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글에서는 히틀러 암살 계획이 마련되기까지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글부터는 실제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의 진행과정을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보자. 아울러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영화 "작전명 발키리(Valkyrie)"와 2004년에 독일에서 제작되었던 영화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의 내용도 조금씩 연관지어 설명하기로 하겠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다룬 비교적 최근작인 이들 영화들에는 세심한 눈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포인트들이 많이 있고, 그걸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니 말이다. 물론 언제나 강조하지만 영화는 영화일뿐, 다큐멘터리와 혼동하는 우는 범하지 마시길 바란다. 다소의 디테일을 희생하더라도 극적 긴장감을 충분히 살려냈다면 그 또한 좋은 작품이라 불리기 손색이 없을테니.
동프로이센의 총통사령부, 볼프스샨체
우선 히틀러 암살 시도가 벌어진 현장, 볼프스샨체(Wolfsschanze) 총통사령부(Führerhauptquartier, FHQ)에 대해 알아보자. 이곳은 2차 세계대전기 히틀러가 독일 국방군의 전쟁 지휘업무를 수행했던 10여 곳의 야전사령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었다.
대전기 히틀러는 국가 원수임에도 수도 베를린에는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이런 변방의 야전사령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정적이 우글거리는 베를린은 쿠데타 및 암살 위협이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베를린은 인구 밀집지역이고 건물도 많다보니 핵심 지휘시설 주변 경호에 필요한 충분한 완충지대를 마련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많은 독재자들이 그러했듯이 다소 은둔적이면서도 괴이한 히틀러의 취향도 한몫을 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그나마 전선과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면 긍정적인 영향(포스?)을 병사들에게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런 총통사령부에는 히틀러와 참모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들과, 전 독일 국방군을 통제하기 위한 각종 통신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다. 이들 시설 주변으로는 넓은 무인지대가 있고 대규모 경비병력이 상주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를 철저히 차단했다. 볼프스샨체 이외에도 독소전이 한창 격렬하던 시기에 사용되던 우크라이나 빈니챠(Винница)의 베어볼프(Wehrwolf)가 제법 오래 쓰였고, 총통사령부라 보기 어렵지만 히틀러의 별장으로 애용되던 독일 남부 베르히터스가덴(Berchtesgaden)의 베르그호프(Berghof)도 유사하게 기능한 시설이었다.

대전기 총통사령부들의 위치. 확대된 지도원본은 http://en.wikipedia.org/wiki/File:Hitler-Headquarters-Europe.png 참조
볼프스샨체(직역하면 늑대굴)는 과거 동프로이센의 라스텐부르크(Rastenburg, 오늘날은 폴란드령 켄친 Kętrzyn) 동쪽 숲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괴를리츠(Görlitz, 오늘날 폴란드령 Gierłoż)라는 작은 마을 옆에 자리잡았으며, 아래 지도의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은 울창한 숲속이라 연합군의 폭격을 따돌리기 쉬웠고, 경호를 위한 완충지대도 충분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경계를 따라 폭 3m, 높이 1.5m의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외곽에는 폭 50m의 지뢰밭을 깔아 놓았다. 철조망 곳곳을 따라 경비초소와 기관총진지, 대공포진지가 배치되어 물샐틈 없는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볼프스샨체 배치도. B가 제1 통제구역, C가 제2 통제구역, D가 총통통제구역이다. (GDW 자료를 홈지기가 직접 스캔)
지도에서 빗금친 부분, 모두 붉은색으로 칠해진 부분, 빈 부분이 있는데 이는 각각 철조망으로 분리된 구역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빗금친 구역 외곽으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다시 그 안에 붉은색 구역 외곽이 철조망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마지막 하얗게 처리된 구역도 그 외곽과는 철조망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볼프스샨체 경비부대
이곳 총통사령부를 지키는 경비병력은 바로 총통경호대대(Führer-Begleit-Bataillon, FBB)였다. 그냥 이야기하면 잘 실감이 안 갈지도 모르지만, 이 대대는 두 가지 점이 흥미로운 부대였다.
먼저 이 경호대대는 앞서 언급한 대독일 경비대대(Wachbataillon GD)의 자매부대였다. 1938년에 이 부대는 대독일 독립보병연대에서 2개 중대를 차출하여 처음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비부대원들은 소속부대를 나타내는 소매띠(Ärmelstreifen)나 견장의 표식도 대독일부대용을 사용했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와 "슈타우펜베르크" 모두 볼프스샨체 경비병력의 군복을 자세히 뜯어보면 이런 소매띠와 견장표식을 달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소매띠는 대독일부대용 말고도 별도의 총통사령부 경호대용의 소매띠만 착용하거나, 이들 둘 다를 착용한 병사들도 있었다. (대독일부대 소매띠는 오른팔에, 총통사령부 소매띠는 왼팔에 달았다.)

총통사령부 경비병력의 복장 특징. 사진의 전차병도 오른쪽 소매에는 대독일부대 소매띠, 왼쪽 소매에는 총통사령부 경비부대 소매띠를 부착했음을 알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견장도 대독일 부대휘장을 달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부대원들도 종종 있었다. (사진은 타키구치 아키라 씨 컬렉션에서 발췌)
그리고 이 경호대대의 초대 지휘관이 바로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이었다. 롬멜이 히틀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출세의 기틀을 마련한게 바로 이 경호대대장으로의 인연 때문이었다. 롬멜은 1940년 초까지 경호대대장을 맡다가 히틀러에게 기갑사단의 지휘를 요청했고, 이에 프랑스전역에서 제7 기갑사단장,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아프리카군단(DAK)장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화려한 명성의 가도에 오르게 되었다.
총통경호대대는 볼프스샨체 경비를 강화하면서 1943년 6월에 7개 중대로 확대된다. 여기에는 보병 4개 중대 이외에도, 중화기중대, 전차중대, 대공포중대 등이 포함되어 웬만한 무장세력의 공격도 버텨낼 위력을 갖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볼프스샨체 내부의 핵심 구역에는 히틀러에 밀착하여 경호업무를 수행하는 경호원들도 따로 배치되었다. 친위대에서 운영하는 특수 경호팀(SS-Begleitkommando)이 있었고, 이들과 국가보안본부 소속 요원들이 상주하면서 보안업무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총통사령부의 친위대 경호팀과 국가보안본부 요원들을 격려하는 힘러. 왼쪽에서 4번째 인물이 경호팀장 브루노 게쉐(Bruno Gesche)이고, 5번째 인물이 부팀장인 프란츠 섀들(Franz Schädle)이다.
