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0년에 쿠르스크 전투와 노르망디 전투에 대해 매우 훌륭한 신간 두 권을 펴낸 스웨덴의 Niklas Zetterling 씨가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연합군 공군력의 효과에 대해 쓴 글이다. Zetterling 씨는 이미 Anders Frankson 씨와 함께 영국의 Frank Cass 출판사를 통해 「Kursk 1943: A Statistical Ananysis」라는 책을 내면서 쿠르스크 전투의 세세한 자료들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던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인물이다. (이 책은 분명히 2000년도에 나온 2차대전사 저작 Best 10 에 꼽을만한 책이고, 이제 시중에서 입수 가능한 책 가운데 쿠르스크 전투를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1개 장을 번역해서 소개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Zetterling 씨는 이후로도 곧 캐나다의 J.J. Fedorowicz 출판사를 통해 또 하나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Normandy 1944」를 내놓으면서 성가를 드높였다. 이 책은 독일측의 보다 많은 1차 사료 분석을 통해, 과거에 나온 에릭 르페브르(E. Lefevre) 씨의 「Panzers in Normandy」 등 기존의 저작들에 비해 한층 수준 높은 통계 자료들이 집약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여기서는 이 책 가운데 관심 있을만한 1개 장(5장)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이 5장의 요점은,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막강한 제공권으로 독일군을 두들겨대고 막대한 피해를 입혀서 독일군이 패배했다고 보던 막연한 관념이 사실은 아주 모호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직접적인 효과는 문헌에 근거한 실상을 들춰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적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독일군의 손실 중에 연합군 항공부대의 공격에 의한 직접 손실은 오히려 매우 적은 수준이고, 대부분은 지상부대의 직접 교전 또는 포병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으며, 많은 전후의 회고들은 과장된 것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연합군 항공부대의 효과는 그러한 실질적인 피해보다는 독일군을 움츠리게 만들어 운신의 폭을 좁히는 간접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 Zetterling 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자세히 어느 부분에서 우리의 통념이 잘못 되었는지 원문을 통해 살펴 보도록 하자:

5장. 연합군 공군력의 효과

Zetterling, Niklas. 2000. Normandy 1944. Winnipeg : J.J. Fedorowicz Publishing, Inc., 2000, pp. 37-51.

보통 연합군의 공군력은 노르망디에서의 연합군 승리의 결정적 요인의 하나, 때로는 유일한 결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불행히도 연합군 공군력의 효과에 대한 기술은 기껏해야 종종 피상적이다. 문제는 공군력은 작전 전개에 여러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사상자를 낸다거나, 교량을 파괴하는 등의 직접적인 효과가 있다. 반면에 부대 이동을 지연시킨다든가, 적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친다든가 하는 간접적인 많은 다른 요인들이 있다. 이것은 이러한 간접적인 효과들이 덜 중요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이것들은 사상자나 물리적 장비, 시설의 파괴보다도 훨씬 중요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들 간접 효과들은 직접 효과보다 평가하기가 훨씬 어렵다.

공군력을 다룸에 있어 또 다른 문제는 그 효과가 서로 다른 종류의 목표에 따라 편차가 크다는 점이다. 또한 날씨나 시계(視界) 요소가 항공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군력의 효과성은 같은 목표를 반복해서 타격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요인들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이들 모두는 연합군 공군력 자체와, 모든 병과들이 참여한 작전에서 그들이 끼친 영향을 기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노르망디에서 독일 지상군 전투부대에 대한 공격들

심심치 않게 전투지역에서의 독일군 전투부대에 대한 (연합군 공군의) 공격이 강조된다. 또 종종 연합군 전폭기들의 독일 전차들에 대한 공격은 연합군 공군력의 대단한 효과의 예로서 제시되고는 한다. 그런데 당시 항공기들의 무장이란게 전차를 공격하는데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매우 이상한 것이다. 효과적인 전차 킬러로서의 연합군 전폭기의 이미지는 아마도 조종사 그들 자신의 주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격 효과 정보에 대해 신뢰성이 떨어지는 소스들을 수긍하기란 힘들다. 그런 주장은 엄청나게 과장된 것들이다.

흔히들 모르탱에서의 독일군 공격이 전차 킬러로서의 전폭기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한 예로 들어지고는 한다. 그러나 사실 이 전투는 아주 과장된 주장의 한 예일 뿐이다. 영국군 제2 전술항공군(2nd Tactical Air Force)은 8월 7~10일에 모르탱 지구에서 140대의 독일군 전차를 격파 또는 손상시켰다고 주장했고, 같은 기간 미군 제9 항공군(9th US Air Force)은 112대를 격파 또는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전과는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 전차들의 총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이 작전에서는 기껏해야 46대의 전차가 상실되었고, 이중 9대만이 항공기 무기로 얻어맞은 것이었다.

