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사 팬이라면, 특히 독일에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분이라면 이런 의문쯤은 한 번 떠올려봤을 것이다.

산업대국, 과학기술강국이라는 독일이 왜 물량전에서 연합국에게 형편 없이 밀렸을까?

거대한 영토와 인구, 산업 잠재력이 있던 미국이 독일을 능가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기 생산량을 보면 독일은 절대적 경제 규모가 작았던 영국과 소련보다도 더욱 형편이 없었다. 예를 들어 군용 항공기 산업에서 1940년 영국이 8,600여 대를 생산하는 동안 독일은 고작 6,600여 대를 생산했다. 독일이 항공기 생산에서 영국과 소련을 능가한 것은 1944년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 독일이 34,100여 대를 생산하고 영국이 22,700여 대, 소련이 33,200여 대를 생산했다. 더군다나 기갑차량의 경우에는 소련의 생산량을 능가해본 적이 없었다. 1943년까지는 심지어 영국보다도 생산량이 저조했다 — 그나마도 영국에 미국의 원조 기갑차량이 대거 쏟아져 들어와 자발적으로 기갑차량 생산을 줄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의문에 대해 국내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1. 독일은 대전 초에는 평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다 막바지가 되어서야 전시 총력전에 돌입했다
  2. 독일은 여성이 가사에 충실하기를 바래서 여성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독일의 패인을 경제적 측면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물량의 열세는 위의 두 가지로 쉽게 설명이 되는듯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위의 두 가지는 매우 잘못된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이번 글에서는 위의 두 가지 속설의 맹점을 살펴보고 진실은 어디쯤에 있는지를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하자.

첫 번째 괴담. 독일은 총력전에 뒤늦게 돌입했다

이 속설의 진원지는 크게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나치 독일의 선전부장관 괴벨스가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에서 행한 연설(Sportpalastrede), 이른바 총력전 연설이다. 여기서 괴벨스는 "TOTALER KRIEG - KÜRZESTER KRIEG (총력전 - 단기전)1"이라는 표어 아래에서 전 국민적 전쟁노력을 촉구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 연설 이전에는 독일이 총력전에 대해 무지했다는 오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총력전(totale Krieg)"이란 구호가 대국민 선전의 전면에 부상했다는 상징적 의의가 강했을 뿐이다. 실질적인 면에서도 징집연령을 확대하고 병역 면제기준을 대폭 축소하는 등의 인력동원, 국민들의 위기의식 고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전시 경제 측면의 총력전은 이와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Sportpalastrede

두 번째 진원지는 독일의 저명한 경제통계 전문가인 롤프 바겐퓌어(Rolf Wagenführ)의 1950년대 저작 『Die deutsche Industrie im Kriege, 1939 bis 1945 (전시 독일 산업, 1939-45)』이다. 바겐퓌어 박사는 대전 시기에는 경제계획 부서에서 일했으며, 전후 부흥기에도 경제분야 요직을 맡았기 때문에 권위가 상당했다. 그는 이 책에서 1939-41년 시기 경제적 측면에서의 전시 체제 돌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사실상 평화기와 다름 없었다고 기술했다. 그 근거로는 1940년에는 오히려 산업계 고용인력이 10% 가까이 감소했으며, 전문 군수산업 분야의 비중이 여전히 16% 대에 불과했고, 소비재 산업 비중은 30% 선에서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여기에 독일의 전시 생산량이 1942-44년 기간 동안 "생산 기적(Production Miracle)"이라 불릴 수준으로 증가한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 때문에 1950-60년대의 2차대전기 경제사 연구자들은 독일이 경제 분야에서도 "전격전(Blitzkrieg)" 전략에 따라 단기적으로 접근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그러나 이는 군사적 측면의 "전격전(Blitzkrieg)"에 대한 오해 — 이에 대해서는 국내에 번역된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Legende)』이나 홈지기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만큼이나 잘못된 인식임이 차차 밝혀졌다. 일단 히틀러를 위시한 독일의 전쟁 지도부는 경제적인 총력전에 대해 결코 무지하지 않았다. 당시의 독일인들은 1차 세계대전 시기 장기전에 대비하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연합국의 무역봉쇄 이후 1918년이 되자 국민 생활수준은 혁명이 날 정도로 비참해졌다. 때문에 해외 천연자원 수입로를 틀어쥐고 있는 해양세력에 맞서 버틸 경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전쟁도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더군다나 전쟁 말기부터 총력전을 외친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영향도 총력전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켰다. 독일도 어느 분 말마따나 경제적 동원체제 구축도 소홀히 하고 전쟁을 할만큼 제정신이 아닌 나라는 아니었다.