볼프스샨체 내부의 건물배치
볼프스샨체는 우선 한가운데로 크라우젠도르프에서 갈라져 나오는 철도 지선이 지나고 있었다. 볼프스샨체의 위치부터가 자그마한 시골역, 괴를리츠 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 보면 거사 이후 철도 옆 도로를 따라 슈타우펜베르크가 도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확히 재현된 것이다. 히틀러는 굳이 외부로 나가지 않더라도 이 역을 이용해 전용 특별열차로 드나들 수 있었다. 육로로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관문은 세 곳이 있었다. 각각 서쪽, 남쪽, 동쪽에 출입구가 하나씩 있었으며 검문초소(Wache)가 자리잡았다. 영화 상으로는 구분이 안 갈수도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는 7월 20일 아침에 도착했을 때는 서쪽 출입구(Wache West)를 통해 들어왔고, 거사 후에는 남쪽 출입구(Wache Süd)를 통해 빠져나갔다.
이 내부에는 크게 3개의 통제구역(Sperrkreis)이 있었다. 철도를 따라 난 중앙도로를 경계로 괴를리츠 역 북동쪽에 제1 통제구역이 있었고, 역 남쪽에는 제2 통제구역이 있었다. 제2 통제구역은 경호부대 및 국방군지휘참모본부와 관련된 시설이었으며, 제1 통제구역에 히틀러와 참모들이 거주하는 핵심 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각 통제구역 역시 철조망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제1 통제구역 내부에는 그 가운데에도 총통통제구역(Führersperrkeris)이라는 특별 통제구역이 하나 더 있어 최외곽경비망부터 최대 4중으로 격리된 구조를 가졌다.

볼프스샨체 내부 통제구역과 건물 배치도. (GDW 자료를 홈지기가 직접 스캔)
1. 상황실 (폭탄이 터진 바로 그 건물)
2. 히틀러의 벙커
3. 내빈용 벙커
4. 국가보안본부용 건물
5. 헤르만 괴링의 숙소
6. 헤르만 괴링의 벙커
7. 마르틴 보어만의 벙커
8. 국방군 총사령부장(Chef des OKW) (빌헬름 카이텔) 사무실
9. 국방군지휘참모본부장(WFSt) (알프레드 요들) 사무실
10. 1번 식당(Kasino I)과 찻집
11. 히틀러의 국방군 담당참모 사무실
12. 히틀러의 개인참모 사무실
13. 통신벙커
14. 국가공보부장 (오토 디트리히) 사무실
15. 최고 국가관청 연락관실
16. 국가보안본부용 건물
17. 친위대 경호팀
18. 속기사실
19. 국가보안본부 우편사무소
20. 사우나
슈타우펜베르크가 설치한 폭탄이 터진 오후 정례 일간 전황점검회의 현장은 지도의 1번 건물, 즉 총통통제구역 내의 상황실이었다. 두 영화 모두에서 묘사되지만 원래 이곳이 회의가 열리던 장소는 아니었다. 통상의 회의는 2번 건물, 즉 총통벙커 내부에서 열리고는 했다.
그러나 암살자들에게는 아주 운이 없게도 당시 총통벙커는 보강공사 중이었다. 원래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총통벙커 지붕 콘크리트 두께가 1m였으나, 이를 4m(!)로 보강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두께 덕에 후일 독일군이 나름대로 철저하게 파괴작업을 수행했음에도 이 총통벙커는 지금까지 웬만큼 구조가 남아 있다.) 이것은 당시 소련군의 하계공세로 동프로이센 턱밑까지 도달해왔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주요 전장이 된 서부지역 가까운 곳에서 지휘하겠다고 하여 총통사령부를 베르그호프로 이전한 바 있었다. 그러다 1달여 만인 7월 9일, 이번에는 소련군이 비약적인 전진을 해오자 볼프스샨체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소련군이 100㎞대 거리로 밀어닥쳤으니 폭격의 위험성은 더욱 커졌고 시설물 보강은 더욱 시급해졌다.

오늘날의 총통벙커 잔해 모습. (사진출처: http://flickr.com/photos/47137650@N00/237715886)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슬쩍 언급된대로 한여름의 더위도 회의장소 변경에 어느 정도는 기여했을 수 있다. 숲속이지만 공사 소음에 더위까지 더해지면 회의하기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여하튼 밀폐된 콘크리트 벙커에서 개방된 오두막으로 회의장소가 변경된 이 사실은 거사의 성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운명의 7월 20일, 정례 전황점검회의실에 들어서기까지
슈타우펜베르크는 7월 20일, 예비군 사령관 프롬 상급대장을 대행하는 참모장 자격으로 일간 전황점검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지극히 독일인답게 일찍 일어나 아침 6시에 관사를 나섰다. 당시 그의 관사는 베를린 남서쪽 니콜라스제(Nikolassee) 구역의 트리스탄 가 8번지에 위치했다. 이곳에서 그는 부관 베르너 폰 해프텐 중위와 함께 랑스도르프(Rangsdorf) 비행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베를린의 주요 공항은 아니었고 대전 이전 레저용 비행기가 이용하던 한적한 비행장이었으나,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용 비행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해프텐은 이곳에서 7시 무렵 베를린과 볼프스샨체를 오가는 연락기인 융커스 Ju-52 수송기를 타고 라스텐부르크로 출발했다. 이 항공편은 우편물 배달이나 이런 출장자들을 위해 매일 운항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사 직후 재빨리 베를린으로 돌아오기 위해 모의세력의 일원인 육군 총참모부 수석참모 에두아르트 바그너(Eduard Wagner) 포병대장에게 부탁하여 귀환용으로 하인켈 He-111 폭격기 비행편을 미리 마련해놓았다. 당시 이런 군용 출장에서는 그나마 속도가 빠르고 방어력을 갖춘 He-111이 종종 이용되었는데, 두 영화에서는 오늘날 가용한 He-111가 거의 없는 관계로 귀환할 때도 융커스 Ju-52 수송기를 타는 것으로 촬영이 이뤄졌다. (참고로 "작전명 발키리" 초반 씬에 나오는 히틀러의 전용기도 영화와 달리 실제는 포케불프 Fw-200이었다.)