따져보면 항공기의 무기에 맞고서 격파된 독일군 전차는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극소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르망디 전역을 통틀어 항공기 무기에 의해 격파된 전차는 100대를 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공포부대로 방호되는 전차부대에 행하는 항공공격은 전차보다도 항공기에 더 위험한 것이었다. 연합군의 항공기 손실도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 제2 전술항공군(노르망디 전역에 참가한 본토 방공부대 포함)은 829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미군 제9 항공군은 897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렇게 전차에 대한 항공공격이 형편없는 결과를 낳은 주요한 이유는 적절한 항공기 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관총과 기관포는 충분한 정밀도를 가지기는 했으나 얕은 피해 이상을 주기에는 위력이 부족했다. 대형 폭탄은 전차를 파괴할 위력은 가지고 있었으나, 직접 명중시키기가 매우 힘들었다. 또 연합군이 자랑하는 로켓탄도 충분한 관통능력을 가지기는 했다. 노획한 독일 판터 전차에 대한 테스트에서 로켓탄은 전차 전면장갑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을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켓탄의 정밀도는 심지어 8발을 일제 사격할 때에도 놀랄만큼 낮았다. 영국의 시험장에서 테스트해본 결과로는 전차에 대한 명중률은 기껏해야 4% 수준이었다. 대공포화에 시달리고 표적은 벌판에서 계속 이동하는 실제 상황에서는 명중률이 그보다 더 낮게 나왔을 것임은 분명하다.

아마도 전차는 항공기가 공격하기에는 가장 어려운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 장갑화되지 않은 목표들이 훨씬 손쉬웠다. 그러나 그런 목표들로 대상을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연합군 항공기에 의해 입은 피해는 연합군 야포, 박격포, 기관총 등에 입은 피해에 비해 적은 것이었다. 일선에 배치된 독일 지상군 전투부대란 연합군 항공부대에게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

독일군 부대가 입은 손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서인가에 대한 통계가 나와있는 (독일군이 자체 작성한) 문서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에 좀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해서 날씨에 따라 독일군의 일간 피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일례로 6월중 제12 SS 기갑사단의 경우를 보자. 이 사단이 최악의 피해를 입은 것은 6월 26일로서, 이날 73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에는 비가 내렸다. 사실 6월 중 가장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6일을 뽑아보면 모두 나쁜 날씨 때문에 항공작전에 지장이 있었다. 만약 항공작전과 독일군 사상자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면 이 경우 오히려 역의 상관관계였다.

유사한 경우를 제2 SS 기갑군단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군단이 치룬 가장 피해가 막심한 전투는 Epsom 작전 중이었다. 사단 전황보고 중에 엄청난 연합군 포병화력의 효과에 대해서는 기술되어있다. 여기서는 이것이 독일군 손실의 주 원인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수많은 연합군 항공부대의 공격은 단지 부차적일 뿐이라고 명시해놓았다.

또 다른 예로는 제346 보병사단의 전역 초기 전투들을 들 수 있다. 6월 10일까지 예하 보병연대가 겪은 손실은 916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적 지상 전투부대와 직접 교전에 돌입하지 않은 사단의 다른 후위부대들은 불과 10명의 사상자만 났을 뿐이었다.

만약 연합군 공군력이 사상자 발생의 주요한 원인이었다면, 이런 예들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피해가 직접 연합군 지상부대와 교전한 부대에 집중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특별히 이상한 예라고도 볼 수 없는 것이, 7월 13일자의 독일군 보고를 보면 독일군 기갑사단들의 모든 피해의 90%는 기갑척탄병들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심지어 독일군 전투일지에서도 역시 연합군 항공부대에의한 피해는 과장되어 있었다. 그 예로 8월 7일의 독일군의 모르탱 공격에 대한 B 집단군의 전투일지 부분을 살펴보면,

이른 아침에 4개 기갑사단으로 좌익을 구성한 제7군은 아브랑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아침 안개는 공격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으며, 정오까지 약 10km의 진격을 이뤄냈다. 날씨가 개이면서, 수백대의 적군 항공기가 공격부대를 습격하여 진격을 정지하게 만들었으며, 인명과 장비 양면에서 심각한 손실이 있었다.

여기서 물론 명시적으로 연합군 항공기가 심각한 손실을 끼쳤다고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문맥상 당연히 그런 식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실제는 위에서 쭉 살펴본대로 항공 공격에 의한 독일군의 손실은 양호한 수준이었다.

