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이변(?)을 골라보라면 사람마다, 나라마다 여러가지 선택이 있겠지만 최소한 영국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꼽는 것이 이른바 1940년 봄 '됭케르크(Dunkerque)의 기적'이다. 프랑스에 당당하게 출정했던 영국원정군(BEF)이 바다 건너 이국땅에서 포위, 전멸당하고 영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휘말릴 위기에서 난데없이 독일군이 됭케르크 코 앞에서 3일간 정지하고 영국군이 큰 피해없이 철수하게 된 것은 영국인들 스스로도 놀라운 것이었다. 영국 사가들 중에는 그래서 됭케르크의 기적이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환점이고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등의 과장(?)을 많이들 하기도 했었다. (요즘은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가 되어서 아무도 그런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는다.)

그리고 30만 가까운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영불해협 건너 보내버린 독일군들도 엄청나게 아쉬웠는지 두고두고 전후의 각종 회고에서는 "그때 왜 우리가 정지해서 저들을 보내줬던가!" 하는 통탄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압도적인 물량의 영미 연합군과 사투를 벌인 독일군들로서는 그때 확실하게 전쟁을 끝장냈으면 이런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그럼 과연 무엇이 됭케르크의 실책의 원인이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그들로서도 큰 관심사일 노릇이었다.

이러한 승자, 패자 양측의 지대한 관심 속에 '됭케르크의 기적'의 원인은 대전 직후 많은 이들의 주요한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연구에서 대전 직후에는 자연히 그 비난의 대상이 히틀러에게 집중되었다. 당시 살아남은 이들에게 히틀러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고, 죽은자는 말이 없기에 갖가지 실책의 책임을 덮어 씌우는 일이 횡행했던 것이다. 됭케르크의 기적은 순전히 히틀러의 기이한 광기의 발작에 근거한다는, 학문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악의적인 해석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사건 이후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쳐서 됭케르크는 순전히 히틀러가 망쳐놓은 것이라는 인식이 곳곳에 팽배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 문제에 대한 주요한 책임은 히틀러가 고스란히 져야 하는 것인가? 이미 2차 세계대전사 학계에서 '승자' 또는 '살아남은 자', 심지어 '친서방주의자'들의 일방적인 책임 전가와 판단만이 인정되던 시기는 지나갔다. 히틀러 이외에 다른 독일의 많은 주요 인물들에 대한 실책과 패전의 책임 또한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됭케르크의 기적에 대한 논의도 그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독일군 수뇌부가 A 집단군 소속 기갑부대의 3일간 정지 결정에 이르게 된 과정과 히틀러 말고도 책임을 나눠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이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러한 사건의 책임 소재에 대해 대충이나마 논해보고자 한다. 물론 그 외에도 이 사건에 대한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글 말미에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독일군 수뇌부의 잠재적인 불안감

됭케르크 앞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프랑스 침공이 독일 수뇌부들로서도 정말 고민되고 어려운 사건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에 이어 9월 폴란드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뤄져서 독일과 소련 사이에 영토 분할과 함께 동부로부터의 위협은 한숨 덜었다지만, 오랜 유럽의 강국 영국과 프랑스를 한꺼번에 대적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규제를 깨고 재무장을 시작한지 갓 5년 남짓한 수준인지라 그간의 급격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육군, 해군, 공군 전력 그 어느 면에서건 영-프 연합군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각 군종의 장군들이 더욱 잘 알고 있는 것이어서, 1939년 가을 이후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도가 명확해지자 자연히 군 내부의 반발이 크게 뒤따랐다. 이것은 히틀러 집권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온 군 내부의 반 히틀러 쿠데타 움직임과도 관계가 있었다. 대표적인 반 히틀러 세력이던 베크(Beck)가 OKH 참모총장이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뒤이어 등장한 폰 브라우히취(von Brauchitsch) OKH 총사령관 - 할더(Halder) OKH 참모총장 체제 하에서도 아직 육군은 무모한 정치에 대해서는 강경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체제 수호의 최후 보루는 육군이라는 전통적인 엘리트 의식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1939년 10월부터 히틀러가 영국 및 프랑스에 대한 구체적인 개전 준비를 국방군 전체에 지시하자, 육군의 폰 브라우히취와 할더는 조속한 개전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여기에는 야전 지휘관들도 동참하여 한 목소리로 반대 어조를 높였다. 특히 군 내에서 명망이 높던 폰 보크(von Bock)와, 히틀러도 대단히 호감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군내 친나치 인사 폰 라이헤나우(von Reichenau)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히틀러에게 11월 개전이 불가하다고 계속 설득했다.

Brauchitsch

육군 총사령관 W. v. 브라우히취

Halder

육군 참모총장 F. 할더

Reichenau

제6군 사령관 W. v. 라이헤나우

이런 의견을 히틀러가 받아들이지 않자 실제 육군 내에서는 쿠데타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야전사령관 중에서는 폰 레프(von Leeb)와 폰 비츨레벤(von Witzleben)이 동조하여 히틀러 체제를 전복하고 무모한 전쟁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육군의 주요 사단들은 대다수가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데다 베를린 주변에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공군 대공포부대들과 SS 소속의 부대들이 상당수였으니, 쿠데타를 실행에 옮길만한 전력을 확보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문제가 컸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쿠데타에 동참하기를 주저하던 폰 룬트슈테트(von Rundstedt) 등을 비롯한 다른 주요 야전사령관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쿠데타 논의는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과연 영국과 프랑스와 조속히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할 정도로 신속하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하기만 하였을까? 히틀러는 그 전부터 특히 프랑스와의 대결을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상황에 따라 영국과의 전쟁의 가능성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도 이러한 두 강적과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한때 독일의 전쟁 초기 전술-전략, 국가정책 모두를 단기 속전속결을 염두에 둔, 이른바 전격전(Blitzkrieg) 식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도 있었으나 근래에는 그것은 잘못된 인식임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 전격전은 어디까지나 실험적인 군 일각의 전술적 변혁의 움직임을 전후에 뭉뚱그려 기술하는 막연한 용어일 뿐이었다. 오히려 히틀러는 각종 국가정책에서부터 사태의 장기화를 염두해 둔 총력전 체제를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러한 사실들은 히틀러의 이러한 공격성 뒤편에는 영국-프랑스에 대한 불안감이 오래전부터 깊게 깔려 있었다는 반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잠재적 불안감은 프랑스 침공 개시일자의 잇다른 연기로 나타났다. 육군 수뇌부가 1939년 11월 12일에 침공한다는 지침을 받고서 쿠데타 준비를 할 정도로 불안감에 떨었다지만, 히틀러도 막상 11월에 이르러 여러가지 개전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자 그의 고집을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11월 9일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중립 보장 제안 문제와 육군과 공군의 조율 문제가 대두되자 작전은 11월 16일로 연기되었다. 그리고는 공군마저 나쁜 날씨 때문에 지원이 힘들다는 입장을 펴자 개시일은 다시 11월 19일로 늦춰졌으며, 이후 갖가지 이유가 나오면서 11월 23일로, 11월 27일로, 12월 3일, 12월 9일, 12월 11일, 12월 17일, 12월 27일...에 이르기까지 1939년 중에만 무려 9차례의 작전 연기가 이어졌다. 이어 혹한이 밀려오자 작전은 아예 1940년 봄으로 확 밀려나게 되었다. 히틀러도 약간의 불리하거나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만한 징후가 보이는 족족 최후의 공격 개시명령은 철회하고 연기를 거듭할만큼 주저하는 구석이 있었음은 분명했던 것이다.