비행기가 목표지점인 볼프스샨체 인근 비행장에 착륙한 것은 약 10시 15분의 일이었다. 이들은 즉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이날 배차된 차량은 경비대 사령부 작전참모였던 피퍼(Pieper) 대위의 차량이었다. 그는 프롬 상급대장의 부관 바르트람(Bartram) 대위 — 그는 프롬의 참모장 크비른하임 대령과는 달리 거사에 가담하지 않았다 — 의 친구이기도 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차량은 약 15분 만인 10시 30분쯤 볼프스샨체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회의장이 있는 제1 통제구역으로 가지 않고, 우선 제2 통제구역에 내려 차주인 피퍼 대위의 접대를 받았다. 지도의 29번 건물로 표시된 식당에서 슈타우펜베르크 일행은 총통사령부 지휘관 부관이던 묄렌도르프(L. v. Möllendorff) 대위와 합석하여 간단한 먹을거리를 제공받았다. 그 사이 피퍼는 카이텔 원수에게 전화로 슈타우펜베르크의 도착을 통보하였다.
이곳에서의 정황은 "작전명 발키리"에서도 시간을 압축하고 다소 윤색하여 담아내고 있다. 다만 영화에서는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7월 15일에만 미리 도착해 식사도 하는 등의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실제로는 7월 20일에도 그러했다.
11시 무렵이 되자 카이텔 원수가 슈타우펜베르크를 호출했다. 일행은 다시 피퍼 대위의 차량을 타고 제1 통제구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도 회의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기에 우선 9번 건물로 표시된 국방군 지휘참모부장 사무실 건물로 간다. 여기에는 국방군 총사령부 육군담당 참모장 발터 불레(Walter Buhle) 보병대장과 제1 군관구 사령관 헤닝 폰 타덴(Henning von Thadden) 중장이 있었으며, 슈타우펜베르크는 일단 이들과 환담한다. 이후 약 30분 뒤인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에 슈타우펜베르크는 카이텔에게 출두하여 본인의 출석을 보고한다.

암살시도 실패 이후 표창을 받는 당시 참석자들. 히틀러와 악수하고 있는 인물은 히틀러의 부관 오토 귄셰(Otto Günsche)이고, 그의 오른편(사진 왼쪽)에 있는 인물이 헤어베르트 뷕스(Herbert Büchs), 또 그 오른편의 키 큰 인물이 바로 카이텔의 부관 프라이엔트이다.
이날은 오후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예방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를 실은 특별열차가 오후 2시, 볼프스샨체의 괴를리츠 역에 도착하기로 되어있어 실제 경비병력이나 참모들의 신경은 온통 그쪽에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 오후 1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던 오후 정례 전황점검회의도 12시 30분으로 앞당겨 간략하게 이뤄질 예정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런 촉박한 일정 때문에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설치할 기회를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국 회의시간이 임박하고 회의장으로 이동해야하는 시간이 다 되어서야 슈타우펜베르크는 셔츠를 갈아입겠다는 핑계로 방을 하나 요구한다. 그래서 카이텔의 부관인 프라이엔트(Ernst J. v. Freyend) 소령이 자신의 침실을 잠시 제공한다. 이곳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해프텐은 황급히 암살에 필요한 영국제 플라스틱 폭약을 세팅한다.
암살의 재료, 영국제 플라스틱 폭약과 연필 기폭장치
히틀러 암살에 쓰인 재료는 공교롭게도 영국제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국군 특수부대와 독일 점령지역의 저항세력들에게 시설폭파용 플라스틱 폭약을 공급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폭약은 폭발력도 좋고 덩어리 째로 공급하면 필요한 분량을 알아서 떼어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모저모 편리했다. 오늘날에야 C-4가 플라스틱 폭약의 대명사로 널리 쓰이지만, 대전 중 영국이 쓰던 대표적인 것은 노벨 화학이 공급하던 808호 폭약이었다.
![]() 808호 폭약 | ![]() 10호 스위치 |
이와 함께 808호 폭약의 기폭장치로 널리 쓰인 지연신관이 이른바 연필 기폭장치(pencil detonator) — 정확히는 10호 스위치(Switch No. 10) — 이다. 이 기폭장치의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아래 단면도와 모식도에서 보듯이, 이 기폭장치 오른쪽의 황동 튜브 안에는 부식 용액이 들어 있는 유리관이 있고, 그 바깥쪽에 강선이 있었다. 강선은 용수철에 연결된 뇌관 타격장치(striker assembly)를 단단히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사용자는 기폭장치를 폭약에 꽂고 이 황동 튜브를 플라이어로 눌러 부식액 앰플을 깸으로써 작동을 시킨다. 그러면 강선은 앰플에서 흘러나온 부식액에 의해 천천히 녹아 일정 시간 후에 끊어지고, 타격장치의 용수철이 풀리면서 왼쪽에 삽입하는 뇌관을 강타, 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10호 스위치의 절개도와 구조 모식도.
이 장치는 부식액의 농도에 따라 강선의 부식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10분 짜리부터 24시간 짜리까지 6종류가 보급되어 있었다. 개봉된 영화도 그렇고 일각에서는 여기 사용되는 부식액으로 황산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는 염화구리(CuCl2) 용액이었다. 상식적으로도 황산은 강산이었기 때문에 부식이 매우 빨리 일어나서 곤란했다. 이 기폭장치는 매우 간단하고 위장하기는 좋지만, 기폭시간의 오차가 비교적 큰 편이었다. 이 때문에 보통 동일한 기폭장치 2개를 꽂아서 작동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영국제 폭약과 기폭장치는 독일 국방군의 방첩기관인 아프베어가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에게 넘어가던 물량을 압수한 것이었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암살 모의자들에게 제공되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나, 아마 전직 아프베어 수장이던 카나리스 제독까지 여기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베어 2국(사보타지 담당) 국장이던 베쎌 폰 프라이탁-로링호펜(Wessel von Freytag-Loringhoven) 남작 대령은 이를 친구 슈타우펜베르크에게 전달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손가락이 3개밖에 남지 않은 그를 위해 제작된 플라이어로 기폭장치 세팅을 꾸준히 연습했다. 그럼에도 회의참석을 독촉받고 있는 상황에서 몸이 불편한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을 세팅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거사에 임박한 흥분 속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해프텐은 또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다. 이들은 거사를 위해 가방에 1㎏ 정도로 가공된 폭약 두 덩이 — 정확히는 각각 975g, 총량은 약 1.95㎏이었다고 함 — 를 갖고 왔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슈타우펜베르크는 이 가운데 폭약 한 덩이만 세팅하여 가방에 넣어 가져간다. 폭약 1㎏으로도 히틀러를 폭사시키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정말 황급해서 두 덩이를 모두 챙겨넣는걸 깜빡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폭약을 세팅하는 도중에 이곳에 근무하던 베르너 포겔 상사가 참석을 독촉하기 위해 방문을 열려고 해서 꼼꼼히 챙겨넣을 경황이 없으리라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영화 "슈타우펜베르크"에서 재현된 독촉 부분이 좀 더 실제상황과 가까웠다.) 어쨌든 이 또한 역사의 향배를 가늠하는 아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플라스틱 폭약 1㎏과 연필 기폭장치 2개를 세팅한 슈타우펜베르크는 카이텔의 집무실 건물을 나와 프라이엔트와 함께 상황실 건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사이에 해프텐은 볼프스샨체를 탈출하여 비행장으로 돌아갈 차편을 잡기 위해 음모 가담자 중 한 명인 에리히 펠기벨(Erich Fellgiebel) 통신대장을 찾아간다. 총통통제구역 내 상황실까지의 약 400m의 거리, 그 길을 걷는 슈타우펜베르크의 심경은 얼마나 복잡했을 것인가.
