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연합군이 독일 영내 깊숙이 전략폭격을 해오고 있었다. 1943년 7월 함부르크 대공습(고모라 작전)과 같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불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폭격 — 7박 8일간 이어진 공습으로 25만 채의 집이 소실되고 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 — 은 국민의 저항의지까지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었다. 폭격 속에서 행정 및 치안조직이 무력화되면 암약하는 반체제세력이 어떻게 준동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나찌 독일의 전쟁기구가 이미 전 유럽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독일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자원과 노동력 상당 부분을 강점지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독일의 지배에 큰 불만을 가진 존재들이었고, 독일 점령기구의 감시가 느슨해지면 폭력적인 봉기에 나설 위험이 농후했다.
독일 수도 베를린은 이러한 불안요인이 혼재된 곳이기도 했다. 베를린 일대는 독일의 중요한 산업시설의 소재지이기도 했는데,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끌어온 해외 노동자들의 거주구역이 대전기 크게 성장했다. 연합군이 대규모 전략폭격과 함께 공수부대를 낙하시키고 이들 해외 노동자와 합세하여 독일의 심장부를 마비시킨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회자되었다.
발키리 작전은 이런 반체제봉기가 벌어질 경우에, 국방군 병력이 나서서 치안을 회복하기 위한 작전계획이었다. 이에 필요한 병력은 당연히 주요 도시 인근의 후방 위수병력이 도맡아야 했다.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전선에 배치된 야전부대를 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방에서 신병을 훈련시키고 부상병, 휴가병을 재편성하여 전선에 보내는 역할을 하는 예비군(Ersatzheer)2 조직이 작전의 실행을 주도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늘날의 한국으로 따지자면 동원 지정이 되지 않은 예비군들이 유사시 북한군 특수부대의 후방 침투를 대비해 향방작계 훈련하는 딱 그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 발키리 작전은 말하자면 일종의 향방작계였다.
이 작전은 총통의 직접 명령에 의해 발령되는 것이 원칙이나, 예비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서도 발동될 수 있었다. 유사시 "발키리(Walküre)"라는 작전지령이 내려지면, 각 해당부대들은 미리 지급받은 봉투를 뜯고 그 안에 지정된 담당 방어시설로 출동하게 된다. 이곳을 장악하고 예비군 사령관의 이어지는 추가 명령에 따라 반체제세력의 준동을 진압하는 것이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전시의 비상상황을 생각하면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조처로 보인다. 히틀러가 발키리 작전의 준비를 승인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 음모자들은 이를 역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발키리 작전의 변용 계획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세력들이 이 발키리 작전에 주목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국가원수인 히틀러가 승인한 계획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보이는 절차에 따라 권력을 장악하고 군 병력을 쉽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살 모의세력들은 ①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볼프스샨체의 총통사령부에서 히틀러를 제거하고 → ②예비군 총사령관의 발키리 작전 발령권을 이용하여 행정권과 군 통수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위장한 뒤 → ③출동한 육군 병력을 이용하여 친위대(SS)와 보안대(SD), 비밀경찰(Gestapo) 등 친 나찌세력을 제압하고 → ④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가담하지 않은 야전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맞춰 예비군 일반육군국장 올브리히트 보병대장은 히틀러 유고시를 상정한 발키리 작전 발령 전문을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준비하였다3:
I. 히틀러 총통께서 돌아가셨다!
일단의 부도덕한 당 지도자 무리가 현 시국을 틈타 어렵게 싸우고 있는 전선 배후를 습격,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벌였다.
II. 이런 위급한 순간을 맞아, 정부는 법과 질서의 수호를 위해 군 비상상황을 선포하고 동시에 모든 행정권과 국방군의 지휘권을 본관에게 부여하였다.
III. 이에 본관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 나는 위임 권한에 의거하여 배타적 행정권을 각 지역 사령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임한다 — 본토에 대해서는 예비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하며 동시에 그를 본토전구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서부 점령지구에 대해서는 서부전구 총사령관(OB West)에게,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남서부전구 총사령관(OB Südwest)에게, 동부 지구에 대해서는 각 지휘 지역별 집단군 총사령관과 오스틀란트 국방군사령관(Wehrmachtbefehlshaber)에게,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해서는 각 지역 국방군사령관에게 위임한다.
