 자신의 능력이 뒤쳐진다고 치부할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은 나이도 롬멜에 비해 5년 연상이었고, 기병병과 출신으로 롬멜이 중령 계급으로 군사학교 교관을 하고 있던 1935년에 이미 장군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영국 등 여러 외국 주재 공관 무관의 경력으로 양식있는 인물로 정평이 난데다가, 이미 1937년에 제3 기갑사단장을 맡아 폴란드 전역에 참전한 독일군 기갑병과 초기부터의 중요한 지휘관이었다. 그 이후 제24 차량화군단, 제3 기갑군단, 제40 기갑군단 등을 이끌면서 캅카즈 깊숙히 그로즈니 목전까지 독일군을 지휘해 들어간 역전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니 야전지휘경험으로 따져봐도 기갑병과 내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만 1942년 10월 큰 병을 얻어 장기간 후방으로 물러나앉는 신세가 되버려서 적절한 평가와 진급기회를 놓치고 롬멜에게 추월당했을 뿐이었다.

이미 롬멜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1944년 1월 8일 파리에서 첫 만남을 가진 바가 있었다. 사실 경험많은 기갑장교들로서 뭔가 통하는 면이 있을 법도 했지만, 이 둘은 처음부터 서로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다. 롬멜은 당시에 정통 참모장교 출신들과의 연이은 마찰을 겪은 뒤라 이러한 정통파적인 냄새가 나는 인물들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고 있었으며, 롬멜이 보기에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딱 그러한 선입견에 들어맞는 부류였다. 반대로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입장에서도 롬멜의 계급과 경력에도 불구하고 극히 변칙적인 해안방위구상에 밑바닥부터 대단히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다.

Dollmann

제7군 사령관 F. 돌만

그런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가 앞장서서 반대하는 견해에 기갑전에 대해서는 별 감각이 없던 서부전구총사령관 폰 룬트슈테트 원수가 미지근한 공감을 표시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롬멜의 B 집단군 관할 야전군인 제7군 사령관 돌만 상급대장 또한 이에 동조하고 있었다. 애초에 서부전구 총사령부 예하 고급 지휘관들이 모두 상당한 연공을 가지고 있고 — 한 예로 돌만은 이미 1940년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4년째 제7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 정통파 참모장교 출신들로 똘똘 뭉쳐있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양자 사이의 기갑부대 운용에 대한 시각 차이는 자못 심각했다. 현장순시를 마치고 사령부로 복귀한 롬멜이 이러한 반대 분위기를 듣게 되자 당연히 그는 격노하며 요들에게 항의전문을 보냈다. 3월 27일자로 요들에게 히틀러가 약속한 바대로 빠른 후속조치의 이행을 다시금 촉구함과 동시에 그는 반대의 선봉장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를 자신의 사령부로 불러들인다.

이로 인해 3월 29일에 B 집단군 사령부로 출두하여 맞닥뜨린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와 롬멜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감정대립으로 치달았다. 롬멜 또한 거의 평정을 잃어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면상에 대고 일갈을 날리게 된다: "들으시오, 난 노련한 기갑부대 지휘관이요. 당신이랑 나는 사사건건 의견이 다르니 이래가지고 난 당신이랑 일해먹을 수가 없소. 뭔가 적절한 결론이 내려지도록 상부에 요청해야겠소." 이에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도 굳은 얼굴로 눈을 부릅뜬채 절도있는 경례를 붙이고 즉각 그대로 B 집단군 사령부를 떠났다. B 집단군 사령부에서의 이 만남이야말로 이후 봄 내내 벌어진 충돌의 본격적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연이은 대립과 롬멜의 기본 가정

