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1944년 독일군의 서부유럽 기동방어전력 확충

1944년, 독일은 그 해 중으로 영미 연합군의 프랑스에 상륙하여 새로운 전선을 형성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그러한 제2 전선의 형성 우려는 1942년 이래 계속되어온 것이지만 1943년의 연합군 작전이 이탈리아, 지중해 등 남부에 집중되다가 이탈리아 중부 카씨노 일원의 구스타프 방어선에서 정체된 상황에서 북프랑스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가능한 것이었다.

히틀러와 국방군 총사령부(OKW)는 이러한 임박한 영미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유효한 예비대를 프랑스 지구에 다수 확보해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 1943년 중반 이래 소련군의 연속된 대규모 공세는 동부전선의 상황을 계속 파국 일보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전선도 험한 지형에 기대어 근근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적당한 전력을 빼내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나마 프랑스에서 어느 정도 쓸만한 전투력으로 육성된 부대들도 동부전선의 위기가 닥쳐오면 급거 러시아로 수송되어 격전 속에 소모되었기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배치된 부대들은 상당수 전투력이 소모되어 재편성을 위해 주둔하고 있거나 동부전선의 험난한 환경을 견디기 힘들어 서부에서 방어부대로 써먹고 있던 2류 이하의 부대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전반적인 보병전력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불충분한 상황에서 이러한 대 상륙 타격전력의 핵심은 유연하고 강력한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들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와 OKW는 이러한 서부의 방어목적으로 일련의 기갑사단들을 계속 인가하고 편성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노력은 무장친위대(Waffen-SS)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1943년 중 다음과 같은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들이 새로 프랑스에서 편성되게 된다.

  • 제10 SS 기갑사단 "Frundsberg (F)": 1943년 1월 편성
  • 제9 SS 기갑사단 "Hohenstaufen (H)": 1943년 2월 편성
  • 제12 SS 기갑사단 "Hitlerjugend (HJ)": 1943년 6월 편성
  • 제21 기갑사단: (북아프리카에서 항복 이후) 1943년 7월 재편성
  • 제17 SS 기갑척탄병사단 "Götz von Berlichingen (GvB)": 1943년 10월 편성
  • 기갑교도사단 (Panzer-Lehr Division): 1943년 11월 편성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3개 Waffen-SS 기갑사단의 편성 진도는 매우 늦게 진척되었다. Waffen-SS의 경우 육군(Heer)과 인력 충원기구가 달라서 3개 사단을 편성하는데 필요한 약 5만 명에 이르는 신규 인력 확보도 문제였고, 무엇보다도 경험있는 간부층의 확보가 대단히 힘들었다. 동부전선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제1 SS 기갑사단 "LSSAH" 이라든가 제2 SS 기갑사단 "DR" 등의 간부인력을 대거 끌어오고 진급을 시키고, 심지어 육군에서 보충을 받았어도 간부층의 부족 사태는 여전하여 이들 사단들은 1944년 여름까지도 사병층은 편제를 초과하여 사단 총원이 2만명 가까이 되는데 반해 간부층은 편제 이하라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또한 제21 기갑사단 경우는 북아프리카에서 이름을 날리던 모습과는 달리 대단히 열악한 장비로 재편성되었다. 전차부대 경우 기간부대가 2선부대인 제100 기갑연대였기에 과거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소뮤어 전차, 호치키스 전차 등의 노획품으로 최초 편성이 이뤄졌으며 1944년 6월까지도 제22 기갑연대 2대대는 상당수의 이러한 전차들을 장비했다. 또한 일부 중대는 75mm 단포신형 4호전차도 장비하고 있었다.

반면 기갑교도사단은 이러한 Waffen-SS 기갑사단의 대규모 충원에 대응하여 육군측이 각지의 기갑부대 훈련학교에서 교도부대를 긁어모아 편성한 사단으로서 당시로서는 육군 최강급의 전투력으로 평가되었다. 예하 보병연대(제901, 902 기갑척탄병연대) 소속 4개 대대가 모두 보병장갑차량(SPW)으로 반궤도화된 사단은 전 독일군에서 전무후무한 존재였던 것이다. 거의 700대에 이르는 보병장갑차량, 240대에 이르는 전차 및 돌격포, 15000여 명의 전투력은 실로 막강했다.

Bayerlein

기갑교도사단장 F. 바이에를라인

Feuchtinger

제21 기갑사단장 E. 포이흐팅거

Ostendorff

제17 SS 기갑척탄병사단장 W. 오스텐도르프

하지만 결국 이러한 준비상황에 경종을 울리게 된 것이, 1944년 3-4월 동부전선의 카메네츠-포돌스키 지구의 전투였다. 1944년 3월 23일, 쥬코프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코녜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협공으로 남부지구에서 독일 제1 기갑군을 통타하여 이 1개 야전군(Armee) 전체를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독일군으로서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포위, 전멸된 참화의 재현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위기상황이었기에 제9 및 제10 SS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제2 SS 기갑군단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게 된다.

