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보
출전: Zetterling, Niklas and Frankson, Anders. 2000.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 Frank Cass Publishers, 2000.저자: Niklas Zetterling (스웨덴 국방대학 수석연구원), Anders Frankson
역자: 채승병 (Periskop 홈지기)
비고: 2001년 8월 초역, 2002년 4월 21일 Periskop 게재, 2007년 3월 16일 수정판 게재
역자 해설

이 책이 지닌 최대의 강점은 역시 책 부제 "A Statistical Analysis"답게 기존의 쿠르스크 관련 저작들에서 두리뭉실하게 처리한 독-소 양측의 참여전력과 손실에 대해서 상당히 보기 편한 형태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영미권에서 나온 쿠르스크 관련 저작들은 주로 전투 흐름에 대해서, 그것도 정확한 전투기록보다는 참전 장병 개개인의 회고담을 짜맞추는 방식으로 접근한 저작들이 많아서 항상 정확한 양측의 교전 전력과 손실에 대한 의문이 남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분을 제대로 정리해놓은 저작이 없어서 여러 관련 서적들에 소개된 독일측 통계, 소련측 통계를 참조해다가 스스로 전체적인 그림을 잡아가야만 했었는데, 이 책이 나오면서 이제는 그런 수고를 상당 부분 덜 수 있게 되었다. 책이 두께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는 단점이 있기는 해도 쿠르스크 전투에 관한 자료에 목마른 사람이라면 그만한 값어치는 충분히 하리라고 본다.
필자는 그래서 원래 이 책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글을 준비하다가 아예 자료성 글과 겸하는 형식으로 총 10개 장(chapter) 중에서 1개 장을 번역하여 이 책의 가치를 소개하기로 하였다. 과거 1998년에 필자가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 G. Nipe, Jr. 씨의 글을 소개해서 잔잔한 반향을 일으킨 이래, 수년 간 더욱 알찬 자료들이 시중에 많이 발간되어 프로호롭카 전투 및 쿠르스크 전투 전반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많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 소개를 게을리한 것에 대한 책임도 느끼고 해서이다. 아직도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서 소련군이 독일군의 기를 꺾은 대승리였다는 식의 주장들이 국내에도 많이 횡행하는데 그러한 시각을 바로잡는데도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울러 앞으로도 영미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소련군 총참모부의 쿠르스크 전투 연구 보고서 "Battle for Kursk, 1943: The General Staff Study", D. M. Glantz와 J. House 공저의 "The Battle of Kursk" 등 이미 출간된 다른 좋은 저작들에 대한 소개도 하고, 출간 대기 중인 기대작들에 대해서도 입수되는대로 언급하도록 하겠다.
프로호롭카 (Прохоровка, Prokhorovka)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많은 글에서는 프로호롭카 전차전을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지구에서 독일군 공세가 힘을 다하고 정지하게 된 순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프로호롭카에서 일어난 일들의 중요성을 따져보았을 때, 실제로는 그 전투가 제대로 정의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전투에 어떤 부대가 참여했으며, 전장의 지형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결국에는 이 전투가 며칠에 걸쳐서 일어났는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중 압권은, 몇몇 저자들에 의해 제시된 참여 전차 수자가 순전히 소설 수준이라는 것이다.
종종 프로호롭카 전차전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가 지휘하는 소련군 제5 근위 전차군과, 파울 하우서가 지휘하는 독일군 제2 SS 기갑군단의 충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관점에서도 몇몇 모호한 점들이 드러난다.

1943년 7월 11~12일 프로호롭카 전투 전황도 (Glantz, et al., 1999)1
프로호롭카: 전통적인 소련측 관점
전투에 대한 소련측 기록들은 대개 전투에 참여한 전차 총수가 1200대(소련군 700대, 독일군 500대) 또는 1500대(소련군 800대, 독일군 700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까지 이 전투에 포함시키느냐의 변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낮은 수치 쪽은 전투가 제2 SS 기갑군단 대 제5 근위전차군 주력이 맞붙은 것으로 잡은 것이다. 높은 수치 쪽은 제5 근위 전차군 전체를 포함시키고, 독일쪽에 대해서는 제3 기갑군단까지 추가해 넣은 것이다.