이러한 대립구조가 심화되자 2주여 후에 파리의 서부전구 총사령부에서 열린 방어대책 회의도 제대로 흘러갈 리가 만무했다. 4월 10일 열린 회의에서 롬멜은 예비 기갑부대들을 자신의 휘하에 전부 몰아서 위험지구 해안에 바짝 붙여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안치오 상륙작전과 디에프 상륙작전의 예를 들었다. 일단 교두보 장악이 끝난 이후에는 아무리 기갑부대를 몰아 투입한다고 하더라도 교두보 제거와 결정적인 승리는 불가능하며, 오직 디에프처럼 상륙하자마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쫓아내야지만 연합군이 다시 상륙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계속해서 연합군 공수사단의 위협을 강조했다. 해안방어에 아무리 노력해도 후방에 대거 강하하는 공수사단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없으면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는 연합군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했다. 재밌게도 여기에는 또한 살레르노 등에서 해안에 대한 직접 반격을 시도하다가 강력한 연합군의 함포사격 등 해상화력지원에 번번히 좌절당한 경험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런 팽팽한 견해의 충돌로 어떤 완벽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예비 기갑부대의 배치문제에 대해 통일된 안을 제시하지 못하자 혼란한 쪽은 히틀러와 OKW였다. 히틀러는 애초부터 롬멜의 견해를 최우선으로 존중해줄 자세였으나 서부전구 총사령부가 워낙 완강하게 반대하자 어떤 결론을 내려야할지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롭게 변수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기갑총감(Generalinspekteur der Panzertruppe) 구데리안 상급대장이었다. 구데리안은 직접적인 군령권을 행사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기갑병과 문제에 대한 히틀러의 유력한 조언자로서 그 자신도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히틀러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구데리안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여전히 롬멜의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서 그렇다면 구데리안이 직접 롬멜에게 찾아가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설득해서 합의안을 도출해올 것을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구데리안은 프랑스로 향하여 의견을 조율하려 하였지만, 그 사이에도 이미 또 다른 의견충돌은 이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문제가 당시 프랑스 지구에서 가용한 가장 강력한 예비 기갑사단의 하나이던 제2 기갑사단의 배치 문제였다. 제2 SS 기갑군단 소속의 2개 기갑사단이 동부전선으로 호출되고 기갑교도사단까지 헝가리에 투입된 시점에서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와 함께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꼽히던 이 사단이 어디에 위치하느냐를 두고 롬멜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팽팽히 맞섰다.

롬멜은 서부전구 총사령부로부터 이 사단에 대한 지휘권을 당장 인수받지는 못했으나 국방군지휘참모부의 요들로부터 사단 배치에 대해서는 그의 의견을 최대한 따르겠다고 약속을 받은 바 있었다. 롬멜은 이를 근거로 제2 기갑사단에게 북서쪽 솜(Somme) 일대로 이동하여 아브빌(Abbeville) 일대 해안에 바짝 붙어 전개할 것을 4월 25일자로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을 전해들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폰 룬트슈테트에게 이 명령을 견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제2 기갑사단은 양 사령부의 눈치를 보느라 4월 26일까지도 부대 이동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롬멜은 또 한번 이에 격노하였으며 다시 한 번 강경하게 제2 기갑사단의 전진배치를 명령하여 OKW는 이 안을 승인해줄 수밖에 없었다.