결국 독일 제1 기갑군은 한스 후베(H. V. Hube) 기갑대장의 지휘 하에 착실하게 서쪽으로 포위망을 돌파해나가고, 제2 SS 기갑군단 등의 구출부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2주만인 4월 6일에 제1 기갑군 소속 제6 기갑사단과 제4 기갑군 소속 제10 SS 기갑사단이 조우,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동부전선의 불안정성 때문에 이 2개의 신편 Waffen-SS 기갑사단은 연합군 침공이 개시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북부 우크라이나 집단군 소속으로 계속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또 다시 동부전선에서 극심하게 소모된 기갑사단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일단 Waffen-SS에서는 1944년 4월 말, 최고참사단들인 제1 SS 기갑사단 "LSSAH"와 제2 SS 기갑사단 "Das Reich (DR)"이 동부전선에서 빼돌려져서 프랑스에서 전면 재편성을 받도록 결정되었다. 이 두 사단은 모두 제1 기갑군 소속으로 포위망에 갇혔다 빠져나온 상황이라 인원, 장비 모두에서 소모가 매우 심각했다.

또한 육군 소속의 기갑사단들도 1944년 1월, 제2 기갑사단이 프랑스로 전환된 것을 필두로 1944년 봄에 제9 기갑사단 및 제11 기갑사단이 동부전선 남부지구에서의 격전 끝에 재정비를 위해 서부전선으로 돌려졌으며, "Windhund"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제16 기갑척탄병사단이 역시 동부전선에서 프랑스로 돌려져서 제116 기갑사단으로 승격,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 결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1944년 6월 1일에 이른 시점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부지구에 배치된 독일군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은 다음의 총 10개 사단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서부지구 독일군 주요 기갑부대 상황
사단번호 기갑척탄병 (기보) 대대 전차대대 판터 4호전차 돌격포 기타
2.Pz.Div. 4 2 79 96(lg) 10 10 (FlakPz38)
9.Pz.Div. 4 2 40 78(lg) 5
11.Pz.Div. 4 1 - 89(lg) 8 26 (Pz.III 75)
21.Pz.Div. 4 2 - 6(kz), 112(lg) - 38 (Somua), 12 (FlakPz38)
116.Pz.Div. 4 1 - 86(lg) 6 13 (Pz.III lg)
Pz.Lehr.Div. 4 2 89 99(lg) 10 8 (Pz.VI), 31 (JagdPz.IV), 12 (FlakPz38)
1.SS-Pz.Div. 6 2 38 50(lg) 45 -
2.SS-Pz.Div. 6 2 39 54(lg) 41 -
12.SS-Pz.Div. 6 2 66 98(lg) - 12 (FlakPz38)
17.SS-Pz.Gren.Div. 6 1 - - 42 12 (Marder)

위의 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이들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들도 그 전력이 결코 정상인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규정대로 완전편제를 갖추고 전투준비가 완비된 사단은 비교적 오랜 시간 준비가 가능했던 제2 기갑사단, 기갑교도사단, 제12 SS 기갑사단의 3개 기갑사단 정도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단들은 예하부대의 장비가 끝나지 않아서 제1 SS 기갑사단 및 제2 SS 기갑사단 등과 같이 4호전차의 부족분을 돌격포로 메꾼다든가, 제11 기갑사단이나 제116 기갑사단 등과 같이 예하 판터대대가 배치중인 부대도 있었다.

그나마 어렵게 확보한 기갑부대들도 모두 이렇게 100%의 전력을 구가하지는 못하던 지경이었으니 독일측의 입장에서는 이 소수의 기갑부대들이나마 얼마나 제대로 써먹느냐가 서부전선 방위의 핵심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미 시작부터 독일군 최고 수뇌부 내에서도 첨예한 쟁점사안이었다.

서부전선 독일군 통수체계의 혼란상

이러한 독일군 최고 수뇌부 내의 갈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 등 서부해안 지구의 독일군 통수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니 간단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를 먼저 간략히 살펴보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독일군 통수체계