우선 민간용 소비재 산업 비중이 높았다는 오해에 대해 짚어보자. 실제 통계상으로 소비재 산업 비중이 상당한 수준(1939년 29%, 1941년 28%, 1942년 25%, 1944년 22%)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용을 뜯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들 소비재 산업의 상당 부문은 생산량의 40-50%를 군에 납품하고 있었다. 특히 소비재 산업 노동력 중에 군납품 생산에 동원된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 1939년 12.2%에서 1943년 38.3%까지 증가한다. 민간 소비수준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938년 대비 1941년에는 74.4%, 1943년에는 67.2%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는 대전기에 오히려 완만한 증가세를 보인 미국은 물론, 영국의 민간 소비 감소추세 — 1943년에는 1938년 대비 85.7%로 감소 — 보다도 훨씬 심한 것이었다. 1939년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독일은 민간분야에 배급제를 도입했으며, 불필요한 소비를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다시 말해 독일 민간인들은 실제로는 기아에 허덕인 소련 인민들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영국 민간인 이상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노동력의 감소 문제도 유사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독일 노동력이 1939년 약 3942만 명에서 1940년 3576만 명으로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군수산업 규모의 축소 문제가 아니라, 남성 노동력의 징집이 본격화된 여파였다. 이후로도 독일의 노동력은 종전까지 1939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다 — 1941년에 3604만 명이었는데 1944년에도 3621만 명 수준에 머물렀다. 전선에서 계속 남성의 희생이 늘면서 산업계에서 긴요한 남성 노동력이 자꾸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력과 여성으로 메우기 급급했다는 이야기이다.

독일의 문제 1. 전쟁에 최적화되지 못한 산업 구조

그렇다면 독일의 저조한 생산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선 여기에는 1939년 개전시 독일의 산업 구조가 아직 전시 체제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나치 정권은 이미 1933년 집권 이후 총력전을 염두에 두고 엄청난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39년에 이르면 이미 국민총생산의 1/4 가량과 국가노동력의 1/4 가량이 군수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초기 투자의 핵심은 거대한 군수공업을 떠받칠 기반산업의 조성에 있었다.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철강 및 비철금속 산업이 필요했고, 화약과 합성석유 생산을 위해서는 대규모 화학 플랜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차근차근 전비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규모의 경제'부터 구축하자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화학공업 분야의 지존 IG 파르벤(I.G. Farbenindustrie)은 이미 1938년에 218,000명을 고용하던 화학공업 세계 1위의 회사였고, 전략적 투자를 계속 늘렸다. 독일의 금속산업을 지배하던 연합철강(Vereinigte Stahlwerke, VSt)도 모자라 브라운슈바이크잘츠기터 일대에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Reichswerke Hermann Göring)사를 설립하고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했다. 독일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시경제에 돌입하기 이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알루미늄 제련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자동차 공업에서도 볼프스부르크(Wolfsburg, 당시는 KdF-Stadt)의 거대한 폴크스바겐 공장이 막 건설에 들어가고 있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군산복합체는 이처럼 이미 그 원형이 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1939년 개전 당시에는 이들 기반투자가 마무리는커녕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예정대로라면 1940년대 초반에 이런 초거대 기반산업을 완성하고, 1940년대 중반에 무기를 쏟아내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쌓아올려야 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앞질러 시작되었고, 지상전이 확대되는 와중에도 이들 거대 기반설비를 완공하는데 상당한 자본과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었다. 아우토반 같은 인프라 건설산업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작 필요한 완성품, 즉 무기 생산은 늘릴 여력은 부족해졌다. 말하자면 대전 초기 독일은 무기를 만드는게 아니라 공장과 인프라를 짓는데 자원을 퍼붓고 있었던 셈이다.

Germany's GNP by end use, 1938-43

1938-43년 독일 GNP의 구성. 맨 윗선이 국민총생산(GNP)이고, 맨 아랫선이 경상수지이다. 그 사이 4개 구간이 각각 정부 전비지출, 정부 비전비지출, 총투자, 소비지출이다. [Harrison(2000) p.159 표를 스캔]

이것은 독일의 전쟁이 주도면밀하게 세계대전으로 확대된게 아니라, 매우 우발적인 도발을 하다보니 감당하기 곤란한 수준으로 번졌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전쟁이 정말 느즈막히 발생했다면 독일군은 오늘날 상상하는 모습과 달리 Z계획(Plan Z)으로 쌓아올린 10척의 전함, 4척의 항모를 갖춘 강력한 해군에, 2만 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막강 공군의 괴력을 투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로는 안에서 경제가 심각하게 곪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원활히 진행되었으리란 보장이 없다.)