- 행정권자는 다음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다:
- 담당 구역 내 국방군 및 무장친위대(Waffen-SS), 국가노동대(RAD), 토트 기구(OT)의 모든 부서와 부대
- 특히 일반경찰(Ordnungspolizei), 보안경찰(Sicherheitspolizei), 행정경찰(Verwaltungs-polizei) 모두를 포함한 (국내 모든 주와 행정구의) 모든 공공기관
- 나찌 당 및 연관 기관의 모든 종사자와 부서들
- 운송 및 보급 시설물
- 모든 무장친위대는 즉각 육군에 편입된다.
- 행정권자는 질서와 치안을 유지할 책임을 갖는다. 특히 다음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 통신체계의 보호
- 보안대(SD)의 제거
군정 권력에 대한 일체의 항거는 가차없이 분쇄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국의 경각에 달한 위험 상황에서는 국방군의 단결과 규율의 유지가 최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이 모든 육해공군의 지휘관들은 수중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각자의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모든 예하 부서들이 훈령을 따르도록 해야하는 이유이다. 독일군 장병들은 역사적인 책무를 앞에 두고 있다. 독일이 구원될 수 있는지 여부는 장병들의 열정과 태도에 달려 있다.
(실제 1944년 7월 20일 거사 당시에는 몇 가지 사건에 의해 이와는 또 조금 다른 전문이 발령되었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전문의 발령 주체는 새로운 독일군 통수권자, 즉 국방군 총사령관 직을 맡기로 한 폰 비츨레벤(Erwin von Witzleben) 원수가 될 예정이었다. 이 전문에 의해 육군이 친 나찌세력의 반발을 성공리에 제압하면 다음과 같은 진용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연합국과의 강화를 추진할 계획이었다:
- 임시 국가 수반(Reichsverweser):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
- 임시 국가 수반 비서실장: 울리히 빌헬름 슈베린 폰 슈바넨펠트 백작
- 수상: 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 박사
- 수상 비서실장: 페터 요크 폰 바르텐부르크
- 부수상: 빌헬름 로이슈너
- 부수상 대리: 야콥 카이저
- 전쟁부 장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보병대장
- 전쟁부 장관 비서실장: 클라우스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 대령
- 국방군 총사령관: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 육군 총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 외교부 장관: 울리히 폰 하셀 또는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
- 내무부 장관: 율리우스 레버
- ……

베크, 올브리히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폰 비츨레벤, 회프너

괴르델러, 폰 슈바넨펠트, 폰 바르텐부르크, 로이슈너, 카이저
발키리 작전의 주요 동원부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무장 전력이 필요했다. 발키리 작전의 핵심 동원부대는 전시의 예비군이 관리하는 여러 후방 경비부대와 교육부대들이었다.
여기서 교육부대가 예비군 관할에 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 독일의 동원체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독일의 야전부대는 (대부분) 특정한 지역 연고에 따라 편성이 되고, 병력은 이 연고지역에서 충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제3 기갑사단은 베를린이 연고지였고, 제13 기갑사단은 막데부르크(Magdeburg)가 연고지였다. 따라서 이런 각 지역에는 담당 부대로 보낼 신병을 훈련시키는 신병교육부대 — 더 정확히는 보충부대(Ersatzeinheiten) — 가 위치하고 있었다. 징접된 병사들은 이런 신병교육부대에 입소해서 기초 군사교육을 이수한다. 이들은 이후 야전부대로 보내져 (필요에 따라) 사단별 야전보충대대에서 추가 훈련을 받고 일반 전투부대에 배치되었다. 이런 지역단위로 세분화된 병력충원 시스템 때문에 독일 내 곳곳에는 많은 신교대와 기간병들이 있었다. 베를린 주변에도 이 지구의 군정 및 동원업무를 관할하는 제3 군관구(Wehrkreis III) 소속의 신교대와, 여타 병과학교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를테면 발키리 작전이 발령되면 베를린 트렙토(Treptow) 구에 위치한 육군 무기기술학교(Heeres-Waffenmeisterschule)는 베를린궁(Stadtschloss Berlin) 주변을 경비하기로 되어 있었다. 또한 리히터펠트(Lichterfeld)에 위치한 육군 화기업무학교(Heeres-Feuerwerkershule)는 인근 베를린 병기창 경비 업무를 전담할 예정이었다.
