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원 님께서 포럼에 올려주신 1차 세계대전 당시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병역 거부에 대한 글을 보니, 역시 굵직한 분쟁 때마다 접경지역의 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애환이 생각난다. 사실 알자스(Alsace, 독일어로는 엘자스Elsass)-로렌(Lorraine, 로트링엔Lothringen) 지역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에 묘사되는 국어 사랑, 나라 사랑의 모습으로 기억되고는 한다. 그러나 역시 머리가 크면 교과서에서 주입하던 내용과는 다른 이야기가 자꾸 들어오는 법이다. 제주도, 오키나와, 쓰시마 등과 마찬가지로 알자스-로렌을 위시한 유럽의 변경, 접경지역 사람들도 뚜렷한 일국의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고 많은 혼란을 겪었음을 알고는 국민국가에 대한 환상이 깨졌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우연히 다른 책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한 번 더 갖게 되었다. 이 바닥의 서양사 서적에 죽 관심을 가져오신 분들이라면 작년 말에 나온 「비시 신드롬」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책은 언론에 서평도 꽤 실린 편이었다. 보수언론 측에서는 이번 정권 초기부터 이슈였던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흔히 모범 사례라고 언급되는 프랑스의 나치 청산의 허구성을 파헤친 저작들이 나올 때마다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하여 소개해왔으니 말이다. 필자는 보수언론의 논조에 그리 찬성하는 편은 아니지만, 드골과 그 일당이 만들어낸 레지스탕스 신화에 대해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라 꽤나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이 「비시 신드롬(Le syndrome de Vichy)」은 독일 점령 치하 시기를 주목한 것이 아니라, 전후 프랑스에서 벌어진 논쟁과 사건들 속에서 그 시기가 어떻게 기억되고 재평가되었는지 살펴보는 재밌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꽤나 참신한 시도에 매우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보면 전혀 관계없을 것만 같던 두 가지 문제가 엮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944년 6월 10일, 프랑스의 오라두르-쉬르-글란(Oradour-sur-Glane)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무장친위대의 집단 양민학살 사건이고, 또 하나가 알자스-로렌의 강제징집자 문제이다.