제5 근위 기계화군단 일부는 독일군 제3 기갑군단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제69군을 증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당시 독일군 제3 기갑군단은 제69군 예하 몇몇 부대들을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제5 근위 기계화군단에서 파견된 부대는 제11 및 12 근위 기계화여단이었고, 이는 또 제2 근위 전차군단에서 파견된 제26 전차여단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약 100여 대의 전차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소련군 추정에 의하면 약 200여 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독일군 제3 기갑군단(제6 및 19 기갑사단) 예하 부대와 격돌하였다.
제5 근위 전차군의 잔여부대는 제2 SS 기갑군단과 격돌하였는데, 당시 이 군단은 신형 전차(티거, 페르디난트, 판터)를 100여 대 장비하고 총수는 500여 대에 이르는 전차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로트미스트로프의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7월 12일 동안 350여 대의 전차와 10,000명의 병력을 잃었다고 한다. 다른 책에서 로트미스트로프는 또 독일군은 그날 제 5 근위전차군과 싸우면서 총 400여 대의 전차(70여 대의 티거를 포함), 88문의 야포, 70문의 박격포, 83정의 기관총, 300대 이상의 자동차, 3,500여 병력을 잃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보다는 양호한 이야기는 소련군 총참모부의 전투 연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독일군은 5일간의 전투 — 7월 12~16일의 전투를 포함 — 를 통해 300여 대의 전차, 20여 대의 돌격포, 200문 이상의 포, 500대 이상의 자동차, 4,5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소련군의 손실은 7월 12일 동안 제5 근위 전차군에서 약 30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손실이 있었다고 이야기되며, 이것은 회수가능한 손실 및 완전손실을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제29 전차군단은 전차전력의 60퍼센트를 상실하였으며, 제18 전차군단은 30퍼센트를 상실했고, 반면 제5 근위 기계화군단의 손실은 적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독일 측 이야기
독일 측에서는 치타델레(성채) 작전이 시작될 때 보다 적은 전력으로 전투에 임해서 제3 기갑군단의 3개 기갑사단이래야 총 299대의 전차(제6 기갑사단 106대, 제7 기갑사단 112대, 제19 기갑사단 81대)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군단은 여기에 추가하여 45대의 (티거)전차를 장비한 중전차대대(제503 중전차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제6 및 19 기갑사단이 7월 12일에 20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실로 놀랄만한 성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일군 부대에게 기동 가능한 전차 수량에 대한 7월 12일자 보고서는 모든 부대의 것이 남아있지는 못하다. 대신 7월 11일자의 그런 보고서는 발견된다. 이 날 이들 제3 기갑군단에 배속된 부대들에게 기동 가능했던 전차는 116대였다.
돌격포 부대 중에서는 단지 제228 돌격포대대만이 제3 기갑군단 예하에 있었다. 만약 이들 가용한 7월 11일 및 12일 수치를 종합하여 7월 12일자 전투력을 추산해본다면, 당시 이 군단은 기껏해야 전차 및 돌격포 135대 정도만이 프로호롭카 전투에 가용했을 것이다.