1944년 여름 서부 프랑스지구 독일군 통수체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꼭대기에는 당연히 독일국방군(Wehrmacht) 총사령관 히틀러가 버티고 있다. 그리고 서유럽지구 지상군의 지휘체계는 국방군 총사령부(OKW) 예하에 룬트슈테트 원수의 서부전구 총사령부(OB.West)로 내려와서, 이 사령부가 예하의 큰 2개의 주요 조직인 롬멜 원수의 B 집단군(Heeresgruppe B)과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의 G 군집단(Armeegruppe G)의 지휘를 총괄하게 된다. B 집단군은 라인강 하구로부터 로와르(Loire)강 하구까지의 서북부 해안을 담당하며, 예하에는 제7군과 제15군이 있다. 또한, G 군집단은 로와르강 하구 이남 비스케만 일대의 서부 해안과 프랑스 남부 해안을 담당하며, 예하에는 제1군과 제19군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서부 지상군의 총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는 기갑부대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가용한 10개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 전부를 관할할 수 있는 서부 기갑집단(Panzergruppe West)을 만들어두고 있었으며, 이 지휘관에는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을 임명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휘체계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 주요한 원인은 바로 국방군 총사령부, OKW의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었다. OKW는 원래는 3군 병립제의 독일군 체계 하에서 통합군 사령부로서의 기능을 염두해두고 조직한 것이지만, 기존의 3군 사령부의 독자적인 위상이 너무 강해서 1944년 무렵에는 그 영향력이 서부 및 남부전선 등의 지상군 사령부 정도로 격하되었다. 그러다보니 OKW 국방군지휘참모부(Wehrmachtführungsstab, WFSt) 부장인 요들 상급대장은 3군의 작전 전반을 조율하기도 힘들었고 어떤 뚜렷한 주관을 가진 일관된 계획을 실천할 수가 없었다. OKW 총장 카이텔 원수가 그러했듯이 거의 히틀러의 명령을 중간에서 전달, 감독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정도였다. 이것은 그대로 OKW 예하의 OB.West 에도 해당되는 것이어서, 서부전선 야전부대를 총괄해야할 룬트슈테트 원수도 지휘 재량권이 크게 제약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에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한 것이 롬멜 원수의 입지였다. 롬멜 원수는 이론적으로야 야전 지휘조직인 B 집단군 사령관으로서 해당 전구(戰區)를 책임지고 있는 룬트슈테트 원수의 지휘에 고분고분 따라야 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의 활약을 통해 얻은 대중적 인기와 히틀러의 신임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주관을 매우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서부전구 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나 OKW 국방군지휘참모부장 요들 상급대장과는 일체의 상의도 없이 히틀러에게 직소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는 했으며, OB.West와 B 집단군의 관계가 많은 부분에서 대등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게 여러 주요 상위조직 사이의 불분명한 관계, 그리고 각 조직 지휘관들의 강한 개성들은 기갑부대 배치에 있어서 논의 당사자들은 서로 자신의 경험과 이론에 바탕한 주장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 주요 조직의 지휘관들이 기갑부대의 운용을 두고서 어떤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대립해왔는지, 자세한 내막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의 기갑부대 배치안

주요 지휘관들의 기갑부대 배치안

1943~44년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의 기갑부대 배치안 비교

OKW 국방군지휘참모부장 요들 상급대장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론적으로는 서부지구 지상군 통수는 OKW를 통해서 이뤄지게 되어있으며, OKW의 작전 통제라는 실질적인 업무는 총장 카이텔 원수가 아닌 알프레드 요들(Alfred Jodl) 상급대장이 맡고 있었다. 이런 서부방위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요들 상급대장은 일찍부터 나름대로의 기갑부대 배치안을 생각해오던 것이 있었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조합해 보았을때 영미 연합군은 브레스트(Brest)에서 라인강 하구에 이르는 프랑스 및 벨기에 북서부 해안에 상륙할 확률이 가장 높았다. 이들 해안 중 가장 유력한 칼레 일대의 영불해협 최단구간 해안을 제15군이, 노르망디 및 브르타뉴 일대의 해안을 제7 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요들로서는 이들 중에 어느 곳도 그대로 방치해두기에는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요들은 약화된 서부 독일군의 실정을 생각했을 때 연합군이 일단 상륙에 성공하면 이를 격퇴시키기가 어렵다는 점을 중시하고, 기갑부대는 연합군의 상륙 즉시 신속한 반격이 가능한 위치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한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 그는 제7군, 제15군 예하에 각각 강력한 2개의 기갑예비집단을 편성하고 해안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 배치하자는 안을 내세우게 된다. 요들로서도 기갑부대의 집중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상륙에 늑장대응을 한다는 것도 매우 곤란한 것이므로 이러한 아이디어를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요들의 이러한 방어개념은 현실적인 장벽에 부닥친다. 첫째로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독일군 기갑예비의 준비가 극히 지지부진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요들이 이런 개념을 피력한 1943년 무렵부터는 동부전선의 혼전 때문에 어렵사리 빼돌린 기갑부대들도 다시 동부전선으로 계속 호출되어나가고 소모되던 차였다. 그런 마당에 기갑예비집단을 2개씩이나 충분히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대 의견이 곳곳에서 강력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두번째로는 1943년 말부터 롬멜 원수가 서부해안 방위에 뛰어들고 여타 다른 고위사령부의 장교들과 의견차이를 빚는 와중에서 요들 상급대장의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1944년부터는 롬멜 원수측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을 필두로 하는 서부전구 총사령부 측의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되어 어중간한 형태인 요들의 아이디어가 끼어들기 마땅치 않았으며 결국 유야무야 사장되는 지경에 이른다.

Jodl

OKW 국방군지휘참모부장 A. 요들

Rommel

B 집단군 사령관 E. 롬멜

Geyr von Schweppenburg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L. Frhr.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B 집단군 사령관 롬멜 원수

명망을 떨친 사막의 여우 롬멜(Erwin Rommel) 원수는 튀니지에서 독일 북아프리카군이 항복한 후에 B 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일시적으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었다. 그러나 이곳은 역시 히틀러의 신임이 두터우며, 롬멜과는 북아프리카 시절부터 앙숙이었던 케셀링 원수가 남부전구 총사령관(OB.Süd)으로 전권을 행사하면서 롬멜의 입지가 마땅치 않았다. 결국 히틀러는 롬멜을 배려하여 서부 해안방위 임무의 중책을 맡겼다.