육군에 대해 보이던 무모한 듯한 모습과는 달리 공격준비와 취소명령이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자 독일군 장교단 내에서는 히틀러가 뭔가 프랑스 침공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괜히 연막작전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일고는 했다. 히틀러부터 전 군 수뇌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침공은 이처럼 자신감은 커녕 불안감 속에 내던지는 한판 도박이었다.

프랑스전역 개전과 급격한 상황전개

이제 시간을 다시 훌쩍 뛰어넘어 독일군의 본격적인 프랑스전역 — 독일측에서는 주로 서부전역(Westfeldzug)이라고 한다 — 으로 넘어가자. 1940년 5월 10일 일제히 전개된 프랑스전역이야 국내의 경우에도 비교적 많은 서적에서 다룬 바 있고, 필자가 듣기로는 군에서도 기동전의 훌륭한 전례로서 많이들 다뤄지고 있다고 하니 꽤 많은 이들에게 대략적인 사태의 전개 방향은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프랑스전역의 준비라든가 작전 계획이 확정되는 과정 등에 대해서는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 문제들을 여기서 다 설명하자면 글의 주제를 너무 많이 벗어날 것 같고, 분량도 엄청나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일단은 독자 여러분들의 기본 지식을 믿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개괄적인 사항만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이것은 좌익을 맡고 있던 폰 레프의 C 집단군이 마지노선 전면을 견제하는 사이에, 우익에서 폰 보크의 B 집단군이 모루(anvil)의 역할을 하고 중앙의 폰 룬트슈테트 휘하 A 집단군에 배치된 독일 기갑부대가 아르덴느(Ardenne)를 돌파해서 영국-프랑스군 배후를 빙 돌아 망치(hammer)의 역할로 대 포위망을 완성하는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A 집단군에서 뻗어나가 포위망을 둘러치는 모습이 마치 낫과 같다고 하여, 독일군에서는 이를 낫질(Sichelschnitt) 계획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아직껏 2차 세계대전사에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인기있는 회고록이나 저작들에 나오는 것처럼 프랑스전역이 아주 매끈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프랑스전역 초기는 사실 독일이 전격전 전술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경우로 볼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독일군은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에 비해 장비의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 모두에서 확고한 우위에 있던 것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전격전이란건 당시 어떤 구체화된 교리로 자리잡혀있던 것도 아니었으며, 순전히 전차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무지한 구세대의 지휘관들도 많이 있었다. "전격전"이 하나의 구체적인 전술/작전술 체계로서 존재하고 있던 것이 아니며, 또한 독일군이 영-프 연합군에 대한 장비의 열세를 "전격전 교리"의 우수성으로 극복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독일의 신속한 승리를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 근래의 중론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 글을 아울러 참조하기 바란다.

어쨌거나 이러한 시나리오가 먹혀들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최대의 고비는 역시 5월 12~14일에 걸쳐 A 집단군 소속의 기갑사단들이 뫼즈(Meuse)강 남쪽 및 서쪽에서 교두보를 장악-확대하는 과정이었다. 아르덴느의 험한 지형을 빠져나왔을 때 프랑스군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좌우하던 중요한 장애물이 바로 뫼즈강이었으니 독일군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입장에서도 가장 신경쓰는 방어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공군력의 집중지원을 받은 독일군의 집중공격으로 점차 붕괴되어갔다. 5월 14일까지 뫼즈강 교두보에서 고전하던 공격 중추인 제15 군단(호트 지휘), 제41 군단(라인하르트 지휘), 제19 군단(구데리안 지휘)의 3개 군단은 프랑스군의 증원이 차질을 빚으며 5월 15일을 고비로 에느-솜므강 북쪽에서 본격적인 돌파에 성공하게 된다.

Hoth

제15 군단장 H. 호트

Guderian

제19 군단장 H. 구데리안

Reinhardt

제41 군단장 H.-G. 라인하르트

이처럼 거의 완벽하게 독일군의 의도대로 상황 전개가 이뤄지자 히틀러 자신도 "기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막상 대성공의 시작이 보이게 되자 전황을 바라보는 독일군 수뇌부의 시각은 전과는 또 다른 형태의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은 최고사령관 히틀러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히틀러의 1940년 5월 14일자 제11 호 총통지령에서부터 징후가 나타났는데, 이 지령의 4번 항목에서 히틀러는 모든 가용한 차량화사단을 A 집단군 지구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5월 14일 뫼즈강 교두보를 놓고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접전에서 A 집단군 소속 기갑사단들만으로는 돌파를 이뤄내기 힘들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었다. 히틀러로서는 너무나 잘 진행되는 상황이 사소한 실수로 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보다 확실하고 안전하게 승리를 확정지으려는 그의 열망이 여기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고한 OKH 참모총장 할더는 이 지령을 독자적인 판단으로 무시하였다. 할더는 개전 전에야 대 프랑스전을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많은 반대를 해왔으나 막상 뫼즈강 돌파가 이뤄지는 시점부터는 이 시기 독일군 수뇌부 중에서 가장 성공을 낙관하고 계속적인 공격을 선호하던 인물이었다. 할더의 판단은 A 집단군이 확보한 전력으로도 뫼즈강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이제와서 전선을 빙 돌아 B 집단군의 기갑부대를 빼돌려 투입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이전부터 히틀러는 일개 부사관 출신이며 실질적인 대규모 군대 운용에는 무지하다는, 정통파 참모장교로서의 강한 자존심이 깔려있었다.

게다가 이것은 당시 히틀러의 신임이 가장 두텁던 제6군 사령관 폰 라이헤나우도 극력 반대하는 일이었다. 히틀러의 조치가 실행된다면 결국 폰 라이헤나우의 제6군에서 병력을 빼돌려야만 하는데, 대전 전부터 주공이 B 집단군 쪽에서 A 집단군으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많은 차량화부대를 뺏긴 폰 라이헤나우로서는 이를 가만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제6군이 약화된다면 강한 영국-프랑스군 주력을 맞아 싸우고 있는 조공으로서의 역할도 힘들 일이었다. 결국 바이에른 출신의 꼼꼼하고 완고한 참모장교 할더부터 교활한 친 나치 정치군인 폰 라이헤나우까지 반대하는 사안을 히틀러로서도 고집하기는 힘든지라 이 지령은 유야무야 사장되고 만다.

그런데 또 다른 징후가 일선 고위 사령관들에게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5월 15일을 전후하여 폰 룬트슈테트의 A 집단군 사령부 내에서는 뫼즈강을 도하한 다음에 3개 선봉 차량화군단들의 진격을 어디까지 허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잇달았다. 사령부 내에서의 의견도 갈라지기 시작해서 안전한 측면과 후위의 확보를 위해 우아즈(Oise)-상브르(Sambre) 강 선까지만 진격하고 후속 도보 보병부대를 기다리자는 의견과, 지속적인 공격을 계속해야한다는 의견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폰 룬트슈테트는 핵심 주공 방향의 집단군 사령관으로서 마땅히 어떤 명백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지만, 그는 구세대로서 기동전에 대한 감각도 없었으며 거기에 특유의 우유부단함이 더해져서 이 중대한 문제의 결정을 히틀러와 OKH 판단에 맡겨 버린다는 유보적인 태도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어 5월 16일 늦게 전방의 제19 군단 및 제41 군단에게 더 이상의 무리한 진격을 자제하고 우아즈 강에 도달하면 정지하라고 명령한다.