(독일군 스스로 연합군 항공부대에 의한 피해를 과장한) 다른 예를 또 살펴보면 7월 3일에 롬멜이 기술한 문건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제12 SS 기갑사단은 노르망디로의 행군 도중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기간 모든 원인을 통틀어 사단 손실이 단 83명이었다는 사실과 그다지 맞아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과장은 전투일지나 다른 문서들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모르탱 공격에 대해 당시 제7군 참모장이던 폰 게르스도르프가 전후 회고한 원고에서는 대부분의 장비 손실이 연합군 공군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다음의 진짜 원인들과 비교해볼 수 있다:

Table 5.1. 모르탱 지구 공격에서의 독일군 피해 원인 조사 결과
표적항공화기 피탄지상화기 피탄유기 또는 자폭원인불명총계
전차 및 자주포92011646
기타 전투차량1292932
견인포02114
자동차440311
수레6222030
구급차20215
모터사이클01124
총계33381942132

확실히 항공기 무기로 얻어맞은 독일군 장비 손실은 약 1/4에 불과했다. 이것은 폰 게르스도르프의 이야기를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또 지적할 것으로 원인불명의 피해들 중 다수 또한 연합군의 항공공격에 의한 것은 아닐거란 점이다. 여러 1차 사료들은 항공공격은 판별하기 가장 쉬운 원인 중의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르탱 공격만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연합군 항공부대의 효율을 지적해주는 예도 아니다. 판터 전차의 손실에대한 원인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노획한 판터 전차(또는 버려진 잔해)를 조사한 3종의 영국군 연구 보고서(이중 둘은 노르망디 전역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르덴느 전투에 관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Table 5.2. 노르망디 전역과 아르덴느 전투에서의 판터 전차 손실 원인 분석
일자철갑탄성형작약탄고폭탄항공기 로켓탄항공기 기관포자폭유기원인불명
6.6 ~ 8.7.3677626313
8.8. ~ 8.31.11112144306
12.17. ~ 1.16.16033010105
총계63811113604324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판터 손실의 주 원인은 승무원들에 의한 자폭이나 유기였다. 이 두 원인은 전 기간에 걸친 판터 손실 총량의 약 반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8월 중 손실 원인에서는 약 8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항공기에 의한 피해는 조사된 모든 판터 손실 중에 단 6% 에 불과했다. 위에서 살펴본 조사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전차들의 손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40대의 조사된 티거 중에서 단 1대가 항공기 무기에 맞았을 뿐이며, 121대의 조사된 4호전차 중에서는 단 9대만이 항공기 무기에 맞은 것이었다. 분명히 연합군 공군력은 대량의 독일군 전차를 격파할 능력이 없었다.

참고로 동부전선에서도 공군력은 전차 손실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공군력은 소련군 전차 손실의 단 2~5% 정도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앞서 살펴본대로 전후에 독일군 손실의 상당부분 원인이 연합군 공군력에 있었다고 이야기 한 독일 장교들이 있다. 존 엘리스(John Ellis)와 같은 몇몇 저자들은 그런 진술에 주로 바탕을 두어 결론을 끌어냈다. 그런데 아마 독일군 스스로 그런 손실 원인을 평가한 연구자료는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수많은 문서 가운데에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연합군 손실의 원인을 보여주는 연구자료가 발견되었기는 하다. 이런걸 보면 전후에 독일군 장교들에 의해 제시된 추정은 거의 일반적인 인상 정도에 근거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인상이 그런 식으로 자리잡게 된 원인을 고찰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시각을 드러낸 대부분의 장교들은 고위 장교였다. 일선에서의 지휘를 강조하는 전통을 가진 독일군에서조차 그런 고위 장교들은 보통 보병이나 전차병들보다는 훨씬 후방에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후방에서 보낸 이들에게는 연합군 지상부대보다 항공부대가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당연하다. 전투부대에서 복무한 이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독일 장병들에게 연합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라는 사실도 덧붙여야 한다. 새로운 위협이 예전부터 겪어오던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보이는 것은 전혀 이상할게 없다. 동부전선에서 싸워온 장병들에게 연합군 지상부대와의 전투는 소련군과의 전투보다는 덜 끔찍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많은 독일 육군 장교들은 전후 그들의 견해를 밝힐 때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빼놓을 수 없다. 공군(Luftwaffe)은 연합군 항공부대를 저지할 책임이 있었다. 만약 연합군 항공부대가 패배의 주 원인이라면, 이것은 패전의 책임이 그들의 어깨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생각을 공공연히 내비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식의 책임 떠넘기기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연합군 성공의 주 원인이 독일군 공군력의 부족에 있다고 단정짓는건 이미 전역 도중 육군 참모본부가 작성한 문서에서부터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해둔다면, 이 문제에 관련된 독일 장교들의 진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이러한 무비판적인 수용의 예로는 엘리스가 "(중폭격기들은) 거점방어에 대한 공격에는 특히 유용하지 않다. Charnwood 작전에 앞선 깡에 대한 집중폭격은 몇달 전 카씨노 수도원과 시가를 초토화시킨 경우처럼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개활지형에 전개된 기갑부대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편차를 감안해도 종종 폭격기들이 박살을 내버렸다." 라고 단언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그 근거로 Goodwood 작전에 대해 7월 22일 폰 클루게가 히틀러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인용하고 있다.