롬멜 원수는 일단 다른 일반적인 독일 고급장교들과 비교해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로 그는 이른바 정통파 참모본부 출신의 장교가 아니라 순전히 야전에서 성장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어 원수에 올라섰다는 배경이 있었고, 둘째로는 다년간의 군 경력에서 영미 연합군과의 실제적인 교전 경험이 매우 풍부하다는 점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주로 아무래도 그와 많은 전투를 치뤄본 영미측에 의해 롬멜 원수의 이야기가 널리 서방에 소개되고 알려지면서 국내에도 롬멜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지만, 실제 당시의 독일군 장교단이나 오늘날의 전쟁사가들에게 롬멜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지휘 스타일은 예하 참모진들과 조화로운 지휘를 선호하는 독일군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파격적인 것이었기에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참모본부의 정통적인 교육의 경험이 없었기에 참모본부 출신들로부터 자질 문제에 대한 의심쩍은 눈초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보여준 영미 연합군과의 전투와 전과들, 대중적인 인기, 히틀러의 신임 등 기반이 있었기에 자신의 의견을 밀고 갈 주관 또한 매우 뚜렷했다. 주변에서의 시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강한 주관이 기실 그를 원수 계급까지 오르게 했던 원동력이었고, 이러한 모습은 기갑부대의 배치 문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당시 롬멜의 주요한 생각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전투에서 절실히 경험했듯이 압도적인 영미 연합군의 제공권 하에서의 전투는 독일군으로서 감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강력한 제공권과 압도적인 물량을 가지고 있는 영미 연합군은 독일군 장병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며, 그들에게 유리한 어떤 환경의 조성도 최대한 사전에 방지를 해야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영미 연합군이 일단 북프랑스에 발을 들여놓고 적절한 교두보를 확보한다면 더 이상 이들을 격퇴할 기회는 사라질테니, 연합군이 상륙을 시도하는 즉시 지체없이 모든 가용한 전력이 반격에 나서서 발붙일 여지조차 주지 말아야했다.

그 결과로 그는 가능한 모든 기갑부대는 북프랑스의 주요 해안선을 따라 해안 직후방에 적절한 간격으로 쭉 늘어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안에 따르면 전 기갑부대는 해안선의 후방 약 15~30km 지점 요지에 배치되며, 일단 각 부대 관할지구 전면에 연합군이 상륙하면 대략 3~6시간 내에 반격에 돌입하여 무조건 적을 해안 밖으로 밀어내야 했다. 이것은 상륙 직후의 신속한 해안에서의 반격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요들의 주장과 상통하지만, 요들은 집중된 형태의 기갑예비집단을 선호했는데 반해 롬멜은 그것도 신속한 반격에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더욱 가까운 배치를 바랬던 것이다.

이 주장은 제기되자마자 즉시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가장 독일군 고위장교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기갑부대의 집중원칙을 과감하게 포기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기갑부대를 해안을 방어하는 보병사단들과 같은 위치에 놓아서 특유의 기동력을 살릴 여지가 없이 1선에서의 전투로 급속히 소모시킬 우려를 자아냈다. 이러한 배치 하에서는 상륙이 어떤 한 지점에 이뤄질 경우에 기껏해야 1~3개 기갑사단밖에 투입이 불가능한데 이들이 유효한 방어를 한다는 것도 힘들 뿐더러, 상륙 이전의 가공할 예비폭격과 함포사격에 투입 이전에 전투력이 녹아날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이 아울러 이어졌다.

그러나 롬멜은 자기 방식 이외의 대안의 부재를 역설했다. 그는 기갑부대가 해안 직후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면 필히 전방으로의 이동, 전개, 집결과정이 필요한데 압도적인 연합군 제공권 하에서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밟아가며 반격에 돌입하기에는 너무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예비폭격과 함포사격보다도 더 손실이 더 클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롬멜도 자신의 방식이 많은 희생이 따르리라는 점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승리의 기회는 오직 자신의 방식에만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그것을 밀고 나갔다. 그러한 주장이 정상적인 지휘 라인을 따라서 관철되기 힘들자 히틀러에게 직소하면서까지 말이다.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Leo Dietrich Franz Reichsfreiherr Geyr von Schweppenburg) 기갑대장은 독일 기갑부대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기갑부대에 관한 전문가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구데리안이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존재라면, 이 사람은 삼촌 정도로 불리워도 그다지 손색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지적인 면모도 뛰어나 재외 공관 무관으로도 근무했으며 외국어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2차 세계대전 개전시 이미 장성급으로 제3 기갑사단 사령관이던 이래 프랑스전역과 동부전선에서 1943년까지 쭉 여러 기갑군단의 군단장 직을 맡아오며 많은 야전에서의 지휘 경험도 갖췄다. 캅카즈 전선에서 풍토병으로 쓰러지고 건강을 해치지 않았다면 능히 상급대장과 야전군급 지휘관으로 발탁되었으리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만큼 기갑병과 내에서의 좋은 경력과 평판은 독일 기갑부대에 대한 뚜렷한 믿음과 지지로 이어졌다. OKW와 서부전구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런 그에게 서부전선 기갑부대를 모두 총괄하는 임무를 맡기기 위해 1944년 1월부로 서부기갑집단(Panzergruppe West)을 조직하고 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처음부터 개성이 강한 롬멜 원수 등과의 애매한 통수체계의 명확한 정리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사실 국내에서는 많은 분들이 롬멜과 비교하여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단순한 실패한 판단착오로 오해하고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는 분위기도 강하지만 기실 여러가지 배경과 고려사항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러한 일방적인 판단을 내릴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기병병과에서 넘어온 정통파 기갑장교로서 독일 기갑부대의 교리에 충실하고자 하는 쪽이었다. 그에게는 기갑부대의 집중이라는 원칙이 대단히 중요했으며, 롬멜의 집중원칙을 희생해서라도 신속한 반격을 도모하자는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족한 기갑부대를 모두 파리 부근의 센(Seine)강 양안에 집결해놓았다가 연합군의 상륙방향이 확실해지면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내륙에서 결전을 벌이자는 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또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이 연합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독일군이 내륙에서 승기를 잡을 수가 있다고 섣불리 판단한 것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이지만, 실제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을 비롯한 여러 독일군 고위장교들은 영미 연합군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제는 그 반대, 영미 연합군은 웬만큼 열악한 환경요인도 뒤집어버릴 수 있는 막대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위장교들이 1차대전의 뼈저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영미 연합군을 무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장 가이어 폰 슈베펜베르크는 영국 주재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영국을 가까이서 똑똑히 목도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당시 육군 내에서 서부의 적에 관한 정보기관인 서부해외군국(Fremde Heere West, FHW)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가 취임하던 1944년 초의 시점에서 영국에서 침공 대기중인 연합군의 전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었다:

  • 41~42개 보병사단과 5개 독립보병여단
  • 11~12개 기갑사단과 12개 독립기갑여단
  • 4개 공수사단과 6개 강하여단
  • (총 56~58개 사단 및 17개 독립여단)

그리고 1944년 봄에는 연합군 전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50~51개 보병사단과 5개 독립보병여단
  • 14~15개 기갑사단과 13개 독립기갑여단
  • 7개 공수사단과 8개 강하여단
  • (총 71~73개 사단 및 18개 독립여단)

그러나 실제로 1944년 6월, 상륙 직전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해 영국에 확보한 전력은 불과 23개 보병사단, 10개 기갑사단, 4개 공수사단 등 총 37개 사단 수준이었다. 이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전력에 대해 실제보다 1.5~2배에 이르는 정도로 과대평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를 비롯한 독일군 고위장교들은 FHW가 제출한 연합군의 전력 예상을 거의 곧이곧대로 믿고 그에 맞춰 방어 계획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가정들 하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영미 연합군측이 선택할 수 있는 작전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영미 연합군이 만약 실제와 같이 37개 사단 정도라면 상륙 공격축을 1개로 한정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예상대로 70개 사단 이상의 전력과 막대한 물량 지원이 있다면 꼭 그럴 필요는 없다. 2개 이상의 상륙지역을 선정하여 주공을 은폐하기 위한 조공 성격의 상륙작전을 병행할 수도 있게 된다. 대략 1개 상륙축에 1파당 5~7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2개 지점에서 조공을 편다고 해도 여전히 주공축에 50개 사단에 가까운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에 이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어차피 독일군이 방어하는 입장에서 사전에 연합군의 상륙지점을 예측하고 그쪽 방향에 전력을 집중하여 대비하는 방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연합군의 정보 능력과 여러 공자로서의 이점을 감안했을때 어느 한 정면에 도박을 하는 방식은 쉽사리 연합군이 간파해낼 것이라 믿었다.

그러면서도 롬멜과 같이 가능한 모든 주요 상륙 예상지점에 기갑사단을 늘어놓는 것을 반대하는데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바로 많은 수의 연합군 공수사단의 존재였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연합군의 공수사단이 상당한 정예부대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상륙작전이 벌어진다면 이들은 주공 상륙지점의 후방 20~50㎞ 지점에 일시에 강하하리라 예측했다. 롬멜의 주장대로라면 주요 기갑사단들은 해안 후방 15~30㎞ 지점에 배치되게 되는데, 그럴 경우에 각 상륙 정면마다 가용할 2개 정도의 기갑사단과 5개 정도의 보병사단은 정면에서는 5~7개의 상륙 보병사단과, 후방에서는 정예 5~7개 공수사단 사이에 끼어 옴싹달싹 못하는 처지가 될 위험이 농후했다.

제아무리 기갑사단이라고 해도 다수의 정예 공수사단에게 보급이 끊기고 후방이 교란당하는 위치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다른 해안 가까이에 배치된 기갑사단이 전환되어 증원되기에는 너무나 돌아가야 할 거리도 많고 통일된 반격은 더더욱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해당 주공방향에 대기한 기갑부대는 포위, 괴멸당하고 증원되는 기갑부대는 축차투입되며 소모되는 상황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이 내릴 수 있던 최종 결론은 어떻게 하든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독일군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연합군의 상륙 초기에 무의미한 소모전에 휘말리지 말고 대규모 연합군 공정부대가 강하하여 주공방향이 명확히 결정이 되면 여기에 모든 독일군의 기갑예비를 집중시켜 먼저 최단시간 내에 위협적인 연합군 공정부대를 격파하고, 그 탄력으로 상륙한 연합군에 공격을 퍼부어 다시 밀어내든가 가능한 최대의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만큼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파리 양안의 넓은 숲 지대에 가용한 전 기갑부대를 배치해 놓는다면 전 북프랑스의 상륙 예상지점과 거의 일정한 거리에 있으므로 최소한 상륙 이후 2~3일 이내에 통일된 대규모 반격을 도모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제기된 안이다.

