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의 격전 고비고비 뒤끝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의 현장이 여럿 있었다.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양측의 결연한 자세가 때로는 인간의 나약함을 초월하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죄 없는 이들의 끔찍하면서도 불필요한 희생을 낳았다. 필자가 집중적으로 살펴본 바 있는 느시사냥(Trappenjagd) 작전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오늘은 이 작전의 뒤끝에서 1만 명이 넘는 패잔병과 피난민들이 어두컴컴한 채석장 동굴에 갇혀 170일 동안 저항하다 옥쇄한 아지무시카이 채석장(Аджимушкайские каменоломни)의 비극을 간략히 정리해볼까 한다.

아지무시카이는 케르치(Керчь)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져 있는 곳으로, 1830년 경부터 석회암 채석장으로 활용되어왔다. 구글 어스에서 살펴본 위치는 아래와 같다.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케르치와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위성사진 (구글 어스에서 캡쳐하여 표시)

석회암은 일부 노지에서도 채석하지만, 질 좋은 돌을 얻기 위해 주로 내부로 파고들어가 절개하게된다. 느시사냥 작전이 벌어진 1942년에 이르면 이미 이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내에는 1세기 동안의 채석에 의해 수많은 갱도와 공동(空洞)이 생겨 있었다. 후일 이오지마(硫黃島)의 일본군이나,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越共) 측이 만든 복층의 지하 진지 네트워크와 유사한 환경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P. M. Yagunov

P. M. 야구노프 대령

다른 글에서 살펴본 대로 느시사냥 작전이 독일군의 승리로 급속히 기울면서 1942년 5월 16일에 케르치마저 함락되었다. 소련 크림 전선군은 잔존 병력을 타만 반도로 퇴각시키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퇴각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당시 크림 전선군 부 참모장이었던 파벨 막시모비치 야구노프(Павел Максимович Ягунов) 대령에게 후비대를 조직해 결사 항전할 것을 명령했다. 야구노프는 퇴각 중이던 부대들을 정지시키고 이들을 긁어모아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을 근거지로 방어를 조직했다. 당시 여기에는 제83 해군보병여단(бригады морской пехоты), 제95 국경수비대(NKVD 소속), 야로슬라블 항공학교, 보로네시 무선통신 특수병학교 등의 다양한 부대 잔존병력이 끼어 있었으며, 피난민들 또한 섞여 있었다. 필자도 현장을 답사해본 것이 아니어서 상세한 밑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으나, 이곳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지하 구조는 크게는 2군데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이중 큰 쪽에는 야구노프 대령을 위시하여 파라힌(И. П. Парахин) 상급 대대 정치위원(중령급), 부르민(Г. М. Бурмин) 중령의 지휘 하에 1만여 명이 들어갔고, 작은 쪽에는 예르마코프(А. С. Ермаков) 중령, 포바즈니(М. Г. Поважный) 중위, 카르페힌(М. Н. Карпехин) 대대 정치위원(소령급)의 지휘 하에 3천여 명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은 이오지마나 베트남의 지하 진지들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애초부터 군사 시설로 기획되고 체계화된 설비가 갖춰진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에는 장기간 농성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 탄약이 있을리 만무했고, 발전 설비가 없으니 조명은 초나 횃불에 의지해야하는 실정이었다. 특히 물 부족이 이들을 괴롭혔다. 채석장 내에는 일체의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1만 3천여 명의 식수난은 이루 말하기 힘든 노릇이었음이 분명하다. 민간인들 가운데서도 특히 쉽게 탈수증세를 보였을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죽었으리라는 것도 눈에 선하다.

독일군(및 루마니아군) 또한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에 갇힌 농성군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이들의 공략에 나섰다. 독일군 측에서는 농성 규모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것 같으나, 거듭된 요구에도 굴복하지 않자 레닌그라드에서 그랬듯이 고사(枯死) 작전에 돌입했다. 이후 부족한 물과 식량을 구하고 포위망을 풀기 위한 내부 농성자들의 처절한 야습 작전과 이를 봉쇄하려는 독일군 및 루마니아군 사이의 접전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구노프 자신도 7월 8~9일 밤에 있었던 야습 과정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내부의 모습은 매우 참혹했을 것이다. 식수난을 해결하고자 내부에서도 폭약을 터뜨리며 우물을 굴착하여 성공한 사례가 있었다고는 하나, 석회암 층에서 나온 물이니 식수로는 매우 질이 나빴을 것이다. 물도, 식량도, 빛도 없는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나날이 죽어가는 시신들은 깊숙한 동혈 내부에 차곡차곡 쌓고, 가득차면 동혈 벽을 무너뜨려 매장을 했다고 하는데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독일군은 6월에 접어들자 이 지루한 공방을 끝내기 위해 외부로 노출된 출입구들을 하나하나 폭파하여 차단하기 시작했다. 소련 측에서는 대량의 최루가스 및 살상용 독가스를 주입했다고 하나, 어느 수준으로 독가스가 쓰였는지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소련 측의 전후 탐사 과정에서 독일군의 가스탄 파편이 채취되었다는 보고도 있으나,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얻은 파편이어서 명확한 성분 분석 등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흔히 독일군이 동부전선의 비정규전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간접적인 실마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경우 또한 그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고사 작전을 펼친 뒤에도 독일군은 결국 1942년 10월 30일(!)에야 진입에 성공했다. 170일 동안의 처절한 농성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사람은 불과 4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살아남아 케르치 인근에 거주하며, 매년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일(5월 9일)마다 작은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기념물

농성 40주년을 맞아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http://sevdig.sevastopol.ws/gal/gal_adg/gal_adg.html)