집단군의 상황이 이러하니 클라이스트 기갑집단(Panzergruppe Kleist)을 이끌던 폰 클라이스트 또한 조심스러운 행보를 취하게 된다. 구데리안의 회고록 「Erinnerungen eines Soldaten」 이래 널리 회자되는 5월 17일 아침의 폰 클라이스트와 구데리안의 만남에서는 결국 이러한 양자의 견해가 크게 충돌하고야 만다. 당시 5월 15일 이래 전방으로 맹진을 시작한 독일군 3개 차량화군단의 남측익은 실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당시 랭스(Reims) 북쪽의 에느(Aisne)강 전선에 반격을 위해 집결한 드 골(de Gaulle)의 프랑스 제4 기갑사단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이것이 전면적인 프랑스군 기동예비의 반격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감돌던 터라 상급지휘관으로서는 막무가내로 진격을 허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데리안은 쉴새없는 전진을 통해 포위망을 하루바삐 완성해야 한다고 끝까지 그의 고집을 꺾지 않는 통에 폰 클라이스트가 일시적으로 그를 면직하는 조치까지 내리고 만다. (사실 겉보기와 달리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으며 제4군 사령관 폰 클루게의 중재로 구데리안은 쉽게 복직된다.) 어쨌든 독일군 기갑부대는 일시 정지에 들어갔으며 구데리안의 군단은 몽코르네(Montcornet)를 향해 공격하는 드 골의 제4 기갑사단을 맞아 그다지 쉽지만은 않은 싸움을 벌였다.1

급기야 5월 17일부터는 군 최고 수뇌부 내의 팽팽한 긴장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날 오후 히틀러는 당시 바스토뉘에 있던 폰 룬트슈테트의 사령부를 방문하여 그의 전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강하게 역설하였다. 그제껏 OKW를 통해 지령과 명령을 발령하고, 다소 물러난 위치에서 육군을 재촉하던 것에서 벗어나 직접 A 집단군 사령관에게 영향력을 넣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폰 룬트슈테트와의 회합에서 히틀러가 표명한 두려움은 이러한 승전의 무드에서 프랑스군에게 잘못 일격을 얻어맞아 급격히 독일군의 기세가 꺾이는 것이었다. 즉 한발짝의 후퇴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느니만큼 위험한 맹진격보다는 다소 페이스가 늦어지더라도 안전한 진격이 그가 바라던 바임을 분명히 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히틀러는 1차대전에서 마른의 전투가 끼친 영향을 크게 신경썼다고 여겨진다. 당시 독일군이 급격한 진격을 하다가 마른(Marne)강 전선에서 일격을 먹고 정지했던 사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섣부르게 퇴각명령을 내림으로서 승기가 꺾이고 만 사실을 상기하고 "부단한 진격"을 바랬을 것이다.

Hitler at Bastogne

바스토뉘의 A 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하는 히틀러

Hitler with Rundstedt at Bastogne

바스토뉘의 A 집단군 사령부에서 폰 블루멘트리트와 악수하는 히틀러

또한 5월 17일에는 히틀러와 OKH 사이의 대립 강도가 훨씬 높아졌다. 이날 히틀러는 폰 브라우히취와 할더에게 남쪽으로부터의 프랑스군의 역공 위협에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했지만, 할더의 일기에서는 "가장 불행한 날"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해가며 히틀러와의 의견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할더는 이미 5월 15~16일로서 남쪽에서 프랑스군의 효과적인 반격 기도는 분쇄되었다고 단언하고 진격만이 남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지라 히틀러와 폰 룬트슈테트, 부쉬 등 여러 고위 장교들이 아직도 남쪽에서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이것은 육군의 또 다른 항명으로 이어져서 이날 밤 중에 할더는 폰 브라우히취를 설득하고 폰 룬트슈테트와의 전화를 통한 설전 끝에 기갑부대의 서진을 재개시키라는 명령을 그대로 발령해버린다.

이로서 5월 18일에 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예하 군단들은 프랑스군 후방 깊숙히 계속 진격해나갈 수 있었으나, 국방군 총사령부는 아침부터 격론장이 되어버렸다. 국방군 총사령부에 출두한 폰 브라우히취와 할더에게 히틀러는 육군 판단 하에 발령된 진격 재개 명령에 대한 극도로 불쾌감을 표시했고, 할더 또한 히틀러와 담판을 짓는다는 각오였기에 양측의 논쟁은 오후까지 내내 이어졌다. 이 긴 논쟁은 결국 외면적으로 히틀러와 OKH가 각각 조금씩 물러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할더 등은 그동안 남쪽에서의 위협은 별거 아니므로 제4군의 보병부대들은 북서쪽에서 덫에 걸린 영국-프랑스군 공격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지금은 원문이 남아있지 않은) 1940년 5월 18일자 제12호 총통지령을 통해 제1 산악사단 등 제4군 소속 보병사단들이 그보다는 남쪽 및 남서쪽으로부터의 잠재적인 위협을 방어하도록 배치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켰다. 이를 댓가로 할더와 폰 브라우히취는 그 전날 밤에 내린 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서진 명령이 계속 유효하다는 승인을 얻어내었다. 그러나 양측은 잠정적인 합의안만 도출해내었을뿐,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고 감정적인 대립은 오히려 깊어지기만 했다.

아라스의 전투와 또 다른 위기감

5월 18일의 격론 끝에 히틀러가 독일 기갑부대의 영불해협을 향한 영광의 맹진격을 잠정 승인하는 동안에 이미 대세는 빠른 속도로 독일군 측에 기울고 있었다. 5월 17~18일 경에 시도되었던 남쪽으로부터 독일 기갑부대 후방으로의 역공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프랑스군은 필사적으로 반격을 계획했지만 이미 독일군이 침투한 지역은 통제가 불가능해서 사령부에서도 아무리 명령을 해도 병력 집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벨기에에서 제1 집단군이 포위되는 것은 시간문제임이 명백해졌으며, 5월 19일이 되자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은 이미 해상으로 이들을 철수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8일에 사의를 밝힌 가믈랭은 이틀 뒤에 해임되고 베이강(Maxime Weygand) 장군이 그 뒤를 이어 절망적인 상황을 넘겨받았다.

Gamelin

프랑스군 총사령관 M. G. 가믈랭

Weygand

프랑스군 후임 총사령관 M. 베이강

Gort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J. 고트

이러한 암울해져 가는 상황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조 체제도 위기에 몰아넣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잠재적인 적대의식은 그동안 잠잠해 있었으나 상황이 나빠지자 즉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해서 서로간의 책임 공방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프랑스 쪽이 주도적으로 군 지휘를 행사해온 것에 큰 불만을 가졌던 영국원정군(BEF) 사령관 고트 장군은 독자적으로라도 영국군을 해상으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본국에 타전했으며, 처칠의 전시 내각은 이의 승인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독자적으로 해상 철수를 해버릴 경우 프랑스군 단독으로는 베이강이 필사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제1 집단군의 남서쪽으로의 탈출 계획을 실천할 수 없을게 분명했기 때문에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계속 프랑스군의 지휘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독일군은 이미 5월 20일자로 제2 기갑사단이 아브빌에, 제1 기갑사단은 아미앵(Amiens)에 이르러 솜므(Somme)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제2 기갑사단의 분견대는 이미 영불해협에 도달하여 독일군이 꿈에도 그리던 대 포위망이 완성이 되었다. 독일군 지휘부는 가히 축제 무드였으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건 아니었다. 기존의 상식을 초월하는 신속한 진격이 이어져서 영불해협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후속하는 보병부대의 전진은 너무 느렸다. 제19 군단의 경우 기갑부대들의 측면이 너무 길어지는데 그제껏 며칠간 측익 방어를 후속 보병부대에게 인계하기가 힘들어서 제1, 2 기갑사단이 전진하고 제10 기갑사단이 힘들게 측면을 엄호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으니 히틀러나 폰 룬트슈테트 등 안전을 중시하던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노릇이었다. 솜므강 전선의 인계가 자꾸 지연되면서 제19 군단은 5월 21일 내내 불로뉴쉬르메르(Boulogne-sur-Mer), 칼레 등 영불해협의 항구들로 진격하지 못하고 묶여있어야 했다.