여기에 독일은 1940년 프랑스전역에서 너무 쉽게 승리하면서 상황을 낙관하게 된다. 지상전의 최대 적수였던 프랑스가 단박에 무너지자 소련 정도는 한입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1940-41년의 여전히 엉망인 군수산업 상황으로도 재빨리 전쟁을 끝내는데는 무리가 없다는 치명적 오판을 저지른다. 그래서 군수산업의 투자 우선순위는 소련과 대결할 육군용 무기(전차, 야포 등)가 아닌, 이후 영국-미국과의 한 판 대결을 염두해둔 항공기 등으로 치우치고 만다. 독일은 정작 모스크바 앞에서 진격이 멎고 소련군과 필사의 대격전을 벌이게 되어서야 이것이 얼마나 나이브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42-44년에 걸쳐 연합군의 전략폭격은 치열해졌지만, 독일의 무기 생산은 급증했다. 이것은 이런 무모한 초기 투자가 점차 시차를 두고 효력이 나타난 영향이 컸다. 이런 시설투자가 어찌나 거대했는지 실제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이때 닦아놓은 공장부지를 제대로 다 써먹지 못하기까지 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볼프스부르크의 폴크스바겐 공장이었다. 당시 폴크스바겐 공장은 무려 연산 150만 대 규모를 계획하여 디트로이트 부럽지 않은 세계 유수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이곳은 개전 무렵까지는 연산 20만 대 수준의 생산설비가 갖춰지게 되었지만, 이나마도 독일은 유연하게 군용 차량 생산시설로 전환하지 못한다. 자동차를 만들 설비는 고작 전방 막사용 난로를 만드는데 주로 전용되었고, 거대한 공장의 단 20% 정도만이 활용되었다. 대전 말기로 가면서는 패색이 짙어지며 징집이 확대되고 숙련 남성 노동자가 계속 빠져나갔다. 이러니 그나마 있는 설비의 잠재력도 완전히 써먹지 못하는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VW assembly line

1940년대 폴크스바겐(민수용)과 퀴벨바겐(군용) 조립라인 모습.

다시 말해 독일은 총력전을 경시하고 전시경제에 대한 투자와 동원을 게을리한게 아니다. 오히려 지나친 규모의 중장기 총력전을 염두해두고 기반시설 투자에 집착하다가 전쟁 일정이 예상과 완전히 어긋나면서 파탄에 봉착했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독일의 문제 2. 비효율적인 산업 운영 및 관리 실태

독일의 저조한 전시 경제실적에는 첫 번째 문제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이 더 있었다. 그것은 독일 산업계의 놀랄만한 비효율성과 퇴행적인 정경유착 구조였다. 흔히들 갖는 잘못된 통념은 히틀러가 독재자의 화신으로 여겨지는만큼 나치 체제가 빈틈없는 위계체계로 짜여져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 나치 체제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소련은 대전 이전의 무자비한 숙청을 통해 스탈린의 유일 권력을 정점으로 한 공포의 총동원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독일은 당내 권력구도가 복잡했으며 이들이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 권력을 분점하고 악의적, 소모적인 경쟁을 지속했다.

당장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 독일 경제에 대한 통제권은 여러 기관과 실세들에게 흩어져 있었다. 정부에는 발터 풍크(Walther Funk)가 이끄는 국가경제부(Reichswirtschaftsministerium)가 있었고, 국방군 총사령부(OKW)에는 게오르그 토마스(Georg Thomas) 보병대장의 경제 및 무장국(Wirtschaft- und Rüstungsamt)이 있었으며, 나치의 제2인자인 헤르만 괴링은 4개년 계획 관리청(Vierjahresplanbehörde)의 수장을 맡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게 다가 아니라 그 밑에는 27개 지역 사무소가 제각기 경제계획을 나눠맡고 있었고, 육·해·공군 각 군종마다 병기국이 또 간섭했다. 괴링의 전횡을 풍크가 물고 늘어지고 있는데다, 국방군과 육·해·공군은 제각각 군수경제에 간섭하려고 들었다. 이들은 서로 생산력 증대 및 효율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조하기 보다는, 서로가 각자 영역에 더 많은 자원을 배분받고 권력을 휘두르고자 이전투구하는 양상을 보였다.

German Economy Leaders

발터 풍크, 헤르만 괴링, 게오르그 토마스, 알베르트 슈페어.

이러니 산업계 현장도 산업권력따라 부화뇌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 산업계에도 미국의 포드식 대량생산 체제에 눈을 뜬 기업가들은 여럿 있었으나, 이들이 뜻을 펼칠만한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 1933년 집권 이후 나치당은 지상 목표를 실업자 해소에 두었다. 정부는 갖가지 보조금을 지급하고 가격통제, 이윤보장 정책을 취하면서 산업의 고도화, 합리화보다는 고용 확대를 장려했다. 이러다 보니 기업가들은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면서 저렴한 노동력 중심 생산체제를 유지하는게 훨씬 유리했다. 굳이 생산성을 향상시킬만한 인센티브가 없었던 것이다.