롬멜의 안과 비교한다면, 롬멜은 주요 간선도로 및 철도가 연합군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될 상황에서 생각만큼 대규모 기갑부대의 이동이 쉽지 않을거라 판단했던데 반하여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야간을 이용해 기동하고 대낮에는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은폐를 한다면 별 피해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반면 롬멜이 해안 직후방에서도 분산배치와 은폐를 통해 예비포격 및 폭격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그것이 더 힘들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롬멜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히틀러 등에게 직소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정통적인 방법에 더 가까운 자신의 주장을 관련 고위장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였다. 그 결과 직접적인 지휘계통 상의 서부전구 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가 이쪽 안을 지지하였으며, 실질적인 군령권은 없지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기갑총감 구데리안 상급대장도 자신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양측의 첨예한 의견대립이 바로 1944년 봄 독일군 방어전략 수립의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이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최종배치와 그 평가

이제 주요한 양측, B 집단군 사령관 롬멜 원수와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의 논리를 살펴보았으니 그 후 사태 경과를 짧게 살펴보자. 서부 독일군의 애매한 통수체계 때문에 이러한 논쟁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은 결국 최고 군 통수권자인 히틀러의 손에까지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로서도 이 문제는 매우 골치아픈 것이 롬멜이나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나 각자의 오랜 경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되도록 양측 사령관과 참모부 사이에서 적당한 합의점을 찾기를 바래고 중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가 각자의 주장을 너무 강하게 폈기에 이 문제는 결국 감정싸움 차원으로 번져서 양자간의 원만한 합의 자체가 매우 곤란한 지경으로 치달았다. 고집 센 롬멜 원수의 주장과 여러 고급장교들의 세를 업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의 주장의 충돌은 독일군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양자의 합의가 힘든 마당이었으니 그때부터는 서로가 자신의 정당성만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영역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경쟁만이 남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서부전구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다.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미 독일군 현역 지휘관들 중에서 최고 연장자였으며 기갑부대의 운용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는 실상 구시대의 인물이었다. (다름아닌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도 전후에 룬트슈테트 원수를 두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지만 기갑부대의 교리에 대해서는 사실상 백지였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지휘계통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기갑부대의 운용에 대해 명확한 주관을 가지고 롬멜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주장을 조율할 수가 없었으며, 논쟁의 한켠으로 밀려나서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고 만다.

결국 히틀러와 OKW는 서부 독일 기갑부대의 배치에 관한 여러 애매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런 조치들의 대강을 살펴보면,

  1. 롬멜 원수의 의견을 존중하여 B 집단군 직속으로 롬멜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제2, 21, 116 기갑사단의 3개 사단을 배정한다.
  2.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의 의견을 존중하여 OKW는 서부기갑집단 예하에 제1 SS, 12 SS 기갑사단, 기갑교도사단, 제17 SS 기갑척탄병사단의 4개 사단을 배정한다. 그러나 이 부대의 사용은 OKW 국방군지휘참모부장 요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3. 프랑스 남부의 위협에 대처하고 불완전한 사단들의 재장비를 위해 제2 SS, 9, 11 기갑사단의 3개 사단을 G 군집단에 배정한다.

이로 인한 1944년 6월 상륙 당시의 독일 기갑부대의 배치는 다음 그림과 같이 이뤄진다.

독일 기갑부대 배치

1944년 6월 5일자 프랑스지구 독일군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 배치상황

이 안은 겉보기에는 무리가 없어보이지만 심각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장 큰 약점은, 크게 보았을 때 롬멜의 의견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의견을 절충한 형태 같았지만, 실제는 그 어느쪽 안의 조건도 만족시키기 힘든 어정쩡한 배치라는 것이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서부기갑집단 예하에서 다수의 전략예비를 파리 일원에 모아놓고 싶었지만 정작 휘하에 들어온 기갑사단들의 배치에 있어 그만한 재량권을 누리지 못했다. 당시 장비 지급과 병력 충원이 부족하여 허덕대던 제1 SS 기갑사단과 제17 SS 기갑척탄병사단은 파리 부근에 배치한다는 원래 계획과는 전혀 맞지 않게 각기 벨기에와 로와르강 이남에서 훈련과 재장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주요 전력으로 가용했던 기갑교도사단과 제12 SS 기갑사단은 OKW 예비라는 이유로 히틀러와 요들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서부전구총사령관과 서부기갑집단이 군령권을 행사할 수도 없어서 신속한 대응전력으로 써먹는데 한계가 있었다.