Lüttwitz

제2 기갑사단장 H. Frhr. v. 뤼트비츠

Schwerin

제116 기갑사단장 G. Graf v. 슈베린

Witt

제12 SS 기갑사단장 F. 비트

사실 제2 기갑사단 이전에도 제12 SS 기갑사단이 4월 초 벨기에에서 이동할 때부터 말썽은 많았다. 제2 SS 기갑군단이 동부전선으로 떠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제12 SS 기갑사단이 이동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B 집단군에서 처음 지정한 이동위치는 센강 하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리지유(Lisieux) 일대였다. (아직 이 때는 제 21 기갑사단도 이 지역에 배치되지 않아 센강 동쪽의 노르망디 지방에는 단 1개의 기갑사단도 남아있지 못했다.) 그러나 3월 말 이곳을 답사한 제12 SS 기갑사단 참모장교들은 B 집단군이 지정한 위치가 너무 해안에 가깝다는데 놀라 이 위치에 대해 서부기갑집단 사령부에 재확인을 요청한다. 이에 서부기갑집단은 다시 서부전구 총사령부를 설득하여 부대배치를 더 동남쪽의 에브류(Evreux)-드류(Dreux)-래글르(l'Aigle) 일대로 전환해버린다. 이에 대해서도 롬멜이 대단히 불쾌하게 반응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 한사코 제2 기갑사단의 이동에 대해서 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자세로 나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가 발끈하여 입장을 조율하러 서부전선으로 찾아온 구데리안을 대동하고 4월 28일, 라 로쉬 귀용에 있는 B 집단군 사령부를 직접 찾아가서 또 한번 격론을 벌인다.

B 집단군 사령부에서의 회의

1944년 4월 28일, B 집단군 사령부에서 벌어진 회의 장면. 왼쪽으로부터 B 집단군 참모장 슈파이델 중장, B 집단군 사령관 롬멜 원수, 기갑총감 구데리안 상급대장,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 기갑총감실 참모 폰 뵐바르트 소령

흔히들 롬멜에 우호적인 전후 저작들에서는 이러한 롬멜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격론들에 대해 롬멜의 영미연합군과의 교전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한 정통파 기갑장교의 독선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회의 기록을 더욱 면밀히 살펴보면 이들 저작에서 간과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롬멜이 왜 예하에 가능한 기갑사단이 극도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안 근접배치에 집착했느냐 하는데 대한 실마리이다. 1944년 4월의 북프랑스 지구 독일군 기갑부대의 실정은 최악의 상황이어서 이들 2개 기갑사단의 배치안이 논의될 당시 실전투입이 가능한 기갑사단은 단 3개 사단 — 제2 기갑사단, 제12 SS 기갑사단, 제21 기갑사단 — 밖에 없었다. (물론 곧 이어 기갑교도사단이 헝가리에서 돌아올 예정이었으며 제116 기갑사단이 이동해와서 배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가장 약체이고 브르타뉴 견제를 위해 렌(Rennes)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제21 기갑사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2개 기갑사단에 대한 롬멜의 배치안을 보면 그가 연합군이 상륙하리라고 확신한 지점은 칼바도~코탕탱 반도 일대의 서부 노르망디 지방이 아니라 바로 됭케르크에서 디에프, 특히 솜강 하구에서 디에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롬멜의 상륙지점 예상

롬멜의 연합군 상륙작전 예상지점과 그에 따른 기갑예비 배치안. 파란 화살표는 연합군 상륙 시 전개될 예비 기갑사단들의 역습 방향.

이들 회의 배석자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롬멜은 이 칼레 이남에서 솜강 하구 일대의 상륙이 주공점이 될 것을 확신하고 실전투입이 가능한 모든 주력 기갑예비는 이곳으로 빠르게 전개할 수 있는 해안지대에 우선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됭케르크에서 칼레, 르 투케(le Touquet)에 이르는 지역은 제67 군단과 제82 군단이 예하에 비교적 양호한 보병사단에 의한 삼각방어체계를 구축해놓고 있었지만, 솜강 하구와 디에프 일대를 방어하는 제81 군단은 해안방어사단 배후에 적절한 예비대를 축적해놓지 못하고 있었으며 롬멜은 바로 이 간극에 기갑예비들을 전진배치하고 싶어했다. 롬멜의 B 집단군이 원래 주장한 제12 SS 기갑사단의 이동 위치도 조공의 가능성이 있는 캉과 칼바도 지방에 대한 견제를 고려하기는 했지만 루앙 등을 통해 동부 노르망디 해안 일대로 빠르게 전개해나가기 적합한 위치에 여전히 치우쳐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제안된 제12 SS 기갑사단의 배치위치와 이후 제116 기갑사단의 배치위치까지 이어보면 솜강 하구 일대에 대한 상륙을 해안에서 봉쇄하는 방향으로 기갑예비의 배치가 기획되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롬멜이 진정으로 코탕탱 반도 등 서부 노르망디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이렇게 솜강 하구~센강 하구에 치우친 해안에 대한 근접배치를 선호했을 이유가 없다. 그가 적은 예비전력에도 불구하고 해안근접방어의 이점에 집착한 이유는 이곳 근방에 상륙 주공이 떨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사실 롬멜 또한 1944년 4월 말까지 대부분의 주의는 칼바도~코탕탱 반도와 한참 멀어져 있었다. 우리가 흔히들 생각해오던 것처럼 롬멜이 그토록 서부전구 총사령부의 지휘관들과 설전을 벌여가며 확보하려던 곳이 서부 노르망디 해안의 방어능력이 아니었다면, 과연 연합군이 호시탐탐 노리던 이 지구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 독일군의 고급 지휘관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 바로 히틀러가 이곳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44년 봄 서부전선의 최종 방어태세 확립