군부가 지나치게 산업계 생산현장에 간섭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독일군은 철저히 '갑'의 입장에서 설계 단계부터 생산 계획, 최종 검수에 이르기까지 관료적으로 하나하나 감독하려고 들었다. 생산 효율화를 위해서는 생산 편의에도 신경을 기울여야 했으나, 대부분은 전선의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우선 순위가 두어졌다. 고증에 신경을 쓰면서 프라모델을 만드는 분들이라면 독일의 무기체계가 생산이력에 따라 얼마나 사소한 변경사항이 많이 있었는지를 아실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이면에는 군의 시시콜콜한 요구로 계속 설계를 수정하면서 생산에 지장이 초래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 군부는 주요 무기체계는 미국의 포디즘적 생산 대상이 아니라는 묘한 편견을 많이 갖고 있었다. 군부 자체가 까다로운 소비자였기 때문에 소비자의 요구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생산 시스템을 더욱 선호했다. 물론 이게 1980년대 이후 토요타자동차처럼 유연생산방식을 고도화시킬 수 있는 업체가 있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1930-40년대 업계 실정으로는 생산 효율성과 유연성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생산력 향상을 위한 기업가와 기술자들의 창의성은 군부의 관료적 압박 속에서 피어날 여지가 없었다.

이런 모든 문제에 일대 전기를 가져온 것이 무장 및 군수부(Reichsministerium für Bewaffnung und Munition)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업적이었다. 독일도 전쟁이 지속되면서 앞서 이야기한 체제 내 경제기구들 사이의 난맥상을 풀어 헤치고 조정업무를 총괄할 부서의 필요성을 점차 느껴가고 있었다. 이를 위해 프리츠 토트 박사가 1940년 3월 설립된 무장 및 군수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충분한 성과를 가시화시키기 전에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 후임으로 1942년 2월 취임한 슈페어 장관은 토트의 기획을 이어받아 군수산업을 합리화시키는 일련의 조치들을 실천에 옮긴다. 마침 이때는 대전 초기의 기반설비 투자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완성되면서 본격적인 효율화/합리화를 추구하기에도 유리해졌다. 히틀러도 부족한 군수산업의 실적에 위기를 느끼고 괴링과 풍크를 압박하며 슈페어에게 큰 힘을 실어줬다. 이제 터 닦고 공장 짓던 노동력은 공장 설비를 효율적으로 재배치하고 가동하는데 전환되기 시작했다.

슈페어의 노력은 크게 생산조직 분야의 합리화와, 생산기술 분야의 합리화라는 양면에서 이뤄졌다. 대량 효율생산에 방해가 되는 복잡한 생산감독 관료조직을 대폭 간소화했다. 그리고 세세한 기능을 간소화하고 대량생산에 적합한 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이렇게 대량생산 체제가 적극 장려되고 군부의 간섭을 차단하기 시작하면서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1939-41년의 대규모 징집으로 급전직하했던 군수산업 분야의 생산성 — 1941년의 생산성은 1939년의 75.9%로 추락 — 은 1944년이 되자 2배 이상으로 폭증, 1939년의 160% 수준까지 올라섰다. 여전히 많은 설비가 놀고 있었고 숙련 노동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결실이었다.

이로 인해 1943-44년에 이르면 독일의 전 산업생산에서 군수분야는 국민총소득 대비 무려 70%에 이르는 엄청난 비중으로 올라서게 된다. 이는 소련이 60% 정도, 영국이 55% 정도, 미국이 40% 정도였던 것과 비교해서도 훨씬 높은 수치였다. 이것은 결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이때쯤 총력전을 선언해서 단기간에 이뤄진 수치가 아니다. 대전 이전부터 총력전에 대비해 막대한 설비투자를 해놓은 기반 위에 1942년 이후 슈페어의 합리화 조치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얻어진 결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이 총력전에 뒤늦게 나섰다는 괴담이 퍼진 것은 독일 산업계 이면의 꼬인 병폐들과 잘못 계산된 투자계획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실제 독일인들의 기억들도 그렇게 전시 동원으로 인한 불편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알다시피 독일은 1920-30년대에 걸쳐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은 나라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대량실업 속에서 막장을 경험해본 사람들에게, 1930년대 나치 집권 이후의 경제 회복은 실제보다도 그 체감효과가 매우 컸다. 그래서 개전 이후의 전시 배급제와 민간 소비 통제 수준으로도 여전히 그 경제위기의 험난했던 시기보다는 한결 살기 낫다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이와 같은 독일인들의 인식이 외국인들에게는 독일은 전시에도 평화시처럼 누릴거 다 누리며 풍요롭게 지냈다는 식으로 와전된 것이다.

두 번째 괴담. 독일은 여성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독일이 여성 고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통념은 여러 가지 기억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우선 나치 독일은 집권 초기에는 실제로 여성의 고용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이유는 최악의 시기 600만 명을 넘던 남성 실업자들을 일소하기 위해서였다. 전통적인 여성의 일감이 아닌 다음에야 그 일자리를 빼앗아 남성들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일은 결코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1차 세계대전 후에도, 2차 세계대전 후에도 미국, 영국 등에서 갑작스럽게 여성의 가정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풍조는 반복된 바 있다. 전시에는 남자들이 총 들고 군대로 가고 여자들이 해머 들고 공장으로 가는 법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남자들의 일자리가 필요해지게 마련이다. 별로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여성들을 은근슬쩍 집으로 쫓아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가깝게는 1997년 환란 이후 한국에서도 구조조정 열풍이 몰아치면서 직장에서 기혼여성들을 콕콕 찍어 몰아내는 일이 횡행하지 않았는가.