오라두르 학살 사건은 독일 무장친위대의 대전 중 범죄행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다 들어보셨을 것이다. 아돌프 디크만(Adolf Diekmann) 소령이 이끄는 독일 제2 SS 기갑사단 제4 SS 기갑척탄병연대("Der Führer") 3중대 병력이 당시 이곳에 독일 장교가 구금되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출동, 마을 주민 642명을 몰살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죽인 방법도 잔인하기 그지 없어서, 마을 남자들은 헛간에 가두고 다리에 기관총질을 해서 쓰러뜨린 다음에, 불을 질러 죽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 여자와 어린이들까지 교회에 모두 몰아넣고 역시 송두리째 불을 질러 죽였다는 끔찍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학살극을 단죄하기 위한 재판은 1953년 1월 12일 보르도 군사법정에서 개시되었다. 그리하여 해당 부대("Der Führer" 연대 3중대) 소속이었던 21명이 피고인석에 서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가운데 14명이 알자스 출신 프랑스인이라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가운데 12명이 무장친위대에 강제징집되었고, 1명은 자원입대, 1명은 불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묘한 피고인 분포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Das Reich" 사단이 1944년 초까지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큰 손실을 입은 뒤에 재편성을 위해 알자스 출신 병사들을 대거 끌어들였던 사정이 있다. 알자스-로렌 지방 청년들이 독일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징집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다가, 대전 말기에는 인력 부족 때문에 많은 수를 무장친위대에 떠 넘긴 것이었다. 결국 정작 학살을 주동한 디크만 소령 등 다른 부대원들은 이후 노르망디 교두보와 아르덴느, 헝가리에서의 격전 와중에서 많은 수가 전사했는데 반해, 알자스 출신 부대원들은 대부분 사단의 패주 과정에서 탈영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탈영 정도로는 전후 생활을 안심할 수 없던 그들은 많은 수가 또 프랑스 국내군(Forces Françaises de l'Intérieur, FFI)에 입대했다 — 이와 관련된 유명한 조직이 바로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가 지휘했던 알자스-로렌 독립여단(BIAL)이 있었다. 일부는 추가로 전후 인도차이나 복무까지 나섰다고 한다. 이러한 점이 정상 참작되어 대부분의 기소자들은 이미 전쟁 중의 행위에 대해 면소 조치되어 고향에서 잘 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오라두르 사건 재판을 하려고 보니 세울 수 있는 독일인 병사들이 너무 적어, 1948년 9월 15일자 소급법을 적용하여 잡아들이기 쉬운 이들 알자스 출신 병사들을 세웠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알자스 지방의 여론은 심하게 들끓었다. 알자스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은 이미 전쟁 중에 충분한 고통을 겪었으며, 이런 식으로 이중의 고통을 줘서는 안된다고 항변했다. 이러한 거센 항의를 받고 프랑스 의회는 1주일 뒤인 1월 28일 수정법률안을 통과시켜 이러한 전시범죄에서 독일인과 프랑스인을 분리하여 심리할 수 있도록 길을 터놨다. 프랑스 출신들은 원치 않은 범죄를 저질렀을 개연성이 크니까 독일인과 동일 선상에서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조치로 알자스 병사들은 크게 감형될 것으로 기대되어 잠시 여론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2월 13일의 선고에서 알자스인 하사관 1명이 사형(다른 독일인 하사관 1명도 마찬가지로 사형)을, 나머지도 4~8년의 중노동형(다른 독일인 병들은 8~12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자 다시 알자스 여론은 폭발했다. 결국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논의 끝에 강제징집자들에 대해서는 사면 쪽으로 가닥을 잡고 2월 19일에 법안이 통과되어 2월 21일에 알자스 출신 병들은 모두 석방되었다고 한다. 재판의 공정성이 시들해지며 급기야 다른 독일인 병사들도 감형되어 1959년까지 단계적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 속에서도 근대 이후 지배적으로 자리잡은 민족국가 대 민족국가의 관점 속에서 쉽게 매몰되는 접경지역의 정체성 문제가 절절히 확인된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주인공 오스카에게 그의 할머니가 소수민족 카슈벤 인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던 부분이 기억 나시는가? 마찬가지로 알자스-로렌 사람들 입장에서는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입장에서 그때그때 세력 구도에 따라 바뀌는 국적에 맞추기 위해 독일 무장친위대와 프랑스 국내군을 왔다갔다 해야만 했고, 그러면서도 양측의 주류에 의해 끊임없이 의심받는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딜레마 속에서 반인류적 범죄를 심판하고 과거를 청산한다는 오라두르 사건 재판도 결국에는 그들의 국적만큼이나 모호한 정치적인 문제로 귀결되어 어정쩡하게 미봉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2차 세계대전의 미시적 전쟁사도 흥미롭지만, 이러한 예들에서 보듯이 전쟁이 드러낸 복잡한 내재적 갈등구조와 전후의 해소과정도 꽤나 의미가 있는 성찰의 대상이라고 여겨진다. 2차 세계대전의 뒷수습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 중간에 위치한 애매한 현실의 존재들로 인해 골머리를 싸맨 유럽. 한국은 과연 그런 역사를 되새기며 극단화되는 대립 구도 속에서 현명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유럽 얘기를 들먹이면 한국적 특수성이 제깍 제기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잘 될지는 두고 볼 노릇이다.

p.s. 오라두르 학살 사건은 그 자체로도 매우 다면적인 고찰이 필요한 주제이니 자료가 더 보강되는대로 따로 그 진실에 대해 논해볼까 한다.

2007/04/08 20:41 2007/04/0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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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빨 2007/04/08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솔직히 알사스인들의 감정은 그냥 변경인의 애환 정도로 이성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고 넘어가기에는 좀 문제가 있는 그냥 제집 식구 감싸기 같네요. 만약 저 학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같은 지역 알사스인이 아니라 자기 식구라고 해도 부끄러워질 일일것 같은데...

    강제복무했다고해서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식으로 따지면 징집제에서의 전쟁범죄의 경우 사병들은 모두 면책되겠네요. 미라이 학살에서의 아메리칼 사단 찌질이들도 그렇고...(뭐 장교의 명령이나 묵시적 지시 없이 사병들이 자발적으로 저지른 범죄의 경우는 처벌가능하겠군요)

    저 알사스인들이 만약 독일 징집병들이 알사스인에게 저런 짓을 했다면 그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서 '강제복무'이니까 용서해주겠다고 할까요? 독일 징집병들도 학살의 현장에서 명령을 거부했다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될 운명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일텐데.