Wachbattaillon GD: 대독일 경비대대
대독일 경비대대(Wachbataillon Großdeutschland)는 이들 예비군 관할부대 가운데도 언급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원래 이 대독일(Großdeutschland, GD) 부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수도 경비 임무를 맡았던 경비단사령부(Kommando der Wachtruppe, 이후 1934년에 베를린 경비단 Wachtruppe Berlin 으로 명칭 변경)가 전신이었다. 이는 나치의 재무장 이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10만 독일군 체제 당시, 전 육군의 7개 보병사단에서 1개 중대씩을 파견하여 편성한 부대였다. 각 보병사단들은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파견중대를 교대시키게 되어 있었으므로 고정된 편성을 가졌던 부대는 아니었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베를린에 주둔한 유일한 군부대라는 중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주요 국가행사가 있을 때마다 의장대로 나서기도 했다. 나찌가 집권한 뒤인 1937년에는 베를린 경비연대(Wachregiment Berlin)로 확장되었으며, 과거처럼 중대 단위로 병력이 교대되지 않고 자체 고정 편제를 갖추고 개별 병사만 전국 각급 사단에서 파견나오는 형식으로 변화한다.
베를린 경비연대가 "대독일(Großdeutschland)"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사연도 남다르다. 다른 독일 육군부대들은 특정 지역을 연고로 한 부대인데 반해, 이 베를린 경비연대는 충원구조상 독일 전국 각지 출신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이 때문에 전 독일의 단결을 상징하는 부대로 지목되어 1939년 초 "대독일"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아울러 자체 신교대를 갖추고 독립 정규 보병연대로 재편되었다. 이후 대독일 보병연대는 육군의 상징적 부대로서 프랑스전역, 발칸전역, 독소전에 연이어 투입되었으며, 대전 중 차량화 보병사단, 기갑척탄병사단, 최후에는 기갑군단 급까지 확장되었다.
대독일 보병연대가 분리되어 야전부대로 재편되고 전선에 투입되자, 1940년 4월 2일부로 수도 경비업무만 전담하는 부대는 베를린 경비대대(Wachbataillon Berlin)로 대대급(4개 중대) 편성을 갖춘 부대로 베를린에 잔존했다. 이 부대는 1941년 5월에 5개 중대급으로 확장되었다. 이어 1942년 10월 1일부로 대독일 경비대대(Wachbataillon GD)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선에 투입된 대독일 사단과의 유대가 한층 강화된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대독일 경비대대 지휘관 오토-에른스트 레머(Otto-Ernst Remer) 소령도 대독일 기갑척탄병연대 1대대(I./Pz.Gren.Rgt. "GD")를 지휘하다가 전보된 인물이었다.