반격을 위해 배치된 모든 기갑부대는 엄청난 밀도의 융단폭격을 당해서, 이들은 온통 엉망이 된 대지에서 긴 노력 끝에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밖에서 끌어내야 할 형편이었다. 결과는 이들 기갑부대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융단폭격이 좋은 부대 또는 나쁜 부대에 떨어지느냐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일단 당하면 모두 거의 전멸당할 지경이었다.

여기에도 몇 가지 점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 사실 중폭격기부대가 (융단폭격으로) 기갑부대를 타격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Goodwood 작전과 Cobra 작전만이 유일한 실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폭격기들이 "종종 박살을 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둘째로, 엘리스가 제시한 예인 Goodwood 작전에서 폭격기 부대는 단 하나의 기갑부대, 제503 중전차대대만을 타격했을 뿐이었다. 이 부대는 손실을 겪었지만, 전멸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부대 대부분은 노르망디 전역이 끝날 때까지도 남아 전투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폰 클루게는 엄청난 과장을 한 것 같다. 융단폭격이 대대가 즉각 위력적인 반격을 하는 것은 막았지만, 그렇다고 폭격기들이 전멸시켰던 것은 아니고 단지 잠시 전투력을 마비시켰다고 보는게 더 옳다.

Cobra 작전 중의 기갑교도사단도 (엘리스가 거론한) 다른 예이다. 엘리스는 모든 그의 일선 전차들이 격파당했다는 (기갑교도사단장) 바이에를라인의 말을 인용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의 전차들 상당수가 일선에 있지 않았거나, 그가 지나치게 과장했거나 둘 중 하나이다. 8월 1일 기갑교도사단은 수리중인 것을 포함해 사단에 67대의 전차와, 적어도 10대의 돌격포가 있다고 보고했다. 기동가능한 전차 수량은 7월 23일 31대에서 8월 1일에는 27대로 단 4대 줄었다.

중폭격기에 의한 공격 결과는 Goodwood 작전이나 Cobra 작전이나 전차를 파괴했다기 보다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던 쪽이었다. 종종 전차들은 공습 뒤에 흙더미에 파묻혔던걸 빼내야 했기 때문에 기동불능에 빠지고는 했다. 그래서 항공공습이 끝난 후에는 지상부대가 즉각 전진을 해야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항공공습은 거의 효과가 남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연합군 중폭격기가 사용된 지구를 조사한 연합군 작전 연구 팀들이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신속한 회복의 예는 6월 29일에도 있었다. 오후 늦게 호헨슈타우펜 사단의 보병장갑차량(SPW) 대대(제20 SS 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는 사단 기갑연대의 판터전차들과 공격을 위해 집결했다. 약 100대의 랭카스터 폭격기가 이 집결지를 폭격했다. 엄청난 먼지구름이 이 지역을 덮었으며, 이 사건을 관찰한 사람들은 이 지역의 모든 부대들이 격파당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저녁까지 80%의 장갑차량들이 다시 기동가능해졌다. 이 폭격 도중에 약 20명만이 전사했다.

이 부대들은 방어를 위해 호를 파고 틀어박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이런 종류의 연합군 공격에 대해 별 엄폐수단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숲속에 전개되어 있었다.

이런 일들은 Epsom 작전 중에도 일어났고,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또다른 중폭격기의 공격도 있었다. 6월 29~30일 밤 중에 약 1000톤의 폭탄이 빌레르 보카쥬(Villers-Bocage)와 그 일대에 투하되었다. 이 공격은 주로 빌레르 보카쥬를 통과해 나가야했던 제9 SS 기갑사단 예하 부대의 공격을 방해했다고 이야기되고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굉장히 이상한 것이, 이미 제9 SS 기갑사단의 전투부대들은 빌레르 보카쥬 북쪽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의 폭격이 사단으로 향하는 보급종대의 이동을 방해했다거나, 후방에서 수리되던 전차들이 전선의 부대와 합류하는 것을 방해했을 정도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사실 여기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들의 부대사에는 이 폭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서부전구총사령부(OB. West)의 전투일지에도 제2 SS 기갑군단의 공격은 매우 격렬한 연합군 포격에 의해 정지되었다고 쓰여있다. 빌레르 보카쥬에 대한 항공폭격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있지 않다. 이 모든 이야기는 연합군의 잘못된 정보활동 결과라고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전쟁 후에도 반복되었다.