역사가 뒤바뀐 폭발현장
슈타우펜베르크가 들어선 상황실 건물(Lagebaracke)은 볼프스샨체를 장식하고 있는 전형적인 목조건물이었다. 목조건물 외벽에 모르타르를 한 겹 입혀 장식한 이 건물은 출입구가 건물 중앙에 있었고, 중앙 복도를 따라 회의실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회의실 직전 복도 양편에는 통신실과 여타 참모들의 사무실이 있었다.
회의실로 가는 도중에 프라이엔트 소령은 슈타우펜베르크의 폭탄 가방을 들어주기로 한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영화에서 묘사된대로 프라이엔트 소령의 호의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프라이엔트 소령은 회의실 안까지 그의 가방을 들어준다. 회의실에 들어서기 전에 슈타우펜베르크는 귀가 잘 안 들린다는 이유로 프라이엔트 소령의 양해를 구하고 히틀러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기로 한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뒤늦게 회의에 들어오자 카이텔은 히틀러에게 그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히틀러와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미 구면이었고 약간 늦은 사실은 큰 문제도 아니었기에, 히틀러는 슈타우펜베르크를 힐끗 보고는 그대로 회의를 진행시킨다.
![]() 상황실 건물이 있던 위치의 오늘날 잔해. | ![]() 잔해 한 가운데 앞에 높인 기념비석. |
슈타우펜베르크가 들어갈 당시, 회의는 격화되는 동부전선의 전황에 대한 보고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보고 담당은 육군 총사령부(OKH) 작전국장 아돌프 호이징어(Adolf Heusinger) 중장이었다. 이 무렵에는 육군 총참모장을 맡던 쿠르트 자이츨러(Kurt Zeitzler) 상급대장이 6월에 사임한 뒤 후임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실질적인 총참모장 업무를 호이징어가 대행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이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붕괴 직전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지만 이는 동부전선에 비하면 약과였다. 이미 동부전선은 6월 22일 바그라티온 작전(O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을 필두로 전개된 소련군의 대공세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벨라루스 곳곳을 해방하며 볼프스샨체가 위치한 동프로이센으로도 바짝 다가서는 소련군을 막아내기 위해서라도 전선에 보낼 증원부대의 편성은 매우 시급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예비군 사령부 참모장으로서 바로 이런 동원능력을 보고하기 위해 참석했건만, 그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폭탄이 터진 곳과 동일한 회의실 풍경. 할더 상급대장이 설명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1942년 경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슈타우펜베르크의 폭탄 가방을 들고 있던 프라이엔트는 히틀러[1번 위치] 오른편에서 전황을 보고 중이던 호이징어[2번 위치] 오른쪽 자리를 마련해준다. 이 위치에는 원래 한스-에리히 포스 제독이 서 있었으나, 프라이엔트의 부탁을 받고 테이블 건너편[15번 위치]으로 자리를 옮겨준다. 아울러 프라이엔트는 폭탄이 든 서류가방을 조심스레 호이징어와 그의 참모 하인츠 브란트 대령[4번 위치] 사이 발치에 놓아두었다. (아래 그림의 처음 폭탄 가방을 놓은 위치는 호이징어와 브란트가 어느 정도 좌우로 움직인 것을 감안하여 잡아놓은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일단 목표한 위치에 폭탄 가방이 잘 놓여진 것을 확인하자 탈출을 모색한다. 먼저 어수선한 회의 분위기를 틈타 베를린에 급히 전화를 걸 일이 있다고 하면서 회의장을 다시 빠져 나온다. 당시에는 슈타우펜베르크[25번 위치]가 나가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인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는 모두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엄숙하게 하는 형식이 아니라 다들 일어서서 돌아다니며 벌이는 형식이었기에 회의장을 들락거리는 일도 잦았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지척에 있던 하인츠 브란트 대령에게 잠깐 언질을 주고 나갔다는 증언이 있기는 하지만, 당사자인 브란트 대령이 폭사해버렸으니 이는 다소 불분명하다. 참석자들 모두 큰 키에 애꾸눈, 외팔이로 많은 이들의 동정과 두려움을 자아내던 그가 설마 이런 일을 꾸미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 옆 통신실에 잠시 들어가 통신감 에리히 펠기벨(Erich Fellgiebel) 통신대장에게 전화를 연결해달라고 한다. 그는 통신병과의 수장 자격으로 총통사령부를 방문하고 있던 펠기벨과 통화하는 척하며 시선을 분산시킨 뒤 슬쩍 건물을 빠져나왔다.
슈타우펜베르크는 곧바로 사전에 약속된대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통신벙커(앞 볼프스샨체 건물 배치도에서 13번 건물)로 간다. 펠기벨 통신대장과 해프텐 중위는 이곳에 위치한 통신장교 루돌프 게르하르트 잔더(R. G. Sander) 중령의 방에 있었다. 잔더 중령은 히틀러 암살 모의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펠기벨은 적당한 구실을 둘러대며 슈타우펜베르크와 해프텐에게 차량을 배차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차량을 배차시킨 구실은 경비대 사령관인 구스타프 슈트레베 중령과 점심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슈타우펜베르크는 다들 알듯이 불구라서 멀리 걷기는 힘든 상황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먹혔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이곳 벙커에 도착할 무렵에는 에리히 크레츠 소위가 운전하는 호르히 자동차가 도착해 있었다.