암살시도 진압 후 대독일 경비대대를 사열하는 레머
이 부대는 베를린-모아비트(Moabit) 지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이곳은 티어가르텐 북쪽, 오늘날 베를린 중앙역(Belin Hauptbahnhof)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벤들러블록과는 3㎞ 남짓한 거리(직선거리로는 2㎞ 정도)에 불과했고, 여타 주요 관공서도 지척이었다. 우리 식으로 따진다면 과거 청와대 주변을 경비했던 수경사 30경비단4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Ersatzbrigade GD: 대독일 보충여단
발키리 작전에서 대독일 경비대대만큼의 중요성은 아니었지만 함께 살펴볼만한 부대가 바로 대독일 기갑척탄병사단의 신교대였던 대독일 보충여단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대독일 부대는 독립 보병연대급으로 확장되면서 자체 신교대를 운영했다. 모 부대가 사단급으로 커지고 여타 소규모 경비부대도 포괄하면서 신교대 규모도 자연스레 확장되었다. 히틀러 암살 모의가 벌어질 당시에는 여단급 신교대가 브란덴부르크 주의 코트부스(Cottbus)와 구벤(Guben)에 자리잡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남동쪽으로 약 125㎞ 떨어진 코트부스에는 여단 사령부와 3개 보병 신교대대, 1개 전차병 신교대대가 있었다. 구벤에는 1개 보병 신교대대와 1개 포병 신교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거리상으로는 베를린에서 100㎞ 넘게 떨어져 있어서 매우 멀게 느껴진다. 실제 발키리 작전에서도 유사시 이 부대의 경비지역은 베를린 시내 한복판은 아니었다. 일부는 브란덴부르크 주 남단 헤어츠베르크(Herzberg)에 위치해있던 당시 유럽 최대의 라디오송신소(송신탑 높이 337m, 출력 500㎾급) Deutschlandsender Herzberg/Elster 일대였다. 또 다른 일부는 템펠호프 공항 남쪽 10㎞ 일대의 외국인 노동자 집단거주 구역까지 걸쳐 있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충분히 베를린 중심으로 불러들일만한 위치이기도 했다. 7천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 강력한 부대가 어느 쪽에 가담하느냐에 따라 거사의 성패가 일거에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발키리 작전의 베를린 시내 주요 장악목표
암살 모의세력에는 이들을 동원하기에 유리한 핵심 지휘관 2명도 동참하고 있었다. 우선 베를린 지구 군정지휘관(Berliner Stadtkommandant)인 파울 폰 하제(Paul von Hase) 중장이 있었다. 대독일 경비대대 등 베를린에 투입되는 예비군 병력은 지휘계선상 폰 하제의 직접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베를린 경찰청장인 볼프-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백작(Wolf-Heinrich Graf von Helldorf)이 거사에 가담했다.5 이로 인해 육군 병력만으로 부족할 경우 일반경찰력도 추가로 투입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었다.
발키리 작전이 발동되면 이들 병력은 다음과 같은 총 30개 우선 목표를 최우선적으로 장악할 예정이었다:

파란 건물은 히틀러 암살 모의세력의 주요 거점, 빨간 건물은 주요 장악 목표, 빨간 점선은 주요 관공서 밀집지역 1차 봉쇄선 (클릭하면 확대) [홈지기가 GDW 자료를 직접 스캔]
(30개 기관 중 일부만 표기)
1. 국가보안본부 제4국(게슈타포) Reichssicherheitshauptamt, amt IV
2. 친위대장 인사참모부 Reichsführer SS, Persönlicher Stab
3. 친위대 중앙지휘국 SS-Führungshauptamt
4. 친위대 및 경찰 상급지휘부 Der Höhere SS- und Polizeiführer
5. 친위대 통신감실 Chef des SS-Fernmeldewesens
6. 친위대 중앙국 SS-Hauptamt
7. 국가보안본부 제5국 Reichssicherheitshauptamt, amt V
8. 친위대 무전국 SS-Funkstelle
12. 총통관저 Kanzlei des Führers
13. 부총통실 Der Stellvertreter des Führers
14. 나찌당 국가조직국 Der Reichsorganisationsleiter der NSDAP
17. 나찌당 국가보도감실 Der Reichspressechef der NSDAP
18. 국민홍보 및 선전부 Reichsministerium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19. 내무부 Reichsministerium des Innern
21. 프로이센 주정부 Preußisches Staatsministerium
22. 돌격대 참모장실 Der Stabschef der SA
23.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돌격대 지부 SA-Gruppe Berlin-Brandenburg
24. 베를린 행정관구청 Gauleitung Berlin
25. 브란덴부르크 행정관구청 Gauleitung Mark Brandenburg
28. 독일노동전선(DAF) Deutsche Arbeitsfront
29. 보안대 베를린 분실 SD-Leitabschnitt Berlin
30. 국가선전국 Reichspropagandaamt
이들이 장악되면 이후 31개 2차 목표기관들까지 장악이 이뤄질 예정이었다. 이상의 기관들을 장악함과 동시에 위 지도의 붉은 점선으로 나와있는 주요 행정부서 밀집구역에 대해서는 저지선을 치고 완전히 봉쇄를 하여 외부 진압병력의 동원을 막기로 되어 있었다.