1944년 4월, 히틀러의 직관적인 기만작전 간파

과거 롬멜에 대해 아주 호의적이었던 저작들에서도 히틀러가 서부 노르망디 상륙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은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저작들에서는 롬멜이 서부 노르망디 상륙을 예견했다는 점을 (틀리게) 강조한 나머지, 히틀러가 노르망디 방어태세 강화에 기여한 부분을 고의건 아니건간에 축소하고 있음을 흔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관심이 워낙에 사방팔방 여러 갈래로 뻗어있었으니 노르망디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의 우유부단하고 히스테릭한 면모에 기인한 우연이 아니었는가 하는 견해도 흔히들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공정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어쨌거나 히틀러는 다른 모든 독일군의 고급 지휘관들이 심각하게 신경쓰지 않던 서부 노르망디 해안의 방어태세 강화에 대해 가장 구체적인 큰 영향을 끼치고 압박을 가했다.

특히 놀라운 점이라면 당시 연합군의 "Fortitude" 작전에 의해 대규모의 기만책이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히틀러는 직관적으로 이 기만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4월 6일 요들에게 "지금까지 영국놈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는 모두 가짜같네…… 난 이 모든게 뻔뻔스러운 속임수로 드러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을 비롯하여 당시 연합군의 동향에 대해 들어오고 있는 보고들에 깊은 의문을 던졌다. 당시 연합군의 폭격이나 정찰활동, 감지되는 준비상황은 그들이 칼레 일대의 영불해협 최단거리 해안 방향에 집중되어 있었지 상대적으로 서부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일대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적었다.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해서 프랑스 지구의 고급 지휘관들은 스헬데에서 르 아브르에 이르는 제15 군 관할구역이 상륙지점이라 해석한데 반하여 히틀러는 역으로 자꾸만 코탕탱 반도와 브르타뉴 지방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그래서 봄 내내 프랑스 지구의 고급 지휘관들에게 코탕탱 반도와 브르타뉴 지방 방어에 신경을 쓰도록 촉구했으며, 그 결과로 적어도 이 일대를 조공 예상지역으로 간주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특히 셰르부르와 브레스트가 연합군이 충분히 눈독을 들일만한 항구라는 점에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게 되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4월 내내 계속된 B 집단군과 서부전구 총사령부의 신경전 속에서 코탕탱 반도와 브르타뉴로의 증원은 그다지 심각한 주제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4월 말에 이르자 자신의 우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대응을 계속 닥달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1944년 4월 26일에 다음과 같은 조치가 내려지게 된다:

  1. 제2 강하군단 사령부와 제5 강하엽병사단을 브르타뉴로 이동시키고, 이 군단은 제3 및 5 강하엽병사단을 지휘하여 예상되는 적의 공수작전에 대비한다.
  2. 5월 2일까지 제91 공정사단(Luftlandungs-Division)을 제7군에 이관한다.
  3. 기갑교도사단은 5월 1일까지 헝가리로부터의 이동을 마무리짓도록 한다.