나치 독일이 민족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여성의 전통적 가치를 중시한 것도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권력 유지에 필요한 사회적 안정을 달성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한테는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여자들은 남자를 믿고 가사와 육아에 충실하는 것이 체제 안정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반영이 되어 독일은 대전 기간 내내 여성을 전투원으로는 절대 동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군인으로의 동원에 한정된 이야기였지, 경제 분야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실 독일은 대전 이전에도 여성들이 어느 정도 산업계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치 정권은 경제 회복을 위해 고용을 장려하고 가격 통제를 엄격히 시행하여,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1935년 이후 남성 실업자가 대폭 감소하여 한숨을 돌리자, 그 다음에는 남편 혼자 벌어서는 가계 수입이 다 충당이 안된다는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결국 나치 정권은 여성들의 취업 제한을 다시 완화하여 맞벌이를 통한 가계 소득보전을 적극 용인한다.

이로 인해 대전 직전의 독일은 오히려 여성 노동력의 활용이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훨씬 많이 이뤄지고 있었다. 철강 및 금속업계에서 여성 노동력의 비중은 1935년 13%에서 1939년에 이르면 19%로 증가한다. 같은 기간 전기공업에서는 12%에서 29%로, 광학공업에서는 18%에서 25%로 증가한다. 1939년에 이미 독일 산업계의 여성 노동력은 총 1463만 명, 전체의 37.4%(!) 수준으로 올라선다. 이때 영국의 여성 노동력 비중은 고작 26.4%에 불과했다. 또한 이 독일 여성 고용 가운데에는 기혼 여성이 무려 640만 명, 즉 전체 기혼 여성 가운데 36%가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나치 독일이 여성이 손에 기름 묻히고 못이 박히는 것을 가련히 여겨 여성 취업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이처럼 사실과 동떨어진 속설이다.

The size and composition of Germany's civilian labour force

독일 민간 여성 노동력의 산업별 규모와 구성비중 [Harrison(2000) p.162 표를 스캔]

그렇다면 왜 나치 독일이 여성 고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런 오해가 퍼져나간 것일까? 그 이유는 대전기에 여성 노동력의 총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여성 노동력은 1941년에 1397만 명(38.3%)으로 일시적으로 감소하지만, 다시 늘기 시작해 1944년에 1481만 명(40.9%)에 이른다. 절대적인 수로 보나 노동력 비중으로 보나 아주 완만한 상승세였다. 대신 독일은 남성 노동력의 징집으로 생긴 커다란 공백을 수많은 외국인 및 강제 노동력으로 메꿨다 — 이들의 비중은 1944년에 총 713만 명(19.7%)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독일은 이미 개전 이전부터 여성 고용비중이 매우 높았지만, 대전 중에는 그 상승세가 매우 완만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여성의 전시 추가 고용이 두드러져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영국과 미국은 대전 이전의 고용률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영국의 여성 고용비중은 1939년의 26.4%에서 1944년에는 37.9%(시간제 고용 포함)으로 상승한다. 미국의 여성 고용비중은 1940년의 25.8%에서 1944년에는 35.7%로 상승한다. 절대적인 비중 면에서는 그래도 독일의 여성 고용비중이 여전히 우세했다. 그러나 상승률로 따지면 거의 40-60%에 이른다는 점이 중요했다 — 미국만 해도 1940년의 여성 노동력은 1300만 명을 밑돌았으나 1944년이 되면 2000여만 명으로 60% 가까이 수직상승했다. 이처럼 영국과 미국에서는 개전시 기준점이 낮다보니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갑자기 늘었다는 느낌을 보다 강하게 받은 것이다.

전시 독일 여성 고용에 있어 또 주목할 부분은 질적인 면에서의 변화도 컸다는 점이다. 1939년 5월 기준으로 공업분야에서 독일 여성은 생산재 공업(화학, 철강, 금속, 전기, 기계 등)에 76만 명(31.9%), 소비재 공업에 163만 명(68.1%)이 고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3년 5월이 되면 그 비율은 크게 역전되어 생산재 공업에 152만 명(54.1%), 소비재 공업에 128만 명(45.9%)이 고용되었다. 숙련도도 낮고 애국심이라고는 있을 턱이 없는 외국인 및 강제 노동력이 비숙련 소비재 공업분야를 대체하면서, 그나마 애국심이라도 투철한 독일 여성들이 자꾸 험한 일자리를 떠맡았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독일은 이미 대전 개전시부터 서구 기준으로는 충분한 수준 이상으로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고 있었다. 여기에 폭격으로 폐허가 된 전후 독일에서 그 어마어마한 와륵더미를 하나하나 치운 이들, 전사한 독일군 아버지 또는 강간하고 떠나버린 점령군 아버지를 대신해 홀몸으로 아이들을  먹여 살린 이들도 바로 독일 여성들이었다. 전시 경제의 중추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전후 부흥을 떠받친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독일은 그토록 치열했던 전쟁을 질기게 수행하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진정 어머니는 어디서든 위대한 존재였다.