그러나 전후에도 이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비극은 제대로 밝혀지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스탈린 시대에는 대조국전쟁사에 대한 윤색이 심했으니, 이런 비극이 액면 그대로 전해질 리가 만무했다. 또한 독일군의 진압과 소련군의 저항 과정에서 많은 동혈이 폭파되고 묻혀버렸으며, 내부가 워낙 미로 같아서 정작 과학적인 진상 조사는 1960년대에나 이뤄질 수 있었다. 결국 1960년대 초에 이뤄진 집중적인 조사로 인해 주요 시설이 밝혀졌고, 그에 따라 1966년 1월에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이후 1970~80년대 까지 이어진 조사에서 약 323개의 지하 동혈이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채 석회암 더미에 묻혀 있는 곳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밋밋한 사건의 기술로 글을 끝맺기 전에, 필자의 감상을 조금 덧붙이자. 필자가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보던 중에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아래 사진을 봤을 때였다:

아이들의 방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중 '아이들의 구획' 사진 (http://fire-of-war.ru/adzhimushkay-foto.htm)

이 곳은 아지무시카이 채석장 동혈들 가운데 아이들이 기거하던 구획이었다고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깜깜한 이 공간에 갇혀 신음하다 죽어갔을 어린 영혼들의 존재를 단순히 수백만의 전쟁 희생자 가운데 일부였다고 넘어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후세 사람들이 쌓아놓은 인형들이 그 아이들의 품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헛된 상상을 해보아도 잔인한 여운이 남을 따름이다.

아마 아지무시카이 채석장의 진실은 저 위 사진의 기념 부조에 새겨진 것처럼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NKVD 등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무장된 병력의 위협으로 채석장에 갇힌 애꿎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저 안에서 살기 위에서 발버둥치며 탈출을 모색하다가 처형당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오늘날의 현실에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2차 세계대전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여러 번 곱씹어보고 넘어가야하는 화두가 아닌가 다시금 생각이 든다.

2007/03/31 19:52 2007/03/3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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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민혁 2007/04/05 0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케르치-페오도샤 지구 전투의 막후에서 저런 일이 있었다...는 부분은 이 글 보고 처음 알았는데, 마침 해당 시대의 해당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후배가 있어서 참고할 만하다는 생각에 이 글을 읽게 했습니다. 저하고 마찬가지로 화학전 의혹 같은 부분에서 꽤 분노(그런 탓에, 저나 제 후배가 감정적으로 곡해해 볼 가능성이 적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했는데, 그 후배가 맨 마지막의 한 문장이 어쩐지 꺼림칙하게 걸린다고 제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NKVD 등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무장된 병력의 위협으로 채석장에 갇힌 애꿎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라는 부분에 대해서 그 후배의 느낌은 대충 이랬답니다.

    "어차피 나가도 나치에게 당할 일은 거의 같은 일이었잖아요."

    뭐, 농성 중 옥쇄하는 것에 비해서는 사망율의 차원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도 있을 수 있긴 합니다만... (대략 2만 명 미만이던가요? 점령기간 2년여 동안 독일군에게 처형된 현지 주민 숫자가...) 뭐라 말할 건 아니지만, 왠지 꺼림칙한 느낌을 주더라는 거죠. 그 후배가 저 이상으로 확실한 반 나치여서 그런 건 있겠습니다만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싶어서 약간 꺼림칙해졌습니다. -_-; 그렇다고 그게 문제라고 얘기하기엔 스탈린 체제 편드는 것 같아 더 꺼림칙하고요.

    하여튼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승병님 글에서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있는 입장에서 도움은 못 드릴망정 오히려 이렇게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무지 죄송하네요. -_-;

    • Periskop 홈지기 2007/04/06 16: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좋은 의견이고 저 또한 스스로에게 그런 반문을 많이 던져본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선택의 문제는 이미 엎어진 과거일 따름이고,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문제이니 우리가 시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겁니다. 다만 저는 상대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를 불러 일으키며 국민들을 사지로 끌어들이는 체제의 작동기제에 탄식할 따름입니다. 저는 당시 저 많은 사람이 그 절박한 환경으로 들어간 데에는 이미 1942년 초에 소련이 한 번 케르치 반도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주입시켰을 공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이거든요. 그러한 과정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자꾸 던짐으로써 우리 사회에도 만연하는 '공포 주입'의 악습을 떨쳐 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썼다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 윤민혁 2007/04/06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입장표명 감사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고, 거기에다가 주민들에게 공포를 주입한 건 소련군만이 아니라 독일군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 정도니까요. (41년 11월에서 12월까지의 짧은 1차 점령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까지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공포 주입에 대한 생각은 저도 동감입니다. 공포와 증오 두 가지에 의존하는 체제 및 시스템 유지는 정말 떨쳐버려야 할 악습인데, 아직도 그런 경향이 강한 곳에 살고 있다 보니 가끔은 등골이 오싹할 때가 있죠.

  3. shrike 2007/06/09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어기 바다건너 대국들은 안그렇던가요...
    사람사는데가 거의 비슷하죠. 이라크 전쟁만 해도 얼마나 무모하게 벌인 일인지 그 과정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에도 역시 별 수 없구나 싶어지죠.

    개인적인 생각일런지 모르지만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인과 여타 지식인들이 벌이는 주도권다툼을 보며 긁적거린게 있는데.. 관심있으시면 한번 보세요. 스타워즈 이야기입니다.

    http://blog.naver.com/beebeam/20013350222


    얼마전 구글회장이 서울에 와서 노골적으로 정치인과 이라크전을 언급하며 까댄것 보면 그런 흐름이 미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도 참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이런 옛날역사를 아는 사람들이 다시 현재의 역사에 관여하고 있는것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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