| 7. 11. | 7. 12. | 7. 13. | 7. 14. | 7. 15. | |
|---|---|---|---|---|---|
| 6. Pz.Div. | 23 | ? | 12 | 14 | 15 |
| 7. Pz.Div. | 54 | 39 | 41 | ? | 23 |
| 19. Pz.Div. | 16 | 15 | 25 | 28 | 28 |
| s.Pz.Abt. 503 | 23 | ? | ? | ? | 9 |
| StuG.Abt. 905 | 28 | 29 | 29 | 27 | 14 |
| StuG.Abt. 228 | ? | 19 | ? | ? | 14 |
| StuG.Bttr. 393 | 9 | 9 | 4 | 5 | 4 |
제3 기갑군단은 7월 11~12일 밤 동안 북부 도네츠 강 대안에 교두보를 장악하였다. 7월 12일 동안 소련군들이 제3 기갑군단 및 라우스 군단 양쪽에 대해 몇 차례의 반격전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독일군은 7월 12일 대부분을 그들의 거점을 공고히하는데 써버렸다. 다음날 독일군은 교두보로부터 공격을 시작했으며, 이때는 아마도 전차 및 돌격포 100대 이상은 공격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로호롭카 읍내 주변에서 독일군은 제2 SS 기갑군단을 투입했다. 이 군단의 3개 사단 중에서 Totenkopf 사단은 좌익에서 프숄(Псёл) 강을 넘어 공격 중이었고, 그 동안 LSSAH 사단은 중앙에서 프로호롭카를 향해 공격 중이었으며, Das Reich 사단은 LSSAH 사단의 우익을 방호하고 있었다. 여기서 Totenkopf 사단은 주로 자도프의 제5 근위군 부대들과 상대했지,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 근위 전차군 부대들과 상대한게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7월 12일에 이 군단이 500여 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소련측 이야기지만, 독일군 기록에 따르면 이 군단은 다음과 같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 7. 11. | 7. 12. | 7. 13. | 7. 14. | 7. 15. | 7. 16. | |
|---|---|---|---|---|---|---|
| 1. SS-Pz.Gren.Div. "LSSAH" | 77 | ? | 70 | 78 | 85 | 96 |
| 2. SS-Pz.Gren.Div. "Das Reich" | 95 | 103 | 107 | 115 | 99 | 103 |
| 3. SS-Pz.Gren.Div. "Totenkopf" | 122 | 121 | 74 | 73 | 77 | 93 |
그러므로, 7월 12일 전 저녁에 제2 SS 기갑군단은 294대의 전차 및 돌격포가 기동 가능했고, 이중 15대가 티거였다(판터나 페르디난트는 수리 중인 것도 한 대도 없었다). 치타델레 작전이 시작될 때, 제2 SS 기갑군단은 총 494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가지고 있었으며(대부분이 기동 가능한 상태), 이중 42대가 티거였다(판터나 페르디난트는 없었다). 이미 치타델레 작전 시작 때부터 제2 SS 기갑군단은, 소련군이 1주일 여 후인 프로호롭카 전투 때 가지고 있었으리라 믿던 수량 만큼도 전차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또한 7월 16일에 이 군단은 292대의 전차 및 돌격포가 기동 가능해서, 7월 11일의 수치보다 단 2대만 더 적은 수준이었음을 또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LSSAH 사단은 7월 11, 12일에 총 192대의 적 전차를 격파했다고 보고했으며, Das Reich 사단은 7월 12일에 총 75대, Totenkopf 사단은 77대의 적 전차를 격파했다고 보고했다. 이 세 SS 사단들은 치타델레 작전 전 기간 동안 총 8,095명 — 사망자, 부상자 및 실종자 포함 — 을 잃었다고 하나, 이들 사상자 중에서 7월 11~15일에 발생한 사상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을 것이다.
| 7. 11. | 7. 12. | 7. 13. | 7. 14. | 7. 15. | 7. 16. | |
|---|---|---|---|---|---|---|
| 1. SS-Pz.Gren.Div. "LSSAH" | 323 | 279 | 325 | 100 | 120 | 103 |
| 2. SS-Pz.Gren.Div. "Das Reich" | 211 | 243 | 61 | 287 | 114 | 224 |
| 3. SS-Pz.Gren.Div. "Totenkopf" | 430 | 316 | 160 | 175 | 65 | 89 |
| 군단직할대 | 1 | 4 | 1 | 2 | 0 | 4 |
만약 7월 11일자 통계를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제2 SS 기갑군단은 7월 12~15일 동안 2,672명을 잃었을 뿐이다. 7월 12일만 따지면 제2 SS 기갑군단은 842명을 잃었다. 분명히 로트미스트로프의 주장은 대단히 과장된 것이었으며, 또한 Totenkopf 사단은 주로 제5 근위군, 그 중에서도 제52 및 95 근위 소총병사단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게 중요하다. 어느 SS 사단도 7월 12일이 사상자 면에서 최악의 날은 아니었다.