참고문헌

P.S. 발키리 작전 연재는 자료 하나만 더 확인해보고 마저 올릴 예정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Notes.
  1. 사실은 비교급이 사용되었으므로 '더욱 총력을 다해 전쟁을 수행하면 더욱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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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팅코  2009/02/01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충격적인 글이네요.
    언제나 좋은글 잘읽고갑니다.

  2. Lawlite 2009/02/02 0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마침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주제의 글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R. J. Overy의 The Nazi economic recovery 1932-1938, 1996 (한역된 [대공황과 나치의 경제회복], 이헌대 역, 1998을 읽긴 했습니다만 ㅋ)을 보고 다른 경제사 책들을 보면서 나치 정권의 경제 체제 효율성에 대해 한 번 글을 써 볼까 했었는데; 제 내공이 부족하여 머릿속에만 남겨 두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 주제를 거창하게 잡은 탓인지 대공황과 렌텐방크 때는 물론이고 1차 대전 이전까지의 독일 경제 자료도 수집하려고 하다가 그만 분량도 분량이고, 너무 주제를 크게 잡은 것 같아 헤메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거든요. -_-; 이렇게 괴담(?)을 통해 접근하게 쉽게 글을 써 주시니 참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계량적 자료로) 독일의 노동력 활용 수준이 상승했다는 것은 나타납니다만, 그 활용의 질적 수준은 어떠했었는지요? 상술한 오버리의 책을 보다 보니, 나치 정권 초기에 시행한 국책 건설 사업들에서 완전 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중장비를 사용해야 할 건설 공사에서 희한하게도 그런 장비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삽만 든 인부만 잔뜩 고용해서 공사를 진행시켰다는 웃기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설마하니 1930년대 후반이나 1940년대에도 이런 수준의 비효율적인 생산 활동이 일어나고 있진 않았겠지요?

    • noblenight 2009/02/02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내에 부족하나 관련 논문이 여러편 존재합니다.

      이헌대교수님이 특히 주도적으로 쓰신 논문이 많으니 이를 참고 하시면 될거같습니다.

      간략히 표현하자면 노동력의 질적수준에 있어서 그 개인적 차가 매우 컸다는 사실을 말씀드릴수 있겠네요

      더욱이 전쟁포로및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을 이용하였으니 효율성이 떨어지게 되는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 이강열 2009/02/02 1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경기부양을 위해 4대강 유역을 정비하시겠다고 하시는 분께서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삽과 고깽이(?)로 강바닥을 파는 모습... 만일 이것이 진짜 시행된다면 만사를 제처놓고 구경가야겠지요. 영화로 만 보던 것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생애 마지막 기회가 아닐런지!!!

    • noblenight 2009/02/02 1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4대강 사업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비판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이 사업의 필요성은 현재 충분히 존재한다고 볼수 있는게 조심스러운 정책학 입장에서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 있어 정책결정자가 생각하는 바와 이 사업을 처음 제안했던 제안자의 정책목표와의 차이를 생각해 봐야겠지요

      인터넷의 발전과 그에 따른 다양한 토론장의 형성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부분이나 인터넷이라는 특성상 다소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토론및 논의가 이루어지는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 이강열 2009/02/02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실제 4대강 유역 사업을 통해 들어가는 재원 만큼 일자리가 보장되는 가에 대한 의문이 나오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물론 4대강 유역 사업의 타당성 여부는 둘째로 치고라도 과연 실업문제 해결에 4대강 유역 사업이 얼마나 도움을 줄지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많이 읽었습니다. 차라리 나치 독일 처럼 기계의 사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노동력을 이용 4대강 정비사업을 한다면 속된말로 "함빠집" 할매(?)라도 먹고 살 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태풍 매미 당시 김천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홍수도 따지고 보면 주변 지역 소하천 및 산악을 관통하는 실개천 등이 문제를 발생시켰는데... 물론 다들 영민하신 분들이시니 이런 문제제기는 한낮 목동들의 풍월소리 정도로 무시하고 넘어가시겠지만 한정된 재원을 상대로 얼마나 많은 효과를 거두는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 noblenight 2009/02/02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4대강 유역 사업에 대해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많으신것 같습니다. 전 단지 정책학 입장에서 정책을 결정 추진하는 이유중의 하나로 이 정책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였으며 이 사업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서 또는 이강열님의 의견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더욱이 여기는 채승병님의 2차세계대전에 대해서 논하는 블로그 이며 더욱이 이 내용이 제기된 글 자체가 이의제기 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됩니다. 혹시라도 제 의견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시면 제 메일 noblenight@naver.com 으로 메일을 보내주시면 제가 성실히 답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강열 2009/02/02 2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할말은 "noblenight" 님 께서 먼저 하시는 것 같습니다. 4대강 유역 정비 사업은 이 채승병님 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혹시나마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prender75@hanmail.net"으로 연락 주십시오. 그냥 한번 웃자고 지나가는 말로 적은 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시니 휴계실에서 잠시 쉬다 저도 모르게 격한 글이 나왔습니다.