이상에서 제시된 것은 연합군 항공부대가 끼친 독일의 손실에 관한 데이터들의 예와, 또한 확인가능한 확고한 사실들과 배치되는 독일 장교들의 증언들의 예들이었다. 물론 여기에 거론된 사례들은 전체에 비해 매우 적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노르망디에서 연합군 공군력이 광범위하게 독일군에게 손실을 끼쳤다는 통념을 뒷받침할 어떤 예도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고 연합군 항공부대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독일군 장교들의 주장과 비교해볼만한 데이터가 있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이들의 주장이 과장된 것임이 밝혀져왔다.

어쨌거나 지상작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반드시 큰 손해를 입힐 필요는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한다. 항공공격은 거의 틀림없이 지상부대들이 대피하고 엄폐하도록 만들었다. 독일 포병에 대한 공습은 직접적인 손실을 끼치지는 않았어도 결정적인 순간의 독일 보병들이 귀중한 포병 지원없이 공격을 할 수밖에 만들었다. 또 모르탱에서 연합군 항공부대가 심각한 전차손실을 입히지 않았더라도, 공습은 독일군 전차들이 앞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것보다 이리저리 엄폐하는데 더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연합군의 제공권에는 또 다른 효과들도 있었다. 독일군 부대들은 연합군보다 자신의 위치를 숨기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요소로는 연합군의 제공권이 정보전에 끼친 영향이었다. 이것은 항공기로 관제하는 포격처럼 즉각적으로 유용한 정보부터, 전선 뒤쪽에서 이동하는 독일군 예비대에 관한 귀중한 정보까지 망라하고 있었다.

연합군 항공공격은 또한 일부 부대들이 노르망디로 보내지지 못하게도 만들었다. 그 예로는 로와르(Loire) 강의 도하점 확보를 위해 소뮤어(Saumur) 일대에서 거의 1달 동안이나 남아있어야 했던 제17 SS 기갑척탄병사단 "괴츠 폰 베를리힝엔(Götz von Berlichingen)"의 공병대대를 들 수 있다. 또한 이 로와르강 도하점에 대한 연합군 항공부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사단 대공포대대도 이곳에 남아있어야만 했다.

노르망디로 이동 중인 지상 전투부대에 대한 공격

노르망디로 이동 중이던 독일 지상군 부대들에 대한 공격은 별다른 손실을 끼친 것 같지 않다.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는 노르망디로의 행군 도중에 모든 원인에 의해 83명을 잃었다. 이 사단이 도착 후에 벌인 전투에서 당한 손실과 비교해보면, 이 정도의 사상자는 무의미한 수준이다. 제9 기갑사단장 에르빈 욜라세(Erwin Jollasse)의 전후 회고에 의하면, 그의 사단은 노르망디로의 행군 도중에 인력 및 장비 양면에서 아무런 두드러진 손실을 겪지 않았다.

Gersdorff

제7군 참모장 R.-C. Frhr. v. 게르스도르프

Jollasse

제9 기갑사단장 E. 욜라세

Bayerlein

기갑교도사단장 F. 바이에를라인

꽤나 자주 기갑교도사단이 연합군 공군력에 의한 손실의 대표 사례로 쓰이고는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 사단장이던 프릿츠 바이에를라인이 전후에 제공한 정보에 근거한다. 그는 그의 기억 이외에 다른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기갑교도사단도 노르망디로의 행군 도중에 적 공군력에 의해 어떤 특기할만한 손실을 겪지는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6월 10일자 보고서가 남아 있다.

따라서 전투 부대들의 노르망디로의 행군 도중에 인력과 장비 손실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상이다. 노르망디로의 행군 도중에 입은 손실이 부대 전투력을 손상시켰음을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

연합군 공군력의 면전에서 부대를 이동시켜야 했던 독일군에게 초래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연이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물론 부대에 대한 직접 공격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교량의 파괴였다. 예를 들어, 연합군 공군부대들은 파리에서 해안에 이르는 모든 센(Seine) 강 교량을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제2 기갑사단은 아미앵(Amiens)에서 노르망디로 이동할 때 더 먼 길을 가야 했다. 루앙(Rouen)을 거쳐가는 대신에 파리로 돌아가야 했는데, 이로 인해 행군 거리가 150㎞ 이상 늘어났다. 제2 기갑사단은 주로 도로를 따라 밤이나 날씨가 안좋을 때 이동해야 했음에도, 400㎞의 거리를 이틀만에 주파하여 인상적인 행군 능력을 보여줬다. 센 강의 교량 격파는 이후의 다른 지연도 연이어 초래했다. 제116 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 이동할 때에는 센 강을 페리로 도하해야 했다.