이로 인해 렌 일대에 제2 강하군단이 투입되면서 3월 중순에 이곳으로 이동해 온 제21 기갑사단이 다시금 다른 지구에서 사용 가능한 예비전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후일 상륙이 벌어졌을 때 깡의 신속한 해방을 저지한 제21 기갑사단도 이 조치 때문에 비로소 5월 3일자로 캉으로 이동해갈 수 있었던 셈이다. 동시에 코탕탱 반도에 이미 배치된 제243 보병사단과 제709 보병사단의 방어진에 직접적으로 새롭게 제91 공정사단이 증원되어 후일 미군과 상륙 현장에서 직접 교전하게 될 전력이 보강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서부전구 총사령부는 여전히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다. 특히 제91 공정사단을 코탕탱 반도 깊숙히 밀어넣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으며 대신 이 사단을 한참 남쪽인 렌와 낭트를 잇는 축선 상으로 배치하자는 대안을 제시했으나, 히틀러의 뜻은 완강하였으며 5월 11일이나 되어서 이 사단의 코탕탱 반도로의 이동에 동의하게 된다.

1944년 5월, 추가 증원과 최종 배치안 확정 상황

5월에 들어서자 히틀러의 걱정은 더욱 커지게 된다. 5월 3일 그는 갑자기 간밤에 참모장교들을 호출하여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지방의 지도를 가져오게 해서는 코탕탱 반도의 방어태세가 자신의 의도한 대로 착실하게 준비되고 있는지 한번 더 점검하였다. 그가 보기에 여전히 이 지구의 방어태세는 맘에 들지 않았으며 당시에 해안에서 뒤로 물러나 다소 후방에 머물고 있던 제352 보병사단을 전방 해안진지로 이동시킬 것과, 추가로 제77 보병사단을 증원할 것을 명령한다. 이중 제77 보병사단은 브르타뉴 지방에 머물게 되지만, 이때 제352 보병사단이 예기치 않게 해안으로 바짝 이동해가서 제716 보병사단의 허술한 해안방위진을 강화하는 바람에 상륙 당일 오마하 해안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히틀러의 제7군 관할구역에 대한 관심의 증폭은 롬멜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히틀러가 해안방위에 큰 신경을 쓰고 가용한 예비부대를 전진배치하려 한다는 사실은 그는 서부전구 총사령부로부터 더 많은 예비대를 자신의 수중으로 전환하는데 적절한 명분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롬멜은 다시 한번 OKW 국방군지휘참모부의 요들에게 3월의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했고, OKW와 B 집단군은 상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B 집단군에게 예비 기갑부대들을 넘겨준다면 그것은 히틀러의 우려대로 코탕탱 반도와 브르타뉴 입구에 대한 대규모 공수작전에 대응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 독일군의 예상으로는 연합군은 6~8개 공수사단을 단시간 내에 투사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데 반하여 준비할 수 있는 기갑예비는 극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관이 가능한 전력은 제12 SS 기갑사단과 기갑교도사단으로 구성된 제1 SS 기갑군단이 유일한 대안이다.
  • 제1 SS 기갑군단은 렌(Rennes)-알랑숑(Alençon)-리지유(Liseux)를 잇는 삼각지대에 투입되는 조건으로 B 집단군에 이관할 수 있다.
롬멜의 제1 SS 기갑군단 배치안

1944년 5월 2일, 롬멜과 OKW가 협의-제안한 제1 SS 기갑군단의 새로운 배치안

위의 지도에서 보라색으로 표시되었듯이 여기서 롬멜이 합의-제안한 이동지역을 잘 살펴보면, 실제 연합군의 상륙이 이뤄진 코탕탱 반도와 칼바도 지방에 더 근접해있기는 하지만 롬멜이 그간 주장해왔던 기갑예비의 해안선 후방 20㎞ 이내의 근접배치안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특히나 미군 상륙의 주요 목표로 설정된 셰르부르와는 여전히 상당히 먼 위치여서 코탕탱 반도에 대한 롬멜식 방어대책으로는 한참이나 미흡한 것이었고, 기존 제12 SS 기갑사단의 배치구역과 비교해봤을 때 결정적인 변화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든 위치였다.