남쪽의 위협에 대한 공포는 한풀 꺾였다지만 이렇게 포위환의 강화가 지지부진한 상황 앞에서 이제는 포위망에 집어넣은 영국-프랑스 연합군들이 남서쪽으로 탈출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다시 독일군 수뇌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때 결정적으로 독일군 수뇌부의 의지를 약화시킨 사건이 바로 유명한 아라스(Arras)의 전투였다.

아라스의 전투에는 바로 유령사단으로 명성을 떨친 롬멜의 제7 기갑사단이 관여한 터라 대략적인 내용들이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The Rommel Papers(롬멜전사록)」 등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상세한 부분은 역시 길게 쓰지는 않겠다. 간략하게는 캉브레 쪽에서 진격을 재개한 제 5, 7 기갑사단 및 SS-토텐코프(Totenkopf) 차량화사단이 아라스를 향해 긴밀히 움직이는 도중에, 약 4개 대대 규모의 영국군이 남쪽으로의 돌파를 시도하다가 저지당한 전투이다.

이 공격은 어디까지나 베이강의 필사적인 탈출 노력에 영국군이 마지못해 협조해준 것으로서, 원래 영국군은 제5 , 50 사단과 제1 전차여단을 아라스 쪽에 투입하고 프랑스군이 2개 보병사단과 2개 기계화사단을 반대쪽에 투입해서 포위환을 뚫어보자는 의도였으나 프랑스군의 집결이 계속 지체되어 공격이 계속 늦춰졌었다. 그 와중에 솜므강 전선에서 독일군의 포위환이 완성되고 호트의 군단이 아라스 전면을 위협하자 영국군이 2개 보병대대와 2개 전차대대로 독일군을 공격했는데, 총 74대의 전차를 장비한 이 2개 전차대대(4th, 7th Royal Tank Regiment2)에는 마틸다 전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틸다 전차는 보병지원 전차로서 무장도 부실하고 기동성도 낮은 약점이 있었지만, 방어력만은 탁월하여 3인치의 장갑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예기치 않은 성과를 가져왔다. 당시 독일군 기갑사단은 극히 빈약한 무장을 가지고 있던 2호전차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데다가 가장 쓸만했던 3호전차래야 37㎜ 전차포를, 4호전차도 단포신 75㎜ 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어서 마틸다의 두꺼운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또한 대전차부대들도 37㎜ 대전차포가 주 무장인지라 마찬가지였다.

5월 21일 오후에 전개된 이 마틸다 전차를 앞세운 영국군의 공격은 그래서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군은 전차포와 대전차포가 무력하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했으며 토텐코프 차량화사단 예하 부대와 제7 기갑사단 소속의 제6 보병연대 등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암담하던 상황은 이날 오후 늦게 사단포병 소속의 야포가 격렬한 탄막을 펴고 전설적인 88㎜ 대공포가 수평사격을 가해 마틸다 전차의 기세를 꺾으면서 간신히 진정되었다. 일단 공세가 한풀 꺾이고 독일군 제25 기갑연대가 저녁부터 나머지 영국군 전차부대와 혼전을 벌이자 영국군은 빠르게 전의를 상실하고 아라스 방향으로 퇴각하여 이날의 위기가 해결되었다.

이날 하루 동안 제7 기갑사단은 무려 89명이 전사, 116명이 부상, 173명이 실종되어 프랑스전역 개시 이래 최대의 피해를 입었다. 롬멜로서도 이 전투는 상당히 놀랍고 힘겨운 것이어서 그는 제7 기갑사단의 피해와 현황을 보고하면서도 단 4개 대대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사단급 부대의 맹반격을 받았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폰 룬트슈테트 이하 A 집단군의 고위 장교들은 모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아직도 강력한 전차를 앞세운 사단급의 반격을 취해 이만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가뜩이나 불안해하던 이들에게 이 사건은 포위망 내의 연합군 전투력이 아직 상당한 수준이라는 판단착오를 일으켰으며, 당시의 진격 페이스를 보다 긴밀하게 가져가지 않으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폰 룬트슈테트와 폰 클루게의 이러한 두려움은 곧바로 히틀러에게까지 이어져 요들은 그의 5월 21일자 일기에서 '히틀러는 보병사단들이 빨리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불안해하여 새벽 1시 반까지도 상황실에 남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틀러에게는 개전 이래로 이어져온 불안과 초조가 한층 가중되는 하루였던 것이다.

5월 22일부터는 솜므강 교두보에 있던 제19 군단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공격을 재개했지만 그때까지도 후속 보병부대와의 교대가 불완전해서 일부 부대는 솜므강 전선에 남아야 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독일군은 전진을 계속하여 제2 기갑사단은 불로뉴쉬르메르 항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제1 기갑사단은 칼레 전면에 육박했다. 그리고 그 우익에서 활약 중인 제41 군단 소속의 제6 기갑사단 및 제8 기갑사단은 생 오메르 남동쪽 일대의 아(Aa) 운하 방향으로 전진을 계속해나갔다. 이러한 기동으로 솜므강 전선의 프랑스군과 제1 집단군 소속의 영국-프랑스군과의 간격은 벌였지만, 이는 영국-프랑스군이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해서였을 뿐이지 독일군도 여기저기 넓은 공간을 급히 메꾸려고 맹진하다보니 방어밀도는 매우 낮아지는 문제를 함께 안게 되었다.

한편 아라스에서의 영국군의 제한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솜므강 전선에서 아직 변변한 공격을 하지 못했으며, 거기다가 아브빌(Abbeville)과 아미앵 등을 탈환했다는 프랑스군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영국은 이미 프랑스군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영국원정군은 베이강 장군의 지휘를 더 이상 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독자적으로라도 전선을 점차 이탈하여 해상으로 철수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마지막 남은 영불해협의 주요 항구인 됭케르크에 대한 독일군의 압력을 덜기 위해 볼로뉴와 칼레에는 오히려 병력을 증원시켜놓고 있었다. 독일군은 신속한 포위망의 소탕을 위해 더욱 압박해 들어갔지만 점차 좁아지는 전선에서 영국군은 철수를 위해, 프랑스군은 희망은 없어도 가장 우수한 A급 사단들이 포진한 제1군과 제7군의 자존심으로 독일군에게 점차 큰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만만하지 않은 완강한 저항 앞에 이번에는 폰 클라이스트가 자제력의 한계에 부딪혔다. 폰 클라이스트는 예하 기갑사단들의 피해가 자꾸만 누적되는데 계속 불안함을 느껴왔으며, 계속 막무가내로 진격만 계속하다가는 이 포위망이 완전히 소탕된 뒤까지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5월 23일, A 집단군 사령관 폰 룬트슈테트와 제4군 사령관 폰 클루게에게 그의 사단들은 이미 2주간의 격전 끝에 반수의 전차가 소모될 정도로 격심한 피해를 입었음을 경고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와 같이 전선이 엉성하게 확보된 상황에서 적이 강력한 전력으로 반격을 취해온다면 기갑사단들은 이를 방어해낼 수 없을 것임을 이야기했다. 예하 기갑부대를 통제하는 지휘관의 이러한 직접적인 표현에 바짝 긴장한 폰 클루게는 폰 룬트슈테트에게 일단 기갑사단들을 현재의 위치에서 정지시키고 전투력을 보존하자고 건의하였다. 안그래도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폰 룬트슈테트는 5월 23~24일 밤 중으로 A 집단군 예하 부대들에게 일단 정지명령을 하달한다. 히틀러가 공식적인 명령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폰 룬트슈테트는 자신의 판단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키려는 의도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기갑부대는 휴식이 필요하며, 포위망에 대한 더 이상의 지상작전은 그제껏 기갑부대 뒤를 쫓아오기 바빴던 보병사단들에게 일임해야 했다.