그 사이 시계는 12시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호이징어의 동부전선 전황 브리핑은 끝난 상황이었다. 이제 엉망이 되어버린 동부전선을 어떻게 수습하고 증원군을 투입해야할지 대책이 논의되어야 했다. 히틀러는 고민하며 허리를 굽혀 책상에 깔아놓은 지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일부 참모들 사이에서 예비군의 증원여력이 어떤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예비군 책임자, 즉 슈타우펜베르크의 의견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카이텔과 그의 육군담당 참모장이던 발터 불레 보병대장이 그제서야 이를 알아차렸던 것 같다. 불레는 잠시 회의장을 나가 옆방 전화실에 들러 통신병 아담 중사에게 슈타우펜베르크에 대해 물었으나, 그도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불레는 투덜대며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배차를 받았지만 폭발을 확인하지도 않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는 펠기벨과 잔더에게 다시 회의에 참석했다가 금방 나와 슈트레베와의 점심식사 자리에 오겠다고 얘기하며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12시 42분에 둔탁한 폭음이 울렸다. 슈타우펜베르크가 회의실에 놓아둔 폭탄 가방이 폭발했던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상황실 건물 창문에서 연기가 솟아나는 것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정확한 사태 파악이 안되어 경비병들도 우왕좌왕하는 순간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를 배웅하러 나선 잔더 중령은 주변 야생동물들이 지뢰밭에 걸려 일어난 폭발이겠거니 오해할 정도였다. 폭발의 의미를 알고 있던 펠기벨, 그리고 전혀 눈치를 못채고 있던 잔더를 뒤로 하고 슈타우펜베르크와 해프텐을 실은 차량은 유유히 출발했다. 제1 통제구역 출입구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해프텐은 잠시 제지당했으나, 아직까지 차단 경보가 울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경비사령관 구스타프 슈트레베 중령과 점심식사가 있다는 핑계를 둘러대고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곧이어 에리히 크레츠 소위에게 다른 급한 일이 생겼으니 비행장으로 직행할 것을 명령한다.

폭발현장의 사진. 화살표로 표시된 지점이 폭탄 가방이 놓여 있었던 곳이다.
그 사이 잠시 자리를 비운 슈트레베 중령을 대신해 경비대 사령관 대리직을 수행하던 피퍼 대위는 볼프스샨체 전체에 경보를 발령한다. 모든 출입구는 차단되어 일체의 통행을 금지시켰고, 피퍼 대위도 경비병력을 이끌고 제1 통제구역으로 출동했다. 이틈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실은 차는 들어왔던 서쪽 출입구가 아닌, 남쪽 출입구로 방향을 잡고 내달렸다. 그러나 이들이 남쪽 외곽 경비초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경보에 의해 출입구가 차단된 상태였다. 비행장으로 가는 마지막 장애물인 이곳에 막힌 슈타우펜베르크는 경비병들에게 베를린에 돌아갈 급한 일이 있다고 다그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남쪽 경비초소의 초소장 콜베 중사에게 직접 따지면서, 경비대 사령관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라고 명령한다. 다소 주눅이 든 콜베 중사는 초소에서 경비대 사령관실로 피퍼 대위와 통화를 시도한다. 이때 전화를 받은 것은 바로 차선임인 묄렌도르프 대위 — 오전에 같이 제2 통제구역 식당에서 식사를 했던 — 였다. 묄렌도르프는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구면인 슈타우펜베르크를 별로 의심하지 않고 그냥 통과시키라고 허가를 내준다. 그러나 콜베 중사는 여전히 찜찜했던 모양이다. 허가를 받고도 그는 한 번 더 묄렌도르프에게 확인전화를 건다 — "정말 통과시켜도 됩니까? 다시 한 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묄렌도르프는 통과를 다시 한 번 승인했으며, 마침내 장애물이 치워지고 슈타우펜베르크는 비행장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슈타우펜베르크가 카이텔에게 전화를 거는 척하고 초소장을 속이는 장면은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허구이다.)

볼프스샨체와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의 위치. 점선은 7월 20일 아침 슈타우펜베르크가 서쪽 출입구를 통해 들어간 경로이고, 그 아래의 실선은 거사 후 남쪽 출입구를 통해 비행장으로 도주한 경로이다.
남쪽 출입구에서 비행장까지는 15분 남짓한 거리였다. 그 사이 가방 속에 남아있던 플라스틱 폭탄 한 덩이를 마저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장면을 사이드미러로 얼핏 확인한 크레츠 소위의 증언에 의해 이 폭탄 덩이는 나중에 다시 회수된다.) 도착한 슈타우펜베르크와 해프텐은 즉시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에 올라 다시 랑스도르프 비행장으로 향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와 핵심인사들의 사망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 약속된대로 펠기벨 통신대장은 베를린의 암살 모의자들에게 히틀러의 사망 사실을 통보하고 볼프스샨체와 외부와의 통신을 모두 절단할 것이었다. 주인을 잃고 고립된 볼프스샨체 총통사령부에서 나찌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발키리 작전에 의해 군 통수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할 일만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멀쩡하게 살아남은 히틀러, 그 암살 실패의 원인
그러나 역사는 비정했다. 히틀러는 폭탄이 터지면서 바지가 심하게 찢겨 나가고 큰 충격을 입었으나, 얼마 후 운신할 수 있을 정도의 경미한 부상 뿐이었다. 분명 폭발은 확실했으나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슈타우펜베르크에게 등을 돌린 마지막 반전은 그가 회의장을 나간 사이에 벌어졌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 테이블 한 가운데, 히틀러 발치 멀지 않은 곳에 폭탄 가방을 놓고 나갔다. 그런데 히틀러 주변을 서성이던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의 눈에 이 가방이 띄였다. 브란트 대령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받은 유명인사였다. 당시 그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특별한 히틀러의 측근까지는 아니었고, 호이징어 중장을 보좌하는 참모장교로서 그의 옆에서 좀 더 테이블에 밀착하려는 생각 뿐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호이징어와 브란트 사이에는 슈타우펜베르크가 서 있었으나 그가 빠져나가면서 브란트의 발치에 폭탄 가방이 걸리적거리게 되었다. 브란트는 무심결에 이 가방을 들어 테이블 다리 바깥쪽으로 옮겨 깊숙이 걸쳐놓았다. 히틀러 지척에서 폭발했으면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을 폭탄이, 이로 인해 제법 멀찍한 테이블 구석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폭탄이 옮겨진 위치와 폭발 당시 사망자들의 위치(빨간색 원으로 표시).