그렇다면 이런 배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배치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4월 초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에 의해 강제로 더 내륙으로 조정된 제12 SS 기갑사단의 위치를 원래 롬멜의 의도대로 리지유 방향으로 다시 조정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부가하여 롬멜은 새롭게 헝가리에서 도착하는 기갑교도사단까지 묶어서 이들 두 강력한 예비 기갑사단을 서부전구 총사령부와 서부기갑집단의 영향력에서 떼어내어 자신의 직접 지휘 하에 놓으려고 한 것이다. 결국 이 배치는 롬멜이 코탕탱 반도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히틀러가 코탕탱 반도와 브르타뉴 방어에 노심초사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제1 SS 기갑군단을 자신의 수중으로 끌어 내리려는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롬멜과 B 집단군은 히틀러의 성화 때문에 브르타뉴와 코탕탱 반도를 느슨하게 커버하면서도 언제든지 제1 상륙 후보지로 고려되고 있던 솜강 하구 일대로 이동시키기에 용이한 지역을 고른 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B 집단군과 OKW의 새로운 협의안마저 서부전구 총사령부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서부전구 총사령부가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코탕탱 반도와 브르타뉴의 방어문제를 떠나서 역시 B 집단군이 2개 기갑사단을 빼내려는 부분이었다. 당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사단들이 하나 둘씩 서부에 도착하면서 한 줌에 불과한 예비 사단들밖에 확보하지 못한 서부전구 총사령부 입장에서 강력한 2개 기갑사단을 뺏긴다면 서부전구 총사령부 차원에서 추구하는 전략예비대의 확보는 불가능한 노릇이었으며, 이는 방어전략의 전면적인 수정을 필요로 하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러한 격한 대립 끝에 1944년 5월 7일자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갑부대 배분에 대한 최종안이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1. B 집단군 직속: 제2, 21, 116 기갑사단
  2. G 군집단 직속: 제9, 11 기갑사단, 제2 SS 기갑사단
  3. OKW 예비: 제1 SS 기갑군단과 제1, 12 SS 기갑사단, 제17 SS 기갑척탄병사단, 기갑교도사단

롬멜은 제12 SS 기갑사단과 기갑교도사단을 빼오는 데는 실패했으며, 단지 렌에서 제2 강하군단에 의해 교대된 제21 기갑사단을 리지유 근방으로 끌어오는데 만족해야 했다. 서부전구 총사령관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렇게 롬멜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이러한 작전계획에도 불구하고 5월 8일 서부전구 총사령부에서 열린 서부전구 고급지휘관 회의에서 여전히 자신감을 드러내었다. 그는 롬멜이 부임 이래로 기울인 방어태세 확립에 대한 노력에 크게 찬사를 보내면서, 롬멜의 노력에 힘입어 다가올 연합군의 상륙에서 독일군은 승리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연합군 상륙 방어대책 회의

1944년 5월 8일에 파리에서 열린 연합군 상륙 방어대책 회의 장면. 왼쪽부터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 G 군집단 사령관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 제3 항공군 사령관 슈페를레 원수, 서부전구 총사령관 폰 룬트슈테트 원수, B 집단군 사령관 롬멜 원수, 서부해군집단사령부 사령관 크랑케 제독.