1940년 5월 24일, 결정적인 정지명령과 됭케르크의 기적

그 다음 바로 운명의 5월 24일 아침, 히틀러는 샤를르빌(Charleville)에 있던 폰 룬트슈테트의 A 집단군 사령부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모두 해상 철수를 할 경우 대규모 전력이 전열에서 이탈하는 파국적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손해를 무릅쓰고서라도 반드시 육로로 솜므강 방향으로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 방문은 이러한 잠재적 불안감이 있던 차에, 5월 17일의 정지명령에도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가장 중요한 지구의 야전사령관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음 방침을 확정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깔려있었다. 그런 마당에 개전 이래 2번째인 이 두 사람의 회합에서 폰 룬트슈테트도 일시적인 진격 정지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히틀러는 크게 고무되었음이 분명하다. 할더를 위시한 OKH와 계속 의견 충돌을 일으키던 차에 폰 룬트슈테트 및 야전 지휘관들이 그와 견해를 같이 한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단 폰 룬트슈테트는 OKH의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육군 내의 최고참 장교였다. 그전까지 히틀러가 그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할 수 없었던 것은 OKW 및 OKH, 각급 야전사령관들이 심중으로는 히틀러의 군사적 자질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총체적으로 반대를 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육군 최고참 장교의 권위를 업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면 OKH의 힘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히틀러의 주장은 공군 또한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 5월 23일 괴링은 육군이 플랑드르에 갇힌 연합군의 포위망을 죄는데 힘겨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고받고는, 이것이 공군이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한다. 당시 프랑스전역의 승리가 거의 확고해져가는 마당에 이런 식으로 전쟁이 끝났다면 대부분의 전공은 육군의 몫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육군이 막판에 고전하는 문제를 공군이 대신 나서 완벽하게 해결할 수만 있다면 공군도 전공의 상당 부분을 가로챌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날 히틀러와 장시간의 전화 통화를 통해 육군이 한발 물러선다면 공군력으로 연합군의 돌파를 막고 항전의지를 꺾어버리겠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히틀러의 간단한 동의가 떨어지자 즉시 OKL 참모총장이던 예숀넥을 통해 OKW 국방군지휘참모부장 요들과 함께 육군이 준수해야 할 경계를 긴급히 합의했다.

The Flanders Pocket

1940년 5월 24일자 플랑드르 포위망 상황

육군에서는 폰 룬트슈테트가 지지하고, 공군 전체가 의욕적으로 나서자 히틀러는 5월 24일 오전 중으로 그의 새로운 명령을 발령한다. 아(Aa) 운하 전선에서 A 집단군 소속의 독일 기갑부대는 다음 공격에 필요한 교두보 이외에는 더 이상 진격을 해서는 안되며, 공군의 작전이 방해받지 않도록 OKW와 OKL이 정한 작전 경계선을 준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군이 이렇게 퇴각을 방해하고 분쇄하는 사이에 포위망에 대한 압박은 B 집단군의 보병사단들이 담당하기로 되었다. 또한 폰 룬트슈테트에게는 OKH의 명령에 상관없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공격을 재개하거나 정지할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했다. 이것이 독일군 제1 기갑사단이 됭케르크 서쪽 20km 밖까지 접근한 상황에서 "됭케르크의 기적"을 만든, 바로 그 명령이 되었다. 또 이날 작성해서 배포한 5월 24일자 제13 호 총통지령에서는 육군의 다음 임무의 비중은 포위망을 소탕한 이후의 작전에 대한 쪽으로 옮겨져야함을 명시했다.

이러한 조치는 또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전까지 육군 운용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지침만 내리고 세세한 명령은 OKH에게 일임하던가, 형식적이나마 OKH와의 상의를 거쳤는데 이번에는 그러한 계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OKW에서 A 집단군에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히틀러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던 OKH로서는 다시 한번 엄청난 반발을 했다. OKH에서는 당시 정보계통의 보고를 종합해볼때 영국-프랑스군이 남서쪽으로 진격하여 포위환을 돌파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으며, 오히려 연합군은 해상 철수를 도모할테니 이것을 막아야 한다는 방침을 굳혀놓고 있었으므로 5월 24일 오후 내내 폰 브라우히취-할더와 히틀러는 이 정지명령의 철회를 둘러싸고 격론을 펼쳤다. 그러나 든든한 지지세력을 업은 히틀러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이에 폰 브라우히취와 할더는 지난 5월 17일 1차 정지명령이 떨어졌을 때 실행했던 조치를 다시 한번 하기로 작정했다. 일단 항명하여 OKH 단독으로 공격 재개 군령을 내린 다음에 사후에 히틀러를 다시 설득해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깊은 논의 끝에 5월 25일, A 집단군에게 히틀러의 명령과 상관없이 공격을 재개해도 좋다고 통보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폰 룬트슈테트가 OKH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전날 히틀러와의 회합을 통해 폰 룬트슈테트는 어느 정도의 자유재량권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OKH의 명령을 실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이를 예하 제대에게 전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히틀러에게 이를 보고해버린 것이다. 역시 히틀러가 노렸던 바가 그대로 맞아들었다. 폰 브라우히취-할더 모두 폰 룬트슈테트의 후배 뻘이어서 이러한 명령 집행 거부에 대해 OKH는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었다. 단지 제4군 사령관 폰 클루게가 호트 기갑집단(Panzergruppe Hoth)이 릴(Lille)을 향해 압박해 들어가는 제한적인 조치를 승인했을뿐, 5월 25일의 A 집단군의 고위 사령관들의 분위기는 담담했다.

그러나 다시 5월 26일이 되자 독일군 수뇌부의 판단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괴링이 호언했던 독일 공군의 맹활약은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 이미 5월 23일 괴링이 공군 단독으로 연합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 Luftflotte 2의 사령관이던 케셀링부터 그것은 공군의 현실적인 능력 밖이라고 개탄했듯이,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못했다. 일단 공군이 그렇게 무능력했던 것은 아니지만, 공군은 지난 3주간의 계속된 지상부대 지원으로 대단히 지친 상황이었으며, 기갑부대의 빠르게 진격하며 전선은 앞으로 계속 이동하는데 비행장은 매우 더디게 확보되던 것이 큰 문제였다. 그때까지도 상당수의 항공부대는 독일 영내의 기지에서 이륙해야 했으므로 실제로 공격을 해야 할 곳까지 도달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전방에 간신히 확보한 비행장들에는 연료나 정비물자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제껏 완전히 소탕되지 않은 연합군이 비행장을 습격해서 항공기들이 다른 안전한 비행장으로 긴급히 이동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마당에 육군이 공군을 믿고 물러서라는 것은 점점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합군이 전면적인 해상 철수를 기도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된 것이 큰 변수였다. 5월 24일까지도 해상 철수가 있어봐야 제한적일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에게도 24일부터 관측되는 됭케르크 일대의 활발한 활동과, 전체 전선에서 일체 반격을 도모하지 않고 자꾸 해협 쪽으로 퇴각하기만 한다는 정황은 남서쪽으로의 돌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히틀러도, 폰 룬트슈테트나 폰 클루게도 분명한 이러한 징후가 확인되는 와중에 가만히 아(Aa) 운하선에 대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폰 클루게는 기갑부대들이 이제 후방의 방호 임무에서 완전히 교대되어 전선으로 모두 집결한만큼 공격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히틀러 또한 됭케르크를 통한 철수만은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는지 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제한적인 전진을 이날(5월 26일) 오후 승인했다. 하지만 역시 차후의 작전을 위해 무리하게 됭케르크로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됭케르크를 포병 사정권 내에 넣는 범위까지의 진격이 허용되었으며 됭케르크에 압박을 넣고 연합군의 퇴각을 막는 임무는 B 집단군 소속의 보병부대들에게 일임되었다.