다른 신속기동 사례로는 수 차례의 공습을 받으면서도 노르망디로의 행군 당시 하루에 200㎞ 이상을 주파한 제17 SS 수색대대(SS-Aufkl.Abt.17)를 들 수 있다. 차량화부대가 연료를 충분히 휴대하고 있고, 상반된 명령으로 우왕좌왕하지 않는다면 연합군 항공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매우 빠르게 프랑스를 가로질러 이동해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이 부대는 과도한 손실도 없이 이를 달성해냈다.

독일군의 신속한 이동에는 연합군의 공습보다도 연료와 차량의 부족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제2 기갑사단이 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다른 사례는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의 판터 대대인데, 이 부대는 6월 7일에 도착했음에도 연료가 없어서 전투 투입이 불가능했다. 제130 기갑포병교도연대 2대대(II./Pz.Artl.Lehr-Rgt. 130)도 노르망디로의 행군을 계속하기 위한 연료 보급을 기다리느라 샤르트르(Chartres)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공군력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연료 부족도 연합군 공군 활약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분명히 이에 기여한 부분은 있으나, 그렇다고 연합군 공군이 연료 부족 그 자체를 만들어낸 것은 분명 아니다. 이미 심각했던 연료 부족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으로 봐야 한다. 독일군의 연료 생산은 단순히 너무 부족했다. 이것은 당시 미국의 연료 생산량과 비교하면 극명해진다:


194219431944
미국183.9199.6222.5
독일7.78.96.4

이 수치는 수입분과 합성연료 생산분을 합한 것이며, 단위는 100만 톤이다.

독일의 낮은 연료 생산량은 이미 연합군 공군이 연료산업을 목표로 하지 않던 1942년 부터 연료 부족을 초래했다. 캅카즈의 소련 유전지대에 대한 공세 도중에도 독일군의 작전은 연료 부족에 의해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연료 부족은 프랑스에서의 부대 훈련도 제한시켰다. 게다가 동부전선의 부대들이 우선 순위를 가졌기 때문에 노르망디에는 충분한 연료 재고분도 없었다. 연합군의 해안 교두보와 제일 가까운 연료창은 돔프롱(Domfront)에 있었는데, 이곳은 캉(Caen)과 70㎞ 떨어져 있었다. 이 연료창은 960㎥(96만 리터)의 연료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노르망디에 가용한 전체 연료의 1/4을 넘는 양이었다. 판터의 연료탱크가 0.7㎥(700리터) 정도임을 생각해보면, 노르망디에 확보된 연료 재고가 얼마나 부족했는 지를 알 수 있다. 전차는 단위 거리를 움직이는데 막대한 연료를 소모했지만, 그래도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독일군 전체가 소모하는 연료에 비해서는 적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독일은 트럭이 너무 부족했다. 제7군 보급부대는 248대의 트럭만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적재중량을 모두 합해봐야 500톤에 불과했다. 이렇게 적은 수의 트럭으로 연료, 탄약, 식량을 운반해야한데다, 차량화 상태가 엉망인 부대들을 노르망디로 수송하는 데 호출되기까지 했다.

노르망디에 확보된 연료가 너무 적었다는 점, 그리고 수송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은, 이들 부대가 단순히 연료 부족 때문에 도착 즉시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연합군 공군이 독일군 부대들의 노르망디로의 이동을 지연시키는 것을 제약시킨 한 요소는, 날씨가 나쁜 날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악천후와 밤은 적어도 하루의 반 이상의 시간 동안 독일군이 안전하게 부대 이동을 할 수 있게 해줬을 것이다.

철도에 대한 공격

석유제품과 차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철도 수송은 노르망디로의 보급 추진이나 생생한 전투부대들의 전방 이동 모두에 핵심적이었다.