    • noblenight 2009/02/03 0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서로간에 오해가 있는거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알려주신 메일로 메일을 보냈습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noblenight 님과 이강열 님 사이의 가벼운 댓글 공방(?)은 두 분께서 알아서 잘 해결하고 넘어가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리고 Lawlite 님께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질문해주신 내용을 짚는다면…… '질적 수준'이라는 말이 좀 모호하기는 합니다만 1940년대 초반까지도 비합리적 관행들이 현장에 굉장히 만연해 있었다고 합니다. 일단 많은 병기 주문량이 다양한 하청업체에 분배되었는데,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간에도 생산성 차이가 10배 가까이도 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차이가 벌어질 때까지도 일률적인 품질관리, 생산성관리 체계가 잡히지 않고 막무가내로 주문을 했다는 이야기지요.

      가끔 드는 사례입니다만, 단적으로 "쉰들러리스트"에 나오는 오스카르 쉰들러를 보십시오. 거기서도 쉰들러가 당료, 관료들에게 뇌물을 퍼부어가면서 저열한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공장을 계속 꾸려가지 않았습니까? 쉰들러는 밑에서 일했던 유태인들에게야 숭고한 인물이지만, 조금만 비틀어 보면 당시 독일 기업가들의 전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많은 현장에서 그렇게 오고가는 뇌물 속에 저렴한 노동력들 잔뜩 받아다가 막무가내로 일 시키고 납품대금 챙기고는 했습니다. 작품에도 나오듯이 대전 후반에 가서야 생산성관리가 확대되면서 대금지불에 페널티가 가해지는 등의 시정노력이 기울여지죠.

  3. 슈타인호프 2009/02/02 0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동안 알고 있던 상식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는군요;;;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4. 길 잃은 어린양 2009/02/02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고문헌 목록의 The Wages of Destruction을 보니 무진장 찔리는군요. 어쩌다 생각 날 때 마다 조금씩 읽다 보니 아직도 200쪽 가까이 못 읽었습니다;;;;;

  5. 네비아찌 2009/02/02 1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나치당 체제의 난맥상이 원흉이라고 할수 있겠군요.
    귀중한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치 독일이 굴러간 원리는 역시 들여다볼수록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나치당 집권을 틈타 벼락출세한 인물들과 전통적 귀족, 관료 등이 온통 뒤섞여 미묘한 균형과 갈등과 끊임없이 일으켰으니 말입니다. 영미식도 아니고 소련식도 아닌 어중간한 그 체제가 결국 국가적 전쟁 수행에는 매우 취약했던 것이죠. 어쨌건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6. 궁금이 2009/02/02 15: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전쟁사 읽는거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1,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왜 영국을 지원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글에는 미국 자본이 개전 초기에는 영국, 독일 양쪽에 투자하다가 막강한 영국해군이 독일로 물자가 들어가는걸 막는 바람에 결국 영국에만 올인한 결과 미국 자본의 지배를 받는 미국 연방정부가 영국을 돕기로 했다고 하더라구요.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국 자본의 지배 등등을 논하는 음모론적 설명은 항상 자체 필터링이 필요합니다.^^ 미국 자본이 당시 독일에도 상당한 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근데 그거야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 흐름상 미국만한 자본의 공여자가 없었던 여파이지요. 이들 독일 산업에 지분을 가진 미국 자본가들 가운데는 포드처럼 음으로 양으로 나치에 호의를 보인 인물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독일을 포기하고 미국 정치권을 주물렀다는 식으로 나가면 그야말로 개념상실 망상역사로 치닫는 길입니다.

      일단 미국의 반 나치진영에의 참가는 여러 배경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고립주의를 고수하느냐 여부를 두고 여론이 첨예하기 대립했는데, 나치의 적대적 팽창정책이 계속되자 이것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이해에도 큰 위협이라는 여론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런 위기의식은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극단적으로 고조되지요.

      여기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등 당시 주요 정치인사들의 성향도 한몫을 했습니다. 루스벨트는 반제국주의, 개입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독일의 팽창 움직임으로 인해 민주주의 기반 국제질서가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 입장에서는 실리적으로 보나 이런 가치적 명분으로 보나 백척간두에 선 영국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7. 일화 2009/02/02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괴담에 넘어간 한 사람이었군요.