발키리 작전의 문제점
이처럼 작전계획의 기본 골간은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을 뜯어보면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독자적인 병력 동원계획이 아닌, 발키리 작전이라는 기존 향방작계의 틀을 차용할 수밖에 없던 고육지책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나찌 비밀경찰과 친위대의 조밀한 감시망을 뚫고 거사 동참 세력들을 폭넓게 포섭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평시에는 수도권에 주둔하는 대규모 연대~사단급 야전부대 몇 개만 포섭을 해도 충분하다. 이런 연대~사단급 부대들은 통수체계를 통한 상급 지휘관과 하급 지휘관 사이의 관계가 밀접하다. 행여 말단 중대장이 거사 내용을 몰랐다 해도 상급 사단장과 연대장이 윽박지르면 직속상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따를 가능성이 높고, 기밀 유지도 용의하다. 이 때문에 쉽게 많은 병력을 거사에 끌어들일 수 있다. 실제로 체코 병합 이전에 독일 육군 내에서 모의되던 쿠데타 계획이나, 우리나라에서 벌어져 성공한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 등에서도 소수나마 확고한 의지로 동참했던 부대들의 역할이 컸다.
반면 1944년 당시 독일과 같은 전시의 후방에는 자잘하게 산재된 중대~대대급 병력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본토에 주둔하며 영공을 방어하는 대공포부대 다수는 나치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공군(Luftwaffe) 소속 병력이었다. 이들을 배제하고 육군 병력을 긁어 모아 거사를 도모하자면 다수의 독립된 하급부대 지휘관들을 직접 포섭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기밀이 누설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발키리 작전처럼 거사에 동원되는 장병들에게는 우선 히틀러와 나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목적임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일뿐 근본적인 위험은 여전히 남는다. 설령 이들을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통일된 리더십으로 거사가 성공할 때까지 끌고 가기란 한층 어렵다. 예를 들어 대독일 경비대대가 자신들이 히틀러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계속 거사에 순순히 따를 수 있었을까? 대독일 사단장같은 상급제대 지휘관이 명령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 군정사령관 폰 하제 중장의 느슨한 통제권으로 이를 강제하기란 매우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12·12 군사반란 당시에도 (상황은 반대였지만) 수경사 장태완 장군이 진압군 측에 섰음에도 정작 예하부대가 끝까지 따르지 않아 실패한 사례가 있었듯이 말이다. 이런 류의 거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고급 지휘관과 참모들의 참여 외에도 중간급 지휘관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인 법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주도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대독일 경비대대같은 핵심부대 몇몇에 대한 통제권만 상실해도 무게추가 확 쏠리기 십상이었다.
다시 말해 발키리 작전은 핵심적인 부분에서 어떻게든 잘 되리라는 지나친 낙관에 의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나온 잡다한 지휘관들과 병력들은 순순히 암살 모의세력의 명령에 따라줄 수밖에 없다, 친위대 등 친 나찌세력들은 혼란 속에서 별달리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순순히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다, 가담부대 장병들이 이것이 반 히틀러 음모임을 알더라도 어쩔 수 없이 대의에 따라올 수밖에 없다…… 등등.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와 나찌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발키리 작전은 빠져나갈(실패할) 구멍이 별로 없던 치밀한 그물이 아니었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엉성한 그물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함이 역사의 비극적 결말을 두고 암살 모의세력의 안이함을 조롱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반란들은 터무니없이 허술한 계획으로 거행되고도 상대의 어이 없는 실수로 인해 성공한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 한국사의 인조반정이나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 등도 모두 그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오히려 그 이면에서 막다른 길로 몰려가던 암살 모의세력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파도를 향해 주사위를 내던질 수밖에 없는. 발키리 작전은 결국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그나마 온전한 그물코에 대어가 걸리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던진 그물이었다.
(to be continued……)
P.S.
이 글은 당초 계획상으로는 3번째에 해당하는 글이다. 2번째 글로 예정했던 "히틀러 암살 계획 주도세력과 쿠데타 시도의 배경"은 자료 보강의 필요 때문에 일단 3~5번째 글을 쓴 뒤에 마지막에 올릴 예정이다.