프로호롭카에서 격돌한 기갑부대의 규모
위에서 지적한대로, 소련측의 전차 수자는 "프로호롭카 전투"에 어디까지 포함을 시키느냐에 달려있다. 3장에서는 제5 전차군의 전투력이 793대의 전차(T-34 501대, T-70 261대, 처칠 31대)와 57대의 자주포(SU)임을 밝혔다. 얼마나 이들 기갑차량들이 제5 근위 전차군 예하 부대들에게 배속되었는지는 얼마나 그들이 전장에 투입되었는가의 그림을 제공해준다.
| T-34 | T-70 | 처칠 | 전차 총합 | 자주포 | 전차+자주포 총합 | |
|---|---|---|---|---|---|---|
| 제5 근위 전차군단 | 159 | 48 | 0 | 207 | 16 | 223 |
| 제18 전차군단 | 96 | 63 | 31 | 190 | 0 | 190 |
| 제29 전차군단 | 122 | 70 | 0 | 192 | 20 | 212 |
| 제53 근위 전차연대 | 32 | 7 | 0 | 39 | 0 | 39 |
| 제1549 자주포연대 | 0 | 0 | 0 | 0 | 12 | 12 |
| 합계 | 409 | 188 | 31 | 628 | 48 | 676 |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제2 전차군단과 제2 근위 전차군단은 제 5 근위전차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치타델레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제2 전차군단은 195대의 T-34를 가지고 있었고, 제2 근위전차군단은 135대의 T-34와 63대의 T-70을 가지고 있었으나, 7월 12일 아침에 이들 군단은 소련군측의 기록에 의하면 편제 하에 기껏해야 총 187대의 전차만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 제시된 수치로부터 생각해보면, 제2 전차군단은 92대의 T-34와 73대의 T-70 등 총 165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소련측 기록에서 제시된 총 187대의 수치와 정확히 맞지는 않는다.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가능한 설명 하나는 제5 근위 전차군의 전차 793대라는 수치는 기동 가능한 차량들만을 말하는 것인데 반해, 위의 Table 4는 수리가 필요한 전차들까지 집계한 통계라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위의 Table 4에 열거한 부대들은 628대의 전차가 아니라 총 606대의 전차가 기동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2 전차군단 및 제2 근위 전차군단에 가용했던 T-70의 대수는 사실 7월 5일자 보유량보다도 많다. 이는 각 부대가 T-70 전차들을 더 보충받았거나, 소련측 기록에서 제시된 정보 일부가 잘못된 것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따지기란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차의 총수는 대략 정확해 보이며, 우리가 따져봐야 할 문제는 전차들이 어떻게 예하 부대에 배분되었는가 정확한 그림을 얻는데 주로 놓여 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제2 전차군단에게는 남은 전차가 거의 없었으며, 제29 전차군단 및 2 근위 전차군단의 측익을 방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10 대전차여단을 지원받아야 했다고 적었다. 이에 의하면, 제2 전차군단은 이 전투에서 어떤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결과적으로, 7월 12일에는 3개 군단이 제2 SS 기갑군단 예하 부대들을 공격했다. 그것은 제18, 29 전차군단과 제2 근위 전차군단이었다.
이로부터 독일군 제3 기갑군단에 대해서는 적어도 150대의 소련군 전차가 7월 12일 새롭게 투입되었으며, 제2 SS 기갑군단에 대해서는 적어도 45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으리라 보여진다. 또한 7월 13일에 프숄 강 북안에서 제2 SS 기갑군단을 향해 추가로 100여 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제2 전차군단과 제2 근위 전차군단이 총합 187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 적어도 120대가 제2 근위 전차군단에 속했다고 가정한다면(80대가 제2 SS 전차군단 쪽을, 40대가 제3 기갑군단 쪽을 상대), 아래와 같은 수치가 얻어질 것이다. 또 제96 전차여단은 전투가 시작될 때 제6 근위군의 예비대로서 61대의 T-34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때는 대략 20여 대의 전차가 기동 가능했으리라 보여진다.