롬멜의 경우에도 확보한 것은 단 3개 사단으로 자신이 원하던대로 해안지방에 죽 늘어놓고 신속한 반격을 도모하기에는 그 수가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제116 기갑사단도 재장비가 불완전하여 비상시가 되더라도 즉각 투입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고작 가능한 배치가 칼바도 지방 해안 방어를 위해 캉(Caen) 일원에 제21 기갑사단이, 칼레 일원 해안 방어를 위해 제2 기갑사단을 배치하는 제한된 조치밖에 취할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대로 막상 상륙이 개시되었을때 독일군 방어체계의 큰 혼란으로 이어졌다. 중서부 노르망디 지방에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당시에 이 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것은 단 제21 기갑사단 뿐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B 집단군 사령관 롬멜 원수가 당시 부인의 생일차 독일로 떠나 자리를 비우고, B 집단군 참모장 슈파이델 중장이 판단을 계속 유보하며 롬멜의 지침을 어기는 바람에 즉각적인 반격에 실패한 채 캉 일대의 수비에만 허덕였다. 또한 가용한 OKW 기갑예비인 제12 SS 기갑사단과 기갑교도사단은 상륙 직후 요들이 군령권을 서부전구 총사령부로 제때 이관하지 않고 룬트슈테트도 주공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사이에 최초 상륙 후 12시간 이상 전혀 출동을 못하고 결정적인 시간을 놓쳐버렸다. 결국 이들 모두 부적합한 배치 상황에서 통일된 반격을 하지도 못하고 축차적으로 투입되며 소모되는 악순환에 빠져버렸다.

자, 그렇다면 과연 독일이 선택해야했을 최적의 방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롬멜과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방법 중 어떤 쪽을 택했어야하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대안을 골랐어야만 하는지 간략한 평가를 해보도록 하자.

롬멜의 방안은 대전 후 서방의 일반적인 시각으로 좀 더 당시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는가 하는 평가를 듣고 있다. 롬멜이 예측한대로 상륙지점 후방에 가장 가깝게 붙어있었던 제21 기갑사단은 연합군의 예비폭격 및 포격에 생각보다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캉에 제21 기갑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상륙 당일에 대단히 중요한 요지인 이곳이 영국군 손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이후 2개월 이상 길게 이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이 고전하게 만드는 발판을 마련한게 사실이다. 또 독일군의 기갑예비의 이동에 있어서도 연합군의 강력한 제공권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예상 이상의 곤란함을 낳았다. 연합군은 주요 도로 교차점과 철도 조차장에 프랑스 현지 레지스탕스와 연계하여 야밤중에도 맹폭격을 가해서 하루에 단 8~10km 정도밖에 이동하지 못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아마도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가 통일된 단일 기갑집단으로 반격에 돌입할 경우 1~3일 내에 반격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보다는 집결에 더 시간이 걸렸으리라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멜의 주장이 옳다고 쉽게 단정하기도 매우 어렵다. 롬멜의 방어안을 냉철히 살펴보면 롬멜의 방어안 또한 현실적인 몇가지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롬멜에게 모든 기갑예비를 몰아준다고 하더라도 롬멜이 확보할 수 있던 전력은 기껏 7~8개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나마 당시의 재정비 상황을 봤을 때 유효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던 사단은 5개 미만, 거기에 노르망디에 배치 가능한 전투력은 결국 2~3개 기갑사단에 불과했을 노릇이었다. 당시 연합군의 화력지원 상황에서 제21 기갑사단 단독으로 단 2,3일을 제대로 반격하기 힘들었고, 이후 당시 가장 잘 준비되었던 기갑교도사단 및 제12 SS 기갑사단까지 투입되어 반격에 들어갔어도 전력 부족의 문제가 드러났다. 노르망디 지방에 기껏 가용했을 2~3개 기갑사단으로 연합군의 상륙을 대처하기에는 다양한 공지전 역량을 가진 연합군을 막아내기는 여전히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롬멜에게 20개 가까운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이 주어졌다면 상당히 유효한 방안이 되었겠지만 그것은 독일군 실정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주장도 결코 순탄하게 이뤄질 방법은 아니었고 집결에 3~5일 이상 걸릴 위험이 매우 컸지만, 7개 사단 정도가 한꺼번에 통일된 반격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경우에 연합군에게는 가할 수 있을 타격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설사 연합군을 모조리 바다로 쓸어넣어 버리기에 여전히 역부족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캉 일원의 영연방군에게 단기간에 훨씬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롬멜이 후방에서 전선으로 부대를 전개하는 도중에 연합군 공군력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 노르망디 상륙 이후 전개된 전투에서 연합군 공군력은 독일군의 전투력을 이동 중에 꺾어버리는데는 기대만큼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 자세한 공군력의 효과에 대한 이야기는 Zetterling 씨의 글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공군력의 효과"를 참조하기 바란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와 그의 방안을 지지하는 독일군 고급장교들의 생각은, 연합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근본적인 가정 설정의 실패를 제쳐둔다면 오히려 롬멜의 방법보다도 합리적인 측면이 많았다고 평가된다.

실제 역사에서 독일이 채택한 애매한 양자 사이의 절충안은 이렇게 양자의 장점을 살리기보다는 단점이 부각되어 이어지는 80여 일 동안의 지독한 소모전으로 엄청난 수의 독일군을 밀어넣는 비극을 낳았다. 그 어느 쪽이건 부족한 자원이나마 확실하게 밀어넣어 승부를 벌였다면 좀 더 좋은 결과가 얻어졌으리라 평가되지만 불행하게도 1944년 봄~여름의 독일군에게는 합리적이고 일관된 결정을 방해하는 큰 구조적인 문제와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대전 내내 고질적이던 독일군 수뇌부 내의 갈등과 동부전선에서의 막대한 피해라는 짐은 유효한 서부전선 방위전략에 너무도 큰 짐이었다.