    한줄 요약하면 강제복무자가 전투행위에 참여하는 문제와 강제복무자가 전쟁범죄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것 같다는 겁니다. (변경인의 애환 같은 것은 전투행위 참여나 부역행위 문제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샤를마뉴 사단 친구들과 알사스출신 친구들을 구별하는 경우에나 통하는 이야기 같다는 거죠.)

    인간은 너무 감정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자기중심적 행동을 굳이 '변경인의 애환'이니 뭐니하면서 이해해주고 싶지는 않군요.

    • Periskop 홈지기 2007/04/09 0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옳은 말씀입니다. 학살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면야 강제징집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하고 나설 필요도 없겠지요. 뭐 저도 그 알자스 병사들이 정말 잔인한 학살범이라면야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그렇게 상식적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문제임에도 전후 알자스는 물론 프랑스 전국적으로 저 문제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고 프랑스 의회에서 사면법까지 통과시켜줬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지 않습니까?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반인륜적 범죄라는 문제 조차 전후 국내정치 문제와 국적을 가려가며 조정되고 흥정되는 과정입니다. 이건 독일과 프랑스 모두에서 나타나던 현상인데, 68세대가 등장하기 이전인 1950~60년 대에는 모두가 공범이라는 잠재인식 속에서 되도록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제식구 감싸기", "진실 은폐"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알자스-로렌 인들의 처사가 의외로 광범위한 공감을 얻게 된 상세한 내막이 궁금해집니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우리나라의 머리 숱 없는 모 전직 대통령이 절간에 의탁했다 감옥에도 갔다 사면도 되었다가 29만 원의 기적도 시현했다가, 고향에는 기념공원이 세워지네 마네 논란이 반복되는 구조와도 비교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오라두르 학살 그 자체의 진실입니다. 일각에서는 재판이 저렇게 유야무야된 것이 정치적 이유 뿐만 아니라, 학살을 깊이 따지고 보니 진실이 너무 모호해서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사후 연구를 보면 일각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갇혀 있던 교회의 비극이 독일군의 방화가 아니라 도망치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마키스)의 실화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홀딱 타버린 것은 마키스가 교회에 숨겨놓은 탄약이 유폭되면서였고, 일부 독일병들은 구출에 나서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지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오라두르 관련 자료를 충분히 교차 확인해보지 않아서 확신이 없는지라 말을 아끼는 중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설'들의 진위에 대해 확인 중인 정도니까 어디서 제가 오라두르 학살을 부정했다고 그러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2. 라피에사쥬 2007/04/09 0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사건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흥미롭네요. 한국은 아직 전쟁범죄의 개념을 정의하지도 못했고, 이에 대한 여러 관점이 확고히 정립된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논의는 체계적으로 진행된다기 보단 여론몰이로 끝나는 것 같아서 앞으로도 관련 문제에 대해선 별다른 진전이 없을것 같습니다. 섣불리 직접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일단 이런식으로 충분한 사전지식을 확보해나가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7/04/09 0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그간 보면 2차 세계대전 중 집단학살과 관련된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논의를 질퍽하게 만들기 때문에 되도록 피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학살 자체의 진실을 받아들여도 다른 역사적 맥락과 연계되어 후대에게 어떻게 해석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이게 우리나라가 떠안고 있는 과거사 인식 문제와 공통점이 많거든요. 결국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더욱 많이 받아들이고 진전된 논의의 밑바탕을 단단히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3. 장갑냐옹이 2007/04/09 2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아는 오라두르 쉬르 글란 학살 경위도 채승병 님과 같습니다. 납치된 장교가 토벌 장교인 데어 퓌러 연대 1대대장 오토 딕만 SS소령의 친구였더군요. 친구를 구하고자 게릴라들을 쓸어버리는 장면까지는 기술이 나름대로 상세한데, 문제는 그 뒤더군요. 모처에서 발행된 다스 라이히 사단사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학살이었습니다. 게릴라 토벌 후 다짜고짜 가옥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 더욱이 3중대는 여성과 어린아이 400여 명을 교회에다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고 기술되어 있었죠. 더욱이 몰아넣는 과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했다고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내용만 보면 히틀러유겐트의 캐나다군 포로 학살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참혹 그 자체더군요. 학살당한 어린 아이들의 생전 사진까지 기재되어 있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데어 퓌어러 연대를 인간 망종 집단으로 매도 할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단순한 오해인지 모르겠습니다. 학살 관련 기술이 너무 짧아서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아무리 인간 망종이라도 여성과 어린아이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한다는 게 아무리 해도 상상이 안 됩니다. 게다가 여성과 어린아이를 귀찮게 따로 모았다는 것은 그들이 남성만 살해할려고 했다는 데 대한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안 가리고 학살을 자행하는 미치광이들이라면 힘들게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아인자츠그루펜 병사들도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일 때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는데, 하물며 정예라 자부하는 다스 라이히 병사들이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과 어린아이를 그랬을 리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채승병 님이 말씀하신 게릴라의 실수로 인한 방화설이 꽤나 신빙성 있게 들립니다.