| 전차 및 자주포 | 전투 투입일자 | 교전 상대 | |
|---|---|---|---|
| 제18 전차군단 | 190 | 7. 12. | LSSAH, TK 일부 |
| 제29 전차군단 | 212 | 7. 12. | LSSAH |
| 제1549 자주포연대 | 12 | 7. 12. | LSSAH |
| 제1529 자주포연대 | ? (9) | 7. 12. | LSSAH |
| 제2 근위 전차군단(-) | ? (80) | 7. 12. | DR |
| 제53 근위 전차연대 | 39 | 7. 12. | Ⅲ. Pz.K. |
| 제96 전차여단 (제69군 소속) |
? (20) | 7. 12. | Ⅲ. Pz.K. |
| 제26 근위 전차여단 (제2 근위 전차군단 소속) |
? (40) | 7. 12. | Ⅲ. Pz.K. |
| 제5 근위 기계화군단 중 제11, 12 근위 기계화여단 |
96 | 7. 12. | Ⅲ. Pz.K. |
| 제5 근위 기계화군단 중 제10 근위 기계화여단, 제24 근위 전차여단 |
113 | 7. 13. | TK |
[역주: DR = Das Reich, TK = Totenkopf]
사람마다 프로호롭카 전투를 정의하는데 따라서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이로부터 294대의 독일군 전차들(제2 SS 기갑군단 소속)과 616대의 소련군 전차들(대부분 제2 SS 기갑군단을 상대)이 격돌했다는 것부터, 최고 429대의 독일군 전차들과 870대의 소련군 전차들이 격돌했다는 수준까지로 전투의 규모를 잡아볼 수 있다. 이중 대부분의 서구 역사가들이 프로호롭카 전투라고 일컫는 제2 SS 기갑군단이 참여한 교전에 주목한다면, 로트미스트로프는 제18 및 29 기갑군단과 제2 근위 전차군단 대부분을 7월 12일 제2 SS 기갑군단 부대들을 상대하기 위해 투입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7월 13일 동안에는 대략 제5 근위 기계화군단의 반수 정도가 또 전투에 투입되었다. 측면 엄호임무를 맡고 있던 제2 전차군단은 Das Reich 사단의 일부를 붙잡아놓고 있었다. 독일측에서 본다면, LSSAH 사단은 7월 12일 제5 근위 전차군 부대들을 상대로 한 전투 대부분을 떠맡고 있었다. 7월 12일에 제2 SS 기갑군단에 가용했던 294대의 전차 중 122대 이상을 가지고 있던 Totenkopf 사단은 주로 제5 근위군과 싸웠다. 누가 전투에 대해 규정하건 간에, 쌍방의 전력이 거의 동등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로호롭카 전투의 결과
결과를 논하기전에 먼저 프로호롭카 전투의 범위부터 규정해야 한다. 우리의 정의는 이 격돌은 7월 12일에 시작해서 7월 16일에 끝났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독일군 측에서 제2 SS 기갑군단과 제3 기갑군단이 참여하였고, 소련군 측에서는 3개 야전군(제69군, 제5 근위 전차군, 제5 근위군)이 참여하였다.
우리가 이 5일 동안 전선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주목한다면, 이 전투 결과 양 독일군 군단은 프라보로트(Правороть) 남쪽의 넓은 지역을 탈취하면서 그들의 측익(제2 SS 기갑군단의 우익과 제3 기갑군단의 좌익) 전선을 단축해냈기 때문에, 독일군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프로호롭카 탈취가 목표라고 적시한 독일군의 전투명령을 전투결과와 비교해본다면, 독일군이 그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음이 분명하다. 반면 붉은군대는 제2 SS 기갑군단을 격퇴하고 박살내기를 바랬었다. 이 목표는 완전히 실패했으나, 적어도 제5 근위 전차군은 독일군이 프로호롭카를 탈취하는 것을 막아내기는 했다.
제2 SS 기갑군단은 이 기간 동안 2,672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7월 5~20일 동안 제3 기갑군단은 제2 SS 기갑군단과 비슷한 수준의 사상자를 내었다. 제3 기갑군단이 7월 12~16일에도 제2 SS 기갑군단과 비슷한 사상자를 내었다고 가정한다면, 제3 기갑군단은 이 기간 동안에 2,790명의 사상자를 내어, 격전의 5일 동안 전투에 참여한 독일군 8개 사단은 총 5,462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비정상적이거나 아주 높은 수준이 아니다.
붉은 군대의 인력 손실은 정확히 파악하기가 더욱 힘들다. 남부 지구에서만 붉은 군대는 평균잡아 매일 약 7,576명의 사상자가 났다. 만약 우리가 이 기간 동안 프로호롭카 전투에 참여한 전력(제69군, 제5 근위군, 제5 근위 전차군)의 매일 손실이 그 반인 3,788명이라고 추산한다면, 전투 기간 동안에 소련군은 총 18,940명을 잃은 셈이었다.