지금까지 1944년 서부의 기갑부대 배치를 둘러싸고 독일군 내부에서 많은 논의와 노력들을 살펴봤다. 아마 어떠한 방법을 채택했든지 근본적인 서부에서의 열세를 뒤집고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부에 확보된 미약한 공군 및 보병 전력 수준으로는 한줌밖에 안되고 그나마 반 수 가까이 재정비도 끝나지 않은 10개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의 힘을 빌어 연합군을 바다로 되쓸어넣는다는 것은 지독한 운이 따라주지 않는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일에게 이미 1944년의 상황은 크나큰 관성에 의해 떠밀려가는 상황이었으며, 상황 반전은 롬멜이나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냉혹하지만 전후 반세기도 넘은 이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모두 단순한 파국의 짧은 지연을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는 것이 아닐까?

2007/04/16 22:25 2007/04/1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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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갑냐옹이 2007/04/17 1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글입니다. 페리스코프 포럼이 폐쇄되어 있을 당시에는 글구 캐시를 즐겨찾기에 넣어놓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즐겨찾기를 지워도 될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매우 사소한 부분이지만 히틀러유겐트 사단 판터 수치에 대해서 조심스레 이설을 제기합니다. 6월 10일 분명 사단은 판터 66량을 수령한 상태였지만, 실제 전투에 투입이 가능했던 건 48량뿐으로 수리 중이었던 2량을 제외하면, 18량은 언제 실전 투입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배치일이 6월 10일이지만 이건 부대 배치일이지 실제 전투 투입일은 아니니까요. 전선으로 이동 중인 상태였다고 봐야겠죠.

    제가 건너 뛰면서 읽어서인지 몰라도 후베르트 마이어 씨가 쓴 히틀러유겐트 사단사에도 언제 18량이 추가로 배치되었는지에 기술이 없습니다. 1개 중대 17량이 7월 5일 전멸한 3중대를 재건하기 위해 새로 배치되었다는 기술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게 6월 10일에 배치된 판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후베르트 마이어 SS소령이 캉 북부 전선에서 철수한 후(7월 16~17일) 사단이 보유한 판터가 수리 및 전투 가능한 전차 모두 합쳐 72량이었다고 한 점입니다. 이중 완파가 21량이었죠.

    다시 말해, 완파까지 셈한 수치니 사단은 7월 17일까지 판터 72량이 전부였습니다. 50(가용 48 + 단기 수리 2) + X 은 간단히 22량이라는 수치가 나옵니다. 7월 5일 17량 전선 배치니 50 + 17 + X가 72입니다. 따라서 6월에 배치된 신규 배치된 전차는 5량뿐입니다.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만약 후베르트 마이어가 수량을 잘못 계산했다면 Zetterling 씨 주장(판터 79량)대로 사단은 6월 중 5 + 7 즉 12량 이상을 수령한 게 맞습니다. 13량 이상이라고 한 것은 수리 중인 2량을 합쳐 총 14량이 배치되었다고 봤기 때문이겠죠.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6월 10일 이전 사단 판터 가용수는 어쨌거나 48량입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수렴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수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히틀러유겐트 사단이 판터 A형도 아닌 G형으로 도배된 무적 기갑사단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데 신물이 났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7/04/17 2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판터 수량은 6월 1일 기준으로 작전가능 48대 + 단기수리 2대로 총 50대였고, 이 문서의 사본이 후베르트 마이어의 사단사에 나와 있습니다. 독일군 집계에서 단기수리 차량은 사단 내에서 수리가 가능한 차량이므로 배치수량에 집어 넣습니다. 이외에도 이미 불출되어 사단으로 배송 중인 판터가 16대 있었습니다. 독일군 기록에는 5월 중에 40대의 판터가 히틀러유겐트 사단으로 보내지는데, 아마 5월 22일 배송분(8대×2회), 5월 24일 배송분(8대×1회) 중 2회분 16대가 6월 1일까지 도착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차들을 언제 수령했느냐가 문제인데, 후베르트 마이어의 사단사에도 나와 있지만 6월 24일 이 사단은 작전가능 판터가 44대라고 보고했고, 이는 6월 6일과 비교하여 판터 19대 손실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6월 6일에는 44+19=63대에 단기수리를 요하는 차량 x대가 있었겠지요. 이를 감안한다면 x=3, 즉 6월 6일까지는 5월 배송분을 모두 수령해서 총 66대의 판터를 보유했고 이 가운데 3대가 단기수리를 요하는 상태였다고 보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6월 1일자가 아니라 D-day 직전의 통계라고 수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장갑냐옹이 2007/04/18 16: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씀을 들어보니 대충 수령일이 감이 잡힙니다. 대충 D데이 전후에는 도착을 해서 판터 대대 본대와 합류 캉 북부 전선으로 이동한 거 같습니다. 판터 대대 본대 같은 경우는 아시다시피 꽤나 늦게 전선에 도착했으니까요. 한 번 더 자세히 히틀러유겐트 사단사를 살펴보고 관련 이야기가 없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없을 거 같습니다. 후베르트 마이어 씨는 마더가 언제 4호 구축전차로 인가가 전환 됐는지도 모르더군요. 유실 된 문서가 너무 많아서 일부 사실은 전혀 검증이 불가능한 게 아쉽습니다.

    그래도 더욱 사실에 근접 할 수 있게 대답을 해 주신 채승병 님의 대답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3. 비밀방문자 2008/01/20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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