그러나 폰 룬트슈테트의 이러한 낙관적인 태도가 결코 그만의 것은 아니었다. 불만은 있었지만 롬멜 또한 5월이 지나면서 방어에 대한 자신감을 서서히 회복해가고 있었다. 상황이 여전히 나쁘기는 했지만 4월과 같은 최악의 시기는 지나갔고, 그 동안 가시적으로 해안지대에 대한 상륙작전 방어태세는 큰 진전을 보았다. 특히 롬멜은 그가 계속 철석같이 주목하고 있던 제15군 지구의 해안 방어태세가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는 것에 커다란 만족을 표시했다. 제2 기갑사단과 제116 기갑사단이 거의 그가 원하는 지점에 배치되었으며, OKW는 당장 지휘권을 이관하지는 않았지만 상륙이 확실해진 즉시 OKW 예비를 B 집단군에게 넘기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제12 SS 기갑사단을 제외하면 주요한 다른 기갑사단들은 거의 롬멜이 4월에 제안한 바대로 배치가 이뤄졌다. 우선적으로 가용한 사단들이 해안에서 방어하는 사이에 이들 OKW 예비마저 제때 이관된다면 증원병력의 조속한 투입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정작 재미있는 사실은 야전의 폰 룬트슈테트나 롬멜 모두가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해가는 와중에도 히틀러는 여전히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5월 9일에 제2 강하엽병사단 소속인 제6 강하엽병연대를 추가로 코탕탱 반도에 증원할 것을 명령한다. 이쯤 되어서는 제7군 사령관 돌만도 히틀러의 우려에 편승하여 코탕탱 반도에 대한 조공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예비대를 더 증원해줄 것을 B 집단군 사령관 롬멜에게 요청한다. 이 제안을 근거로 다시 롬멜은 5월 12일에 제12 SS 기갑사단을 자신의 수중으로 즉시 보내줄 것을 요들에게 요구한다. 이번에는 이미 제21 기갑사단이 리지유 지구로 이동해왔으므로 제12 SS 기갑사단을 아예 아브랑쉬 남쪽에 전개하자는 안을 들고 나와서 요들을 설득하였다. 국내에 널리 퍼져 있는 리델-하트의 「롬멜전사록(The Rommel Papers)」이나 여타 유사한 분위기의 저작들에서는 이때의 요구를 가지고 롬멜이 노르망디 상륙을 예견했다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지만, 면밀히 분석해보면 이 요구 또한 롬멜 고유의 의견이 아닌데다가 정작 요구한 배치지역은 결정적으로 코탕탱 반도의 방어태세를 유리하게 전환시킬 위치가 아니고 역시 브르타뉴에 대한 견제능력을 강화하는데 적합했던 위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요구마저 요들은 수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한다.

이후 5월 12일에 예정대로 제2 강하군단이 브르타뉴로 이동을 완료하게 되자 사실상 서부전선에 증원가능한 모든 예비대의 배치는 일단락되었다. 동부전선, 남부전선 할 것 없이 상황이 어려운 마당에서 더 이상 빼올 예비대란 남아있지도 않았고 2달 가까이 끌어온 첨예한 고급 지휘관들 사이의 신경전은 어정쩡한 타협안으로 미봉되었다. 히틀러가 아무리 코탕탱 반도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증원은 불가능해졌고 이렇게 확정된 상황 하에서 남은 방어준비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서부전선의 고급 지휘관들에게 마지막 남은 의문은, "그렇다면 과연 상륙작전은 언제 개시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한창 좋은 시즌인 5월이 넘어가는 마당에 계속 상륙이 지연되어 더 많은 준비가 이뤄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연합군이 그들의 의도대로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었고, 최선의 방어를 위해서는 가장 정확한 상륙시점의 예측이 필수불가결했다.

(to be continued......)

2007/04/17 20:01 2007/04/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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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민혁 2007/04/17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에 편집상 문제가 좀 있는데... "흔히들 롬멜에 우호적인~"으로 시작하는 "롬멜이 실제로 예측하고 있었던 연합군 상륙지점" 부분이 중복돼서 편집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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