한 소련측 기록에서는 제5 근위 전차군만도 7월 23일까지의 방어전에서 약 14,000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3개 야전군에서 18,940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수치는 과장된 수치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주 양호한 가정이라고 보여진다.
그간 전차 손실은 종종 양측 모두에게 똑같이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이야기되었지만,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격파된 전차에 있어 독일군의 손실은 붉은 군대가 겪은 손실에 비해 대단히 적었다. 제2 SS 기갑군단은 7월 5일과 23일 사이에 36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상실했으며, 이중 적어도 19대가 프로호롭카 전투 이전에 격파당했다. 이에 따르면, 제2 SS 기갑군단은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17대 이상 전차를 잃었을리 없다.
[역주: 여기서 말하는 최대 17대 손실은 수리가 불가능한 "완전손실"만을 일컫는 것이다. 그날그날 수리가능한 정도의 피해를 입어 전열에서 탈락하는 손실 규모는 당연히 이 수치의 몇 배가 된다. LSSAH 사단의 기동 가능한 전차 수량이 7월 13일을 고비로 거꾸로 늘어난 것은, 달리 이야기하면 쿠르스크 전투 초반부터 경미한 손상을 입어 수리된 전차들이 대거 복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Totenkopf 사단 통계만 보더라도 7월 13일에는 기동 가능한 전차가 50대 가까이 급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일매일 수리되어 돌아오는 전차가 대략 10~30대 정도란 것을 감안하면, 통상의 기동불능에 빠지는 손실이 이날 이 사단만도 60~80대 정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2 SS 기갑군단에 비해 기갑전력이 적었던 제3 기갑군단은 그보다 더 심한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7월 11일부터 20일 사이의 기간 동안 제3 기갑군단은 37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잃었지만, 이 군단의 모든 부대들이 프로호롭카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 근위 전차군은 7월 16일까지 222대의 T-34, 89대의 T-70, 12대의 처칠 전차와 11대의 돌격포를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모두 완전손실이었다. 이 통계는 총 334대의 소련 전차 및 돌격포가 격파되었음을 이야기하며, 이것은 독일군의 경우 기껏해야 54대의 전차 및 돌격포가 격파된 것과 비교된다. 이것은 소련군의 전차 손실이 적어도 독일군 손실의 6배 이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이 계산에서는 실제 프로호롭카 전투에 참여한 것보다도 더 많은 독일군 부대를 포함시켰기 때문에, 실제 손실비는 더욱 높다.
이 기간의 독일군 손실은 특별히 심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 전에는 그저 무시할만한 정도는 아니던 손실에 추가되었다. 그래도 어떤 독일군 부대들도 재정비를 위해 전선에서 빼돌려지지 않았다. 소련측에서는 제2 근위 전차군단이 재정비를 위해 전선에서 빼돌려졌다.
이러한 제반 사항을 고려해본다면 프로호롭카 전투를 결정적인 독일군의 패배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몇몇 저작들에서는 심지어 제2 SS 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가 프로호롭카에서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그가 제2 SS 기갑군단장 직을 1944년 6월 28일까지 유지했고, 그 뒤에는 노르망디에서의 제7군 사령관을 맡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왜 그런 실수가 일어났는지 참으로 이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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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에 이어서 블로그도 개장하셨군요. 개장 축하드립니다. -ㅅ-/
민혁님, 오랜만입니다. 온라인에서 계속 맹활약이시란 얘기를 들었는데 앞으로도 많이 들러 도와주십시오.
홈페이지의 시대는 가고 웹2.0에 기반을 둔 블로그의 시대가 온 것 같군요. 저 역시 재개장 축하드립니다.
두영님 홈페이지는 꿋꿋이 서 있어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들 많이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블로그가 개장하셨네요. 축하 드려요(저를 기억하실려나?;;;) 자주 들르겠습니다.^^
아무렴 내가 너를 기억 못 할까봐.=_= 들러줘서 고맙고 언제 얼굴이나 보자꾸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이 글을 읽은지 벌써 5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중학생 소년은 이제 복학생 취급을 받을만큼 삭았지만 -_-;; 그 열정은 아직도 식지 않았습니다. 재개장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5년이 지났다는 소리에 뜨끔!했습니다. 저도 그만큼 나이 먹으면서 이거 뭐하고 있는건지 반성합니다.T_T 어쨌건 자주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