    끝으로, 경악한 데어 퓌어러 연대장 질베스터 슈타들러 SS대령(당시)이 진상 조사를 명령하고 즉시 군법 재판에 딕만 SS소령을 기소했지만, 당사자가 전투 중 사망해서 유야무야되었더군요(흥미롭게도 말메디 학살 용의자로 여겨지고 있는 푀츠케 SS소령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진상을 알 수 없는 대표적인 학살 사례 중 하나 같습니다.

    • 윤민혁 2007/04/09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갑냐옹이님//글쎄요... 남자는 체포 후 총살 또는 타살, 여자와 아이를 교회 또는 큰 건물에 몰아넣고 총질하면서 불지르기는 실은 교회나 그에 준하는 대형 건물이 있는 데에선 예외없이 벌어진 패턴물 수준의 학살방법인데요. 동부전선에선 적어도 소련의 발표에 의하면 유사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_-;;;

      마키가 은닉한 탄약의 폭발로 사태가 악화됐다는 것이 사실일 수는 있어도 "귀찮게 그럴 리가 없다"는 논리는 통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유사 사례가 너무 사례가 많아요. 오히려 남녀노소 안 가리고 학살하는 놈들일수록 그런 귀찮은 짓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1919년 수원 제암리 사건만 해도 대상자가 여자가 아니라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남자들이었다는 걸 빼면 진행은 아주 비슷합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7/04/12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라두르 학살이 참극으로 번진 이유에는 3중대 병력이 현장으로 가는 도중에 마키에 의해 참혹하게 난도당한 독일군 구급차를 보고 열이 바짝 올랐다는 것도 하나 있겠지요. 물론 그게 면책사유는 되지 않겠지만 다양한 앞뒤 사건들을 살펴볼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작년에 오토 바이딩어(Otto Weidinger)의 「Tulle und Oradour」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기회에 이거나 사 봐야 겠습니다.

  4. grayherb 2007/04/11 1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선 늦게나마 블로그 개장 축하드립니다.

    윤시원님의 글과 이 글을 읽고나니 2002년 경에 알자스, 로랜주가 주민투표로 불어-독일어 교육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킨 일이 생각났습니다. 독일과의 교역이 알자스주의 주수입원이란 이유였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알자스-로랜지역 사람들에겐 알자스어로 대표되는 프랑스도 아니고 독일도 아닌 그들만의 정신적인 '무언가'를 본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무릅쓰고라도 지키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7/04/12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대에 와서는 유럽인들의 다채로운 정체성을 상징하는 얼마 남지 않은 표상이 언어인 것 같습니다. 다른 문화적, 인종적 차별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까요. 에스파냐나 독일은 같은 나라라 하더라도 지역마다 방언 특성이 꽤나 달라 재밌었는데, 알자스어는 어떨까 몹시 궁금합니다. 나중에 스트라스부르에 가걸랑 확인해봐야죠.

  5. 고전압 2007/04/12 2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로렌과 알자스 지역은 언어적으로도 독일어 방언을 사용하는 뿌리깊은 게르만 지역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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