- 발키리와 슈타우펜베르크의 최후 현장, 벤들러블록에 대한 기억 [→바로가기]
- 히틀러 암살 계획 주도세력과 쿠데타 시도의 배경 [미완성]
- 발키리 작전(Operation Walküre)의 목표와 문제점 [→바로가기]
-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 (1) 볼프스샨체 총통사령부 [→바로가기]
-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 (2) 베를린과 파리 [미완성]
- 또 다른 슈타우펜베르크와의 만남 [→바로가기]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 독일어 발음을 최대한 살리면 "발퀴러"라고 표기하는게 적당할듯 싶으나, 국내에 널리 알려진 영어 발음대로 "발키리"라고 쓰겠다.
- 직역하자면 '보충군'이 더 적절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비군'으로 번역하였다.
- 1943년 경의 초안 전문은 독일어 위키피디아 해당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 부대는 5·16 쿠데타 이후 고양에 있던 제30 보병사단 중 1개 대대를 차출해 청와대 턱밑에 주둔시킨 것이었다. 30경비단은 이후 경복궁 태원전 자리에 35년간 주둔하다 1996년에야 외곽으로 이전했다.
- '희한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헬도르프는 돌격대 출신으로 누구보다도 충직한 나찌당 인사 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 그와 친하게 지내던 나찌당 고위인사들의 충격이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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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고 갑니다.
아무래도, 홈지기님 말씀과 같은 상황에서는 저보다 나은 계획을 세우긴 힘들었을 것 같군요.
히틀러 암살모의를 보면 어렵긴했지만 조금만 더 신경쓸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운 대목이 여럿 있습니다. 특히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볼프스샨체에서의 행동이 특히 그렇습니다. 당시 주모자들이 받고 있던 극도의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닙니다만, 자꾸 그런 미련이 남는 것은 역시 전쟁의 후유증이 너무 컸기 때문이겠죠.
발키리작전의 문제점에 관한 부분을 읽다보니 사육신의 세조암살계획이 떠오르는군요.
김질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해봐야겠군요.^^
독감에서 회복되신 모양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저도 2주쯤 전에 그냥 감기로 1주일간 고생한 기억이...) 확실히 반란음모라는 것은 확실하게 준비하면 발각되기 쉽고, 비밀리에 준비하면 엉성하게 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핵심인 히틀러의 암살만 이루어진다면 그만한 대체인물이 쉽게 등장하기 힘든만큼 성공가능성이 그렇게 적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완전 회복은 아니고 그냥 운신하는 수준입니다. 저도 걸리기 시작한 때부터 하면 열흘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잔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이 않좋으신 상황에서도 글을 올려주시니 읽는 저로써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채승병님의 열정이 느껴지는것 같습니다. 특히 중간급 지휘관 참여 부재와 관련해서 예전에 교수님에게 들었던 하나회 철폐 주된이유가 생각나 무척 즐거웠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성공한 몇몇 쿠데타들을 살펴보면 이 중간급 지휘관들의 역활에 크게 좌우 되었다고 볼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계속 이어질 채승병님의 연재가 기다려집니다
성인조폭들이 중고등학교에서 꿈나무(?)들 미리 점찍어놓는거랑 비슷한 면이 있었죠(웃음).
아무래도 어느 정도 겁 개념을 상실한 이들이 있어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법이죠. 항상 갈등을 때리게 만드는 거사일수록 그런 추진력을 실어주는 無鐵砲 정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런걸 생각할 때마다 자꾸 시청 앞 차지철이 떠오르는군요. --a
차지철이 있기에 박대통령이 힘을 발휘할수있었다는 충청도 출신의 정치인의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나 요새 세상을 보면 차지철이 너무 많은것 같아 걱정입니다.
삼청동에 계신 어르신께서도 부디 본인께서 과천청사에서 말씀하셨던 계영배처럼 넘침을 경계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전투에서도 대대/연대급의 실전투병력 지휘관이 중요하지요.
ps)독감은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올해에는 몇번이나 감기에 걸려서 고생했는데...