연합군 공군에게 철도 수송은 전투 부대 자체 보다도 짭잘한 목표였다. 지상 수송부대에 대한 공격은 이동 중에 공격이 이뤄져야 했으나, 철도 공격은 사전에 이뤄지더라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철도, 핵심 교량, 조차장 등의 위치는 미리 잘 알려져 있었다. 철로는 애초부터 도로 교통보다 훨씬 탄력성이 적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로 인해 철로는 연합군 공군에게 적당한 목표였으며, 그 노력은 효력을 발휘했다. 철로가 완전히 마비되지는 않았지만, 수송능력은 심각하게 떨어졌다.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위험할 정도로 늘어났다. 앞서 도로를 이용한 빠른 이동 사례로 제2 기갑사단이 이틀 만에 아미앵에서 노르망디로 이동했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사단 일부는 철도로 수송되었으며, 이 부대는 이후 1주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느린 철도 이동의 또 다른 사례로는 쥐페-무르멜롱(Suippes-Mourmelon)에 위치한 포병학교에서 편성된 2개 대대를 들 수 있다. 1개 대대는 차량화되었고, 1개 대대는 마필에 의존했다. 두 대대는 6월 10일에 노르망디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차량화대대는 자체 수송수단으로 이동했고, 다른 대대는 열차편으로 이동했다. 차량화대대가 도착한 정확한 날짜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6월 15일에는 도착해있었다. 그런데 철도로 이동한 대대는 7월이 시작될 때까지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처럼 차량화되지 못한 대대가 철도로 이동할 때는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적어도 4배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이 프랑스 철도망의 수송능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키지 않았더라도 노르망디를 방어할 서유럽 소재 독일군 전력을 빠르게 집결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개 기갑사단은 보통 전 사단을 이동시키는데 60~80편의 열차 편성이 필요했고, 1개 완편 보병사단은 약 50편의 열차 편성이 필요했다. 이는 5개 기갑 및 5개 보병사단을 이동시키는 데만 600편의 열차가 필요했음을 의미한다.

노르망디 이외의 지구에서 서부전구총사령부(OB. West)는 34개 보병사단(예비사단 처럼 전투에 부적합한 사단 제외)과 9개 기갑 및 기갑척탄병사단을 갖고 있었다. 이 모두를 철도로 이동시키려면 2500편에 가까운 열차가 필요했다. 이만한 수의 열차를 노르망디로 보내는 데는 꼬박 몇 주가 걸렸을 것이다. 따라서 연합군 공군력이 문제를 발생시키지는 않았다고 결론내야만 한다. 어려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 보는게 맞다. 어쨌거나 연합군 공군력이 일반적으로 독일군의 도로 이동보다는 철도 이동 방해에 훨씬 효과적이었음이 분명하다.

독일군의 보급품 수송에 대한 공격

위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군 전차를 격파하는 능력이 신통치 않았음을 이야기했다. 1944년 8월 동안 독일군 전차 손실 원인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독일군의 전차들 대다수는 승무원에 의해 자폭되거나 단순히 버려졌다. 이 가운데 몇몇은 분명 연료 부족 때문에 버려졌을 것이다. 이러한 부족의 중요한 원인은 보급 수송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이었을 것이다. 연합군 공군이 전차에 대한 직접 공격 보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차 손실을 끼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러한 전차 손실이 공군 단독에 의해서만 초래된 것이 아님이 강조되어야 한다. 연합군 지상군이 전진하지 못했더라면, 독일군은 이들 전차들을 회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연합군 공군 단독의 공이라기 보다는, 공군과 지상군 부대의 합작품이라는 편이 옳다.

어쨌거나 보급은 독일이라는 전쟁 기계 가운데 가장 약한 톱니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노르망디에서의 연료 재고량은 매우 불충분했다. 탄약 사정도 그리 낫지 않았다. 노르망디의 탄약창들은 단지 7172톤의 탄약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는 증원부대가 노르망디로 많이 보내지지 않았음에도 단지 수 일분에 불과한 양이었다. 브르타뉴에는 11,576톤의 추가 재고가 있었지만, 위에서 살펴본 대로 제7군은 철도 운송의 도움 없이는 이들 재고분을 수송할 수단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철도 운송을 제외하고는 제7군 구역으로 단지 소량의 보급품의 추진만 가능했다. 센 강과 로와르 강의 교량들이 격파됨에 따라, 보급품의 철도 운송도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수리 능력을 2개 선에 집중시킨 결과, 독일은 파리-베르사유-드류(Dreux)-쉬르동(Surdon)으로 이어지는 철로와 투르(Tours)-르망(Le Mans)-알랑숑(Alençon)-세스(Sees)-쉬르동으로 이어지는 철로를 재개통할 수 있었다. 그래도 투르에 있는 로와르 강 교량은 손상으로 충분한 하중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최대 용량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6월 15일까지, 독일군은 5000톤의 탄약을 소모했다. 이는 대략 하루 500톤의 탄약 소모에 해당한다. 이것은 1편의 열차에 의해 수송될 수 있는 분량이다. 러시아에서의 1941년 대 하계공세(바르바로사 작전) 중에도 중부집단군 전체가 하루에 열차 24편의 보급이면 충분했다. 독일군이 철도 수송능력 대부분을 전투부대 이동에 쓰지 않았다면, 그만큼 철도망은 보급 소요 충족에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6월에 부대 이동용 열차편 수는 보급 열차편 수의 4배 이상이었다. 균형잡힌 결론을 내린다면 연합군의 공습은 대규모 부대 수송을 심각하게 방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철도망에 손상을 끼쳤다는 쪽이다. 그러나 보급 활동에도 같은 수준의 영향을 끼쳤는 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그럴 수준으로 이야기하려면 사실상 철도망을 완전히 마비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단지 큰 강의 교량을 완파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7월 15일에 투르의 교량을 완전히 격파시켰을 때 비로소 달성되었다. 이것은 제7군의 보급 상황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었고, 10일 후 미군이 코브라 작전을 전개했을 때 그 효과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연료 부족으로 인해 독일군 예비대는 신속하게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공습에 의한 독일군의 트럭 손실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노르망디 전투의 첫 10일 동안 전략적 수송차량의 20%가 공습과 사고, 고장에 의해 망가졌다. 이것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첫 27일 동안 50%의 보급 트럭이 망가진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렇다고 나쁜 도로 사정이 공습 만큼이나 보급 트럭에 위협이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성급하다. 결국, 공습에 의한 손실이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설명은 야간이나 날씨가 나쁜 때를 제외하고는 도로 이동을 꺼려한 독일군의 태도였다.