결국 A 집단군 소속의 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제한적인 진격만 한 채 포병으로 됭케르크를 제압하는 쪽에 비중을 두었으며, 호트 기갑집단은 릴 일대에서 제6군과의 협공으로 프랑스 제1군의 잔존병력을 소탕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멀리 서쪽으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회프너(E. Hoepner)의 제18군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던 공군만으로는 됭케르크를 빠져나가는 연합군을 다 막아내기에 역부족인 지경에 이르렀다. 또 독일군 전반에 승리를 거의 움켜쥐었다는 생각이 만연하면서 5월 27일부터의 공격은 승리를 굳히기 위한 필사적인 공격이 아니라,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이미 확정된 승리를 줏어 담는듯한 가벼운 공격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3세는 독일군에게 항복했으며, 처칠은 총력 철수를 위한 다이나모(Dynamo) 작전을 발령하면서도 차후의 본토 결전을 위해 해군과 공군의 주력을 투입하지는 않았기에 됭케르크의 철수작전은 시종일관 연합군의 비참한 수세 속에 진행되었다.

Table 1. 됭케르크 지구에서 연합군의 철수 통계
해안에서 철수됭케르크 부두에서 철수합계누계
5. 27. - 7,669 7,669 7,669
5. 28. 5,930 11,874 17,804 25,473
5. 29. 13,752 33,558 47,310 72,783
5. 30. 29,512 24,311 53,823 126,606
5. 31. 22,942 45,072 68,014 194,620
6. 1. 17,348 47,081 64,429 259,049
6. 2. 6,695 19,561 26,256 285,305
6. 3. 1,870 24,876 26,746 312,051
6. 4. 622 25,553 26,175 338,226
합계 98,671 239,555 338,226 338,226

하지만 다이나모 작전이 거둔 성과는 대단히 고무적인 것이었다. 영국으로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고, 처칠도 5만명 정도 구출해내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6월 4일까지 영국원정군 23만명과 프랑스군 14만 명, 8만 5천대의 차량이 무사히 영국으로 빠져나왔다. 그것을 결코 승리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로 인해 5월 28일 장시간의 논의 끝에 처칠이 확인했던 계속 항전의 국론에는 한층 힘이 실리게 되었으며, 영국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으로부터의 결정적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5년 후, 영국은 마침내 다시금 독일을 굴복시키며 승전국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됭케르크 목전의 정지명령에 대한 평가

이제 앞에서 됭케르크의 기적을 낳은 5월 24일의 정지명령이 내려지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으니 그에 대한 평가를 해보도록 하자. 일단은 전통적인 논제로 들어가서, 최고 사령관인 히틀러가 왜 그러한 결단을 내렸는지에 대한 학계의 오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히틀러는 도대체 왜 정지명령을 내렸을까?

글 앞부분을 주의깊게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필자가 이미 히틀러의 잠재적인 불안감에 큰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켜 왔음을 눈치채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하셨다면 필자의 글쓰기 실력이 부족함을 탓해주시기를.) 대부분의 전문 연구자들도 이러한 히틀러의 잠재적 불안감이 이 사태의 1차적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는 동의를 하고 있다. 히틀러는 일찌기 프랑스-영국과의 대결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서 많은 공을 쏟았기에 그 전과는 사뭇 다른 이러한 백척간두의 결전에 배짱만을 튕기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직업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군인이 아니라, 감각이 뛰어난 정치가였기에 군사적인 엄밀성에 근거한 전황파악에는 아무래도 다소간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히틀러의 약점과 뒤로 어딘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두고 소심하고 기회주의적인 정치가의 모습 쪽으로 몰고가는데 논거로 쓰기도 하지만, 필자는 그 정도까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도 많이 지적했지만 히틀러의 불안감은 그 혼자만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히틀러와 유사한 고민은 폰 룬트슈테트를 비롯해 야전의 고위 지휘관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는 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이전보다도 훨씬 빨라진 고속기동전의 상황 전개에 당혹감을 느꼈다는 분석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소위 전격전 이론은 당시에 육군에서도 명백한 교리 체계로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몰트케 이래 독일 육군의 전통적인 집중 원리와 기동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던 다소 막연한 개념이었다. 독일군이 베르사이유 조약의 제약에 묶여 있다가 재무장 이후 급격한 확장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있는 신진 세대들이 대거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역시 육군의 고위층은 과거 프로이센 육군 이래의 엄격한 전통적 가치에 물들어있는 이가 대다수였다. 그들이 동의한 원칙이란 유효한 화력과 기동력을 지닌 기갑부대를 집중점(Schwerepunkt)에서 대거 운용하여 고착상황을 타개하고 돌파구를 형성하여 포위섬멸전으로 유도한다는 것이었지, 끊임없이 기갑부대 단독으로 적 깊숙히 계속 질주시켜서 후방을 마비시킨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특히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 준 전차와 기계화부대라는 수단에 대해 기술적으로 이해가 부족한 장군들은 기존에 비해 훨씬 향상된 스피드와 탄력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을 떠나, 논리적으로도 고속기동전이 과연 얼마나 실현가능한 아이디어인가 회의를 품을만한 여지는 대단히 많았다. 독일은 후방지원 체계가 아주 발달된 나라도 아니고 상당수의 보급이 철도를 기반으로 마필에 의존했기 때문에 구데리안 등이 추구하던 수준의 기동전을 지원할만한 바탕이 불충분하다는 인식도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실제 B 집단군의 경우 그렇게 격렬한 기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급 추진의 곤란함을 겪을 정도였고, A 집단군은 후속 보병부대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던 상황인지라 많은 부분에서 항공 보급에 의존하여 진격을 해나갔다. 그럼에도 독일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전역 초기에 탄약 소모가 예상치보다 적어 탄약 추진에 필요했던 여력을 연료 보급 등으로 돌릴 수 있던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Table 2. 프랑스전역 전기 독일군 전차 완전손실량 통계
Pz. IPz. IIPz. IIIPz. IV35(t), 38(t)총계
5. 10. ~ 5. 20.414526141127
5. 21. ~ 5. 31.101150846387485

그리고 독일군의 전차 전력도 아직 전투력이 빈약한 2호전차가 상당수를 차지하던 관계로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전차에 비한 상대우위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포위망을 완성시키고 죄어들어가던 5월 20일 이후 전차 손실은 빠르게 증가했다. 위 통계에서는 "완전손실량"만을 열거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손실이 적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 고장이라든가 경미한 수리가능한 손상으로 행동불능에 빠졌던 전차들은 통상 이러한 완전손실량의 2~3배에 이르기 때문에 당시 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나 호트 기갑집단이 입은 피해 규모는 히틀러 뿐만이 아니라 폰 클라이스트, 폰 클루게 등 현장에 가까운 독일군 지휘관들이 관찰하기에도 매우 위험천만한 수준이었다.