결국 폭탄의 파괴력은 튼튼한 테이블과 그 다리(그림의 점선부)에 부딪혀 한 번 감쇠되었고, 그나마 남은 폭발력은 바닥과 창문을 통해 분산되었다. 구조 모식도와 현장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회의실은 평범한 창문이 여러 개 달려 있었으며 이들은 폭발 위력으로 쉽게 산산이 깨져버렸다. 그리고 사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건 후 현장을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일부 바닥까지 꺼져버렸다고 한다. 이는 상황실 건물이 약간 경사진 땅에 세워진터라 건물 일부는 바닥과 지반 사이가 나무 기둥으로 시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폭발 현장에서의 사망자들. 왼쪽부터 브란트, 코르텐, 쉬문트. 맨 오른쪽은 10월 1일 병상에서 사망한 쉬문트의 유해.
2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테이블 주위에 촘촘히 몰려 있었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폭탄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파편과 폭풍을 뒤집어 쓰면서 히틀러[1번 위치]를 가려주는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히틀러 대신 폭탄 옆에 있던 브란트[4번 위치]는 다리 하나가 날아가며 치명상을 입었고 이튿날 사망했다. 브란트 근처에 있었던 공군 총참모장 귄터 코르텐(Günther Korten) 항공대장[3번 위치, 실제는 더 테이블에 가까이 있었음]은 큰 나무조각들이 배에 박히는 치명상을 입고 역시 이틀 뒤에 사망했다. 히틀러의 육군담당 수석참모 루돌프 쉬문트(Rudolf Schmundt) 중장[7번 위치]은 왼눈을 잃고 곳곳에 파편이 관통하는 중상을 입어 시달린 끝에 결국 그해 10월 1일에 죽고 말았다. 현장에서 즉사한 것은 애꿎은 속기사 베르거 한 명[11번 위치] 뿐이었다. 브란트 대령에 의해 옮겨진 폭탄의 위치와 사망한 4명의 폭발 직전의 위치를 그림에서 확인해보면, 브란트의 역할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테이블 한 가운데에 있던 히틀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기타 참석자의 위치:
1. 아돌프 히틀러: 총통 - 경미한 부상
2. 아돌프 호이징어: 육군 총참모장 대리 - 부상
3. 귄터 코르텐: 공군 총참모장 - 사망
4. 하인츠 브란트: 육군 총사령부 작전부 작전참모 - 사망
5. 칼 보덴샤츠: 총통사령부 공군담당 연락장교 - 부상
6. 하인츠 바이체네거: 국방군 지휘참모부 작전참모
7. 루돌프 쉬문트: 국방군 담당 총통수석참모 - 사망
8. 하인리히 보르그만: 국방군 육군담당 부관 - 부상
9. 발터 불레: 국방군 총사령부장 육군참모장
10. 칼-예스코 폰 푸트카머: 국방군 해군담당 부관 - 부상
11. 하인리히 베르거: 속기사 - 사망
12. 하인체 아스만: 국방군 지휘참모부 참모 - 부상
13. 에른스트 욘 폰 프라이엔트: 국방군 총사령부장 부관
14. 발터 쉐르프: 국방군 총사령부 전사부장 - 부상
15. 한스-에리히 포스: 총통사령부 해군담당 연락장교
16. 오토 귄셰: 총통 개인 부관
17. 니콜라우스 폰 벨로프: 국방군 공군담당 부관
18. 한스 게오르그 오토 헤르만 페겔라인: 총통사령부 SS국가지도자 대리
19. 하인츠 부흐홀츠: 속기사
20. 헤어베르트 뷕스: 국방군 지휘참모부장 부관
21. 프란츠 에들러 폰 존라이트너: 총통사령부 외교부 연락장교
22. 발터 발리몬트: 국방군 지휘참모부 부부장
23. 알프레드 요들: 국방군 지휘참모부장
24. 빌헬름 카이텔: 국방군 총사령부장
암살이 성공할 수는 없었을까?
히틀러는 정말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모면했다.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보듯 몇 가지 조건 가운데 단 하나만 만족이 되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후 쏟아진 수많은 책들이 다양한 대체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도 있다. 그 가운데 이런 대체 시나리오를 모아 흥미롭게 엮어낸 프로그램으로 홈지기가 재밌게 본 것은 역시 다큐멘터리 시리즈 "Unsolved History" 두 번째 시즌(2004년)의 12번째 에피소드였던 "Killing Hitler"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했던 이력답게 이 프로그램에서는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서의 세 가지 "what if" 시나리오를 실감나게 테스트했다.
- 회의장소가 원래대로 히틀러 전용 벙커 안이었다면?
히틀러의 전용 벙커 내부 회의실처럼 밀폐된 방이었다면 폭발력이 새나가지 않고 내부에서 반사되면서 살상효과를 극대화시켰을 것이다. - 폭탄 가방의 위치를 브란트 대령이 옮기지 않았다면?
슈타우펜베르크가 처음 폭탄 가방을 놓았던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면 최소한 히틀러에게도 강력한 폭발력을 미쳤을 것이다. - 가져온 플라스틱 폭약 두 덩이를 모두 가방에 넣었다면?
기폭장치를 꽂을 시간이 없었더라도 남은 1㎏ 정도의 폭약마저 가방에 넣어놨다면 연쇄폭발이 일어나면서 살상력을 배가시켰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우선 현재 남아 있는 볼프스샨체의 건물 잔해와 당시 사진들로부터 현장을 최대한 재구성했다. 특히 나무 테이블을 재질과 구조를 맞춰 유사하게 직접 다시 짰다. 회의실도 알려진 바에 맞춰 벽과 창문을 설치하고 히틀러 인형을 만들어 배치하였다. 이 상태에서 위의 세 가지 다른 설정에 따라 진짜로 폭탄 가방을 터뜨렸을 때 히틀러 인형에 얼마만큼의 피해가 가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을 수행한 것이다.
홈지기는 매양 부러운 것이, 역시 미국은 총기류의 천국답게 이런 프로그램에서 진짜 폭약을 터뜨려가며 실감나게 실험을 한다는 점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 "Mythbusters"가 이런 리얼한 실험 연출로 크게 성공했듯이 말이다.