결론

연합군 공군력은 프랑스 철도망에 막대한 파괴를 끼쳤다. 로와르 강과 센 강의 교량 파괴는 도로 이동에도 큰 지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다면 공군에 의한 파괴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독일군이 개활지에서 이동해야 했던 8월에 조차 공습에 의한 손실은 제한적이었다. 공습에 가장 취약한 차량은 아마도 야지 주행능력이 떨어지는 트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팔레즈 포위망 전투에서도 1100~1200대의 승용차와 트럭만이 공습으로 격파되었다. 이것은 일견 꽤나 심각한 손실로 보이지만, 연합군 공군 출격회수의 2.5~8.9% 당 1대의 차량이 격파되었음을 의미한다. 연합군 공군에 보고된 자체 격파 집계량은 실제 독일군 손실보다 적어도 5배는 더 많았다. 제9, 10, 12 SS 기갑사단은 6월 1일에 기동 가능하거나 단기 수리를 요하는 승용차와 트럭을 7783대 보유하고 있었다. 연합군 작전조사반은 팔레즈 포위망 전투가 시작될 때, 독일군이 약 30,000대의 승용차와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산했다. 어쨌거나 이 수자도 낮은 쪽이라고 보인다. 이는 연합군 공군이 최고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전체 승용차와 트럭 가운데 단 3% 정도만이 항공 무기에 의해 피격되었음을 의미한다.

철로를 제외하고, 항공기의 파괴력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대신에, 주요한 효과는 간접적인 것이었다. 항공작전이 가능한 날씨에는 움직이기를 꺼려하는 태도는 수송능력의 감소로 이어졌다. 이미 위험할 정도로 수송능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전폭기가 독일 지상군 전투부대를 공격해서 격파한 장비 양은 보통 매우 적었지만, 병사들의 행동에 끼친 영향은 보통 더 컸다. 모르탱 공격 중에 독일군 전차들은 전폭기들의 공습을 받았을 때 엄폐 기동을 해야했다. 공습 중에는 가장 안전한 곳이 전차 안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승무원들은 종종 공습 중에 전차에서 뛰쳐나왔다. 이것은 독일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했으며, 반격 시에 예비대의 집결을 지연시켰다.

마찬가지로 중폭격기에 의한 융단폭격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그로 인해 초래되는 공황이었다. 즉시 이를 이용한다면 공격하는 지상군 부대에게 이는 큰 가치를 지녔지만, 우물쭈물했다가는 독일군은 신속하게 회복될 수 있었다.

이번 장에서는 공군력이 무기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물리적 파괴는 — 철로와 교량을 제외하고는 — 공습의 중요한 효과가 아니라는 점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제공권, 또는 적어도 우세한 제공권을 누리지 않았더라면, 연합군은 오버로드 작전을 계속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장의 핵심은 공군력의 효과가 덜 실체적인 요인이라는 점이다. 행동과 사기만큼이나 적의 의사결정도 그 영향을 받았다. 공군력은 또한 연합군의 정보 우위에 기여했다. 그러므로 간접적인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분석하기는 더욱 어렵지만, 그 결과는 아마 훨씬 가치있을 것이다.

2007/04/13 14:48 2007/04/1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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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utsch 2007/04/17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제(?)의 게스도르프가 서부 전선 7군에서도 등장하는군요. ㅎ;

    • Periskop 홈지기 2007/04/18 0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양반도 하여튼 굴곡있는 삶을 살았지요. 종전까지 암살 모의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지 않은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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