특히 5월 24일의 일시정지 시점에서는 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예하부대의 배치가 너무 엉성했다. 솜므강 하구에서 아(Aa) 운하선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에 걸쳐 독일군의 밀도는 대단히 낮았으며 그 넓은 공간을 장기간 동안 계속 힘들게 전투를 치뤄온 4개 기갑사단들이 이리저리 쪼개져서 솜므강 전선, 볼로뉴-칼레 전선, 아 운하선 등 곳곳을 지켜야만 했다. 집중된 공세점이 없이 여기저기 폭넓게 분산된 기갑부대의 방어능력은 제대로 검증된 바도 없었으며, 독일군의 전통적인 교리에서 용납되기 힘든 것이었다. 이날의 결정은 분산된 기갑사단들이 다시 각자의 목표에 맞게 긴밀하게 집결할 필요가 가장 큰 요인이었으며, 폰 룬트슈테트도 미리 작심했다시피 야전에서도 의외로 큰 반발은 없었다는 것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히틀러가 아주 비정상적으로 모든 장군들의 반대 하에서 독단적인 주장을 한건 아니었다.

단지 문제가 된 히틀러의 결정적인 오류였다면 포위망에 갇힌 연합군이 남서쪽으로 돌파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여 이 25일 이후에도 연합군의 해상 철수 가능성을 경시하고 쉽게 기갑부대들을 풀어주지 않았다는 점과, 괴링의 말에 혹해 공군의 역량을 과신하였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것도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무능함에 그 원인을 두는 반면에, 또다른 쪽에서는 히틀러의 육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여 공감대를 얻고 있다.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항상 휘하 조직들의 경쟁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던 히틀러로서는, 프랑스전역이 성공적으로 종결될 경우에 육군의 위상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커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구석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전역 중에도 OKH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령에 대해 항명을 하고 폰 룬트슈테트의 권위를 빌려와서야 명령이 먹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육군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며 끌려다닐 수는 없었으니, 공군에게도 충분한 전공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괴링의 주장에 솔깃했을 것이라는 설명은 필자에게도 상당히 그럴듯하게 와닿는다. 군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받지 못하며, 그렇다고 강권으로라도 확고한 통제의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면 국가 지도자로서의 생명을 보장받기는 힘든 노릇이다. 25일 내내 반대의견을 개진한 OKH에게 당장 설복하지 않고, 26일에 이르러 OKH의 기세가 어느 정도 주춤할 정도가 되어서야 연합군의 대규모 해상 철수 의도와, 공군의 무력함을 인정하게 된 것도 상황의 불안함에 더해 이러한 육군에 대해 누적된 불만과 견제심리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2차 세계대전기 히틀러의 통치 스타일에서도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프랑스전역 이전만 하더라도 군에 의한 쿠데타 위험이 극심했고, 앞서 봤다시피 전역의 진행 중에도 육군의 반감이 심해 히틀러가 OKH의 군령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2차의 정지명령을 둘러싼 사건을 통해 히틀러는 육군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생각되던 작전 실행 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OKH를 통하지 않고서도 집단군 사령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고 재량권을 부여하는 선례를 남김으로서 점차 그의 권한을 강화시킨다. 한편 육군 입장에서는 여기서 히틀러에 대해 어떤 통일된 주관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이후 종전에 이르기까지 점차 인사권자인 히틀러에게 끌려다니는 길로 접어들고 만다.

영국에 대한 정치-외교적인 고려는 없었을까?

그런데 이것만으로 히틀러의 정지 결정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측에서는 히틀러가 막후에서 영국과 어떠한 형태의 외교적 해결을 희망했기에 의도적으로 영국군을 놓아준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상당한 수준으로 대두되었다. 게다가 이 설의 진원지는 히틀러의 주변 인물도 아니고 바로 히틀러 그 자신이었다. 히틀러는 됭케르크에서 생각보다 많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해상으로 철수하게 되고 그 책임에 대한 의혹이 이는 듯 하자, 이후 벌어진 여러 정부 관료들이나 장교들과의 회합에서 영국과의 적대적 상황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조치였다는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중의 몇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은 「The German Generals Talk」에 나오듯이 리델-하트가 당시 폰 룬트슈테트의 작전참모였던 폰 블루멘트리트로부터 들은 증언이 있다. 5월 24일 운명적인 결정이 내려지던 바로 그 날, 샤를르빌의 A 집단군 사령부에서는 히틀러와 폰 룬트슈테트, 그리고 폰 블루멘트리트 등 참모장교들이 배석한 회합이 있었다. 폰 블루멘트리트는 그 당시에 히틀러가 대단히 유쾌한 어조로 당시 상황이 기적적으로 잘 이뤄지고 있음을 인정했다고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영국이 존재해야 하는 필요성, 영국이 기여한 문화적 업적 등을 들며 대영제국을 찬양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중략)…… 그(히틀러)가 영국에 원하는 것은 단지 대륙에서의 독일의 입장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중략)……히틀러는 영국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군대를 동원해 돕기도 할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중략)…… 영국이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조건 하에서 평화를 맺을 것이라며 그는 말을 끝냈다.

그러면서 폰 블루멘트리트는 폰 룬트슈테트가 이날 히틀러와 정지명령에 함께 동의한 것은, 전쟁의 끝없는 확전을 바라지 않고 있던 폰 룬트슈테트의 입장에서 히틀러가 영국과 적당한 선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대로라면 이미 이전에 히틀러는 영국에게 치명타를 가할 의도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또 히틀러의 비서였던 크리스타 슈뢰더의 회고록에서는 "군은 영국의 중추세력이다…… 우리가 그 등뼈를 부수어 놓는다면 대영제국도 그와 함께 파괴된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물려받을 생각도 할 수 없고, 실제 물려받을 수도 없다…… 내 휘하의 장군들은 그런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이후에도 종전 가까이까지 그는 주변의 측근들이나 다른 장군들에게 영국을 자존심을 어느 정도 유지시켜 주는 선에서 영국과 평화적인 세력 분할 구도를 만들고 싶었다는 투의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실제 독일 핵심부에 있었던 많은 인물들은 이러한 주장이 주 요인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당시 상황이 어쨌건간에 그만한 외교적 고려가 없었던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쪽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침 같은 기간 영국에서도 처칠같은 대독 강경론자와 핼리팩스 등의 대독 유화론자들 사이에 차후의 정책을 두고서 여러 긴박한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을 거론하면서 영국과 어떤 막후 접촉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시키던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학계의 중론도 그렇고, 필자의 판단으로도 이러한 히틀러의 대영 유화책의 일환으로 됭케르크 목전에서의 정지명령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히틀러가 측근들에게 영국에 대한 긍정적인 말을 한 만큼, 거꾸로 다른 원사료들이나 증언들에서는 히틀러가 영국을 확실하게 굴복시켜 독일의 패권을 공고히 하자는 강경한 방침을 역설한 것들도 많이 확인된다. 히틀러가 블루멘트리트가 증언한 것처럼 정말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나, 또한 20만이 넘는 영국군을 코앞에서 놔주고자 할 정도로 영국에 대한 배려를 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각종 지령이라든가 그의 실제 행동에서 설명이 되지 않은 부분이 참으로 많이 나타난다. 히틀러가 영국과 해양세력-대륙세력 식으로 공존하며 패권을 나눠가진다는 발상은, 히틀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집권 중기 이후 철회된 생각이었다는 주장이 상당하다.