Killing Hitler의 실험 장면. 가운데 탁자 옆의 히틀러 인형이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과는 세 가지 경우 모두 히틀러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히틀러 인형은 폭발로 수많은 파편이 박히고 너덜너덜해질 수준으로 타격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를 토대로 판단해보면 히틀러가 얼마나 억세게 운이 좋았는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특히나 마지막 시나리오마냥 가용한 폭약 덩어리를 모두 가방에 넣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고 후 옷을 갈아입고 의기양양하게 다시 현장에 나타난 히틀러.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보노라면 우리는 '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는 암살 미수를 운좋게 피하고 점점 더 자신이 절망 속에서도 독일을 구해낼 수 있는 운명을 갖고 있다는 잘못된 확신과 환상에 빠져들었다. 그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살아남은 '운'의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이 더 고통을 받았어야 하는 아픈 역사였다. 한국도 지난 대선에서 온갖 의혹을 운좋게 잘 피해간 분이 청와대 벙커에 앉아 계시지만, 행여나 자신이 운이 좋으니 이 경제난국 속에서 구국의 운명을 내려받았다는 헛된 망상에 빠지진 않으시길 바란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건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건 그것이 '필연적 운명'이라느니 '신의 섭리'라고 할 근거는 전혀 없다. 세상은 원래 도도한 변화의 격랑 속에서 이렇게 '운'이라는 이름의 우연적 요소와 사람들의 예기치 않은 실수가 비선형적으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결과일 뿐임을.
(to be continued……)
- 발키리와 슈타우펜베르크의 최후 현장, 벤들러블록에 대한 기억 [→바로가기]
- 히틀러 암살 계획 주도세력과 쿠데타 시도의 배경 [미완성]
- 발키리 작전(Operation Walküre)의 목표와 문제점 [→바로가기]
-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 (1) 볼프스샨체 총통사령부 [→바로가기]
-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 (2) 베를린과 파리 [미완성]
- 또 다른 슈타우펜베르크와의 만남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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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설 연휴기간에도 글을 올려주시다니!!
역시 열정이 넘치시는 홈지기님이십니다.
저 세가지 시나리오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히틀러가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니
역시 역사란 참 별거 아닌 일로도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원래는 연휴 들어가기 전에 글을 올리고 아무 생각없이 쉴려고 했는데 역시 이런저런 일이 겹치며 질질 끌었습니다. 아무튼 개인이건 국가이건 역사의 돌발변수는 무궁무진한 법이지요. 오늘도 생각 없이 보내는 사이에 놓치는 기회가 많지는 않은지 고민해봅니다. =.=
국가원수의 '벙커'를 폭파시킨다는 것 때문에 이 영화 개봉못하는거 아니냐는 농담이 떠돌았더랬죠(쓴웃음) - 워룸에서는 왜 또 갑자기 회의를 하시나.
국가 등 거대집단의 책임있는 위치에 계신 분들은 개인의 운과 집단의 운을 구분하셔야 할텐데... 뭐든 한 발자국만 물러서면 저거 뭐하는 한심한 짓인지 알 수 있는 일도 울타리안에 있으면 파악못하는게 인간의 한계이니.
원래 끗발 좀 오른다고 이성을 잃고 올인하다가 말아먹는 법이지요. 물론 세상에는 그런 도박이 성공하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합니다만, 성공담은 과장되고 실패담은 묻히다 보니 행운이 줄줄이 이어지리라는 잘못된 판단에 빠지기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높은 자리일수록 달콤한 인의 장막이 더해지니 어려운 노릇입니다.
발키리 관련 글을 죽 읽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군요.^^;
아쉽지만 그만큼 설이 지나고 나서 읽을꺼리를 기다리는 두근거림으로 지내렵니다.ㅎㅎ;
설 잘 쇠시고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냥 가볍게 읽으시라고 쓰는 글인데 따로 시간까지 내야할 정도인가요? --a 글쓰기 문제를 좀 더 반성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말씀 감사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GDW에서 배포하는 자료는 정말 충실한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채승병님이 독일저항추모관에 갈 일이 있으면 브로슈어를 챙겨오라고 하신게 기억나는군요. 다음에 베를린에 가게 되면 독일저항추모관에 꼭 들러야 겠습니다.
요즘은 제법 쓸만한 자료 소스가 많이 생겼기에 빛이 바랜 감은 있지만 그래도 GDW의 자료들이 여전히 괜찮아 보입니다. 다음번에 베를린에 가시걸랑 미리 말씀주시면 이것저것 자료사냥 많이 부탁드려야 겠습니다.^^
홈지기님의 내공이 실린 글을 보며 항상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홈지기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며 설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히틀러의 운과 BBK의혹으로부터 그럭저럭 빠져나온 MB의 운을 비교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됩니다.
만약 MB의 의혹이 진실이라면 그는 운이 좋은 것 이지만,
의혹이 정치적 모략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쓸데없는 정쟁에 말려들게 된 불운이라고 할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물론 이 말에 발끈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이는 인간은 진실보다는 자신의 코드에 부합하는 내용을 더 신뢰하기때문이겠죠.
그리고 근거도 없는 광우병 괴담을 퍼뜨리는 등 끊임없이 정파적 이익을 위해 정권을 흔들어 대는 사람들 이야말로 헛된 망상을 버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MB의 경우를 그렇게 운/불운으로 나눠서 보실 수도 있겠지요. 다만 저는 제기된 의혹의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MB에게는 큰 '운'이었다고 봅니다. 침소봉대된 의혹에 의해 뜻하지 않게 낙마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정치판에서 그만한 사건이 표심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부터가 기묘한 상황이었지요. 말씀하신대로 좌/우건 진보/보수건 어느 쪽이든 당시에도 사람들이 진정으로 진실을 추구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이미 마음 속으로 편을 갈라놓고 거기에 맞춰 의혹들을 재해석한 결과가 지난 대선에 투영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뒤늦은 인사이긴 합니다만 저도 설 잘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답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에서도 홈지기님의 내공이 느껴지네요.
홈지기님 말씀대로 그런 의혹에도 대권을 잡았으니 운이 좋은편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저는 사실 MB를 BBK피해자라고 보는게 더 합리적으로 설명이 된다고 보기때문에 그런 말을 드린겁니다.
BBK관련 여러 내용을 살펴보면, 특히 아이러니칼하게도 마지막 광운대동영상을 보면 MB가 BBK피해자라고 보는게 설명이 더 합리적으로 되더군요.
물론 피해자라고 한다고 해도 MB에겐 결코 명예로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아무튼 홈지기님의 내공을 배우기 위해서 자주 들르고 있습니다.