(원래 일년에 한번 정도 크게 않는 편인데)
빠른 연재보단,
건강하신 몸으로
꾸준히 알찬 연재가 더욱 바라는 바입니다.^^
마지막 말씀을 들으니 좀 부끄러워집니다. 이번 글도 감기 기운이 섞인 상황에서 좀 몽롱한 가운데 썼더니 영 엉망인 것 같고…… 어서 말짱한 정신 회복하여 다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_=
올렸던 댓글이 등록이 안되었었네요.
병세가 호전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연재라 일하면서도 글이 올라왔을까 기대가 되네요.
참 계획이란게.. 아무리 잘 세웠다고 해도 막상 실제 실행단계에선
황당한 경우가 한두번도 아니니.. 사람이 하는일인대 그것도 극도의 보안속에서.. 이해는 가죠.
역시 조직이나 사람이나 허리가 강해야 한다는!! 쿨럭..
갑자기 12.12때 탱크로 반란군들 쓸어버린다고 하시던 장태완 사령관님이 생각나네요
다음 글도 기대되는군요. 5.16과 12.12를 보더라도 쿠데타에는 대대/연대급 실병력 지휘관이 중요하지요. 12.12를 육사 11기가 육사 17기 등에 업혀 일으킨 쿠데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
조금 전 영화를 보고 왔는데 7월 20일 전인 7월 15일에도 이미 한번 암살 시도를 했더군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번역은 그럭저럭인데 '슈타인버그'가 계속 거슬리더군요. 히믈러를 이름은 아예 날려버리고 그냥 친위대 대장이라고만 번역한 것도 그렇고...'히믈러 친위대 대장'이라고 해주면 안되남.
참 저는 슈타인호프 친구인 드레드노트라고 합니다.
예전 세로자막이 대세이던 시절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가로자막이라도 가독성의 문제로 글자수 제한의 압박을 많이 받죠. 영화상의 발음도 그렇고 '슈타우펜베르크'보다 글자수가 많이 줄지 않습니까(웃음). 히믈러의 경우도 어차피 7월 20일 사건 자체를 모르고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이 태반일텐데(톰아저씨에 관심이 있을 뿐) 누군지 관심도 없을 등장인물을 굳이 명기할 이유가 없었겠죠.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확실히 완벽하진 않아도 상황을 보니 어쩔수 없긴했겠네요. 만약에 히틀러가 죽었으면 성공했었을까요?^^: 뭐 우리 나라 지금 실정도 그때와 별반 다를 거 없다고 생각되니 한번쯤은 가정해보게 되네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문제점은 단 하나.. 희생정신이 부족했음
폭탄은 밀폐된 공간에서 터졌을때 효율적이였는데 ..
장소가 변경 됬음. 거기다 폭탄 2개중 1개만 터졌고..
왜 그너마는 그렇게 독일에 충성스러웠으면.. 나오는 길에
다시 들어가서 희틀러를 확인 사살이라도 했어야 했음.
근데 단지 죽었을거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일을 진행했음..
만약 자신을 희생하여 히틀러를 죽였으면.. 전세는 바뀌였음
독일의 동원 체제는 과거 영방국가 시절의 유산이로군요. 바이에른군, 뷔르템베르크군, 작센군, 프로이센군 등등 말입니다. ㅎ
한국사랑 연관지어 생각해보니까...요즘 모영화-_-;; 때문에 인구에 희자되는 공민왕 시해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꽤 오래전부터 몇 몇 학자분들이 그 사건에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더군요. 그 양반들 주장에 따르면 자제위같은 친위세력이 그런 정변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사건을 진압한 이인임을 의심하더군요. 당시 이인임은 공민왕의 엄청난 견제를 받고 있었고, 언제 숙청될지도 모르는 험한 상황에 몰려있었으니까요.(대충 이순신장군과 선조의 관계와 비슷한 상황이었죠.)
아무튼 영화 중간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총통 암살죄를 친위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고 건의하는 장면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키피디아에서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의 토막글 '발키리 작전'
작전개요 퍼갑니다. 위키피디아에 출처를 명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