그래서 이러한 영국에 대한 우호적인 말은 히틀러가 그 후에도 종종 써먹었던, 정치-외교적인 수사를 이용하여 직업정신이 투철한 관료들과 군인 계급을 입막음하려는 조치가 아니었는가 하는 설명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보인다. 군사적인 견지라는 이유를 들면서 육군의 전문 장교집단을 설득한다면 가뜩이나 부사관 출신이라고 멸시하던 장교들이 제대로 들을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블루멘트리트가 이야기하는 폰 룬트슈테트를 설득하는 과정도, 평화쪽에 무게를 두고 있던 폰 룬트슈테트의 소심한 특성을 알고 있던 히틀러가 그를 확실하게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작정하고 한 말이 아닐까? 또한 이 일 이후 의혹을 가지는 이들에게 이것은 군사적인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에 의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함으로서 히틀러는 자신의 판단착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에게 할만큼 했으나 영국이 신의를 저버리고 호전적으로 나가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과연 히틀러만 책임질 문제였는가?

이제 또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 히틀러 이외의 책임소재에 대해서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상에서 보았듯이 히틀러의 잘못된 결정에 대한 부분에 대해 쉽게 책임을 면해줄 수야 없지만, 그 과정에서는 어떤 뜻이었건 많은 독일군 장교들이 연대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일단, A 집단군 사령관 폰 룬트슈테트의 책임에 대해 보다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폰 룬트슈테트는 그의 전후 각종 회고에서 이 됭케르크 목전의 결정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히틀러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앞에서 본대로 이것은 그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폰 룬트슈테트는 첫번째 5월 17일의 정지 결정에서는 그 스스로의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우유부단한 자세로 일관하여 히틀러의 뜻에 따랐다. 두번째 5월 24일의 결정에서도 본인은 히틀러의 그럴듯한 말에 속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포위망 내의 연합군의 탈출 시도를 두려워하며 기갑부대의 정지를 생각해뒀다는 것이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다.

거기에 더욱 치명적인 것은 5월 24일의 결정이 군사적으로 합당한 것이었다고 보더라도 이후의 사태 전개에 있어 그의 최고참 장교로서의 권위가 OKH의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이용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분명히 그 시점에서의 됭케르크로의 공격 재개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판단했다면 5월 25일에 OKH가 공격 재개를 허가한다는 명령을 내렸을 때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재촉에 대해 히틀러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등의 조치로 OKH와 히틀러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데 한몫을 하였다. 폰 룬트슈테트의 이러한 기동전에 대한 몰이해, 다소간의 우유부단함은 이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을 전후한 서부 방어전에서도 독일군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또한 공군 총수로서 괴링의 문제도 짚어놓을 필요가 있겠지만, 괴링의 문제야 워낙 여기저기서 많이 다루고 그의 공군에 대한 무모한 과신은 국내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니 역시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과거에 에른스트 룀이 그랬고, 한켠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그랬듯이 자신이 관여하는 군사조직으로 전통의 육군을 대체하며 권력의 정점에 서보려는 야망은 끊임없는 제3 제국 내부의 갈등을 조장했고 히틀러가 그 사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시키는데 아주 톡톡히 이용해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을, 이 됭케르크 목전에서 일어난 사건에서도 절절히 음미해보시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됭케르크 목전의 정지결정에 대해서는 당시 프랑스전역에 중요하게 관여했던 군단장급 이상 모든 고위 지휘관들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됭케르크 목전에서 정지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전후에 회고하던 것처럼 진짜로 당시 고위 지휘관들이 벌집 쑤신듯한 반응을 보였는가? 하면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이다. 그 당시 고위 지휘관들 중에서는 이 일로 앞으로 영국과의 전투가 힘겨워진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일단 그들에게는 눈앞에 기적처럼 닥쳐온 엄청난 승리의 무드가 온통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 30만 명 이상이 빠져나갔지만 그 뒤에 거둔 전과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독일군은 됭케르크와 기타 포위망 소탕을 통해 10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으며, 프랑스군의 정예부대 25만명 이상을 전열에서 탈락시켰다. 또한 1800문의 포와 930대의 장갑차량을 노획했다. 1차대전에서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라이벌 프랑스의 주력을 섬멸했으니, 곧 다가올 프랑스 내륙으로의 본격적인 진공에서 더욱 큰 승전가도를 달릴 생각에 사실 됭케르크에서 결사적으로 전투를 벌일만한 의지는 그들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이미 한풀 꺾였었다고 보는게 올바른 시각이다.

그리고 1940년 6월 이후에는 너나할 것 없이 이러한 프랑스에 대한 대승의 전공 차지하기에 바빴지 됭케르크에서의 정지가 그토록 실책이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나오고, 히틀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한 것은 독일의 무리한 확전이 소련에서 그 참담한 패배를 맛보고 전세가 연합군 측에게 기울고 나서 부터였다. 또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패전으로 끝나자 마치 패전의 분풀이마냥 망자에게 그 비난의 화살을 돌렸을 뿐이다. 역사 한가운데 놓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면해보고자 하는 그런 궁색한 행동들이 이해는 가지만 답답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듯 하다.

유명한 말 중에 "승리는 너도나도 자기가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패배는 아버지 없는 사생아 취급을 받는다" 라는 것이 있다. 됭케르크의 기적은 독일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너도나도 자기가 프랑스전역 승리의 주역으로 나서고 싶어 안달하는 사이에 태어난, 아무도 전후에 책임을 떠맡기 싫어한 사생아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아버지가 히틀러라고 떠넘겼다. 하지만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법이다. 자신만의 비밀을 품고 죽어간 이들을 놓고 누가 그들을 됭케르크에서 정지시켰는가? 에 대한 해답을 결코 완벽하게 얻을 수야 없겠지만 아무쪼록 필자 나름대로 정리한 이 글이 그러한 의문을 풀어가는데 작은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Article History.

2000. 02. 23. 하이텔 군사동호회 게재.
2001. 02. 03. Periskop 수정판 게재.
2007. 04. 12. Periskop 재게재

Notes.
  1. 몽코르네 전투에 대해서는 본 사이트 포럼의 관련 글1, 관련 글2-1, 관련 글2-2, 관련 글2-3을 참조하기 바란다.
  2. 영국군 기갑부대의 Regiment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대대급 규모이고, Brigade가 연대급 규모이다. 이 때문에 문헌에 따라서는 Regiment를 직역하여 연대라고도 하고, 의역하여 대대라고도 한다.
2007/04/12 15:56 2007/04/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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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영훈 2007/04/14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다이나모 작전이 성공한 이유가 너무 궁금했을 때, 이 글을 읽고 속시원히 풀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보니 새롭네요^^

  2. 조명신 2007/12/31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갈게요^^

  3. 황상규 2008/03/06 0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룬트슈테트에 관해서인데요, 그는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전역을 했다가 군에 복귀한 사례로서 군생활의 절반을 장성으로 복무한 군인인데요, 왜..보통 프러시아의 대령견장을 장군견장대신에 달고다녔는지요?! 무슨 명예로운 이유가 있는건지?! 혹시 아시는가요?!

    • Periskop 홈지기 2008/03/06 15: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럽의 많은 군대가 그렇지만 독일군도 각 지역 연대의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장교들이 장군으로 진급해서도 과거 복무한 연대번호가 찍힌 견장 등을 패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룬트슈테트는 장군으로 진급하기 전에 제18 보병연대에 오래 몸 담았다가 대령으로 연대장까지 역임했습니다. 그도 군 경력의 상당 기간을 보낸 제18 보병연대와의 인연을 매우 소중하게 여겨서 나중에도 연대장 시절의 복장에 견장만 장군 견장을 달기를 즐겨한 겁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 들어서자 룬트슈테트가 군내 최선임 장교가 되다보니 복장을 자기 맘대로 하고 다녀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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