다음 글도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무척 흥미롭군요...
그런데 폭발시 사람들의 위치 같은 건 어떻게 알아낸 거죠?
부상자의 위치를 일일이 기록으로 남길 것 같지도 않고, 증언으로
재구성한 건 솔직히 좀 신빙성이 떨어질 것 같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은 사건 발생 이후 게슈타포와 친위대의 조사가 철저히 이뤄졌었고 상당수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망자도 4명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20명의 증언을 교차검증하면 회의 당시 사람들의 위치는 비교적 정확하게 나오는게 당연합니다. 적어도 폭탄이 터질 때 자기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는 다 알지 않겠습니까?
방금 <작전명 발키리>를 보고 왔습니다. 생각보다 괜찮더군요.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읽으니 훨씬 더 잘 읽히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되길 바라는건 아니니 당연히 선즐감 후일독을 기대하고 쓴 글입니다.^^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채승병님이 언급하신 동영상을 보았는데 재미있게 보았던 적이 생각납니다. 개인적으로 이 실패한 암살사건을 볼때마다 결국 불을 당겨야할 가장 중요한 인물인 슈타우펜베르크 본인의 실수 또는 조급성에 의해서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대사일수록 긴장되고 초조한 마음이 드는건 사실입니다만 본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결국 거사의 최종적인 성패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부터 이 사건을 보면서 중국의 형가가 자꾸 머리속에서 떠올랐습니다만 채승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군요.
그래도 누구도 여기까지나마 실행해보지 못한 일이었으니 슈타우펜베르크의 실수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그냥 안타까워할 수밖에요. 그런걸 보면 사람들에게 권위+공포로 인한 위압감을 조성해서 저절로 주눅이 들고 실수하게 만드는게 역대 독재자들의 중요한 생존법칙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슈타우펜베르크에 대해 개인적 입장 휴머니티적 관점에서 그의 행동에 대해서 존경하는 바이나 결과론적으로 그나마 존재했던 국가 지배층내에 반정부 세력들이 일소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상당히 파격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 농후하여 염려되는 발언이지만 관련서적을 볼때마다 늘 느끼는 부분이 과연 그가 이 거사의 최종적인 불을 당길만한 자격을 갖춘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냉철하게 판단해보면 아닐까 하는게 저의 판단입니다. 그분에 관한 이야기 주로 회고록 형식의 글을 접할때마다 그분의 이념과 성품을 볼때에는 분명 존경할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한 독재자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입장이 되기에는 차가운 피가 다소 모자라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문득 사망자 중 쉬문트라는 이름을 다른 데서도 들어본 거 같더라니, 폰 만슈타인을 낫질 작전 건과 관련해 히틀러와 다리를 놓아준 그 쉬문트가 이 쉬문트로군요.
글의 마지막 문단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다시금 좋은 글에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__)
쉬문트도 ('부시의 푸들'처럼) 충견이라는 비아냥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위대가 설치는 한 가운데서 육군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대변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긴 합니다. Lawlite님의 성원에 항상 감사드리오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내용이군요. 제가 가입한 사이트(DVD프라임)에 홈지기님이
쓰신 글들(161번, 160번)을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겠는지요?
발키리 작전에 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참고용으로 게시판
본문에는 블로그 링크를 다는 형태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넵, 링크는 굳이 이렇게 허락을 맡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나중에 통보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죠. 일찍 답해드려야 했는데 제가 어제 하루 종일 다른 일이 있어 좀 늦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해당 사이트 '영화 이야기' 게시판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
정말 멋진 글에 감탄 또 감탄 뿐입니다^ㅇ^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서는 통신실 아담 상사-병장??-가
히틀러에게 슈타우펜베르크가 수상하다는 말을 했었다는데
정작 히틀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토트 조직'소속 기술자나 노동자가 매설한 폭약이
터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더군요.
슈페어의 회고록에서도 그런 오해로 인해서
슈페어가 잠깐이나마 난처한 입장에 빠졌었다는 내용도
간략하게나마 있었고요.
이건 상당히 생뚱맞은 질문입니다만...
사진 중에서 히믈러가 나오는 사진에서 말입니다,
히믈러의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요한 라텐후버 맞는지요?
그리고 프란츠 섀들이란 사람 혹시 '몰락'영화 후반부에서
빌헬름 몽케가 벙커에서 같이 탈출하여 나가자고 했을때
안 간다면서 권총을 입에 물고 자살한 그 사람이 맞는지요?
간만에 오면서 이거 질문만 한보따리 풀어놓고 가서 죄송합니다....
아무쪼록 금년 한해에도 새해 복을 가득^^ 받으시길 빕니다.
별말씀을…… 개인적으로는 쓰고 나니 빼놓은게 많은 것 같아 불만입니다. T.T
그리고 아이아스님 댓글을 보고나니 또 여러 가지가 생각나네요. 일단 통신실의 아담이 사실 '중사'였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Wachtmeister는 '중사'로 번역하는게 맞죠.) 슈페어의 회고록에 나온 이야기, 처음에는 OT 소속 노동자들이 의심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써놓는다는게 빼먹었네요.
질문하신 내용도 정확합니다. 맨 왼편이 라텐후버 맞고요, 섀들이 몰락에 자살하는 것으로 출연했다는 점도 다 옳습니다. 역시 아이아스님 안목이 상당하시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끄럽게도 제가 물음표를 올린 것이 융에의 회고록 국내 출판본에
아담의 계급을 '병장'으로 적었기 때문에 올린 것입니다ㅠ.ㅠ
저기서 제일 끔찍하게 죽은 사람이 속기사였다고 하는데
진짜 애꿎은 사람이 다리가 모두 절단당하면서 죽었다더군요.
회의기록만을 하다가 날벼락당한 것인데
너무 죽은 상황이 끔찍해서인지
홈지기님께서 설명을 생략하셨군요.
홈지기님의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침 조조할인을 이용 영화를 보았습니다. 생각 외로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중.고교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많더군요. 이 어린 학생들이 자라 양심과 의무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홈지기님도 Mythbuster 를 보신다니 놀랍네요.
저도 집의 유선에 Discovery channel 이 나와서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주위에 저 말고는 보는 사람이 없어서......
참으로 딱한게...BBK말입니다. 그렇게 뻔한 사기 수법에도 넘어갔던 사람이 이 어려운 시기에 울 나라의 국정최고운영자라는 사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