    슈페어가 효율성을 높였다는 얘기도 들었지만(아마도 홈지기님의 글이었던 듯 합니다만) 아무래도 정복전쟁이다보니 총동원이 곤란했었다는 얘기가 개연성이 있다고 믿어버렸네요.

    다시금 홈지기님의 좋은 글 덕분에 진실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부터 Periskop Forum을 즐겨 읽으셨다면 효율성 내용은 여러번 언급이 된 바 있습니다. 사실 2차 세계대전시 독일은 여러모로 전쟁 준비가 허술한 나라였고, 그럼에도 초기 엄청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여러 오해가 빚어진게 당연하기도 합니다. 어쨌건 댓글 감사합니다.^^

  8. noblenight 2009/02/02 2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쁘신 가운데 좋은글을 써주신 채승병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도 채승병님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이 분야에 있어서 상당히 잘못된 시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4년전인거 같습니다만 그떄 이 화제에 대해서 채승병님이 쓰신 글에 상당한 충격을 먹고 다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매번 바쁘신 가운데에도 좋은글 써주시는 그 열정이 부럽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언제나 제 글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추가로 공부를 더 하셨다는 분들이 제일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공부하시고 두루 지식을 풀어헤쳐주시기를 바랍니다.^^

  9. 윤민혁 2009/02/03 0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부분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초기 인프라 구축 부분은 잘 몰랐네요. 잘 보고 갑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술자리에서 언제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니었나요?^^ 이 글 내용도 글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게 정말 오래전 같은데 이제서야 올리게 되어 많이 찔립니다.

  10. 방문자 2009/02/03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한 블로그네요... 지식의 깊이가 대단하시군요

  11. 함부르거  2009/02/03 1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간의 상식을 깨는 귀중한 글 감사합니다.
    독일 여성들을 볼 때마다 참 강인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저런 역사에 존경의 념이 드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단지 그녀들의 덩치에 쫄아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하, 덩치…… 독일 여성들이 평균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 여성들에 비해 미모가 덜하다고는 하지요. 그래도 문득 살면서 제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러 독일 여인네들이 기억에 주르륵 스칩니다.^^

  12. 별마 2009/02/04 0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사에는 그닥 관심이 없지만 최근 읽고 있는 폴 베어록의 economics and world history(1993)에서 간략한 내용이 있어서 흥미가 갑니다.
    베어록의 경우 파시즘의 경제정책에 대한 기존통념을 비판하면서 홈지기님께서 두번째 단락에 언급한 내용(여성 노동력에 대한 괴담?)에 대해 굉장히 짧게 언급했죠.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1935년경 여성, 독신남, 청소년 등의 노동인력을 과감히 축소해버렸다고요(1935년 이후 여성노동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더군요...). 즉 베어록은 나치독일의 경제성과에 대해 홈지기님께서 말씀하신 동원체제에 가까운 비상경제조치(임금 감소와 노동시간 증가, 군비확장 등)로 인한 일시적 효과로 혹평하고 있습니다(이때까지만 해도 나치의 눈부신 경제성공이 일종의 통설이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별 시덥지 않은 댓글을 길게 적었군요.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눈부신 성공 이면에는 사실 많은 편법과 부정이 만연했던게 당시 독일의 경제였죠. 독일 경제의 그런 측면 때문에 히틀러가 전쟁을 좀 더 참았더라도 다른 형태의 내재적 문제가 봇물처럼 터졌으리라는 주장이 최근에는 많이 있습니다. 위의 참고문헌에 적은 Tooze의 책이 그런 논의들을 이것저것 잘 정리하고 있으니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13. Bigcat 2009/02/04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문단 눈물나네요.T.T 여기 , 2차대전 피해자 하나 추가요! 독일이요!(씨네21기사에서 빌려왔습니다.^^;;)아무튼 산 사람은 살아야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14. 포로리 2009/02/04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터넷에도 이렇게 똑똑한 글이 있네요. 좋은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2/04 1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똑똑한(?) 글이라니 뭔가 좀 애매한 느낌이 드는군요.^^ 인터넷 공간에도 사념이 난무한 글 말고도 다양한 정보성 글들이 많이 올라와야겠죠. 아무쪼록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5. vicious 2009/02/07 1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지금까지 괴담에 사로잡혀있던..

    그전에 봤던 다큐들도 거의 같은 논조였는대 정말 잘못 알고 있었던 거군요.

    마지막부분 독일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뭉클하네요 ㅠㅠ

  16. 비밀방문자 2009/02/08 1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7. 긁적 2009/04/10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수작이군요. 잘 보았습니다. 긴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18. 시골 2009/04/15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분의 글에서 전격전과 2차대전기 독일의 능력에 대한 오해와 과대평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트랙백된 본문의 내용을 보고..
    역시 이미 periskop님이 글을 써두셨군요.. ^^;;;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ps. 다른분의 글에서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것 같긴 합니다.

  19. 도도새  2009/09/24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용 좀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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